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전후처리 (2)
에르브 공작은 희미하게 바랜 미소를 지으며 가신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종류의 미소였다. 가신들은 벌써 한 시간째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소리요!”
“사절의 목을 쳐야 한다니까!”
“명분 없이 황실에 칼을 겨누겠다? 잘도 생각하셨소. 대단하시오! 다 같이 칼을 물고 고꾸라져 보자는 제안도 마저 해보지 그러시오!”
“감히!”
이런 식이었다. 정황상 황실이 벌인 것이 명백한 사교도의 준동과 암살 위협을 간신히 이기어 내고, 하나 된 리뷔에를 다스려 보자는 웅대한 포부는 가신들의 논쟁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가슴이 아프군.”
공작의 옆에서 나른하게 앉아 있던 키르하스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공작이 술을 입에 머금으며 고개를 돌리자, 키르하스는 공작의 잔에 자신의 잔을 툭, 쳤다.
“뭐, 어린애들도 아니고 같이 싸운다고 정이 들면 그게 더 유치한 일이지.”
“저들은 이미 정이 들 만큼 들어서 저러는 걸세.”
“두 번 정이 들면 전쟁이 일어나겠는걸.”
“날 걱정해서 저러는 걸세, 대족장. 그대가 막은 그 암살 시도 말일세. 그 이후부터는 쭉 저런 상태였다네.”
전투는 한순간에, 동녘이 터오는 그 순간에 마무리되었다. 해골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저 스스로 허물어지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공작의 바로 곁까지 달려왔던 흡혈귀는, 키르하스의 장검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다. 그 이후부터 귀환까지. 무너진 궁성을 보고, 딸의 안위를 살핀 이후부터 지금까지.
공작의 가신들은 앞으로 리뷔에는 어떻게 이 난국을 견뎌야 할지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토론이 그렇듯, 탁상 위에선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공작?”
“싸워야지.”
공작은 담담히 말하며 가신들을 내려 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분쟁을 멈추고,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 혼자면 모르되, 황제는 내 가신들, 가솔들, 그리고 나의 가족을 건드렸다네. 앞으로 황제가 다시 그러지 않을 것 같나? 당연히 맞서 싸워야지.”
“하오나, 전하!!”
기사 하나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영지의 병력은 결코 중앙의 군단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내전이 발발한다면, 우선 선제후들을 포섭해 대항하는 것이 옳다 여기니, 이를 재고해 주십시오!”
“증거가 있나! 황제가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다른 제후들을 설득이라도 할 것 아닌가! 전하! 제국의 사절을 참하고 교회에 이 일에 대해 고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대는 교회가 우리의 고발을 진지하게 검토하리라 생각하는가? 소국의 귀족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야. 제국의 황제를 심문해야 하는 일이다! 어떤 교회의 어떤 교황이 섣불리 나서겠나!”
그래, 그게 문제지. 에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황상 이 모든 계략은 황제가 꾸민 일이다. 그가 아니라면 이런 규모의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할 인물이 없다. 그러나 그건 정황 증거에 불과했다.
설령 물증이 있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황제의 직인이 박힌 명령서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황실은 그것을 조작된 증거라 우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몰락의 기로에 있는 선제후의 편을 들어 제국 행정부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만신전의 모든 교회들은 속세의 정치에 대해 완전한 중립을 선언했다. 에를렘의 열세 번째 공의회에서 열렸던 그 신성한 선언은 그 이래 4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어겨진 적이 없었다.
교회로서도, 귀족들로서도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교회는 그로써 자신의 권위를 드높였고 권력자들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교회가 권력자들을 심판하거나 파문하는 행동들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로 여겨졌다.
그리고 권력자들 또한. 각 국가와 왕실의 귀족들 또한 이 결정을 반겼다. 그 전까지 세속 사회는 종교를 등에 업은 혼란기가 이어지고 있었던 탓이다. 종교와 교리라는 명분으로 벌여지는 수많은 영지 전쟁과 내전을 다시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 400년. 종교는 세속과 선을 그었다. 그리고 세속의 군주들이 종교에 기댈 때, 교회는 놀랍도록 냉정한 잣대로 정치권의 균형을 가늠했다.
그런 와중이니, 교회가 리뷔에의 손을 들어 황제를 벌하리란 것은 그저 막연한 희망에 불과했다. 군주는 희망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에르브는 술잔을 들고 말했다.
“경들의 말이 모두 옳다. 그러나 섣불리 사절을 해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 사절이 온다면, 우리는 사절을 예로써 대하리라.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진의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향후의 거취는 그 이후에 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일단 참아 보자. 키르하스는 공작의 말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정치가가 싫었다. 명분을 찾기 전까진 움직일 줄도 모르는 굼벵이들…….
