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성가신 모기떼 (2)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르네는 망연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시기가 공교롭지 않은가. 하필이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때에, 하필이면 제국의 사절이 도착하기 직전에…….
이단 접수가 들어가 공식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영주에게 있어서 결코 긍정적인 사태가 아니다. 제국 궁중에서는 공작의 통치력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고, 공작의 정치적 입지는. 이미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증발할 것이다.
르네는 입술을 살짝 씹으며 페르난데스에게 말했다.
“누군가의 모략일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소.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계획을 사전에 인지했다면 첩자가 있다는 소리인데. 이 계획의 요체를 알고 있는 이는 영애와 나, 그리고 대족장과 공작뿐이오. 이 중에선 첩자가 나올 수가 없지.”
“그럼 정말, 그냥 갑자기 일어난 이단 사건이라는 소리예요??”
르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리뷔에와 이 인근 정착지들은 흑마법사가 침투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소. 이단과 사교도들은 언제나 그런 틈을 찾아 들어가지.”
그 행태가 바퀴벌레와 같다. 사실 하는 짓거리도 그 이상은 아니다. 그늘 밑, 어두운 틈에 파고들어 창궐하고 역병을 퍼트리곤 하니까.
“당신은 어쩔 셈이지요? 제국 사절이 이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에요. 다른 수가 있나요?”
“사절이 오기 전에 찾아내어 교회에 보내야지.”
-아니면, 너를 포기하거나.
페이자쉬가 낮게 속삭였다. 그래, 그런 방법도 있지. 페르난데스는 작게 끄덕였다. 이 계획에서 르네와 리뷔에는 대체 가능한 조건이다. 리뷔에의 입지와 공작의 조건이 작전과 적합하긴 하지만, 그 자리에 다른 어떤 선제후들이 들어가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터.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자, 르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폈다.
“우릴 버릴 생각이군요.”
르네가 페르난데스에게 ‘눈이 다르다.’라고 했던 것처럼, 페르난데스 또한 르네의 눈을 보며 ‘다르다’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타인과 다르다.
페르난데스에게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눈이다.’라고 했던 설명을 인용하자면, 그가 바라보는 르네의 눈은 ‘더 깊은 곳을 보고 있는 눈’이다. 마음 깊숙이, 어쩌면 본능의 영역까지.
현자의 눈이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그런 눈을 한 사람들을 더러 알고 있었다. ‘영웅들’.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
-그새 정이라도 드셨나?
‘그럴 리가. 우리가 떠나도 이 여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야. 다른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겠지. 그 뒤에, 설령 제위에 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린 제국 남부와 서부의 영향력을 잃게 될 거야.’
르네 필리파는 이 정도의 시련에 허물어질 여인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이 근방 지역의 지배력을 가질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포기한다면, 페르난데스는 추후 황무지 인근 제국령의 통제권을 상실할 것이다.
모든 관계는 거래다. 상호간의 호혜적인 거래. 그리고 거래의 기본은 값이 쌀 때에 구매해 비싼 값에 판매하는 것.
지금 페르난데스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호의로,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미래의 영웅이 될 사람의 환심을 구매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린 친구가 된 것 아니었소?”
“……의리가 넘쳐 보이는 사람은 아닌데.”
“나는 친구를 쉽게 사귀지 않소.”
이 시점에서 페르난데스에게 ‘친구’라고 당당히 다가온 사람은 비센테, 다리안, 로프트, 그리고 르네뿐이다. 동부의 왕과 인류 최강, 북부의 사신, 미래의 황제.
-지난 삶보다 교우 관계가 좋군.
‘이게 착하게 산 보답이 아닐까.’
-하, 웃기는군.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베이타서스 교회 측과는 협력이 가능하오. 사태가 조기에 마무리된다면 함구하는 정도는 수월하지.”
“교회에도 지인이 있나 봐요? 그 치들은 이득이 없으면 손을 뻗지 않는데. 특히 정치적인 부분에선.”
“뭐 그렇지. 그쪽은 걱정할 필요 없소.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그 흑마법사를 잡아내느냐. 그뿐이겠지요.”
“궁중 마법사를 불러 주시오. 현장에 직접 나가 보아야겠소.”
