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우리는 반석이라 (4)
조금만 더. 페르난데스는 사방에 충천한 마력 사이사이에 쐐기를 박아 넣으며 생각했다. 말뚝을 박는 것 같다. 그가 박은 쐐기들이. 형체 없는, 마력으로 응집된 쐐기들이 복잡한 주문과 주문 사이를 헝클어트리며 무계획적으로 난립되어 있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어김없이 하나씩. 삐뚤빼뚤한 잔류가 남아 저 홀로 파직거리고 있었다. 허물어지는 건물 내부를 내달리는 페르난데스는, 머릿속으로 일종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날파리 같은 놈!!”
-콰아앙!
지도가 수정된다. 건물 일부가 터져 나가며 벽돌이 쏟아졌다. 그 사이로 쐐기를 박아 넣고 다시 뛴다. 페르난데스의 지도는 평면적이지 않다. 입체 공간을 투사하는 복잡한 도형이다.
달려온 궤도, 르네 필리파가 수감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장소,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물이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입체 도형이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맨더슨이 있다. 반쯤 악마가 된 맨더슨은 녹색으로 빛나는 근육을 꿈틀거리며 여기저기를 후려치고 있었다. 놈의 정신이 점점 희미해진다. 분노로, 또는 지옥 마력의 오염으로.
‘어리석은 녀석.’
페르난데스는 짧게 혀를 찼다. 지옥 마력과 접촉하고, 그것을 이용할 땐 대단히 주의 깊은 주문과 보호 술식, 그리고 장비가 필요했다. 이렇게 대뜸 악마와 계약하고 그 힘을 다루는 것은 결과적으로 저 스스로의 파멸을 불러온다.
맨더슨은 머저리가 아니다. 적어도 페르난데스가 기억하는 맨더슨의 모습은 그랬다. 소심하고 소극적이지만 제법 똘똘하고 유능했던 녀석이다. 학회의 말단, 재기 넘치는 마법사였다.
“너는 제명이다, 맨더슨.”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외벽의 벽돌 한 무리가 그의 귓가를 스쳐 바닥에 처박혔다.
“언제까지 토끼처럼 뛰어다닐 작정이냐! 덤벼! 덤비란 말이다! 이 왕성은 나의 것이야. 더 이상 궁전을 어지럽히지 마라!!”
“그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다.”
놈은 이제 거의 착란에 빠져서, 저 스스로 이미 공작이 된 것처럼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고는 대검을 들어 허공을 후려쳤다. 날아들던 벽돌이 대검의 검신에 부딪쳐서 놈의 머리로 튕겨 나갔다.
“크으윽!!”
갑작스런 공격에 맨더슨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곧 놈의 눈이 분노와 광기로 이글거렸다.
“크아아아악!!”
-쿠구구구궁!
건물 전체가 요동쳤다. 이미 공왕의 궁전은 최상층부터 적어도 세 개 층계가 허물어져 있었다. 마력에 의해 간신히 외형만 유지되던 벽면이 부스러지며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
이제 더 이상 벽은 일정한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공중에 하나씩, 하나씩. 홀로 떠 있는 돌다리처럼 부유했다. 페르난데스는 벽을 박차고 다음 벽으로, 기둥을 잡고 달려서 다음 발판으로 뛰어다니며, 연신 칼을 휘둘렀다.
‘90%.’
방금의 도발로 맨더슨의 이성이 잠시 흐트러진 틈을 타서, 페르난데스는 부유하는 벽들의 가장 높은 지점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칼을 거꾸로 잡은 채로—
-아직 완성되려면 조금 이른데.
‘이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맨더슨은 르네를 포기할 거야. 그럼 거시적으론 우리의 패배지.’
-도박이라.
‘우리 삶 전체가 우리 자신을 건 도박이었으니.’
이건 그 연속이지. 페르난데스는 대검의 칼끝을 바닥으로 향한 채, 공중에서 뛰어올랐다. 맨더슨의 타오르는 눈이 그의 몸을 좇았다. 놈의 입이 열리고, 날카롭게 변한 어금니가 으득, 갈리며. 놈이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잡았구나!”
바닥을 달릴 때와 달리,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궤적은 저 스스로 변할 수 없다. 그리고 운동 방향을 미리 읽어낼 수 있다면, 저 날파리 같은 놈을 으스러트리는 것은 여반장이다!
맨더슨은 환희에 차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휘둘렀다. 대기에 섞인 자욱한 마력이 뭉치고, 형상을 빚어낸다. 단순한 힘. 마법적인 술식을 짜 올린 것이 아닌, 그저 단순히 총량으로 밀어붙이는 힘!
그렇게 되면 마력 쐐기는 무용지물이다. 놈의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해 주마. 맨더슨은 픽 웃었다. 그러나 필멸자. 한낱 인간의 육신이다. 마력을 우악스레 뭉쳐 으스러트리는 압력은, 중공업용 압착기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한다.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끝이다!!”
“끝이군.”
두 사람의 시선, 두 사람의 대화가 교차했다. 칼이 맨더슨의 이마에 박히기 직전, 맨더슨의 마력이 페르난데스의 양옆을 짓누르며 공간을 으스러트렸다.