‘빨리 돌아가서 칭찬받아야 되는데.’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암살 위협을 막아 내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페르난데스의 명령대로! 그러나 그녀가 복귀했을 때, 공작 영애는 뜬금없이 그녀의 입궐을 반대했다.
‘은고……. 내 애첩이 편찮으…… 아프다면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대족장께서는 의술에 능하신지요?’
‘……아니?’
‘리뷔에엔 뛰어난 의사와 약제사들이 많습니다. 대족장께선 심려치 마시고 아버지와 함께 회의에 드시지요.’
‘어…….’
‘아니면, 리뷔에의 의사보다 뛰어난 의술사가 대족장의 가솔 중에 있으신지요?’
대황야의 부족들은 의술을 주술과 거의 동일시하는 편이었다. 이단심문청에서 수학하면서, 그녀는 현대 의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배웠다. 수인들의 의술은 사실 민간 신앙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래와 동물 뼛가루를 빻아서 물에 개어내며 짐승의 담즙을 섞던 부족 주술사를 잠시 떠올린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과가 확실한 저희 의사들에게 맡기시고, 대족장께선 군사 회의에 참여해 주십시오. 그것이 리뷔에와 호족 연합을 위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키르하스는 풀이 죽어 돌아왔다. 디모니카가 아플 수가 있나? 은공은 막 부활하지 않나? 아니, 은공이 아픈 게 가능하기나 하나?
그런데, 이 와중에도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은…… 은공께 다른 계획이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종류의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헝클였다. 페르난데스가 정말 필요했다면, 병상이 아니라 전선에 나섰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그건 분명 다른 계획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그 계획에 그녀가 필요하다면 그는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은공이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은, 그녀가 회의에 참석하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으아아…… 은공. 전 이런 자리가 싫어요.’
키르하스는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는 술잔을 들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최대한 나른하게. 회담장의 수인 전사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언제나처럼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대족장이야, 이 혼란 속에서도 굳건한 모습을 보게!
하하, 저게 강자의 품격이란 것 아니겠나? 무릇 황야의 대족장이라면 저런 풍모가 있어야지!
술잔과 함께,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수인들의 전통대로 회의는 연회와 다를 바 없는 공간이었고. 적어도 이 자리에서 연회를 오롯이 즐기는 이들은 저들뿐이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페르난데스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만 하루간 거의 강제로 구금된 병상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난 이제 멀쩡하오만.”
“당신이 각혈하는 것을 보았는데,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나요? 걱정 마세요. 영지의 약제사들은 아주, 아주 유능합니다. 자, 이걸 쭉 들이켜시고…….”
“서리초와 하담풀, 그리고 파스라스를 섞은 용액이군. 이건 해열과 이완제요. 영애, 굳이 따지자면 내상을 치료하는 약을, 개중에선 항염제를 투약하는 것이 옳은 처방 같소만.”
“어…… 저희 약제사와 친하셨나요……?”
“냄새로 알았소.”
“냄새로 제약 성분을 분석하셨다고요?”
그건 개도 못 할 것 같은데……. 르네는 다소 당황하며 그렇게 속삭였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슬쩍 몸을 일으켰다. 디모니카의 후각이 개의 후각보다 뛰어난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하지만 특정 자취를 감지하는 것에선 못하다 볼 수 없었다.
흑마법사의 기본 소양 중 하나가 연금술과 제약 기술이다. 대부분의 시약을 필드에서 혼자 만들어야 하는 작업 환경 탓에, 흑마법사는 어지간한 약제사에 못지않은 약학 지식을 필요로 한다.
페르난데스는 반평생을 와일드캐스트로 지내온 인물이다. 그는 주로 마을에 숨어들 때에 약제사로 위장하곤 했다. 아리아를 처음 만날 때처럼.
“정말 못 하는 게 없네요.”
“많소만.”
“궁금한데요? 세르너드 경. 가장 자신 없는 것이 무엇인가요?”
르네는 후후 웃으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페르난데스는 르네의 손에 들린 과일 접시를 받으며 한 조각 집어 올렸다.
“지금처럼 쉬고 있는 것.”
“침착하지 못한 모양이에요.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군요?”
“그런 말에 대답하는 것.”
“과묵한 건 아주 매력적인 요소죠. 마음에 들어요.”
“주제와 벗어난 대화를 하는 것.”
“항상 핵심을 파고드는 자세. 진취적이죠. 좋네요.”
“…….”
“아하하.”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과일을 들어 우물거렸다. 늦봄 딸기가 아주 달았다. 르네는 머리칼을 쓸어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거 제가 직접 씻어 온 거예요.”
“공작 영애께서 할 일은 아닌 것 같소만.”
“시종들은 지금 궁중 정리에 분주하니까요. 이게 귀족의 의무(Noblesse oblige) 아니겠어요?”
