213. 리뷔에의 선제후,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 (2)
* * *
회담은 흐릿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회담의 실패를 염려하지 않았기에, 장내에 도사린 긴장감의 원인은 단지 공작의 가신단이 갖고 있는 경계심뿐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회담의 불발을 근심하는 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키르하스의 고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지, 공작?”
“말씀은 고맙지만, 대족장. 흐으음…….”
에르브 공작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자못 여유로운 듯 턱을 긁적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 모습이 더욱 그를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차라리 선제후의 권리보단 주류 정권에 복종하기로 했던 이 나이 든 공작은 힘없이 웃었다.
“내겐 병력이 없다네.”
“전하!!”
가신들이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병력이 없다? 우스운 핑계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귀족과 준귀족, 그리고 영지 기사들의 병력을 다 합쳐도 물경 오천 가량의 정병이 당장 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에르브에 입성하며 수많은 성외 막사들을 본 키르하스에게 있어서도, 그건 웃기는 핑계였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변명치곤 구차하군.”
“……말을 꺼내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전쟁이 끝났고. 난 더 이상 제국 군단의 총사령관이 아니라네. 이건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네.”
외인에게, 그것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군벌에게. 더군다나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가신단 앞에서 하는 말치고는 대단히 직설적인 표현이었고…….
-저놈, 머저리인가?
정치공학적인 자살법에 가까운 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에서 몰래 고개를 저었다.
‘선제후에게 정치력이 부족할 리는 없어.’
-정치든 통치든 간에 발달 장애가 있는 모양인데?
‘아니. 저건 포기한 거다. 정말 머저리였다면 제 성 밖에 늘어선 군사들을 보며 자신의 군대라 여기고는 허세를 부렸겠지. 에르브 공작은 생각 이상으로 현명해.’
페르난데스는 후드의 그늘 아래에서 에르브 공작을 바라보았다. 노년과 중년 그 경계 어딘가에 얹혀 있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보였다.
젊었던 시절 한 지역을 다스리는, 호방한 기사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제국의 서부 원정이 지속되었으니, 그는 일종의 전쟁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유년기를 군 막사에서 지냈고, 가열찬 전쟁 속에서 부친의 직위를 무사히 이양받고, 가신들의 충성을 유지한 사내가 무능할 리가 없다.
그러나 반대로. 저 사내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만 것이다. 서부 원정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엔 삶의 원동력이 부족한 것이다.
평생 군단의 지휘와 전쟁에만 매진한 장수……. 페르난데스는 에르브 공작을 알고 있다. 정확히는, 그의 삶과 그의 딸에 대해서.
‘전생 시절 에르브는 결코 무능한 머저리가 아니었어.’
-심지어 딸은 아비와 달리 외교 감각도 뛰어났지.
‘그래. 그 균형 감각이 대단한 여자였지.’
르네 필리파. 전생의 역사대로 흘러갔다면…….
‘여황제가 되었을 여인이었지.’
서부 원정이 지속되며 흘러넘치던 국부와 막강한 군권을 바탕으로, 선제후와 변경 귀족들의 아슬한 줄다리기를 건너 마침내 다음 제위에 도전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쟁취한 여걸.
제위에 오른 이후로 시작된 문명 사회의 종말과 분열. 그 가열찬 시기에서, 심지어는 북부와 남부 양방에서 휘몰아치는 이교도 군세의 침략을 꿋꿋이 견디어내며.
칠흑의 에리크, 대카간 카라드스카르의 군세 아래에서 불타는 제국을 직접 순시하며 이끌어 하나로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던. 인류 문명 사회의 빛나는 영웅들 중 하나.
원래 역사대로라면 그래야 했을 인물이……. 지금, 서부 원정의 몰락으로 개화하기도 전에 빛을 잃고 추락하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너무 어릴 시기이긴 하지.
‘열여섯? 어린 나이는 아니지. 우린 열여섯에 영지에서 홀로 나왔었잖아.’
-누가 들으면 자립한 줄 알겠어. 이봐, 전생을 생각해. 우린 노예에서 시작했어.
‘시종이라고 정정할게.’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공작의 선언 이후로 가신단 사이에서 불만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감고서, 후드 아래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로 청력에 집중했다.
디모니카의 청력은 가장 멀리 떨어진 이의 옷감 스치는 소리조차 잡아낼 수 있다. 이런 한정되고, 외부 소음이 차단된 공간에서라면 더욱 정확하게.
그러므로, 페르난데스는 이전부터 가신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잡아내어 분류하고 있었다.
[전하께선 아무래도 노망이 나신 것이…….]
라는 불만.
[정말 미색이 끝내주는군.]
이라는 탐욕.
[……아버지.]
라는 종류의 속삭임까지도.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공작을 노려보는 키르하스에게 다가갔다.
