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우리는 반석이라 (1)
그 시각, 리뷔에의 시외에선 대피 작업이 한창이었다. 외성 바깥의 농경지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시민들의 인파가 길게 줄을 이으며 성내로 들어서기 위해 아우성을 쳤다.
그 광경을 내려 보며 르네는 혀를 찼다. 늦다. 이 인근 영지의 백성들은 대피에 익숙하지 않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도 리뷔에는 전선의 최전방에 놓인 적 없는, 후방 전초기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저 멀리. 능선 너머 어둠 속. 불길이 치솟는 저 먼 서쪽 방향 어딘가에선 지금도 미상의 군단이 진군하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
공작은 전갈을 받는 즉시 칼을 뽑고 일어섰다. 그를 따르는 대검 귀족들은 거의 모든 종류의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전문가들이었고, 공작의 갑작스러운 출정 명령에도 머뭇거림 없이 검을 들었다.
적지 않은, 아마도 영지의 거의 모든 병력이라 할 수 있을 군단이 서쪽 너머 어딘가에서 몰려온다는 망자들의 행진을 막아내기 위해 일어섰다.
“공작 영애. 피하셔야 합니다.”
“아저씨.”
궁중 마법사 안타엔이 어느새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두려움 탓인지 그의 늙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르네는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이 부재이며, 영지 내에 남은 군사력이 그저 치안 유지 병력뿐인 지금. 그녀마저 도주한다면 영지를 방어할 사람이 없다.
영지의 방어를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 곧 외부로 출정을 나간 군사들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린 그 끈적한 함의에 르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지는 공격받고 있었다. 전선 너머의 술탄이 아니라, 원인 모를 망자들에게.
“피하시지 않더라도 궁으로 향하시지요. 전황을 직접 내려 보며 하명하시는 편이 모두에게 더 낫습니다.”
“예, 그렇게 하지요.”
안타엔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척거리며 앞장서서 걸었다. 르네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뛰어난 전투 마법사였던 안타엔도 나이를 먹고 심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안타엔을 따라 걸으며 피난민 대열을 힐끔거렸다.
* * *
“보르아! 전황은 어떤가!!”
“개별 상황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적의 수가 끝이 없습니다!”
에르브 대공은 말에 탄 채로 보르아의 외침을 들었다. 공작의 군단은, 오랜 전장 속을 동고동락한 정예들이다. 해골과 망자들이 몰려드는 전황은 낯설지언정 대비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마법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 산발적으로 사방에서 터져 오르고 있었다. 안타엔을 불러야 하는가. 에르브는 침음하며 천천히 물러나는 전선을 바라보았다.
-콰아아앙!
화염이 폭풍처럼 몰아닥칠 때마다 뼛조각과 함께 피륙이 터져 나갔다. 전선에 틀어박히는 화염 폭풍은 피아를 식별하지 않고 그 자리를 전소한 이후에 사그라들었다.
대단할 것 없는 전투 마법이다. 그러나 마법전을 펼칠 전력이 과도하게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 전선에 공백이 생기면 어김없이 망령 군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전선이 밀린다.
여기서 더 밀려나면 피난민 대열과 마주한다. 그 뒤는 혼란뿐이다. 이미 보급선 따윈 생각할 여력도 없이 차출한 병력이다. 하루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 백성의 피난이 모두 마무리된 후에야 성벽을 끼고 항전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대족장은! 대족장은 어디에 있는가!”
“출타 중이다!!”
공작의 외침에 수인 전사 하나가 소리 질렀다. 공교로운 부재였다. 갑작스레 기습해 온, 신원 미상의 망자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사라진 대족장…….
공작은 불길함을 억누르며 전선을 시찰하는 파스칼에게 말했다.
“파스칼 수사! 이건 황무지의 망령 군단이 벌인 선전포고라 봐도 되겠는가!”
“마법의 활용과 병력 운용, 그리고 병사들의 복식이 아시트의 것과 전혀 상이합니다. 공작, 저건 사령술사의 군대가 분명합니다!”
“제기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사령술사라니!”
“저 병사들의 무장을 보십시오! 갈쿠리와 쇠스랑, 곡괭이……. 병사가 아닙니다, 저들은 농민들입니다. 아니, 한때 농민이었던 자들이겠지!”
파스칼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늦었다. 그의 임무는 이 영지에 파고든 사령술사가 무언가 사악한 술수를 부리기에 앞서서 그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퀴벌레 같은 것들. 파스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단 하나의 이단. 단 한 사람의 사교도라도 민간 사회에 파고들어 충분한 시간과 자본을 손에 넣는다면 이런 짓거리를 펼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싹을 근절했어야 했다. 파스칼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들 모두가 베이타서스의 백성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저들은 만신전의 신도들이었을 터였다. 만신전의 권역 밖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소작농들.
