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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15화 (216/388)

215. 리뷔에의 선제후,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 (4)

* * *

이젠 회담이라기보단 연회장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공작에게 충성하지 않는 귀족들은 모두 영지를 빠져나가 철군하는 상황이었고, 이 거대한 홀을 삼엄하게 지키는 경비들은 공작의 기사들이 부리는 병력이었으므로.

그리고 이 홀엔, 술과 음식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키르하스가 이끄는 수인 호족들은 이제야 긴장을 놓은 듯, 껄껄 웃으며 술잔을 나누고, 이따금 공작의 병력과 함께 음식을 집어 먹고 있었다.

키르하스 또한 술잔을 든 채로 웃고 있었다. 가열찬 외교적 마찰과 회담 같은 이야기들은 어디 한구석에 고이 접어 둔 듯이, 그녀는 공작과 대작하며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정말 아세아스산 담뱃잎이라는 건가, 공작?”

“아아, 최고급품이지.”

“공작 당신 좋은 사람이었군!”

키르하스는 아이처럼 웃으며 잘 말려진 찻잎 같은 것들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만졌다.

페르난데스는 그 광경을 보며 픽 웃었다. 저건 그녀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도락이었으니까.

어쩌면 새로 생긴 버릇이라 봐도 무방했다. 뭄토의 차원에서 카단이 완전히 풀려나며 그의 영향력이 미친 까닭이다.

뭄토의 차원에 빚어진 ‘전생 당시’ 키르하스가 가진 재능과 파편이 카단과 함께 키르하스에게 겹쳐진 것이다.

그 반작용이라 해야 할까. 사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고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인성이 비틀리거나 정신이 찢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놀랍도록 매끄럽게 적응했고, 그녀의 흡연은 그 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페르난데스는 호족 전사들이 따라주는 술잔을 잡은 채로 잠시, 저 가련한 수인 소녀를 바라보았다.

위대한 영웅으로 스스로 거듭날 수 있었던 여인. 그 싹을, 그가 강제로 분재하고 생장시킨 것이다.

그 완성품은…… 원본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졌다 하더라도 모든 시련을 스스로 딛고 일어섰던 전생과는 업이 가진 격에서 크게 모자랄 터.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올바르게 성장했다. 그 모습이 참 고맙고, 또 기특해서. 페르난데스는 이따금 그녀를 바라볼 때에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어? 어디 가나?”

“잠시 바람을 쐬러.”

페르난데스는 전사들의 술잔을 거절하고는 홀의 구석, 테라스로 향했다.

몰락하는 영지에서 벌어지는 아주 오랜만의 연회였던 탓에 병사들도 한껏 흥이 올라 그 누구도 페르난데스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 * *

밤. 황량한 서부의 영지에도 봄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후드를 걷어내고 반백이 된 머리칼을 쓸며 난간에 기댔다.

횃불이 가도를 따라 일렁였다. 저 멀리 외성 너머로 철군하는 군세가 보였다. 대단히 신속하군. 기울어지는 배 위의 쥐떼들처럼.

저자들은 언제고 이 영지를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었고, 지금이 마침 그럴 최적의 타이밍이었을 뿐이다.

-후륵.

차가운 액체가 목젖을 타고 흘렀다. 쓰고, 달고, 맵다. 독한 알코올이 훅 하고 올라오더니 이윽고 부드럽게 목 안을 타고 흘러내렸다. 좋은 술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디모니카는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점과.

“술을 더 가져다 드릴까요?”

디모니카는 고요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길 정도로 둔감하지 않다는 점이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테라스 밖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안줏거리라도…….”

“그것 또한 필요 없소.”

“실례했습니다. 자리를 비켜드릴…….”

“융숭한 대접 고맙소. 공작 영애.”

움찔, 하고 굳는 여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곧 후, 하는 한숨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감추지 않을 작정이라는 듯 그녀는 또각또각 걸어와 페르난데스의 옆자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곧, 붉은 머리칼이 밤바람에 따라 일렁였다. 페르난데스는 굳이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들고 온 잔을 그대로 마시며 머리망을 풀고 고개를 비틀어 우득거렸다.

“이상한 일이군요. 제 변장은 가신들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했는데.”

