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26화 (227/388)

226. 제국의 사절 (1)

“아들이…… 있다고요?”

“그렇소.”

“대족장과의……?”

“아니오.”

“그럼, 아내분은 세르너드 남작령에 있나요? 데인 왕국?”

“아니오.”

“수수께끼는 싫어하지 않지만, 조금 답답하네요. 아내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죠?”

“이제 없소.”

페르난데스의 말에 르네는 흠칫 놀랐다. 끈적하고 우울한 공기가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르네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별……하셨군요?”

“…….”

일종의 사별이지. 그녀의 죽음은 비바람이 불던 그 날 직접 보았으니. 문드러진 감정도, 들끓던 슬픔도 이젠 남아 있지 않지만. 그저 가루가 되어, 영혼이 갈리며, 그날의 기억은 추억보단 환영에 가까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베이타서스는 전생의 감정과 그 자신을 유리시켰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건 후회 이상의 비탄을 곱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군요…… 유감이에요. 진심으로.”

“영애가 그럴 필요는 없소.”

“아들분은 지금 어디에…….”

“먼 곳에.”

아주 먼 곳에. 페르난데스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르네의 눈에 차츰 활기가 돌았다. 그녀는 저 혼자 흠, 하고 고민에 빠지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귀족 간에 이 정도 흠결은 하자로 치지도 않지요. 저는 좋아요.”

“뭐가 말이오……?”

“결혼하죠. 우리.”

“싫소.”

즉답이다. 르네는 멍한 얼굴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의 눈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득……이 많으실 텐데?”

“손실도 많을 예정이라.”

“배상해 드릴게요……?”

“거부 조항은 어디에 서명하면 되겠소?”

“완고하시네요.”

“…….”

“딸기 내놔요.”

* * *

공작의 서신에 대한 답변이 도착했다. 거대한 행렬과 시끄러운 악단을 동원한 채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리뷔에의 외성 입구로 진입하는 것을 보며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기수(旗手)는 화려한 갑주를 차려 입고서, 으스대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럴 만했다. 저 갑주의 양식은 황실 기사단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광명성창회 기사단의 것이었다.

광명성창회가 고작 일개 사절의 호위로 나섰을 리가 없다. 기수가 든 깃발은 두 종류의 것이었다. 하나는 기사단의 인장이 화려하게 박혀 있는 작은 깃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황실에서 직접 나섰다고……?”

자줏빛 천에 금실로 튤립과 왕관, 그리고 태양과 눈, 사슴이 그려진 문양. 튤립은 제국을, 왕관은 작위를, 태양과 눈은 각각 샤일드와 만신전을. 마지막으로 사슴은, 지금의 황가. 선제후 트레뮐레 궁중백 가문의 인장이다.

왕관의 금실에 은색 자수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2황자로군. 에르브 공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사절단을 맞을 준비를 했다.

상대가 황자라 하더라도 제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따라서 황자는 명목상의 존중을 위한 직함일 뿐, 실질적인 계급은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다. 트레뮐레 가문이 장자 계승 원칙을 준수한다면 심지어 저 젊은 청년은 백작 위는커녕 평범한 법복 귀족에 불과한 채로 삶을 마무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제후이자 공작이며, 제국의 원정 군단 총사령관인 에르브가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다. 가신들 또한 그러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스스럼없이 말에서 내려 몸소 앞서 나갔다.

“위대한 레바인테르에 영광 있으라! 제국의 적법한 황실의 차남이며 고귀한 트레뮐레 궁중백가의 원수부장이자, 제국 재무서경이신 로베르 베니티에 드 라 트레뮐레 경이 입궐합니다!”

기수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던 종자가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우스꽝스러운 사절 행렬이었다. 에르브는 실소를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명목상의 직책이라 하더라도 황자는 황자다. 정치인들의 권력은 명목과 명분에서 나오는 법.

그리고 트레뮐레 가문은 리뷔에와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강대한 군권과 상권을 손에 움켜쥔 대귀족이다.

“반갑소, 로베르 경. 지난 축하연을 마지막으로 참 오랜 시간이 흘렀구려.”

“그렇소, 카르벨리에 공작! 그간 무탈하시었소? 내 더 자주 찾아뵈어 제국 총사령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었어야 했는데, 불찰이외다!”

“걱정해 주어 고맙소. 하하, 어서 들어오시오. 연회가 준비되어 있소!”

“환대에 감사하오.”