꼬리가 흔들거리는 모양을 보니, 일단 노려는 보는 중인데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키르하스는 솔직한 인물과 노인에게 약하다. 그녀는 보호 본능이 강한 인물이었고, 약자와 노인, 그리고 진솔한 이들에게 한없이 자비로워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강하게 호통쳐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건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외부에서 보기엔 이방인 대족장이 공작을 노려보며 무언으로 협박하고 있는 형태였으니.
페르난데스가 키르하스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대족장님. 잠시 휴정을 선언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핫.”
긴장감 속에 굳어 있던 키르하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페르난데스가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자, 긴장이 탁 풀린 듯 맑게 웃던 키르하스가 실수를 깨닫고 냉큼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는 순식간에 날카롭고, 고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턱, 하고 손끝이 페르난데스의 턱에 닿았다.
“이런, 페르닌. 갑자기 그렇게 말을 걸면 간지럽지 않으냐.”
“……대족장님.”
“어허. 키르하스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
-페르닌?
‘페르닌?’
페르난데스는 순간 움찔거리며 멈췄다. 페이자쉬가 저 너머에서 발버둥 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기랄 베이타서스! 영혼을 갈라놓을 참이면 내장 기관도 만들어놨어야지! 역겨운데 토할 수가 없지 않느냐!
‘제발 닥쳐, 페이자쉬.’
-그래, 그러지. ‘페르닌’.
‘아, 제발.’
페르난데스는 헤죽거리는 페이자쉬를 무시하고는 키르하스에게 다시 한 번 속삭였다.
“……키르하스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휴정을 선언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흐음? 단둘이 해야 할 말이더냐?”
“예.”
“하핫, 이 녀석. 그건 잠시 후에 내 침소에서 해도 되지 않겠느냐? 좋다. 오늘 밤에 내 침소에 들거라.”
“……키르하스.”
키르하스는 끈적한 표정을 지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그 완벽한, 퇴폐적인 대족장의 얼굴에 감탄했다.
천성이 족장감이로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러나 아직 꼬리까진 감추지 못한 탓인지, 그녀의 꼬리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꼬리는 행복함과 근엄함 사이 어딘가에서 고장이 난 듯 이상하게 움찔거렸다.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싱글거리며 웃던 키르하스가 유쾌하게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부부간의 금슬이 참 보기 좋군……?”
“아, 그런 편이지. 그럼 공작. 내 ‘애첩’이 원하는 대로, 잠시 휴정을 청해도 되겠지?”
“물론이네. 응접실에 다과를 준비해 두지. 편히 쉬고 있게. 한 시간 후에 다시 보지.”
공작은 그렇게 일별하고는 벌떡 일어서서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가신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키르하스는 벌 받을 준비를 하는 장난꾸러기처럼 새초롬하게 웃으며.
“따라오거라!”
하고는 훌쩍 떠났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은공! 어땠어요? 진짜 감쪽같죠? 그쵸?”
키르하스는 가솔들을 모조리 쫓아낸 이후 방방 뛰며 달려들었다. 페르난데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녀를 밀어냈다.
“페르닌?”
“아, 그.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이단심문관들이 하는 거! 그, 그. 맞아. 음성 기호요! 암호명인 거죠, 암호명.”
애칭으로 암호명을 만드는 이단심문관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사제로 내쫓겠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다짐하며 키르하스를 내려보았다. 키르하스는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정말 감쪽같았죠?”
“그래. 잘하더구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아깐 좀 놀라서…… 아니 세상에, 공작이라는 작자가 어떻게 가신들 앞에서 외지인한테 병력이 없다고 밝힌대요? 그거 군법 위반 아니에요?”
“키르하스. 그건 도박수에 가까운, 대단히 위험한 지원 요청이야.”
페르난데스는 응접실 한구석에 있는 찻잔에 찻물을 붓고는 키르하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공작의 입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느냐?”
“예, 지금 끈이 떨어진 연 신세라고요.”
“그래. 그리고 귀족들은 대단히 정치적인 생물들이다. 특히 변경 귀족들로 이루어진 이러한 공국의 가신단들 같은 경우엔 놀라울 만큼 기회주의적이지.”
페르난데스는 하, 하고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손녀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느긋하게.
“본디 봉신과 영주의 관계는 상호 간의 호혜적인 계약을 기본으로 한다. 보호와 인적 자원, 그리고 이윤이 걸린 대단히 차가운 관계지. 몰락하는 입장에서, 기울어지는 배에 남아 있을 선원들은 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저리들일 뿐이야. 저들은 각자 머릿속에서 주판을 열심히 돌리고 있겠지.”
페르난데스는 응접실 너머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남아서 도박을 해 보느냐. 다른 대귀족의 휘하로 들어가느냐.”
둘 다 고려해봄직한 상황이다. 공작의 몰락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 보이고, 그의 사병은 가신단이 지닌 병력의 총체를 넘지 못하는 이상, 이미 균형은 기울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남아 있는 이들은 머저리들이거나, 다른 계략이 있는 이들이다. 공작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권을 황제에게 이양받은 상황이며, 치안이 불안정하더라도 몇몇 장원들은 건재하다.