“가신들이 둔하거나, 알고도 모른 체한 것 아니겠소.”

“저를 멍청하다 모욕하시는 건가요?”

“나는 제국 귀족이 아니오. 그렇게 에둘러 모욕하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니지.”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르네는 그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굳었다.

뒷모습과 옆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칼 탓에 영락없이 중년인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반백의 머리칼,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제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청년의 얼굴이었다.

대단히 귀족적인, 좋은 혈통을 타고났음을 짐작할 수 있을 선 굵은 외모. 그리고—

“눈이 신기하군요. 당신.”

어딘가 달관한 듯한, 또는 어쩐지 음울한 듯한 푸른 눈동자. 르네는 잠시 그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 보았다.

“이름은?”

“페르닌.”

“본명은 아닐 텐데.”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두시오.”

“불공평하군요. 당신은 날 아는데.”

르네는 싱긋 웃으며 컵을 올렸다.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외성 너머의 횃불들을 바라보았다.

“동부 출신이죠?”

“데인.”

“그 지역 특유의 억양이 있죠. 제국에는 오래 살았었나 봐요? 제국 억양이 완벽하던데.”

거의 평생을? 페르난데스는 동부 왕국 연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전성기 대부분은 제국 근방에서 보냈다.

그 탓에 다리안과 수도 없이 부딪쳤지만. 그의 삶 중 즐거웠던 기억들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대부분 제국 도시에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황무지였던 이 지방은 이제 온화한, 심지어 다소 습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황무지를 초원으로 바꾼 것처럼. 많은 것들이 바뀌고, 섞이는 시대였다.

페르난데스는 황제가 되었어야 하는 영웅, 전쟁의 사령관이 되었어야 했던 노인을 등 뒤에 둔 채로, 아무 말 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당신 작품인가요?”

“우린 어울려 준 것에 불과한데.”

“호족 대족장을 극단 위로 올리는 것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다행히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라.”

“원하는 것이 뭐죠?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은 일일 텐데. 군사 지원이라. 우린 당신네에게 줄 병력이 없어요. 저치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세요.”

그녀는 거리를 가득 채우며 화려하게 타오르는 횃불들을 바라보았다.

한때 리뷔에는, 그리고 카르벨리에는 가장 강력한 영지이며 가장 위대한 선제후 중 하나였다.

50년 전쟁의 종전 이후, 황제의 관심이 서부에서 사라진 직후부터. 아니, 정확히 말해서 서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풀 한 포기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남은 가신들은 얼마나 오래 버틸까. 인간은 황금과 명예를 원하는 생물이고, 저들은 인간이며, 이 지역엔 더 이상 황금도, 명예도 남지 않았다.

몰락하는 영지. 폐허가 된 농토. 산발하는 산적과 용병들. 분열하는 영민과 기아에 허덕이는 소작농들의 삶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르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그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다.

어두운 밤 아래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그녀의 눈에 비치며, 그 어떤 때보다 찬란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영애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안정적인 삶? 평온한 영지?”

“하, 그럴 리가요.”

“아니면 복수?”

“저들에게? 그럴 가치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죠. 저들은 사람의 천품대로 행동하는 것인데. 오히려 남아 있는 대검 귀족들이 더욱 이상한 것 아니겠어요?”

르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페르난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잠시 페르난데스의 눈을 보며 멈칫하더니, 시선을 살짝 돌리고는 말했다.

“그거 아세요? 황제는 대단히 가정적인 사내예요.”

“…….”

“그리고 현실적인 사내이고, 정치적인 사내이며, 또한 대단히 냉정한 사내죠. 영특한 사람이에요. 선출 황제라는 것은 애당초 정치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니.”

그녀는 천천히 턱을 들었다. 사륵, 하고 아름다운 머리칼이 바람결에 스쳐 흘렀다.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지금의 황제는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는 자신의 가문에서 나올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 자신의 치적은 오랜 시간 서부에 투사한 막대한 자본과 함께 증발했으니.”

“……그래서 황제가 전쟁을 바라고 있다?”

“남은 정복지가 어딜까요? 북부? 남부?”

“동부겠지.”

