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24화 (225/388)

224. 전후처리 (1)

르네 필리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여걸이라 하더라도 열일곱 어린 나이에 겪기엔 과도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궁중마법사가 갑자기 얼굴이 바뀌더니, 자신을 감금했다. 마법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가더니 자신의 오랜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까 고민할 때쯤,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는 이내 장내가 조용해졌다. 안타엔…… 아마 안타엔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로 위장한 암살자나…… 황제가 보낸 첩자였겠지.

왜 ‘나’일까.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하는 것은 침착하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르네는 그보다 더 현명했다. 납치한 대상이 왜 ‘나’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명백했다.

공작 영애를 납치해 감금하고, 공왕의 거처를 점거했다. 일반적인 상황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무력으로 점거한다고 공왕의 직책과 작위가 인계되는 것이었다면 군사력이 강한 가신들이 이미 시도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므로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뒤를 봐줄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선제후를 상대로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상대가 선제후보다 강한 인물이란 뜻이다.

이 넓은 대륙에, 이 거대한 문명 사회에,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신의 아래에서 단 하나뿐이다.

“황제……!!”

르네는 영리한 인물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가설과 수많은 결론이 빗발쳤다. 황제가 선제후를 조종해 항구적인 권력을 원하고 있다.

대규모 언데드 사태, 이단 고발, 그녀의 납치와 감금…….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들통난다 하더라도 해결할 자신이.

그것이 그녀를 절망에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야심만만한 그녀로서는, 인근 변경 귀족들의 권력과 선제후 간의 정치 알력쯤은 시간만 충분하다면 능히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 그것도 치밀하게 준비한. 공개적으로 이 일이 거론되더라도 해결할 자신이 있는. 그런 존재가 자신의, 리뷔에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감금한 이유. 그건 그녀에게 아직 쓸모가 있기 때문이리라. 선제후 공작의 유일한 후계자. 그리고 여인. 정치적인 관점에서 대단히 강력한 카드다.

그녀는 순식간에 자신의 미래를 그렸다. 아마도 아버지는 암살당하시겠지. 이미 당하셨거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머리는 더없이 냉철하게 사고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아마도. 황제가 점지한 짝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괴뢰 정부의 완성이다. 영원히 황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세습 황제 시대를 열 선제후로. 아니,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선제후가 아니다. 황제와 봉신뿐이다.

얼마나 많은 선제후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까. 제국 선제후들 모두가 리뷔에처럼 몰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리뷔에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했다. 선제후들의 가문은 황가에 밀리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에, 그녀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날 죽이고, 내 시체를 불태우게.’

‘파스칼 형제.’

형제? 파스칼? 이단 고발로 조사를 나온 이단심문관이다. 이단심문관은 저들끼리 형제를 운운한다지. 참 끈끈한 기관이지만…… 형제……? 이단심문관이 누군가 한 사람 더 있다!

안타엔. 아니, 그로 위장한 첩자는 죽었는가? 그 또한 대단한 수준의 마법사였다. 이단심문관‘들’이 그를 처단했나?

그런데, 대화가 이상했다.

‘천국에도 형제의 자리가 있기를.’

‘가로되, 나의 삶은 밝은 세상의 반석 되리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콰직.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들렸다. 마치 칼로 사람의 척추를 으스러트리는 듯한. 처절하고 끔찍한 소리다. 이단심문관이, 이단심문관을 죽였다. 그리고 그녀가 감금된 곳을 향해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언제나 미지는 공포를 낳는다. 그녀는 다가오는, 이단심문관을 살해한 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살인멸구인가? 저 흉수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건가?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문에는 강력한 주문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곧.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문틈에 대검이 틀어박혔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새하얀 칼날이 문을 넘어서 삐죽 솟아올랐다.

다시금 콰직, 콰직. 무기질적으로. 장작을 패는 나무꾼 같은 손짓으로. 콰직.

-쾅!

문이 반쯤 부서지자, 문 밖의 사내가 거칠게 잔해물을 발로 차 무너트렸다.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르네는 떨리는 입가를 간신히 쓸어 만지며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데인의 알베르트.”

“몸은 괜찮소?”

“다행히. 걱정 고마워요. 날 죽이러 왔나요?”

“뭐……?”

“황제의 첩자를 베고, 이단심문관을 도살했군요. 이제 목격자를 죽이러 온 건가요. 배교자 이단심문관?”

그녀의 말에 사내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그의 핏물 젖은 소매를 바라보았다. 곧 그는 칼을 납도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르네 필리파는 영리했고, 오만했다. 그녀는 결코, 가장 두려운 순간에도 공포를 내비치지 않을 것이었다. 표정 연기는 궁중의 기본 소양이고,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궁중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저 처절한, 슬픔 가득한, 음울한 푸른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날 구하기 위해 왔군요.”

“그렇소.”

“알베르트는, 그래요. 이단심문관들의 작전명이구요.”

“맞소.”

그녀는 사내의 몸을 살폈다. 반쯤 삭아 사라진 옷, 격전의 흉터와 말라붙은 핏물. 창백해진 얼굴과 살짝 떨리는 다리. 드러난 옷 아래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과 수많은 흉터들.

거친, 흉터 덮인 손. 떨리고 있는.

“고생 많았어요.”

그 한마디,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단순히 자신을 구한 것에 대한 치사가 아니라. 그녀는 진심으로 그의 삶을 치하하고 싶었다. 아직 이자의 정체를 모르고, 이 사내의 사상도 알 수 없었지만. 진심을 다해서.

고생했다고.

“잠깐, 앉을까요.”

르네는 자신의 옆을 탁탁 두드렸다. 그녀는 궁중의 별채, 그녀의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최고급 품질의 침상은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정도로 커다랬다.

