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리뷔에의 선제후,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 (3)
* * *
가신단 사이의 불온한 기운을 감내하며, 에르브 공작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흐릿한 눈으로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정치적인 불발탄이었다. 에르브 공작은 대단히 노골적으로 지원 요청을 보냈다.
그는 키르하스라면 이에 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익힌 예법은 궁중의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키르하스가 아무런 제스처를 보이지 않자, 분위기의 초조함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그리고 무릇 군주의 불편함은 신하들, 더군다나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정치 귀족들에겐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이때, 행동에 나서는 귀족들은 에르브 공작의 작위에 관심을 갖는 법복 귀족1)들이었다. 기반 영지도, 기반 병력도 없는 이들은. 공작 영애와의 로맨스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머저리들이었다.
“크흠.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오!”
“맞소! 이 무슨 무례한 언사란 말이오! 공왕 전하께오선 이곳 리뷔에의 군주이자, 대제국의 위대한 선제후이시며, 또한 수천 기사들의 충성을 받고 있으신 바! 아무리 그대가 최근 명성을 떨쳤다 한들, 이리 독대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어선 아니 되는 일이었건만!”
키르하스는 나른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곧장,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공작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말해 봐, 공작. 네 하인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수천 기사들의 충성을 받고 계신 분께서, 병력이 없다고 말한 것인가? 공작이 거짓을 말한 건가, 아니면 그대의 하인이 거짓을 고한 것인가?”
거짓으로 나를 모욕한 것이냐. 아니면 제 하인조차 다루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것이냐? 키르하스의 말은, 외교적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설이나 다름없었다.
키르하스의 말에 법복 귀족들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무례하다! 오만하다! 저 비천한 수인족을 당장 궁중에서 내쫓아라! 이러한 언사가 회담장을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고함치지 않고 남은 인물들은 깊게 한숨을 내쉬는 귀족들과 코웃음 치는 귀족들로 나뉘었다.
각각, 충신과 역신들이다. 충신들은 타국의 군주 앞에서 보이는 귀족들의 추태에, 그리고 역신들은 신하의 감정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공왕의 모습에 감정을 내비쳤다.
페르난데스는 후드 아래에서 그 얼굴들을 머릿속에 익히고 있었다.
‘변경 귀족과 기사들이군.’
-의외로 기사들의 충성이 대단한데?
‘의외라고 생각할 건 없지. 저건 증거야. 공작이 무능한 머저리가 아니라는 증거.’
무능하고 쇠약한 왕에게, 무력 집단이 충성을 보일 리가 없다. 아무리 제도화되었다 하더라도 무력을 가진 집단은 본능적으로 강자에게 이끌리기 마련이고, 그건 변경 귀족들의 촉각보다 더 예민한 감각에 속했다.
그러므로, 기사 출신의 대검 귀족2)들이 보이는 충성은 오히려 공왕의 건재함을 방증했다. 페르난데스는 우묵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공왕을 바라보았다.
에르브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없군.”
“그럼 회담은 끝이로군. 다과, 잘 즐겼어. 공작. 다음번엔 카다라스에서 만나길 바라지. 내 기꺼이 초청해, 그대에게 술 한잔 대접하고 싶어지는 광경이군. 마음고생이 많겠어.”
키르하스는 픽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백한 도발, 그리고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고함치는 법복 귀족들을 향한. 그녀는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핏대를 세우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이, 이, 비천하고 천박한 황무지의 들개들이 감히!!”
-쾅!
귀족 하나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장대한 체구의 귀족은 대뜸 으르렁거리며 키르하스를 내려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속셈이 뻔히 보였다. 설마 여기서 자신을 해치겠나, 하는 종류의 허세 가득한 행동이다.
제아무리 예법을 어겼다 한들 궁중에서 타국의 사절이 궁중 가신을 해치는 데에 공작이 좌시할 리는 없다. 또한, 이곳에서 무력 분쟁이 생긴다면 저들은 독 안에 든 쥐 꼴이다.
그리고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대황야의 우두머리를 포로로 잡는다면 이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계산이 머릿속에 선 귀족은 앞으로 성큼 내딛으며 다시 한번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키르하스는 의자를 탁 차고 몸을 돌려, 정면으로 그 귀족을 올려보았다.