“함께 가지요. 당신은 전사지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하는 짓은 딱 마법사 같기는 하지만……. 뭐! 좋아요.”
르네는 손뼉을 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어디 그 흑마법사인지 뭔지, 감히 공왕의 영토에서 허가 없이 마법을 부려 대는 그놈에게 세금이나 징수하러 가자구요!”
“세금이라.”
재밌는 표현이다. 페르난데스는 르네의 말에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리뷔에의 궁중 마법사 안티엔은 소탈한 성격이 그대로 얼굴에 묻어나는 노인이었다. 필라인네일 대학의 교수 출신이라는 이 노인은 느긋하게 말을 몰며 유기된 정착지를 가리켰다.
“여기일세! 내가 여기서 그 망령 사제와 함께 현지 조사를 했었지.”
“이상한 점은 없었소?”
“온통 이상한 것들뿐이었지! 마을엔 강도나 도적떼가 들었던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네. 그냥 사람만 사라졌다? 이건 기이하지.”
“그런데 왜 그런 보고를 하지 않았소?”
“뭐라 보고할까? 망령 군벌에선 결백을 주장한다, 내가 조사했을 때 마법의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만 사라졌다……. 이게 무슨 뜻으로 들리나?”
“소작민들이 단체로 반군이나, 도적떼에 가담했다?”
“그 경우 말고는 답이 없지. 최근 리뷔에 영지의 세율을 알고 있나? 이런 작은 정착지에 부과하기엔 과도한 세금을 걷어내지. 이 영지 전체에 이런 식으로 유기된 정착지가 한둘일 것 같나?”
“그럼 야밤에 돌아다닌다는 망령과 해골들은?”
“그런 소문은 영지가 정상일 때에도 돌았네. 우리 영지뿐이겠나? 이 마을, 저 마을, 심지어는 수도에 있을 때에도 흔히 들리던 저잣거리 낭설에 불과해.”
시민들은 언제나 괴담과 기담을 즐겼다. 그건 그들의 도락이나 다름없었고, 시골 마을일수록 기이한 관습이나 풍물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늙은 마법사의 말은 타당했다.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도주한 정착지. 허황된 풍문, 마법의 흔적이 없는 마을…….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말머리를 돌려 마을 안으로 향했다.
* * *
마을 도로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짐승의 대변이나, 행인의 쓰레기 따윈 전혀 없이. 그저 낡고 잡초 무성한 채로 정돈된 도로였다.
당연한 일이다. 오물이든 쓰레기든 그곳에 생물이 살 때에나 발생하는 법이고, 여기 짐승이라고는…….
‘들개들이 있군.’
버려진 마을에 보금자리를 편 야생 동물들뿐이었다. 잡초가 돋아나기 시작한 마을 내부에, 집 안에서 생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까악, 까악.
까마귀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며 퍼드득 날아올랐다. 한 담벼락 위에 앉은 까마귀는 고개를 비틀며 마을 안으로 접근하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음식까지도 테이블 위에 차려진 채로 사라졌다 들었소.”
“그래서 짐승이 이렇게 많이 몰렸던 모양이군. 들개, 고양이. 으익, 쥐도 많구만!”
담벼락의 틈 사이로 쥐 한 마리가 타닥, 하고 달려 사라졌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다.
페르난데스는 말을 몰며 눈을 감았다. 평범한 황무지의, 부패한 짐승의 사체나 야생 동물 특유의 노린내가 났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각.
말을 몰아 다가가도, 고양이는 경계심 없이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고양이를 향해서 속삭였다.
“용의주도하군.”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놈의 노란 눈이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모로 보나, 조금 대담한, 그냥 평범한 길고양이였다.
“시체탑의 맨더슨.”
-샤악!!
고양이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지르고는 타닥, 하고 뛰어나갔다. 페르난데스는 고양이를 쫓지 않았다. 이미 놈의 기척은 사라져 있었다.
흑마법사에겐, 마법보다 정통해야 하는 분야가 있다. 기척 감추기. 마법을 배우기에 앞서서, 모든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기척과 마법의 잔향을 감추는 것을 먼저 숙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늙은 흑마법사일수록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얼마나 자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감추느냐, 그것이 흑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다.