첫 번째 부류는 아귀들. 공작의 남은 살점을 노리는 포식자들이며.
“혼사를 통해 공작위의 명목을 챙기고 싶은 변경 귀족은 차고 넘치지.”
공작에겐 영민하고 아름다운 딸이 있다. 그건 공작 자체가 가진 배경에 더해서 영애의 몸값을 올리는 조건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장담할 수 있다. 이들이 가장 어리석은 부류다. 충신들보다 더.
“공작의 딸은 녹록한 인물이 아니야. 상황에 따라서, 그래. 혼인 동맹을 성사시킬 수는 있겠지. 그러나 공작 영애를 삼킨 귀족은, 설령 누가 되었든 결코 안온한 말년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노예 신분으로, 저 스스로 대족장의 직위를 따낸 전성기의 키르하스를 생각한다면 더욱이. 본디 그 시절 ‘영웅’이라는 이름은 그 무게가 남다른 법이니.
리뷔에 대공 영애.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는 결코 이 정도의 시련에 무너질 인물이 아니다.
“그 여자를 대단히 고평가하시네요, 은공.”
키르하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차를 마셨다.
“카르벨리에 부녀는 이 영지에서 우리와 눈높이를 맞출 얼마 되지 않는 위인들이야.”
아비와 딸 둘 모두가. 지금 이 시기에도 그러길 바란다. 페르난데스는 찻물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 * *
“아버님!! 대체 그 무슨 망언이십니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이 넘실거리며 에르브 공작의 눈앞에서 흩날렸다. 공작은 힘없이 웃으며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내려보았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와, 붉은 머리칼. 사별한 부인을 똑 닮은. 그래서 오히려 더 다행스러운 딸이다. 투박한 자신의 외모를 가져가지 않아, 티끌 하나 없이 아리따우니까.
그리고, 그래서 더 서럽게 느껴졌다. 딸의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에 마치 부인이 자신을 훈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그녀가 저 돼지와 아귀 같은 귀족들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다 여겨지니 더욱.
“르네. 앉아 보거라.”
“서서 듣겠습니다!”
“나는 앉겠다.”
“……저도 앉겠습니다.”
르네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깔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심성이 곱다 여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놓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비는, 그 어떤 부모보다 극진히 자신을 돌본. 주위 귀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대저 제국 귀족들에게 딸이란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동부나 북부, 또는 서부의 다른 ‘야만인’들과는 달리, 제국은 지독하리만치 보수적인 사회였다.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걸 깨달을 정도로 영민했으며, 또한 자신의 아비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챌 정도로 사려 깊었다.
“아버지.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당장 저 서부 군벌이 떠나거든, 가신단을 어찌 다독일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에르브 공작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호족 대족장이 갑작스레 찾아와 군사력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가신단은 곧 해산하고, 나는 너를 상품으로 내걸어 내 위치를 유지하거나, 우리 가문이 완전히 사토 속에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대족장은 그저…… 운수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식객에 불과해.”
“식객에게 도박수를 걸겠다는 의미세요?”
“이상한 점이 없었더냐?”
에르브 공작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족장의 품행은 그다지 방정하지 못했어도, 자세 하나하나. 앉는 방식에서부터 수하를 부리는 손짓에 이르기까지. 그 행동 전반에 걸쳐 예법에 어긋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저 무뢰배로만 보이던데요.”
“아니, 그건 연기에 불과해. 딸아. 어떤 군주를 마주하면, 결코 군주가 보여 주는 모습을 진실이라 여기지 말거라. 군주들의 진심은 유언장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에르브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응접실이 있는 동쪽 관이 보였다.
“어찌 되었건. 대족장의 예법은 거의 완벽했다. 언사와 달리 대단히 귀족적이었지. 하지만, 제국 귀족의 것은 아니었어. 그건…… 동부 왕국 특유의 예법이었다.”
동부 왕국 연합은 50년 전쟁 당시 오랜 시기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했었고. 에르브 공작은 한때나마 50년 전쟁의 정점에 있었던 사내였다.
그는 정치에 둔하다. 그러나 전쟁에 있어서…… 그는 평생을 종군한 전문가였으며. 그가 바라보는 전장은 감각과 본능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전 세대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지. 딸아. 네가 한번 뒤를 캐 보아라. 나는 계속 무능한 채로 남아 있을 테니.”
“아버님. 궁금한 것이 생기네요.”
“무어냐?”
“군주가 보여 주려는 모습은 언제나 거짓이라는 말씀은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그럼 지금 아버지도 그러신가요?”
“그게 무슨 소리냐, 르네.”
에르브 공작은 눈을 돌려 딸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군주 이전에 아비가 아니더냐.”
내 채무를 네게 변제토록 하지 않겠다.
다만, 내 몫의 행복을 네게 전가하마.
나이 든 아비는 그렇게 웃고는 일어서서, 휘적거리며 내실을 빠져나가 알현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