“맞아요. 당신이 바라는 것이 그거지요? 당신네들. 황무지의 대립 대족장, 망령 군단, 호족 내부의 반란군들…… 이런 이야기를 들고 왔지만. 아니, 적어도 저 수인 여자의 목적이 그것일 수는 있지만. 당신은 아니야.”

그녀는 페르난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천천히 술잔을 가져가 페르난데스의 술잔에 부딪쳤다.

“당신의 눈.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 마음에 들어요. 수인족 전통대로 우린 술잔을 나누었고. 당신은 호족의 사절이니. 이제 우린 친구가 되었군요.”

“황제를 견제하고 싶다는 것이, 공작의 뜻이라 봐도 좋소?”

“아하하, 제 뜻과 제 아버지의 뜻이 어찌 다를 수 있겠어요?”

르네는 싱긋 웃고는 페르난데스에게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흉터로 덮인 거친, 강인한 손등 위로 르네의 하얀 손가락이 얹어졌다.

“제가 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죠. 저는 황제의 몰락을 원해요.”

“아닐 텐데.”

“같은 의미죠. 황제의 몰락, 그리고 그 가문의 몰락. 평생 충성으로 제위를 보필한 우리 아버지가 당한 설움과 이 치욕. 그 대가. 아버지께 돌아가야 했을 명예와 보상. 그러니…….”

“제위를 노리시겠다?”

“이제 우린 친구인가요?”

-위협이군.

‘심지어는 실제로 위협적이야.’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말에 동의했다. 친구가 되지 않는다면 독이 든 찻잔을 보낼 여자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사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술잔을 들어 그녀의 손을 슬쩍 피했다.

“데인 출신, 알베르트요.”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예요.”

-챙.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그 소리는, 연회의 시끄러운 음악, 흥겨운 고함, 식기가 부딪치는 소음에. 그리고 밤하늘 아래의 어둠에 묻혔다.

두 사람은 하얗게 웃었다.

‘영웅은 영웅이로군.’

-대단히 당차. 아주 마음에 들어.

* * *

페르난데스가 자리에 돌아왔을 때, 이미 거나하게 취한 전사와 기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술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말 집어서 삼킬 기세로 마셔대고 있었다.

개중 한 기사가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반갑게 외쳤다.

“오, 대단한 전사가 납셨군! 어서 앉게! 이리 오게!”

기사는 껄껄 웃으며 그의 빈 잔에 술을 부었다.

“엄청난 용력이더군. 어떻게 그 거구를 한 손으로 들어서 팽개쳤나? 황무지의 무예인가?”

“비슷한 것이오.”

“한번 당해 보고 싶구먼! 내가 여기저기서 굴러는 봤어도 몸을 들어서 집어 던져진 적은 없으니 말일세!”

그는 시끄럽게 떠들며 페르난데스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빌레의 보르아일세! 반가워!”

-불곰 보르아?

‘그 작자가 맞는 것 같은데?’

-하여간 인물이 흔한 시대라니까.

‘한 집 건너 하나씩은 나오는 편이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이름을 날린 영웅들이 흔해지는 시기이긴 하고. 또한 보르아라면 전생 황제의 충신들 중 하나였으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에르브 공작의 가신단에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수하들을 수없이 썰어 버린 그 무뚝뚝한 기사의 젊은 시절 모습을 바라보며 술잔을 나누었다.

당초, 친구는 잠재적인 적이었고. 페이자쉬는 오히려 친구보다 적을 더 가까이에 두는 편이었으므로. 페르난데스로서는 그 모습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반갑소. 페르닌이라 부르시오.”

“하하, 좋군! 여기! 술을 더 가져오너라! 페르닌. 이제 곧 한 전선에 설 사내들이 이렇게 뛰어나니 내 아주 마음이 든든해!”

“이를 말이오. 경의 모습을 보니 나 또한 그렇군.”

영웅이 흔하다는 말은 곧 그 토양의 건강함을 나타낸다. 이들의 토양이 되는 에르브 공작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의미는, 그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했다.

영웅을 만들고, 황제를 폐위시키려는 계획에.

“같이 그 뼈다귀들을 으깨러 가 보자고!”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담이 성사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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