그의 스승, 기안-켈은 한 도시의 주교로 분장했음에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런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처럼 뛰어난 흑마법사일수록 일반적인 방법으로 자취를 쫓을 수 없다.
완벽하게 몸을 숨긴 흑마법사를 쫓는 방법은, 전통적인 헤레티카식 탐문 수사가 동원되거나 같은 흑마법사가 은폐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아니면, 숨은 존재를 이미 눈치채고 있거나.
헤레티카의 수사법, 베이타서스 사제 특유의 감각, 늙은 흑마법사가 가진 성취, 미래의 지식까지. 페르난데스는 달려 나가는 고양이를 보며 웃었다.
‘내 오랜 친구여.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여기까지 날아왔나.’
-시체 파리 같은 녀석. 난 원래 놈이 싫었어.
“뭔가 발견이라도 했나?”
“아니. 아무것도 없군.”
페르난데스는 가까이 다가오는 안티엔에게 대답하고는 다시 말 위로 올랐다. 이 마을엔 더 이상 볼 게 없다.
그와 함께 걷던 르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힐끔 바라보며 소리 죽여 말했다.
“뭘 찾았죠?”
“어떤 걸 말이오?”
“아무 수확도 없었을 리가 없는데.”
“아직 심증만 있을 뿐이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자, 르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려 나아갔다.
추적에 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다. 마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 뻔했고, 그의 마법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어쨌건. 사태의 해결이 먼저다. 페르난데스는 리뷔에로 돌아가는 말 위에서 마지막으로 마을의 풍경을 일별했다.
* * *
-화르륵!!
공왕의 궁정 바로 앞에는 화형대가 걸려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도착할 때쯤엔 곡소리와 매연이 궐 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손을 흔들고 비명을 질렀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가만히 있으시오.”
페르난데스는 뛰어나가려는 르네의 팔을 움켜쥐고는 앞서 나아갔다. 영애와 궁중 마법사를 알아본 위사들이 시민들을 몰아 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끝, 그렇게 만들어진 길의 끝엔 화형대와 불에 탄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 사이를 걸었다.
“으아아아악!!”
화형대 위에 매달려서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사람 하나가, 까맣게 그은 시체로 변하며 굴러 떨어졌다. 불이 잦아들기도 전에,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다른 이가 위병들의 팔에 의해 끌려 나왔다.
“살려, 살려주세요! 저,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피고의 죄질이 확연함에도 결백을 주장해 법정을 모욕하려는 죄. 사형에 처한다.”
“나, 나는 잘못이 없어! 살려주세요!!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익숙한 목소리다.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말에서 내렸다. 위병들이 그를 가로막으려다가,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보고는 찔끔하며 물러섰다. 페르난데스는 힘없이 그를 겨눈 창대를 옆으로 밀어 버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본 법정을 폐회하오.”
“……무슨 권한으로?”
헤레티카 파스칼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엔 피에 전 세인트메탈 장검이 들려 있었다. 저항이 심한 이들은 화형대에 가기 전에 저 칼 아래에 쓰러졌으리라.
페르난데스는 파스칼의 앞에 서서, 위병에게 끌려가던 시민을 바라보았다. 눈물과 콧물이 엉겨 붙은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낙이었다. 그는 잠시 아낙의 턱을 잡고 이마와 입, 그리고 안구를 살폈다.
“이 여인에겐 흑마법 사용의 정황이 없소.”
“……흑마법에 박식한가 보오? 그대는 누구시오?”
특수 작전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페르난데스는 이단심문관이 아니다. 파스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수인 호족 연합의 사절이오.”
“외국의 문제에 개입하지 마시오, 이교도.”
“본 연합은 소란을 원하지 않소. 담화를 청하오.”
“그대의 입장에 충실하시오.”
“그렇게 하고 있소만.”
페르난데스의 뒤를 쫓아 달려온 르네는, 저 무시무시한 헤레티카의 앞에서 굴하지 않고 말하는 페르난데스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동부 왕국 출신인 그가, 이단심문관의 악명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단순히 호의로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좋소. 따라오시오.”