“다음 말은, 아주. 아주 사려 깊게 입에 담도록. 하인. 이건 대족장의 충고다.”
“닥쳐라! 비루한 야만인 같으니! 감히 예가 어디라고…….”
“쯧.”
키르하스는 혀를 차며 뒤를 돌았다. 수인 전사들은 이미 벌써부터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장은 모두 알현실 밖에 두고 왔다 하더라도, 호족의 전사들은 그런 조건에서 겁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손을 흔들어 그들을 만류하고는 페르난데스에게 말했다.
“페르닌. 저건 도전이라 봐야 하느냐?”
“연합의 규율대로라면 그렇습니다.”
“허면, 대족장은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키르하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공작을 향해 말했다.
“칼을 다오. 공작. 네 하인이 연합의 대족장에게 도전을 한다니. 내 친히 받아주마.”
그녀의 말에 좌중의 흥분이 극에 치달아갔다. 귀족들은 당장 손에 무언가 있기라도 했다면 집어 던지려는 기세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하며 키르하스의 오만함을 규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여전히 흐릿한 눈으로 키르하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인가. 대족장?”
“아니면 너희 제국의 규칙대로 해석해도 괜찮겠나. 공작?”
“제국의 규칙?”
“나는 너희의 규율과 규범에 익숙하지 않지만, 다행히도 내겐 유능한 수하들이 많지. 페르닌. 제국의 규칙대로 한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겠느냐?”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말했다.
“선전 포고에 해당합니다.”
“좋군. 새로운 도전이야. 내 지금 당면한 외적이 수월치 않지만, 대족장이 직접 모욕을 받은 일은 결코 좌시할 수 없지.”
키르하스는 으르렁거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 기세에 눌린 듯, 앞서 나선 귀족이 목을 움츠렸다. 당장이라도 목젖이 베이는 듯한 예리한 살기가 그를 감쌌다.
새파랗게 질린 귀족의 얼굴을 보며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의 무례에 자비를 보이는 것은 어떤가?”
“자비는 승자의 권한이야. 공작. 그리고 난 ‘아직’ 승자가 아니지. 승리할 기회를 주겠나? 자비는 그 뒤에 보여 드리지.”
파국이다. 이 자리의 모든 귀족은 키르하스의 말을 들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만일 호족 연합과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설령 그것이 대족장 직속의 몇몇 군벌들과의 전쟁에 불과할지라도 지금의 리뷔에는 그를 막을 병력이 없다.
아니. 병력이 없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각 귀족들이 아직 해산하지 않은 그들의 사병들은 여전히 리뷔에에 체류 중이었으니.
그러나. 그들 중 누가 남아 무익하고 무의미한 전쟁을 벌이겠는가. 전쟁이 사업 수단이 되는 것은 물자의 흐름이 보장될 때, 그리고 전쟁의 당사자가 아닐 때 뿐이다.
가장 앞에서 직면하는 이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그저 파멸, 다만 죽음일 뿐이다. 50년 전쟁의 흐름을 함께했던 이 자리의 귀족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몇몇 귀족들은 헛기침하며 몸을 피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배에서, 더 이상의 손해를 감수하기 싫었던 성질 급한 귀족들이 회담장을 떠났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의 귀족들. 공왕의 직속 가신단 중에서도 가장 충성심 높은 대검 귀족들은 조용히 시종에게 속삭이며 자리를 지켰다.
공왕의 얼마 남지 않은 영지군이 곧 이 회담장에 들이닥칠 터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리석은 부류들……. 여전히 돌이킬 희망이 있다고 믿는, 그리고 목소리의 크기로 자신의 몸집을 치장하는 부류들은.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그 도전을 받아들이마!!”
적어도, 키르하스는 호리호리한 여인에 불과했다. 그녀의 치적은 사령관의 것이었지, 위대한 전사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키르하스의 앞으로 소수의 사내들이 나섰다. 그들 각각은 공국의 행정관들이었다. 영지 없는 법복 귀족들. 공왕의 사위를, 그리고 공왕의 작위를 노리는 아귀들.
공작이 가장 빨리 처리하고 싶던 이들. 키르하스가 그들을 바라볼 때, 페르난데스는 공왕을 바라보았다.
공왕은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 공작. 그 놀음에 어울려 주지.’
‘고맙다.’
