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우리는 반석이라 (3)
밤은. 별과 달이 흐드러진 밤은 신비의 시간이다. 망령이 흐느끼는 시간이며, 또한 은밀한 지혜가 흐르는 시간이다. 그러니 밤은, 마법사의 시간이다.
그러나 마녀사냥꾼들은, 이단심문관들은 언제나 밤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기 마련이니.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제외하면 아군이 없다. 선신 만신전의 권역 한가운데에서도, 항상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며.
“흐으…… 후…….”
핏물이 흐르는 세인트메탈 장검이 힘없이 늘어졌다. 마법사의 심장을 파고든 장검은 달빛 아래에서 시린 빛을 띠었다. 파스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상한 탓에 바람이 샜다. 핏물이 울컥이며 목을 타고 흘렀다. 침을 뱉어내고는 한참 쿨럭였다. 파스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법사를 밀쳐냈다. 마법사의 몸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럼에도,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서 있는 해골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투 도중에 깨달았다. 이 마법사는, 애당초 이 사태의 주범이 아니었다.
“궁중 마법사 안타엔. 본 법정은 그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크륵, 큭, 크큭.”
로브를 뒤집어쓰고, 전장을 폭격하던 마법사의 정체는 안타엔이었다. 파스칼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클클 웃는 안타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피에 젖은 손으로 파스칼의 머리 위, 저 하늘 너머를 가리켰다.
“저 밤하늘 아래 모두가 죄인이니. 모두의 죗값에 사형을 언도하게나.”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콰직.
칼날을 비틀어 뽑았다. 늙은 마법사의 몸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는가. 이단 정황의 발견과 고발이 거의 시차 없이 진행되었다. 누군가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누가 감히? 누가 감히 흑마법사와 이단들로 이단심문관을 충동했는가. 파스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가오는 해골들을 쳐내며 생각했다.
제국. 궁중 마법사 안타엔의 출신지는 제국의 수도다. 그리고 이단 정황을 고발한 귀족은 제국의 백작이었다. 선제후를 모략하기 위한 방법이었나. 감히, 감히 자국의 정치에 교회를 끌어들였단 말인가?
-콰직!
해골을 쳐내고, 망령을 베어내는 칼날은 떨릴지언정 무뎌지지 않았다. 여전히 예리하게. 여전히 날카롭게. 파스칼은 망령의 두개골을 으스러트리고는 헐떡였다.
“성자…… 형제……!”
당장 끊어질 것 같은 숨으로, 파스칼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의 작전. 제국의 고발을 무시하라는 그의 충고. 교황과의 비밀스런 접촉이 있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는 이 일을 조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방해했구나. 파스칼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한 언사에 충동질 당했다고 여겼거늘, 그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다.
체력의 한계가 가까웠다. 그러나 의지의 한계는 아직이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는가. 이것을 근심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 어디부터 고쳐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어디서부터, 어떤 누구를, 어떻게.
불태워야 하는가.
마녀를, 이단을, 악마를……. 사사로운 속세의 사정에 교회를 이용했다면, 그자들이 곧 이단일지니.
그는 해골을 분쇄하며, 최대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공작 병력이 지키고 있는 안전한 전선의 안쪽이 아니라. 공작의 궁궐을 향해서.
* * *
키르하스는 코끝을 찡그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사실 전장의 기사들에게선 땀 흘리고 흥분한 자들 특유의 체취가 나기 마련이었고, 이곳 전초기지엔 그렇지 않은 이들을 찾기 어려웠으므로, 후각에 의지하는 것은 곧 한계에 봉착했다.
모두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긴장감, 흥분, 공포……. 전장 특유의 냄새. 아니, 전쟁의 냄새다. 매운 살기와 함께 타는 듯한 분노까지.
그러나, 그 사이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어딘지 익숙한. 언젠가 맡아 본 적 있는 것 같은 냄새…….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이건 자주색이었다. 그런 느낌이다.
‘어디서 맡았더라. 이게 무슨 냄새였지?’
사실 지금 그녀는 그저 근엄한 표정을 짓고, 나른하게 의자에 앉아서 전황을 지켜보는 것 이상의 역할이 없었다. 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날뛸 수 있다면 좋으련만, 페르난데스의 명령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공작의 안위였다.
그러니 그녀는 호위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 자조적이지만, 그녀는 이 혼란한 전장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적어도 시간을 보낼 방법이라도.
