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제국의 사절 (2)
“내일은 같이 순시를 돌기로 했다고?”
“전투 현장을 직접 보고 희생된 정착지 주민들의 넋을 위령하겠다나 봅니다.”
“사제도 같이 왔나?”
“샤일드의 주교가 왔습니다.”
늦은 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처소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공작과 황자의 사이에서 열심히 외웠던 대화 내용을 더듬거리며 상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 별말은 없었고?”
“함께 온 기사가 오히려 더 말이 많더군요. 황자는 대화 내내 그저…… 대부분 웃기만 했습니다.”
키르하스는 뜻 모를 의뭉스러운 미소만 짓던 황자를 떠올렸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흠잡을 데 없을 예의와 격식으로 식사를 하고,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자의 친전이요? 놀랍도록 대담하긴 하더군요. 아이언사이드가 직접 개입했던 것을 우리가 확인했고, 그 사실을 황실 또한 알고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저리도 침착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곱게 말하더라도 황자의 상황은 단두대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페르난데스가 생각하기에 황자의 방문이 의미하는 건 둘 중 하나였다. 황제가 리뷔에와의 분쟁을 원하지 않거나, 황자가 황제와 같은 배를 타고 있지 않거나.
방금의 대화로 후자의 가능성이 한결 커졌다. 실상, 황제가 리뷔에를 용인할 이유가 없다. 당장 리뷔에가 지난 며칠 간의 모략에 대해 공개적으로 황실을 적대한다면 명분은 황실에 있지 않은가.
“황자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
“자리를 마련할까요?”
“가능하면 독대로.”
“호위기사가 대단히 치밀하던데요. 황자가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도 따라갈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하.”
황자의 호위기사. 광명성창회의 기사였지. 광명성창회는 레반스 기사대장의 직속 병력이고, 레반스 기사대장은 황제의 최측근이다. 그가 황자를 ‘보호’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감시’하려는 것인가…….
-똑똑.
“누구냐?”
키르하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 거의 반나절 만에 간신히 페르난데스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카르벨리에 공작 영애입니다. 대족장.”
“공작 영애가……? 들라 하시게.”
문 밖에서 호위를 서던 수인 전사가 문을 열었다. 곧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와 타는 듯이 일렁이는 붉은 머리칼이 문간을 넘어 들어섰다. 르네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입장과 동시에 훅 풍겨 오는 달큰한 냄새를 맡았다. 귀족 영애가 사교회에서 향수를 뿌리는 것은 오히려 일반적인 일이지만…… 아까 연회장에서 맡았던 냄새와는 또 다른 냄새가 나는데……?
르네는 페르난데스를 힐끗 바라보고는 곧장 대족장에게 다가가 고개를 살풋 숙였다.
“늦은 밤에 실례했군요. 대족장.”
“그래, 무슨 일인가?”
“잠시 대족장의 가신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페르닌에게……?”
키르하스는 순간 매섭게 눈을 치켜뜨고는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또, 또, 또인가요?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또는 무슨 또야.
그 둘 사이의 기류에도 아랑곳없이 르네는 키르하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짐짓 팔짱을 끼었다. 부드러운 이브닝드레스의 실루엣이 키르하스의 성미를 긁어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하게.”
“독대를 청합니다.”
“감히 대족장의 애첩에게……. 정숙한, 공작 영애가, 심야에, 단, 둘이. 할 말이 있단 뜻인가?”
“예, ‘심야에’ ‘단둘이’.”
장난이 심하군.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르네 필리파는 열일곱 어린 나이의 귀족 영애다. 제아무리 영민하고 또 제아무리 대담하다 하더라도 저 나이 또래 특유의 장난기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웃는 소리를 듣고 키르하스가 움찔 떨었다. 그녀는 공작 영애의 어깨 너머에서 벽에 기대고 서 있는 페르난데스에게 황급히 입을 벙긋거렸다. ‘벌써 그 정도까지……?’ ‘무슨 벌써야.’
‘난 가끔 키르하스가 날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더군.’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겠지.
‘닥쳐.’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키르하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족장에게 수인 호족이 보일 법한 예절을 보이며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제가 영애를 침소에 안내하겠습니다.”
“페르닌……!”