페르난데스는 머뭇거리더니, 다가와 앉았다. 르네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외간 사내가 이 침상에 몸을 들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렇소?”

“네, 당연하죠. 제 몸은 놀이 삼아 망칠 정도로 가치가 없지 않답니다. 그런 규중 처녀의 침상에 이렇게 거침없는 걸 보니, 익숙하신가 봐요?”

“그렇게 보이오?”

“으흐흐, 예. 정말로요. 아주 난봉꾼처럼 보이네요.”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르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베개 아래에 손을 넣더니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보통 침상에 그런 물건을 두고 주무시오?”

“공녀의 기본 소양이지요!”

르네는 침상 위에 앉은 페르난데스를 두고, 벌떡 일어섰다. 페르난데스 또한 그녀를 따라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괜찮아요. 그 마법사는 죽었나요?”

“그렇소.”

“그럼 이제부터 내 몸은 내가 지킬게요. 덤으로 그쪽 몸도. 그러니까, 뭐. 잠깐 쉬어요! 가끔은 그래도 괜찮아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물어보겠는가. 르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소드벨트를 풀고 대검에 기대어 편히 앉았다.

“쉴 때도 칼을 끌어안고 있나요?”

“보통은 아니오.”

“그럼 왜 지금은……?”

“그쪽이 보통이 아니거든.”

“……지금 농담한 거예요?”

“그렇소.”

“누가 농담을 그렇게 하나요?”

“이단심문관이.”

“재수 없어.”

르네는 웃으며 말했다. 페르난데스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무너진 문, 허물어진 외벽 너머로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서히 날이 밝아 왔다.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예요. 리뷔에 공작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의 적자이며, 이 영지의 정당한 후계자이고, 제국 황제 선출권을 지닌 고귀한 선제후의 유일한 딸이죠. 당신은?”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데인 왕국의 변방, 세르너드 남작령의 장자이며 베이타서스 교회의 대주교이고, 2급 이단심문관이며, 렐리기오사 디모니카요.”

“이제 서로를 알았으니, 우린 친구가 맞지요?”

“그렇소.”

“고생 많았어요. 세르너드 남작.”

“그대도, 고난이 심했소. 카르벨리에 영애.”

“할 말이 많지만. 그래, 지금은 쉬어요. 궁금한 건 더 좋은 날에 좋은 자리에서 해결하기로 하죠.”

그 말을 끝으로, 르네는 새벽녘 첫 햇살을 받아 밝게 웃었다.

* * *

가끔은 쉬어도 괜찮아요. 어쩌면 그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페르난데스는 침상이 편안하다고 느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나는?

평생을 안주하며 산 적 없……. 페르난데스는 잠시, 아주 잠깐 졸았다. 피로했다. 디모니카는 사흘을 밤새워 싸울 수 있다지만, 잠들지 않는다고 피로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디모니카들은 대단히 규칙적인 삶을 산다. 정시에 잠에 들고, 칼같이 일어난다. 규칙적인 삶이 근육을 키운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지만, 또한, 굳이 피로함을 감수할 이유가 없는 탓이기도 하다.

먹지 않아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 허기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잠들지 않아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이 수면욕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부족한 건 다만, 자격일 뿐이다. 후회뿐인 삶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짧은 순간마저 허용할 자격이.

그러니, 어쩌면 저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제국의 정치, 황제의 음모, 뒤바뀌는 정세, 죽은…… 형제. 페르난데스는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르네는 잠에 든, 젊은 이단심문관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 남자의 정체, 지금 리뷔에의 상황, 무너진 공작의 궁전. 그런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순수하게.

영원할 것 같은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다. 어제와 같은 봄날의 아침. 저 멀리, 외성 너머로 병력이 회군하는 것이 보였다. 가장 선두에 공작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말 위에 당당히 올라타서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50년 전쟁 시절 그때의 정력 넘치는 사내가 된 것처럼 우렁차게.

수많은 난관이 남았고, 어쩌면 리뷔에의 미래가 밝지 않을 수도 있다. 황제가 선제후들을 노리고 야욕을 드러낸 이상 고난은 확정된, 담담한 사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날의 승전을 축하하도록 하자. 탐욕스런 변경 귀족과 법복 귀족들을 몰아내고, 미력하지만 하나 된 공작령을 축하하자. 시작은 누구든 초라한 법이니.

“고마워요.”

르네는 잠든 이단심문관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 사내는 자신뿐만 아니라 공작령 전체를 구원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사내에, 귀족에, 뛰어난 기사라면 뭐. 공작 영애와 격이 영 맞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지 않은가.

사제는 혼인을 못 하던가? 베이타서스 교회는 사제의 혼사에 큰 문제를 삼지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이단심문관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저 나이에 주교급 인사이니 권력 또한 충분했다. 그녀는 샤일드의 신자였지만 만신전은 뭐, 다 한통속 아닌가.

데릴사위로 들여서 공작위를 이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세르너드 남작 부인보다는 카르벨리에 여공작이 낫지 않은가. 이 사내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것 같았다.

아버지가 알면 노발대발하시겠지만. 대족장과 친구라고 하기도 했으니……. 어쩌겠는가. 수인 호족의 군사 지원이 없다면 어차피 리뷔에는 황제에게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니. 원하든 아니든 한 배를 탄 셈이다.

‘음. 근데 대족장이 이 사내를 애첩이라 하지 않았나……?’

그건 또 새롭게 고민해 볼 문제다. 카르벨리에는 픽 웃었다. 황무지에 천막 치고 사는 여자보단 그래도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더 매력 있지 않겠는가. 사내들은 다 똑같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르네 필리파는 조용히 아버지를 기다렸다. 숨소리도 내지 않도록, 잠든 저 청년이 깨어나지 않도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