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성가신 모기떼 (1)
대황야, 지금은 카라디스 평야라 불리는 이 땅은 지금 크게 네 종류의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애당초 거대한 땅덩이인 만큼, 각 집단 간의 분쟁은 크게 도드라지지 않지만. 평야는 여전히, 황무지 시절만큼 위험한 화약고였다.
남쪽 지역의 라비라타 왕조. 호족 연합과의 경쟁이 극화된 기나긴 전선을 유지하며 세력을 불려 나가는 망령 군단.
북쪽 지역의 아포타자르. 50년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황제와의 협정을 통해 제국의 동맹으로 편입된 망령 군단.
평야 전역을 차지한 수인 호족 연합체, 카라디스. 평야의 주권을 주장하며 온 평야에 점점이 흩어진 부족 중심의 수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립-대족장 연맹. 체라드 블론드테일이 이끄는 연합의 반군.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대족장과, 보신주의에 빠진 원로회를 규탄하며 아직도 공공연히 노예로 매매되는 수인족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궐기한 이들.
키르하스의 통치 기간 동안 대립군이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 거대한 무리가 반군에 가담한 적은 분열기 이래로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진압? 이 시점부터는 반군의 진압이 아니라, 대대적인 전쟁의 규모가 된다. 전체 부족들의 약 1/3이 반란에 가담했으며, 남은 몇몇 부족들 또한 중립을 표명한 상태.
애초에 호족 연합은 중앙집권형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각 부족들의 자치권과 영역이 확고했기에, 체라드의 반란 사태는 대황야 전역에 불길을 끼얹은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외부에 나온 키르하스로서는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다. 반군에 가담한 부족들이 한 지역에 예쁘게 모여 있다면 모르되, 애초에 연합은 점조직이다. 무수한 지역에서 산발적인 게릴라가 벌어지고 있고, 자기방어가 불가능한 친족장파 부족들조차도 생존을 위해 중립을 선언한 상태였다.
“다르알은 키르하스에게 넘겨라.”
페르난데스는 지도에 점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지도엔 각 부족들의 성향과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화톳불이 타닥이며 뭉그러진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주군, 멜마르드는 체라드에게 넘기겠습니다.]
“좋군. 그럼 서부 3번 구역은 전소하겠어.”
[술탄이 좌시하겠습니까?]
“좌시해야지. 그쪽 사정도 좋지 않을 텐데.”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애초에 이 전쟁은 역할 놀이에 불과했다. 반군의 역할, 진압군의 역할, 세력의 재편성, 그리고 전쟁으로 걸러져 나올 정예병들…….
지금 대황야 지역을 바라보는 다른 군주들은, 화약고가 터졌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페르난데스가 보기에 이 지역은, 이 거대한 땅덩어리는 화약고가 아니라, 용광로였다.
잡금과 불순물을 거르고, 순금을 뽑아내는 용광로. 대립군? 대부분은 키르하스의 통치에 부정적인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나머지는 추후 일어날 전쟁에 희생양으로 쓰일 이들이다.
그러니, 아벨을 데려올 수는 없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명목은 그녀에게 있어서 변명에 불과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희생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었고, 페르난데스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제국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운은 띄워 놨지.”
이 시점에서 페르난데스가 준비해야 하는 사업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황제의 동부 정벌을 막고, 그를 실각시키거나 정치적으로 파멸시킬 것.
둘째, 약 20년 후. 백국마족의 대카간 카라드스카르의 진격을 막아낼 전초기지를 건설할 것.
제국에 새로운 영웅을 만들고, 그 영웅에게 목줄을 씌워 놓아 그의 기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이득에 불과했다. 한 가지 계략에서 하나의 이윤을 노리는 것은 하수이며, 페르난데스는 단 한 수에 착수하지 않는다.
-참 의롭기도 하시군.
‘이게 옳은 일이야.’
-언제부터 우리가 ‘옳은’ 사업을 벌였지?
‘다시 태어난 순간부터 쭉.’
-잊은 것 아닌가? 처음 눈을 뜬 날에 우린 삼촌과 사촌을 죽였어. 단지 실험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동부 정벌을 막아내려는 이유는 50년 전쟁보다 더 큰 피가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카라드스카르의 진격을 막아내는 이유는 멸망할 수많은 소국들과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 공백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러니 옳은 일일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지도의 한구석에 점을 찍으려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불길이 저 홀로 타닥이며 속삭였다.
[주군?]
“아니, 아니다.”