페르난데스와 공작의 사이에서 그런 의미의 시선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키르하스가 빙글거리며 무어라 반박하려 할 때에,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그들 사이로 걸음을 내딛었다.
“대족장. 하인을 상대하는 일에 족장이 직접 나서는 것은 체면에 어긋납니다.”
“황야의 법도는 그렇지 않은데?”
“이곳은 제국의 영역이니, 제국의 법도로 해결하겠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그 법도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좋다. 페르닌. 대족장에게 승리를 진상하겠나?”
“기꺼이.”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뒤로 물리며 거구의 귀족 앞에 섰다. 귀족은 키르하스가 물러서자 죽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목덜미를 쓸어 만지고는 페르난데스를 내려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넓은 로브에 몸을 감싸고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결코 작은 체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비대한 수준은 아닌 몸집. 특별할 것 없는 기세. 귀족은 비죽거리며 웃었다.
“네 대족장이 겁에 질려 울까 봐 보모께서 납셨나?”
“제국 귀족결투법. 민간 분쟁 조정에 관한 각주. 그리고 영지 간 분쟁에 대한 대리전 조정의 법률. 통칭 로렌스 법. 너희의 황제가 공인한 제국 법령에 의거하여 대리 법정을 실시한다.”
그 말을 들으며 공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시종들이 황급히 다가와 두 자루의 장검을 각자에게 건넸다. 페르난데스가 장검의 무게를 가늠할 때에, 공작이 느릿하게 말했다.
“본 결투는 내 입회하에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대족장, 서로의 과는 여기에서 끝나길 바라지.”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칼을 뽑아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는 귀족이 비릿하게 웃었다.
“칼을 잡을 줄은 아나, 짐승? 손톱으로 싸울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제법.”
후드 아래에서, 푸른 눈이 음울한 빛을 띠고 일렁였다.
* * *
“아버지. 저 남자입니다.”
“응?”
시종으로 분한 채 공작의 곁에 서 있던 르네가 조용히 속삭였다. 공작은 칼을 뽑는 두 사내를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남자. 수인이 아니에요.”
“음. 손이 미끈하더구나.”
“예, 그리고 제국법에 정통합니다. 말하는 투도 귀족적이고, 몸가짐에서 예법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르네는 공작의 컵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공작은 시종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건 저 남자가 수인 대족장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지금 이 상황을 구상했다는 뜻인데……. 내 말이 맞느냐?”
“예. 아버지.”
“단순히 대족장을 보필하는 가신일지. 아니면 대족장의 막후일지는 두고 봐야 하겠구나.”
-챙!
두 사내가 홀의 한가운데에서 격돌했다. 칼이 서로의 목을 향해 나아가고, 이윽고 얽히며 맑은 울음소리를 냈다.
잠시 힘이 길항하는가 싶더니, 페르난데스의 칼이 빙글 돌며 뱀처럼 흘러 귀족의 칼끝을 올려 쳤다.
-카앙!
귀족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나가며 천장으로 치솟았다. 귀족이 당혹감 속에서 뒤로 주춤 물러설 때, 페르난데스는 빈 한 손으로 귀족의 턱을 잡고—
-후웅!!
-쾅!!
들어 올렸다가, 곧장 바닥에 내리찍었다.
“대단한 용력이구나!”
그 순간 공작은 다른 생각 없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의 체구보다 족히 배는 큼직한 저 귀족을 한 손으로 들어서, 바닥에 찍어 버리는 것은 그조차도 자신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 야만성이. 귀족적인 언사 뒤에 가려진 흉포함이 저릿하게 울리는 듯했다.
페르난데스는 귀족의 머리를 수차례 바닥에 찍고는 그의 가슴팍 위를 한쪽 무릎으로 눌러 앉았다.
-스릉.
쓰러진 귀족의 눈이 충격으로 흐리게 풀려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칼끝으로 귀족의 목을 살짝 밀고는 조용히 말했다.
“믿는 신이 있나?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말해라.”
그건 방금까지 있었던 찰나의 격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착하게 가라앉은 말투여서, 그 서늘함에 귀족이 퍼뜩 놀라며 외쳤다.
“살, 살려다오! 여긴, 여긴 대공의 면전이다! 여기에서 피를 보는 것은…….”
“네 피, 또는 전장에서 흐를 피. 둘의 무게 중에 네 쪽이 더 가볍다.”