로베르는 화려한 코트가 잘 어울리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트레뮐레 혈통 특유의 찬란한 금발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금실 자수가 화려하게 들어간 아이보리색 드레스 수트가 그의 군살 없는 몸을 빈틈없이 조이고 있었다. 로베르 황자는 공작의 옆에 서서 예의를 갖추고 인사하는 르네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시 만나 반갑소, 카르벨리에 영애.”

“예에…… 로베르 경. 지난 사교회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서부 승전 축하연이 마지막이었지.”

서부 원정은 황실 공인으로 ‘승리한 전쟁’에 속했다. 술탄의 공세를 막아내고 제국의 영토를 안전하게 지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리뷔에가 아직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 이곳에서 열렸던 화려한 연회장을 기억하고 있다.

화려한 장례식이라 보아도 좋았다. 리뷔에의 정치적, 경제적 생명이 끊어지는 날이었으니까. 그날의 연회에서 귀족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리뷔에의 자금줄들이 하나씩, 하나씩 끊어졌다. 더 이상 어떤 물류도 리뷔에를 거쳐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흐름 위에 황실의 재상부가 관여했음은 명백했다.

제국 황실의 고위 관직은 전통적으로 선제후에게 돌아갔다. 에르브 공작이 황실 원수부의 군단 총사령관 직위를 맡고 있는 것처럼, 각급 부처의 장관급 인사는 선제후에게 인계된다.

그러나 그런 명목상의 권한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부서를 운영하는 이들은 달리 있다. 재무부의 재무서경, 궁내부의 궁중원장, 원수부의 레반스 기사대장…….

제국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권력은 제위와 함께 황제가 임명한 그의 수족들에게 돌아간다. 선제후들은 명목상의 관직 외에도, 자신의 영지를 보살피는 것만으로 충분히 분주한 탓이다.

그러므로 이곳 리뷔에에 일어난 정치 공작은 반드시 그 인물 중 하나가 저지른 짓이다. 상권을 무너트렸다는 점에 있어서, 그건 눈앞의 이 젊은 재무서경이 벌인 공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그러나 귀족은 표정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

“참으로 헌양해지셨습니다.”

“하하! 영애께서도 여전히 아름다우시오!”

그 말과 함께 기병과 악단이 성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르브가 슬쩍 눈짓하자 르네는 고개를 숙인 후에 물러섰다.

“수도에서 이곳 리뷔에까지 오시느라 여독이 다대하실 터, 연회실에서 몸을 녹이고 편히 쉬시게나. 로베르 경, 부디 경의 성처럼 여겨 주길 바라네.”

에르브의 말에 로베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 * *

그리고 너무나 화려한 입장인 탓에 그 광경은 리뷔에 내성, 수리가 한창인 첨탑 위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애당초 이 정도 거리는 페르난데스에겐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황자가 직접 내방했다라…….

‘대담하군.’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트레뮐레 가문기를 바라보았다. 로베르 트레뮐레. 전생에서도 이름 드높았던 귀족이다.

100년 전쟁 이후 군권과 재력을 한 손에 움켜쥔 카르벨리에 공작가는 다음 선제후 회의에서 무사히 제위를 이양받는다. 선황제의 사후, 트레뮐레 백작가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트레뮐레 궁중백가의 주도는 제국 북부의 무역항 귀르다. 제국 북해의 해상 무역로는 모두 귀르를 통과하며, 귀르는 동부 삼각무역항들과의 연계로 빠르게 재화를 축적한 거대한 도시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 ‘백금항’ 귀르. 성벽부터 부두까지 이르는 거대한 영지를 대리석으로 꾸며 아침 햇살을 받으면 백금이 빛나는 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는 곳.

그리고, 칠흑의 에리크가 전사한 격전지.

‘저놈, 이 시기에도 대단한 검사다.’

로베르 트레뮐레 궁중백은 북부인의 침공 당시 최전선에서 활약한 제국의 대영웅 중 하나였다. 북부 야만인의 급습으로 동부 왕국의 모든 항구도시가 불타오르고, 전화가 동부를 덮쳤을 때. 제국 북부항들 또한 무사할 수 없었다.

그 혼란기를 수습한 인물이 로베르였다. 개인의 무력과 전략적 안목 모두가 제국 기사도의 꽃이라 불리며, 그는 제국의 북부를 거의 완벽하게 수비해내는 것에 성공한다.