지도 위의 전장은 무미건조하고 차갑다. 전쟁은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겐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백 명이 죽는다 하더라도, 천 명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어떤 비극과 어떤 희극이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루더라도. 그건 그저 몇 글자의 숫자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전장에선 일천이백삼십이 명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 지역의 약탈로 삼백오십삼 명이 죽고, 기반 시설 파괴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는 이천오백여 명의 기아입니다. 가을 추수 이전까지 도합 삼천여 명의 난민이 기근으로 무력화될 예정입니다.
차가운 숫자들이 드륵거리며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펜을 내려놓고는 눈매를 쓸었다. 적게 잡아도 오십만 명의 기반 시설이 파괴될 전쟁을 막아 내기 위해 수천 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그저 예쁜 포장지에 불과하다.
이 지시로 저들은 죽을 것이다. 그들의 목젖을 썰어 내는 것은 날붙이이지만, 그 날붙이를 휘두르는 칼자루는 그의 펜촉에 이어져 있다.
“체라드를 라비라타 왕조와 연합토록 해라.”
[남부 정벌을 시작할까요?]
“최대한 전장을 한편으로 몰아. 전선이 난립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남부 1, 5, 9번 구역을 전장으로 삼는다. 사흘 뒤에 1번 구역에서 한 차례의 회전이 일어날 수 있도록.”
[사흘 뒤, 남부 1번 구역, 라비라타. 알겠습니다.]
-화르륵.
벽난로 속 화톳불이 다시 붉은빛을 찾아 자연스럽게 불타고, 마력으로 이어진 주문이 깨어지는 것을 느끼며 페르난데스는 끈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한 차례 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그들에게 동정심이 생겼나?
‘아니. 공감대가 형성되는군.’
-수인들에게?
‘베오른에게.’
이단심문관들의 수색, 탐지, 또는 토벌 작전들. 모든 작전들의 평균을 고르게 계산해 보자면 한 사람의 대원이 생환할 확률은 약 48% 정도. 토벌 작전의 경우엔 15% 안쪽으로 떨어진다.
임무의 분배와 최종 인가는 오로지 수도원장 한 사람의 권한이다. 막강한 권력이지만, 동시에 서늘한 임무였다. ‘형제’라 부르던 이들을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베오른은 언제나 이런 기분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보다 더 심하겠지. 페르난데스는 전장 아래 전투들로 희생될 수인들과는 일면식 하나 없지만. 베오른은 모든 심문관들의 양성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인물이다.
-약해졌군. 페르난데스. 혐오스러울 정도로 나약해졌어.
‘글쎄.’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말하고는 다시 펜을 고쳐 잡았다. 이건 성향의 변화 탓일까. 지금까지의 경험 탓일까. 확실한 건 전생에선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지금도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고민은 대부분의 경우 사치에 불과하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목숨은 수많은 소모 자원들 중 하나였다. 전쟁은 자원을 삼키는 불길이고, 그에겐 던져줄 땔감이 아주 많았다.
그는 지도 위에 올라간 시계를 밀었다. 동부 지역들이 그의 손 아래에 나타났다. 제국 동부의 한 산간 마을이 보였다. 황제가 동부 왕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면 반드시 전화에 휩쓸릴 작은 마을이.
“아리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부 전쟁은 막아야 했다. 황제의 눈을 서부에 못 박아 두어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것이 이기심에 불과하더라도. 반드시.
* * *
키르하스는 보르아가 귀찮았다.
“오, 이거 보이나, 대족장? 이건 닷새 전에 내가 작살낸 검치호의 흔적이라네!”
보르아는 말을 타고 가는 내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시끄럽게 굴었다. 키르하스는 아무 말 없이 말을 이끌며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건 그때 산적이 쏜 쿼렐인데 이게 원, 여기 아직도 박혀 있구만. 하하!”
보르아는 나무 밑동에 처박힌 작은 쿼렐을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줄곧 이런 상황이었다. 리뷔에에서 나와 황야로 향하는 길목에는 온갖 파괴흔과 치워지지 않은 전투 상흔들이 가득했다.
리뷔에는 엄밀히 말해서 카르벨리에 영의 수도에 불과했다. 전장 한복판이나 전선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가장 안전해야 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리뷔에 인근 지역을 순시하는 이 시점에서도 전투의 흔적들이 보인다는 것은 지금 리뷔에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보르아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마치 소중한 추억을 곱씹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아, 은공이 보고 싶다.”
키르하스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머리를 흔들었다. 말은 불만스럽게 투레질하고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페르난데스는 리뷔에 인근의 치안을 점검하라 명했다. 그건 공작과의 거래 조건 중 하나였다. 황실로 사신을 보냈으니, 그 응답이 나올 때까지 영지에 체류하며 반군이나 산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카르벨리에 공작에겐 당장 외부로 전개할 수 있는 병력이 없다. 그를 포섭하기 위해선 그의 기반 영토를 안정화시켜야 했다.