수십 수백의 무고한 시신을 불사르더라도 단 하나의 악인을 용인하지 않으리라. 이단심문청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상황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수백의 목숨은 분명코 무겁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명징할 때엔 차가운 숫자 놀음에 불과해진다.
수백의 무고한 백성을 불태워, 단 하나의 이단이 수확할 수천 수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허용 가능한 수준의 손실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의는 모두 그 자신이 이고, 그 업을 품겠다.
파스칼은 정통적인 베이타서스의 헤레티카였다. 그의 눈에서 분노가 불길이 되어 흘렀다. 마법사가 다시금 화염을 전선에 투사했다. 그 흐름을 읽고, 파스칼이 말머리를 돌렸다.
“공작! 저는 마법사를 추적하겠습니다. 전선을 유지하십시오! 밀려나면, 공국의 백성들이 모두 잿더미 아래에 깔려 신음할 테니!”
“그 걱정은 내가 해야 할 일이네!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러 가게나!”
파스칼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차를 찼다. 말이 전선 너머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마법사를 향해서 질주했다. 파스칼은 세인트메탈 장검을 뽑아 손에 쥐고는 검신에 입을 맞췄다.
“막토 수페를라우도.”
저들의 심판은 주의 몫이다. 그러나 주의 재판장으로 저들을 끌어 올리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헤레티카는 어둠 속을 달리며 그렇게 되뇌었다.
* * *
페르난데스는 구릉지의 위에서 망령 군세가 진군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수가 적어도 수천. 네크로폴리스의 매장 사제가 없는 이상 이 정도의 군단을 유지하기 위해선 대단한 출혈을 각오했어야 했으리라.
‘조급했구나. 맨더슨.’
뛰어난 흑마법사의 영혼은 악마들에게 매우 높은 가치를 갖는다. 맨더슨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저당 잡히는 것을 각오하고서 이 군단을 일으켜 세운 것일 터였다.
적어도 십수 개의 정착촌이 유기되었다. 사라진 주민들은 농기구를 들고 시체가 되어 리뷔에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일견 대단한 군세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마법사의 기량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 군단을 하루 이상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은 일이다.
그러므로, 맨더슨은 지금 영혼을 저당 잡혀가며 일을 벌여 놓고도 정작 하루를 견디지 못할 자충수를 둔 것이다. 시선을 돌리기에는 충분하더라도, 리뷔에 전역을 불태우거나 지배하는 것에는 한참 모자라다.
오늘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먼지가 될 이들이다. 그리고 극도로 예민해진 헤레티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흑막을 잡아낼 것이다. 이 정도의 일을 벌인다면 반발을 의식했어야 했다.
‘무슨 꿍꿍이냐.’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서 가만히 전장을 내려 보았다. 수인 전사들과 공국의 병력이 거칠게 밀어닥치는 망령 군단을 막아내고 있었다. 수적 열세가 뚜렷했음에도 병력의 질적 우위는 쉽사리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바라고 저질렀느냐.’
막다른 길에 몰려 홧김에 저지른 일이라 보기엔 그 피해가 과중하다. 맨더슨은 그렇게 어리석은 녀석이 아니다. 그 순간, 불길이 전선 한복판에서 타올랐다.
“……!!!”
화염 폭풍이 전선을 강타하며 그 자리에 있던 해골과 공국의 병력을 동시에 일소했다. 전선이 한 번 더 뒤로 밀렸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화염 속에서 타오르는 마력과 술식의 조성. 마법의 구성과 잔향…….
‘폭파 마법.’
-사령술이 아니야. 제국 필라인네일 대학의 수법이군.
‘맨더슨의 마법이 아니야. 다른 마법사다. 제국 전투 마법사가 있어. 제법 수준 높은…….’
-궁중 마법사 안타엔.
“제기랄.”
페르난데스는 끙 하고 신음했다.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씩 짜맞춰지며 새로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사절이 나타나기 직전에 이단 사건이 발생했고.’
-이단 사건의 조사가 너무 빠르게 시작되었어. 누군가 미리 고발이라도 했다는 듯이.
‘필라인네일 대학은 제국 황실이 직접 설립하고 운용하는 전술학교야.’
-황실과 연이 닿아 있었겠지. 그리고 황실은…….
‘서부 원정을 원하지 않는다.’
함정, 함정, 그리고 함정이다. 황실이 펼쳐 둔 올가미 아래에 공작이 걸린 꼴이다. 어디부터 예상했을까. 아마 안타엔이 회담에 대해 보고한 그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공작의 최측근이고, 회담장에서 공작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아마도, 서부 정착촌의 흑마법사는 황실이 준비한 미끼였을 것이다. 황실은 어떻게 해서든 공작을 희생양으로 삼고 싶었다. 50년 전쟁의 실책을 대외적으로 돌리는 것이 황제의 입장에서 가장 달가운 일이었을 테니까.