영지 분쟁의 조정에 대한 대리전. 이 유구한 전통의 결투법은 영지전을 한 사람의 피로 대신하겠다는 서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뜻을 이해한 귀족의 낯이 푸르게 죽었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대, 대족장! 자비를! 약속했던 자비를 요청하오! 내, 내가 졌소. 승자의 자비를 보여주시오!”
그 말에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돌리자, 키르하스는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페르닌. 대족장의 언사가 가벼워서는 안 되지. 자비를 보여라.”
그녀의 말에도, 페르난데스는 귀족의 가슴 위에 얹은 무릎을 치우지 않았다. 숫제 바위가 짓누르는 느낌이어서, 귀족은 헐떡이며 바닥을 쳤다.
“네, 네 주인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저자의 신에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그래서 저 비루한 목숨으로 더 이상 이 세상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자비를 보여라. 페르닌.”
“예, 대족장.”
-스르릉.
칼이 긴 호를 그리고—
“대족장!! 대공!! 이건, 이건!!”
-콰직!
소리는, 행동보다 늦게 회의실에 퍼졌다. 바닥의 타일을 따라 핏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간담이 서늘해진 몇몇 귀족들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홀을 빠져나갔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이제 공작과 대검 귀족들. 키르하스의 가신들. 그리고 시체 위에서 칼을 닦고는 딱딱하게 굳은 시종에게 건네는 페르난데스뿐이었다.
-타다다닥!
곧이어 홀의 문가에서 무장한 병력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소집한 궁정 위병들이었다.
문이 거칠게 얼리고, 병사들이 포위하듯 키르하스와 호족의 전사들을 감싸며 창을 들어 올렸다.
키르하스는 그 광경에 아랑곳없이 웃으며 전사들 사이에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이제 피차 믿을 만한 것들만 남았군. 공작. 너희는 일을 복잡하게 처리하길 좋아하는구나.”
“가신단 없이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서 말이지.”
공작은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느슨하게 웃었다. 점차, 그의 흐린 눈에 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꼭두각시놀음에 한바탕 어울려 주었다. 만족했는가?”
“대단히. 아주 인상적이더군, 대족장. 어떻게 그 오합지졸들로 망자들에 맞설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아.”
“마침 하인들도 몰려왔겠다. 술상을 들라 해라. 손님 접대가 아주 박하군!”
호족들은 친구와 술을, 적과는 차를 나눈다. 키르하스의 말은 회담의 성사를, 또는 아주 긍정적인 방향에서의 시작을 기대한다는 의미였다.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던 내부의 아귀들을 차도살인하고 대족장과의 개인적인 자리를 만든다. 이를 위해 가신단 내부에 의심과 혼란을 부채질한다.
공작의 이 술수는 ‘나는 병력이 없다.’라는 첫 선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로 단 한 번도 계책을 공유하지 않았던 두 인물이 하나의 각본처럼 각자의 배역을 맡고 연기를 펼친 셈이었다.
공작은 키르하스와, 그리고 그의 곁에 가만히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웃었다. 빚을 졌군. 그리고—
‘이거, 승냥이를 쫓고 범을 데려온 것은 아닌가 싶군.’
그러나 설령 범이라 하더라도, 승냥이에게 물어 뜯겨 죽는 것보단. 범의 등에 타고 달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잔을 들었다.
르네가 그의 잔에 다시 물을 따르려는 그때에, 공작은 재빨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사내를 떠보거라. 내가 대족장을 맡으마.”
“예, 아버지.”
후드 아래에서,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었다.
디모니카는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라면 소매가 스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있었으므로.
1)법복 귀족(또는 법의 귀족 : noblesse de robe)는 정통적인 귀족 등작위 대신, 관직의 일종으로 수여 받은 작위를 지닌 귀족들입니다. 종류가 보다 더 다양하긴 한데, 이 소설에서는 편의상 법복 귀족과 관방 귀족이 혼용되었으며, 모두 왕의 행정 관료들이 받는 귀족 작위입니다.
2) 대검 귀족은 종군 기사 출신의 귀족들로, 전통적인 작위의 ‘Sir’에 해당합니다. 편의상 기사를 부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법복 귀족, 변경 귀족(영지 귀족)의 대립항으로 쓰기 위해 보다 적확한 표현을 하고자 단어를 선택한 경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