한낱 핏덩이로 변할 놈의 모습을 기대한 채로, 맨더슨은 광소를 터트리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그러나, 마력이 멈췄다.
“무, 무슨……. 이게 대체…….”
“주위를 잘 살폈어야지.”
-탁.
페르난데스가 맨더슨의 어깨를 밟고 섰다. 악마화하며 거대해진 탓에, 맨더슨의 양어깨에 다리를 올리고도 균형을 잡기엔 충분했다.
허물어진 건물의 지붕 너머에서 달빛이 내려앉았다. 묵빛 대검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맨더슨은 멍하니 대검의 검신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의, 희미한 실루엣으로 보이는 페르난데스도.
그리고 음울하게 빛나는 두 눈도.
“마력 쐐기…… 마력 쐐기로 술식을 만들었다고…….”
“본디 이 기술은 너의 것이었다. 맨더슨.”
페르난데스는 잠시 칼을 멈춘 채로 말했다. 마력 쐐기를 박아 적의 주문을 끊으며, 그 쐐기들을 이용해 대규모 마법진을 구성하는 것.
마력 쐐기는, 말 그대로 쐐기꼴의 형상을 한 마력 조각들이다. 아무런 정보도 담기지 않은 그저 마력 노이즈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주문 술식 사이, 구성의 가장 연약한 틈에 박아 넣어 상대방이 펼치는 주문의 정보 체계를 교란시킴으로써 마법을 파훼하는 것.
카운터 스펠. 적의 주문이 갖는 구성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고급 술수.
-마법진은, 마력 회로를 특정 사물에 그려 넣어 술식을 짜는 도구.
‘그리고 마력 회로는, 마력이 응집된 선들의 총체.’
그러니 마력 쐐기, 아무런 정보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마력 덩어리들을 이어, 거대한 술식의 말뚝으로 삼고 그 공백을 적의 주문으로 대체하는 것.
이 기술을 당년 맨더슨은 ‘잭’이라 불렀다. 녀석다운 소심한 작명이다. 페이자쉬였다면 이런 복잡하고 아름다운 전투법을 창안해 낸 이후에 ‘페이자쉬의 강탈’이란 식으로 이름 붙여 시그니처 스펠로 삼았으리라.
그러기에 충분했던 기술이다. 맨더슨. 시체탑의 맨더슨. 소심하지만 성실하고 재치 넘쳤던 친구. 적의 주문을 파편화시키고 그 파편들을 자기 입맛대로 조각조각 모아내 자신의 주문으로 바꾸는 복잡한 전투 마법을 구사하던.
“이…… 주문의 이름은……?”
“맨더슨의 강탈.”
“하…… 난 그런 주문을 만든 적 없었는데.”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네가 아니라, 미래의 널 상대해야 했다면 이보다 더 까다로웠을 테니까.”
“네 이름은?”
“페이자쉬.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페르난데스는 주문 강탈의 백래시로 허물어져가는 맨더슨의 몸을 바라보았다. 놈을 이루던 악마의 근육과 뼈대가 흩어지고, 그 아래로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창백하고 비쩍 마른,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령술의 반작용으로 육체의 급격한 노화를 겪었으나. 죽기 직전 그의 육신은 그런 부작용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그 위로, 페르난데스가 대검을 늘어트렸다. 바싹 마른 가슴 위로 칼끝이 살을 가르며 들어갔다. 묵빛 대검의 검신에 달빛이 어린다. 대검의 그립 바로 위에 삐뚤하게 적힌 글자가 반짝였다. 다인, 연민.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화륵.
강탈한 주문이 천천히 흩어지며,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에 떠있던 검은 헤일로가 사그라들었다. 청동 왕좌가 한계치에 다다랐다. 마력이 더 이상 순환되지 않았다. 맨더슨은 그것을 느끼며 픽 웃었다. 조금만 더 버텼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너무 망설였던 것 아닌가?
“제기랄, 허무하구만.”
-콰직!
대검은 그대로 맨더슨의 심장을 갈랐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 위에 칼을 박아 넣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뺨을 간질였다. 그는 묵묵히 소드벨트에서 로사리오를 꺼내 들었다.
촤륵, 사슬이 감기며 맑은 소리를 냈다. 열쇠검 인장이 사슬에서 길게 늘어졌다.
“편히 잠들기를.”
-만일 우리로 인해 타락이 가속화되지 않았다 한들, 녀석은 흑마법사였어. 어차피 죽였어야 했다.
‘미래에 운명이란 없어.’
-이런 녀석도 구원할 수 있다는 거냐? 그건 자비나 연민이 아니라 위선이야.
‘위선은 언제나 위악보다 낫다. 페이자쉬.’
피로하다. 황무지에서 여기까지 이어진 전력 질주, 그리고 곧장 시작된 격렬한 전투로 페르난데스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설령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무한하지 않다. 사흘 밤을 지새워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다만 초월적일 뿐. 소모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페르난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쉴 시간 따윈 없었다. 평생에 거쳐 안주하며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것 하나만큼은 변치 않으리라. 페르난데스는 잠시 목을 틀어 몸을 풀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형제.”