파스칼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서자, 르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형을 집행하는 이단심문관이 한 수 물러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보며 다가가 속삭였다.
“제정신인가요?”
“더 큰 피해는 막아야지.”
“지금 저희 영지의 백성들을 걱정한 건가요?”
“아니. 이단심문이 공식적으로 행해지면 반드시 소문이 나기 마련이오. 제국 사절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것 같소?”
어쨌건, 당면한 문제는 제국의 사절이다. 제국의 지원을 받아 황무지로 군사 증원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이단 재판은 결코 달갑지 않은 사건이다.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파스칼을 따라 궁중 외부의 막사로 들어섰다.
* * *
“형제여, 이게 무슨 짓인가?”
페르난데스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파스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쌓인 보고서들을 툭툭 두드렸다.
“저들에겐 모두 하나 이상의 혐의가 있었네. 그리고 자네는 이렇게 앞서 나서면 안 될 입장이 아닌가.”
“적어도 형제가 불태우려던 그 여인은 무고했습니다. 파스칼 형제. 교회는 이 사건이 불거지길 원하지 않을 겁니다.”
“교회는 이단의 가장 작은 편린이라도 이 문명 사회에 파고드는 것을 원하지 않네. 지금 형제가 한 행동은, 이단 정황을 의심할 수 있는 짓이라는 걸 아는가?”
“내부 심의원에 고발하십시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형제의 작전 수행이 제 임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파스칼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이단 정황을 묵인하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라 말하는 건가? 대단히 위험한 발언일세.”
“무고한 이들을 적법한 조사 없이 화형시키는 것도 위험한 행동 아니겠습니까.”
“무고함을 누가 증명하는가? 자네가 나 이전에 이 사건을 조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 사건의 주체는 날세, 형제. 단 하나의 이단을 불태우기 위해, 그 땔감으로 무고한 이들의 시체를 수백 구를 더 치우더라도. 이단심문청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그래, 그랬지.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웃었다. 썩은 욕창을 들어내기 위해 생살을 찢어야 한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술을 집도할 이들이었다.
전생, 아리아의 마을이 불타던 때를 기억한다. 그는 장대에 걸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루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꼬리를 잡았나?”
“그걸 확인해 보려 합니다, 형제. 그 이후에 일어나는 재판에는, 만신전에 맹세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좋네. 단 하루. 기다리겠네.”
페르난데스는 파스칼을 뒤로한 채, 막사를 벗어났다.
* * *
키르하스는 안절부절못하던 상황이었다. 얼굴을 아는 헤레티카가, 공국의 백성들을 거의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며 불태우는 시점에서 외국인의 입장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뜯으며 성 밖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막고 싶다. 그러나 무슨 권리로 그러겠는가. 지금 그녀는 수인의 대족장이고,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토치맨에 불과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는 재빨리 차가운 얼굴을 가장하며 날카롭게 문을 노려보았다. 곧, 그녀의 인상이 풀렸다. 페르난데스였다.
“키르하스.”
“으, 은공, 큰일 났어요!”
“안 그래도 거기에서 오는 길이다.”
페르난데스는 우묵한 눈으로 곧장 다가와 방 한켠에 놓인 무장을 챙겨 들었다. 소드벨트를 허리에 감고, 대검을 등에 둘렀다.
“이단심문관의 일을 할 차례다. 키르하스.”
“파스칼 형제님도 함께 가시나요?”
“아니. 우리끼리 간다.”
너무나 공교롭다. 그의 작전이 시행되려는 시점에 시의 적절하게 발생한 이단 사건. 접수되자마자 파견된 이단심문관. 제국 사절이 도착하기 직전에, 공국의 온 백성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요란하게 시행된 이단 재판까지.
너무나 공교로워서,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누군가, 더 있군.’
맨더슨 말고. 이단 재판 신청과 파견에 개입할 수 있는 누군가가. 그의 계획을 방해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이 영지에 도사리고 있다.
“가자.”
“예, 은공.”
누가 되었더라도 오늘보다 오래 살 수는 없으리라. 페르난데스는 어둑해지는 저녁 하늘 아래로 나섰다. 해질녘과 새벽은 이단심문관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