“이거 대족장은 말수가 참 적군!”
“천성이라.”
키르하스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품에서 담뱃대를 꺼냈다. 다른 전사들은 각자 다른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키르하스 또한 심심한 중에 한 바퀴 돌고 오려던 참이었다.
타국의 군주를 수행원 없이 보낼 수는 없으니, 공작 측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기사 하나를 붙여 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믿음직한 기사가 키르하스에게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주로, 무력 면에서.
“전사가 과묵한 것은 미덕이지! 아, 대족장은 어떤 자격으로 즉위하는지 참 궁금하더군. 결투 같은 걸 하나?”
“외교적인 결례다.”
“음! 미안하구만!”
보르아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외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몇몇 마을을 지나 황무지의 초입에 다다랐다.
넓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키르하스는 아직도 초원으로 변한 황무지가 낯설었다. 그녀는 유년 시절 내내 황야에서 보냈고, 그녀가 대족장으로 보낸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도 대부분 황무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지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보르아가 외쳤다.
“아, 자네 땅이군! 혹시 자네 밤중에 걸어 다니는 해골들을 본 적 없나?”
“망령 왕조 말이야?”
“아니! 정말, 밤중에 걸어 다니는 해골들 말일세!”
보르아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이틀 정도만 더 나아가면 나오는 마을이 하나 있네. 그냥저냥 가난한 소규모 정착지인데. 언젠가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우리 기사단이 파견된 적이 있었지.”
“그런데?”
“마을이 없어져 있었다네!”
“……?”
보르아는 평야의 먼 어딘가를 바라보고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마을이 사라져 있었단 말일세. 건물만 남고, 백성들이 사라져 있었지.”
“침략을 당했나?”
“아니. 먹거리도, 재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네. 마치 당장 한 술 뜨려는 것처럼 차려진 식탁 위로 먼지만 쌓여 있었단 말이야. 으스스하지 않나? 그 뒤로 그 마을부터 몇몇 마을에 그런 소문이 돌았네.”
밤중에 걸어 다니는 해골들이 나타난다는 소문.
“처음엔 우리도 망령 왕조의 침략인 줄로 알았지. 한동안 비상이었어. 북쪽이라면 아포타자르 왕조의 땅이 아닌가. 놈들은 지난 전쟁 동안 우리 공작님과 화친을 맺은 상태였다고. 설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고, 우리 왕실의 궁중 마법사 양반과 놈들의 제사장이 직접 찾아와 땅을 살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네.”
“사람들이 그냥 사라졌다고?”
“맞아. 그냥 사라져 버렸어. 유기된 것도, 침략을 받은 것도, 못된 주술이나 마법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깨끗하게.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네!”
그 말에 키르하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토치맨에게 이건, 이단 사건의 시작처럼 들렸다.
* * *
그 시점, 페르난데스에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특수 작전으로 분주하다고는 알고 있었네만, 형제.”
이단심문관 정복을 챙겨 입은, 선 얇은 청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공작에게 이단심문관이 파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곧장 접촉을 시도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헤레티카 파스칼 안드레이. 친교가 깊진 않았지만, 수도원에서 종종 마주치던 사내였다.
“어쩐 일입니까. 형제.”
“이단 정황이 의심되는 사건이 이곳 리뷔에에서 보고되었다네. 수도원장님께서 직접 내어주신 작전이야.”
“제가 있다는 걸 알고 계셨을 텐데요.”
“전혀 다른 작전이 아닌가. 상관없는 일이지.”
파스칼은 차를 마시며 다리를 꼬았다.
“어떤 종류의 사건입니까?”
“마을이 유기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야밤에 해골과 유령들이 쏘다닌다는 목격 증언이 빗발치고 있네. 아주 명백히 의심스러운 사건이 아닌가?”
-맨더슨이군.
‘이 시기에 맨더슨이 왜 여기에 나타나.’
-맨더슨 말고 저딴 짓을 공공연히 벌일 놈이 있나?
‘아니, 제국 서부는 놈의 활동 지역이…… 아.’
치안이 흐트러진 지역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꼭 이교도나 흑마법사들이 활개 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50년 전쟁의 종전 직후 몰락하는, 제국 중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데다가 치안 유지 병력에 공백까지 생긴 지역이라면 흑마법사들이 숨어들기 더없이 적합하다.
맨더슨. 사령술사 맨더슨 알렌. 놈은 시체가 많은, 그러나 감시자는 적은 지역에 실험실을 펼치기 좋아하는 흑마법사였고, 리뷔에만큼 적합한 땅이 따로 없다.
페르난데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하다. 이단심문청의 조사와 감시가 시작된다면 공작의 행동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제국 사절이 도착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