파스칼이 계단참 위에서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디모니카의 감각을 속인 것이 아니다. 다만 마력이 흩어짐과 동시에 급격히 몰려온 피로로 그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파스칼의 상태 또한 위중해 보였다. 핏물이 갈빗대 사이에서 울컥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우선 파스칼에게 다가가 상처를 둘러보았다. 위중하지만, 치유가 불가능하지 않다. 주위 신관이나 의사에게 간다면 아직…….
“자네 정체가 뭔가.”
파스칼은 상처를 살피는 페르난데스를 붙잡았다. 피가 역류해 눈동자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잠시 쿨럭이고는, 페르난데스를 우묵하게 바라보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날 치료한다면 난 반드시 자네의 흑마법 사용 정황을 교회에 고발할 걸세. 이건 대의와 교회의 의사를 떠나서, 나의 의무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날 치료하겠다는 건가?”
페르난데스는 손을 멈추고 잠시 파스칼을 바라보았다. 치료해야 하나.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교회에 고발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를 적으로 돌리고 대천사들을 구원하는 것이 가능한가. 교회는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인가.
아니, 아니다. 교회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이단심문청은 타락한 이단심문관들에게도 다른 이단과 같은 혐의를 묻는다. 그들은 사정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결과를. 다만 그자가 ‘이단’인지만을 확인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흑마법 사용은 이단의 가장 명백한 증거였다. 검은 헤일로가 불타는 것을 본다면. 설령 베오른이라 하더라도 그를 비호할 수 없을 것이다.
“형제의 의도는 순수한가.”
“……예?”
그러니 이건, 일반적이고 완고한 이단심문관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었다.
“형제는 대황야의 악마를 처단했고, 지금은 제국의 타락을 막는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일세. 난 형제가 이단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여겼거늘, 사태의 진상을 파악해 보니 이용당한 것은 나였더군. 형제. 흑마법을 사용해 악마를 사냥하는 것을 보았네. 더 큰 악을 처단하기 위해 악업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모든 이단심문관들은 그에 대해 고민하곤 하지…… 쿨럭!”
파스칼은 핏물을 토해냈다. 살점이 섞인, 끔찍한 부상의 흔적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악을 정화하기 위해 악업을 행할 수 있는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해 악인을 처단한다면 그건 올바른 일이 될 것인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집행되는 희생은, 희생이라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악마 숭배자들이 벌이는 ‘제물’과 동일한 악업이 아닌가.
이단심문관들은 결코 그런 고민을 타인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안고 가야 할 업이었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생각했다.
악을 처단하기 위한 선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악마의 수법을 사용하는 성자도 용인할 수 있는가.
지엄한 만신전의 법률에 의한다면 그건 명백한 배교 행위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파스칼은. 핏물을 훔치며 바닥에 허물어져 앉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이 박힌 열쇠검 로사리오를 건넸다. 페르난데스는 핏물 젖은 로사리오를 건네받았다.
“더 큰 선을 이룩하기 위해서 때론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면. 그 더러워진 손으로 쌓아 올린 세상이 만신전의 보우 아래에 안온할 수만 있다면……. 주여, 기꺼이 그리하리다. 형제여, ‘너는 안온함을 바라지 말라.’”
“‘네가 아니오, 다만 나의 양들이로다.’”
“‘너는 주의 양을 지키는 목양견이오, 이리의 앞에 나서는 목자가 되리니. 우리는 화평이 아니오, 다만 칼을 들고 왔노라.’ 형제여, 날 죽이고 내 시체를 불태우게.”
“파스칼 형제.”
“내가 살아나면 이 일은 반드시 교회에 보고될 걸세. 그 이후를 감당할 수 있겠나?”
“형제…….”
“그러니 날 죽이게. 나는 나의 의무를 방기할 수 없네. 의무 속에서 잠들 수 있도록, 형제의 손으로 끝내게. 그리고 언젠가 갈림길에서. 타락과 배교의 갈림길에서 내 핏물을 잊지 말게나.”
그 말을 끝으로, 파스칼은 목을 내렸다. 단번에 베어 넘기라는 듯이. 페르난데스는 칼을 들어 올렸다. 내려치기 직전.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천국에도 형제의 자리가 있기를.”
“가로되, 나의 삶은 밝은 세상의 반석 되리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콰직!
칼이 허공을 그었다. 곧게 그어진 대검의 타격은 살점의 무게에 반동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래서, 페르난데스가 느낀 반동은, 아주 작은. 실낱같은 생명의 무게뿐이었다.
-페르난데스.
‘잠시, 조용히.’
페르난데스는 싸늘하게 경고하고, 죽은 파스칼의 몸에 기름을 부었다. 곧 불이 타올랐다. 시체는 전투 중에 손상된 것처럼 꾸며질 것이다. 흔적을 말소하는 것은 흑마법사의 특기 중 하나였고, 페르난데스는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작업을 마무리한 이후 그는 아주 잠깐 발을 헛짚고는, 곧 자세를 다잡고 묵묵히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