페르난데스가 리뷔에에 접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뷔에는 몰락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엔 흑마법사와 결탁한 선제후라는 오명과 함께 멸문당했겠지. 그러나 안타엔의 보고를 받은 직후, 황실은 재빨리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
미리 준비해 둔 미끼를 이용해서 공작의 계획을 망치고…… 시선을 돌리고…….
“르네 필리파…….”
공작이 전선에서 암살이라도 당한다면. 후계자는 공녀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공녀를 사로잡는다면 공국 전체를 괴뢰 정부로 삼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다. 황실의 계획은 치밀하고, 끈적하고, 치명적이었다.
공국의 모든 병력과 기사들이 전선에 투입된 이 시점. 공녀는 홀로 남아 백성들을 수습하고 있으리라. 전선에 투입된 마법사가 안타엔이라면 이 사태를 조장한 흑마법사는 어디에 있겠는가……!
“키르하스. 전선으로 향해라. 공작을 도와.”
“은공, 하지만 은공께서는요?”
“나는 달리 할 일이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작의 안위를 지켜라. 그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전장의 상황이 지휘부가 타격을 입을 정도로 격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마법사를 암살하는 것은 어떤가요?”
“아니, 저들의 암살자를 대비해야 해. 황실이 공작을 노리고 있다. 공작이 쓰러지면 일이 틀어져.”
가라. 키르하스는 더 이상 페르난데스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명령이 내려졌으니. 그녀는 곧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작의 지휘부를 향해 달려갔다.
페르난데스는 그 뒷모습을 짧게 바라보고는, 리뷔에의 외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헤레티카는 전투보다 수색과 추적에 특화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투력의 부재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파스칼은 해골과 구울 따위가 일어선 시체들을 도륙하며 가로질렀다.
세인트메탈은 사령술의 하수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새하얀 장검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일 때마다 해골들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쓰러졌다.
-두두두두두!!
마법의 잔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독한 흑마법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 도래한 망자들이 내뿜는 끈적한 악취, 악의, 잔류 사념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나와라!! 나와서 주의 심판을 받으라!!”
파스칼은 분노에 타오르며 칼을 휘둘렀다. 그를 가로막던 해골이 힘없이 허물어지며 쓰러졌다. 그때, 불똥이 튀었다. 그가 탄 말의 눈이 타들어 가며 말이 경련을 일으키고 발작했다.
“크흑!”
질주 도중의 낙마. 그는 바닥을 수 차례 구르며 간신히 멈췄다. 그는 몸이 멈춘 직후 바로 일어나 칼을 들었다. 충격으로 손이 떨렸지만, 그의 눈에선 여전히 굳건한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이 두려운 것은…… 그 잡것들이 문명 사회 내부에서 암약할 때뿐이지.”
해골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로 저 멀리,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지팡이를 겨눈 채 말했다. 파스칼은 떨리는 다리를 앞으로 내디뎠다.
“홀로 남은 이단심문관은, 그저 칼을 잘 다루는 전사 하나에 불과해. 이따금씩 그런 것을 망각한 채로, 정말 저 스스로가 잘났다는 듯이 덤벼드는 것들이 있더군. 하찮기 그지없어.”
“아니.”
파스칼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낙마의 충격으로 늑골이 나갔다. 숨을 쉬는 것도,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칼 한 자루. 가벼운 빈 몸. 그저 전사 한 사람에 불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너희가 이단심문관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문명 사회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단.”
칼을 뽑아 앞으로. 마법사의 아래턱, 비웃음이 길게 걸린 그 실루엣을 향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불사르더라도, 그 빛이 문명 사회를 밝히는 등대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 맹세했다. 그러니 마땅히 두려워하라. 너희 악인을 불태워 타오르니 가로되 우리의 삶은 횃불이라.”
“허세는. 죽고 나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까.”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오, 주의 세상을 위한 시작이 되리니. 가로되 우리의 삶은 반석이라.”
-스릉.
호흡이 거칠고, 맥이 가쁘고, 손이 떨렸다. 디모니카라면 어땠을까. 파스칼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디모니카였다면 애당초 이것보다 더 끔찍한 전장에서 끔찍하게 죽어 갔을 것이다.
“기도해라, 이단.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그저 간절히.”
밤이 깊고, 동이 틀 때까지 긴 시간이 남았다. 달빛이 망자들의 두개골을 비추고 있었다. 새하얀 평원에서. 이단심문관은 마법사를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