어차피 이 전투는 날이 밝으면 끝난다. 그 전까지 공작이 멀쩡히 살아 있다면 우리의 승리다. 그녀의 주인이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그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
‘기분 나쁜 냄새가……. 음……. 바다. 음, 아니야. 바다가 아니라……. 좀 더 비슷한…… 비슷한…….’
끈적한 냄새다. 비린내가 섞인. 쇠 냄새에 가까운. 전장 어디서도 쇠를 찾아볼 수 있고, 피 냄새 또한 쇠 비린내와 비슷하므로, 자칫 놓치기 쉬운 냄새였다.
무슨 냄새일까. 무슨…….
‘멜리실두르의 여명.’
해가 비추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란 소리를 듣자, 문득 그 마법이 떠올랐다. 기적 같은 섬광이 항구를 휩쓸던 그 순간이.
마법? 항구? 갑자기 이런 말이 왜 떠올랐더라…….
‘엘프 냄새인가?’
엘프들은 바다 비린내가 난다. 항구 특유의 짠내가 난다. 성격도 짜다. 째째하고 투덜거리고 그런 주제에 오만하기까지 하다. 기분 나쁜 족속들이다. 귀쟁이들!
‘음. 비슷하긴 한데, 아닌데…….’
엘프 냄새가 아닌데. 그보다는 좀 더 음침한 냄새가 난다. 비슷하긴 한데, 둘 다 짠 냄새긴 한데. 비린내는 나는데, 좀 더 쇠 비린내에 가까운…….
‘쇠 비린내는 피 냄새랑 비슷해.’
피 냄새. 쇠 비린내. 엘프와 비슷함. 항구. 멜리실두르의 여명. 용……? 아니, 아벨한테선 좋은 냄새가 나. 용이 아니라.
“흡혈귀!!”
키르하스는 비명을 지르며 펄떡 뛰어올랐다. 그녀 주위에서 무장을 점검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서려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키르하스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한구석.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노란 눈동자가 언뜻, 바이저 아래에서 빛났다.
“찾았다!”
키르하스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끈적한 살기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사냥의 여제, 카단의 선택받은 대족장. 그 진가가 드러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에겐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얼굴. 사냥감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 달아오르는 본능. 핏줄이 불거지고 손톱이 날카롭게 일어나며 전신 근육이 활처럼 탄력 있게 먹잇감을 노렸다.
뭄토의 차원에서부터 여기까지. 카단의 신성과 함께 넘어온 선택받은, 완성된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의 본능이 깨어나며—
“제기랄.”
그 모습을 보고, 흡혈귀는 짧게 한탄했다. 위장은 완벽했다. 설령 이단심문관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알았는가. 흡혈귀의 고민은 짧았다.
-탓!
섬전처럼, 키르하스의 몸이 달려들었다. 뛰어오름과 동시에 칼자루를 손에 쥐고, 그대로 일격.
-캉!
바닥이 맹수의 발톱에 으스러지는 것처럼 파괴되었다. 흡혈귀는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짓—!”
“비켜! 공작이 위험하다!”
당황한 기사들이 벌떡 일어섰다. 키르하스는 그녀를 막으려는 기사들의 틈을 빠져나가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 흡혈귀를 쫓았다. 흡혈귀가 사라진 방향…… 전선의 후열. 그곳엔 공작이 있다.
* * *
공왕의 궁은 리뷔에의 역사와 함께했다. 그들의 선조는 리뷔에의 이름을 처음 짓고 그 지역에 정착한 고대의 씨족장이었으며, 그때의 씨족이 남아 번성한 것이 지금의 리뷔에다.
그러므로, 공왕의 궁궐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곧 리뷔에의 전부와 같았다. 오랜 전통, 유구한 역사. 권위와 존중은 핏줄이 아닌, 그 핏줄로 쌓아 올린 저 담벼락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공왕의 궁궐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유구한 세월의 흐름 아래에서 단 한 차례도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았던 강고한 내성이, 폭발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페르난데스는 무너지는 연회실의 벽을 따라 달리며 수인을 짚었다. 콰득! 주문이 얽힘과 동시에 쐐기가 틀어박힌다. 페르난데스를 노리고 들어오던 공격 주문 일곱 갈래가 동시에 허물어진다.
-쾅!
무너지는 벽돌과 벽돌, 기둥을 발판 삼아 뛰어오르며 다음 발판을 찾아 몸을 싣는다. 단 한 순간도 멈출 수는 없었다. 악마가 된 맨더슨의 주문이 공왕의 궁전을 무너트리고 있는 이 시점. 멈추는 순간 잔해 아래 파묻혀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찾아야 했다.