당연하게도, 로베르 또한 페이자쉬가 경계한 인류 문명 사회의 영웅들 중 하나였으며,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정보에도 빈틈이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비, 선황제 트레뮐레는 이미 페이자쉬의 전성기 이전에 죽은 인물이니 굳이 파악할 필요도 없었지만. 로베르 트레뮐레의 가족 구성, 개인 이력과 인적 사항은 페이자쉬의 정보망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차남이라.

‘그래. 장자가 따로 있지.’

교황이 건넸던 황실 고위 귀족 인명부. 트레뮐레 가문의 가계가 빠짐없이 기록된 그 보고서를 읽으며, 페르난데스는 직감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던, 전생에 없던 인물. 트레뮐레의 첫째 자식.

‘에버리즈 리스 드 라 트레뮐레.’

선제후 정도의 대귀족이 작위 승계 과정에서 장자가 돌연사하거나 독살당하는 등의 비사가 발생한다면 결코 추문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페이자쉬가 수집한 어떤 정보에도 로베르에게 손윗형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로베르의 형제가 아직 살아 있고, 추후에 죽을 예정인데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면?’

-로베르의 나이가 열여섯이야. 저놈보다 나이 많은 형제가 지금껏 살아 있다면 계승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확실하군.’

-거의.

페르난데스는 황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일이 점점 더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페이자쉬가 투덜거렸다.

-제기랄, 베이타서스. 이거 일부러 이러는 것 아니야?

‘제 딸을 사지에 처박고 구해 오라 시키는 머저리가 어딨어.’

페르난데스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에버리즈. 전생에 없던, 트레뮐레 가문의 영애. 타락한 정황이 보이는 황실의 첫째 황녀…….

‘라제리엘, 소어레델. 둘 중 하나다.’

남은 두 천사 중 한 명이다. 어쨌건 황제를 처단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궁성 안으로 들어섰다.

* * *

비록 제국의 수도, 레반스에서 벌여지는 거대한 연회나 화려한 사교 파티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리뷔에의 연회는 영지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듯 사치스러웠다.

궁궐의 보수가 끝나지 않은 시점, 연회장은 야외에 마련되어 있었다. 때마침 봄이고, 황무지가 초원으로 변한 지금의 봄은 습윤하고 따듯했다. 늦은 저녁의 사교장은 촘촘한 마력등 아래에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시종들이 연신 새로운 음료와 산해진미를 날랐다. 페르난데스는 수인 전사들 사이에 앉아서 비죽 웃었다. 공작의 사재가 실시간으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공작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키르하스가 보였다. 그녀는 이따금씩 다급한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그 모습이 썩 재밌어서, 페르난데스는 일부러 그녀와 눈을 맞추곤 했다.

‘저 지금 위험해요! 구해 주세요, 은공!’

키르하스가 열렬한 눈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술잔을 들어 그녀를 약 올렸다.

키르하스는 충격과 배신감에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봉꾼.”

“뭐라는 거요.”

“딸기 도둑.”

“배상해 드리오?”

“바람둥이.”

“그런 적 없소.”

-진심이냐?

페르난데스는 뜨악한 표정을 짓는 페이자쉬를 무시했다. 잠시 실례, 하고 르네가 수인들을 내쫓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수인들은 르네와 페르난데스를 힐끗거리더니 저들끼리 큭큭 웃으며 떠났다.

“무슨 일이 더 있소?”

“더 있지요. 무슨 일. 어쩔 생각이죠?”

“황자의 친전. 음. 뜻밖의 수이긴 했소만.”

“무슨 의미일까요.”

“이 자리에 온 것이 황자의 뜻인지, 황제의 뜻인지 두고 봐야지.”

페르난데스는 깍지를 끼며 저 멀리, 키르하스와 공작, 그리고 그들과 담소를 나누는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귀족적인 손놀림으로 고기를 작게 썰고 있었다.

“황제의 뜻이라면요?”

“리뷔에의 상황을 염탐하고, 자신들의 착수가 실패한 것을 덮으려 하겠지.”

“황자의 뜻이라면?”

“세습 제위를 노리는 황제, 무능하지 않은 장녀. 그리고 계승 서열이 밀리는 차남. 제국은 귀족법상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오. 차남이 황실 밖으로 나와서 황실에 적대할 것이 뻔히 보이는 지역에 왔다면…….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겠소?”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황자를 죽이거나 유폐할 수는 없다. 저자는 문명 사회의 빛나는 영웅 중 하나다. 그러니…….

‘이용해야지.’

르네는 감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아한 손짓으로 샴페인을 들었다.

“우리 결혼할까요?”

“싫소.”

“아,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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