“좋은 자세지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군.”
“저도 궁금한 게 참 많은데, 하나씩 번갈아 해 볼까요?”
“나부터 하겠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페르난데스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르네는 다소 뜨끔한 표정을 짓다가 짓궂게 웃었다.
“규중 처녀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서운하군요?”
“우린 한 배를 타고 있소.”
“듣기 좋은 말이에요. 그래서요?”
“그러니, 내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들이는 시간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소. 이미 포섭된 인물이니까.”
“……그건 좀 냉정하네요. 그래요. 그렇다고 하면, 그래서요?”
“그러니. 내게 보이는 영애의 자세는 바르지 않소. 단순한 호감, 아니면 교회의 권위. 둘 중 어떤 것이든. 둘 다 좋은 결과가 나오긴 어렵소.”
페르난데스의 완곡한 거절에 르네의 인상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곧 헛기침을 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회의 권위를 얻기 어렵다는 뜻부터 들어볼까요?”
“교회는 이 일에 직접 개입할 수 없소. 특히 베이타서스 교회의 경우, 지금 동부 왕국의 정세를 신경 쓰기도 지난하기 때문이지. 교회의 지원을 바란다면 그 생각은 접는 것이 맞소. 황실의 이단 조사를 진지하게 시행하기 위해선, 그 리스크를 감당할 기반이 잡혀야 할 것이오.”
“교회의 지원 없이 황실에 적대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시간을 버시오.”
“시간…… 말이지요?”
페르난데스는 미간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르네는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족장의 군단을 이용해 리뷔에를 거점 도시로 삼는다면 적어도 세 명의 선제후가 동시에 압박하더라도 승산이 있소.”
“대족장의 군단은 지금 반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 않았나요? 후방 지원을 받기 위해 우리 영지를 찾았다고 했을 텐데요.”
“황야의 내전과 반군은 시간만 충분하다면 정리할 수 있소. 지원은 다른 곳에서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시간과, 각오가 필요하오. 에르브 공작이라면 결코 달갑지 않을 제안이 남았소.”
“그게 뭔가요?”
“술탄의 지원.”
페르난데스는 미간에서 손을 떼며 르네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르네는 돌처럼 굳었다. 술탄과의 지난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있어서 에르브 공작은 총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술탄의 입장에선 찢어 죽이고 싶은 적국 수괴라는 뜻과 동일하다. 그런 와중에, 술탄의 지원이라고?
“라비라타는 대외 세력에 적대적이고, 술탄은 새로운 무역로 개선을 원하오. 이미 황무지 너머 대륙 서부는 그 전역이 술탄의 권위 아래에 있소. 그가 뻗어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면은, 대황야와 그 너머뿐이지.”
“술탄이 리뷔에를 도울 것이라 생각하나요?”
대외적으로 지금의 술탄, 알’하쉬르는 전쟁광이었다. 선대 술탄으로부터 이어진 서부 통일 전쟁은 그의 대에서 마무리되었으며, 알’하쉬르는 더 넓은 영토를 원했다.
그의 확장 전쟁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제국뿐이다. 제국은 술탄의 정복욕에 맞서 지난 50년간 황무지에서 격돌했었다.
지금 와서, 50년 전쟁의 총사령관에게 술탄의 지원을 받으라 말하는 것은. 최대한의 모욕이 될 것이다. 그의 지난 삶 전체를 배신하라는 뜻이었고, 제국 여론은 그를 반역자 이상으로 취급할 테니까.
“외세의 힘을 받아 황실을 공격한다면, 성공한다 하더라도 미래가 없어요. 그걸 모를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교회가 황실과 공작의 대립에서 공작의 손을 들어 주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소.”
“술탄이…… 교회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뜻인가요?”
“술탄의 불사대대, 대황야의 호족 군벌들. 그들이 가세한다면 능히 제국 전역과도 싸워볼 만하지. 무력은 충족되었고, 남은 것은 명분인데…….”
페르난데스는 음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명분 싸움과 여론전은 본디 교회의 장기가 아니겠소.”
섬짓한 바람이 불었다. 르네는 소름이 오스스 돋는 느낌을 받으며 눈앞의 청년을 응시했다. 젊고 귀족적인 외모,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흉터 가득한 단단한 몸. 누가 보아도 유능한 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저 눈. 첫 만남부터 시선을 끌었던 저 푸른 눈이……. 르네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두 가지 이유를 들었지요. 하나는 대답을 들었군요.”
“두 가지?”
“공작 영애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말이에요. 첫 번째 이유는 뭔가요? 단순한 호의여서는 안 될 이유요. 제가 매력이 부족한가요?”
“나는 아들이 있소.”
그 말에, 르네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