‘맨더슨의 주문이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다.’
그게 누구일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붕괴되는 건물 속에서, 맨더슨 그 자신은 건물의 잔해를 굳이 피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키고자 하는 이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어떤 악마도, 이단도. 사회 근간 전체를 말소하지 않는 이상 대외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 대외적인 신분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반드시 어딘가에 기생해야 하는 족속들이다.
그리고 그 기생체. 맨더슨의 욕망이 담긴 아름다운 여인. 고귀한 혈통과 빛나는 재능. 르네 필리파다. 맨더슨은 페르난데스를 정리하고, 황실과의 계획을 완성한 이후에 르네 필리파와의 혼인을 통해 이 지역을 집어삼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 경우, 르네 필리파는 대외적으로 모습을 비쳐야 하는 인물이 된다. 선제후로서 제국의 정치에도,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꼭두각시로서도. 그녀는 반드시 멀쩡히, 대외적으로 하자 없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르네 필리파를 향한 보호 주문은 맨더슨의 이성을 의미했다.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이성적일 때에 르네를 빼돌려 보호해야 했다. 꼭지가 돈 맨더슨이 보호를 포기하고 공격에 전념하는 순간, 그녀는 이 잔해 아래에 깔려 시체가 되고 말 것이다.
-콰르르릉!
벽돌들이 저 스스로 날아와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투석기의 포환과 같다. 하나하나의 물리적인 충격력은 인간의 피륙이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캉!
그러나, 쳐낸다. 치는 족족 근육에 막대한 부하가 오지만 불가능하지 않았다. 힘은 힘으로. 칼끝으로 쏟아지는 벽돌을 쳐내고, 앞으로. 앞으로!
-콰직, 콰직, 콰지지직!!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수인을. 청동 왕좌의 잔량으로 따지면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쓸 수 있는 주문은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직 해주에만. 마력 쐐기를 박아 넣는 것에만 청동 왕좌를 운용한다.
마력 쐐기를 박아 넣어 시전되는 주문의 흐름을 끊는 것은, 단순히 주문을 시전하는 것보다 월등한 단계의 기술이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뛰어다니고, 칼을 휘두르며 사용할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곡예에 가깝다. 페르난데스는 맨더슨의 당혹을 절절이 느끼고 있었다. 전사처럼 싸우고, 노회한 마법사처럼 해주하는데, 정작 공격 주문을 쓰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느냐!!”
맨더슨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이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저 주문으로,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주문으로 자신을 이기어 낼 수 있음이 확실했다. 그런데 이놈은, 이 작은 인간은. 그저 장난치듯 칼을 휘둘러 벽돌을 쳐내고 이리저리 몸을 빼며 그를 맴돌고만 있었다.
“그럴 리가. 난 항상 최선을 다한다네.”
“이…… 이익!!”
-쾅!
마력이 휘몰아치고, 망령의 형상이 떠오른다. 그 순간 망령의 주위 모든 사물이 빠르게 삭아 먼지가 되고, 그 위로 곰팡이가 슬고 포자가 피어올랐다. 부패의 악마다.
페르난데스는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며 재빨리 수인을 짚었다. 부패의 악마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전에, 푸른 벼락이 악마의 몸 주위를 스치더니, 그대로 가루가 되어 허물어졌다.
또다시, 주문 해주가 들어갔다. 맨더슨은 강제로 해체되는 주문의 백래시에 기침을 토하며 분노했다. 고급 주문을 사용할 때마다 어김없이 쐐기가 박혔다.
거의 예술에 가까운 카운터 스펠이다. 그였다면 가장 완벽한 정신의 가장 완벽한 컨디션에서도 감히 시도할 수 없을 순간적이고 정교한 마력 쐐기 삽입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강력한 마력의 총량 그 자체를 이용해 물리적인 잡기술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마력을 투사해 벽돌을 들고 건물을 터트리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었으니까.
그 탓에,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깨물며 연신 칼을 휘둘렀다.
‘제기랄, 마법사면 마법만 써!’
-칼 든 마법사가 이런 말 하니 웃기는구나.
‘아니 그럼 칼질만 하든가! 이건 무슨 숫제 길거리 염동술사처럼 싸워대니 마법전의 낭만이 부족하잖나.’
-얼마나 진행됐지?
‘75%!’
놈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이기지 않은 채로, 르네 필리파의 안전을 확보하며, 놈의 힘을 빼앗는 과정이 이제,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