키르하스의 눈이 불신과 배신감으로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헤레티카의 수화로 짧게 손짓했다. ‘작전.’ 키르하스는 비꼬는 투가 최대한 가득 담긴 손짓으로 대답했다. ‘아, 네. 물론 그러시겠죠.’
“어머, 고마워요. 제가 경의 단잠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저어되네요.”
“저는 잠이 적습니다. 영애.”
“세상에나. 저는 잠이 많아서 항상 아침마다 문제였거든요. 자, 그럼 잠시 걸을까요?”
르네는 키르하스를 도발하듯 한쪽 팔을 나긋하게 뻗어 페르난데스의 팔에 얹었다.
* * *
궁중 내원은 지난 파괴로 인해 그다지 경치가 좋다 할 수는 없었으나, 봄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따듯한 밤, 달빛 머금은 분수대는 아름다웠다. 페르난데스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르네와 함께 걷고 있었다.
“날이 정말 좋지 않나요?”
다소 뚱한 표정을 짓던 르네가 짐짓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분수대 앞에 멈춰 서서 르네를 내려 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에메랄드색 밝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양손을 모으고 섰다.
“용건이 뭐요.”
“……좀 무안하네요. 낭만이란 것이 없나요?”
“로망스는 책에서 즐기시오. 대족장을 도발할 정도의 일이 있으리라 믿소.”
“친구가 보고 싶어서?”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공작 영애. 친구 관계는 상호 호혜적이어야 한다고 여기지 않소?”
“쯧.”
르네는 흥이 식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곧 분수대를 바라보며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요.”
“황자와 개인적으로 접촉했소?”
“네, 그리고 황자가 지금 당신을 보고 싶어 하더군요.”
“나를?”
“네, 당신을. 서로 아는 사이였나요?”
페르난데스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르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제 신분이 신분이니 밤중에 외지의 사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는 없어요, 세르너드 경. 하지만 술탄을 끌어들인다는 계획은 보류하는 것이 좋겠더군요.”
“황자와 황제가 반목하고 있다는 뜻이오?”
“제국이 무너질 거예요.”
르네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녀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로베르 황자 전하. 그렇지 않나요?”
“낡은 건물은 증축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하는 것이 합당하지.”
-부스럭.
정원의 관목 뒤, 그 옆으로 길게 난 협로를 따라서 로베르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로베르는 가벼운 튜닉에 장검 한 자루를 비껴 차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접근을 인지하고 있던 탓에 페르난데스는 큰 감흥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전생 시절 그의 주 활동 범위는 제국 동부 방면이었고, 따라서 북부의 영웅과는 안면이 깊지 않았다. 영웅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이 다소 낯설었다.
“반갑군. 나는 로베르 트레뮐레라네.”
“데인의 알베르트입니다. 황자 전하.”
“과례는 거두시게, 알베르트 세르너드 경. 데인 왕국의 원탁 기사가 그리 저자세로 나온다면 비센테 왕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고개를 숙이던 페르난데스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곧 짧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아이언사이드는 내 정체를 알지.’
-로베르가 재무서경이라 하지 않았나? 아이언사이드와 어떻게 접촉한 거지?
‘모든 조직은 재무부의 인가를 받으니까.’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들고는 팔짱을 꼈다. 두 사내는 빠르게 서로의 몸을 훑었다. 강하다. 가까이서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과연, 북방 해상의 지배자.’
-전생 시절엔 엘프들이 쇠락했었어. 지금의 해상 전력으로 따지면 로베르는 가이메른 왕실의 적수가 될 수 없다.
‘로베르는 바다에서만 강한 것이 아니야.’
칠흑의 에리크는 해전보다 내륙에서 벌이는 전쟁에 더 능했다. 북부인들은 기본적으로 체구와 완력이 대륙인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모든 전선과 항구가 마비된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반격을 시작한 것이 눈앞의 사내였다.
하여간, 영웅이 흔한 시대다. 페르난데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런 영웅들이 모여 있는 대륙도 결국 멸망하지 않았던가.
“경의 명성은 내 익히 들었네.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당장 칼을 섞어 보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한스럽군.”
“과찬이오. 트레뮐레 경.”
트레뮐레 경. 황자의 직위는 세습되지 않으므로, 외교적인 의미에서 상대를 일개 백작령의 차남으로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로베르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경에 대한 이야기 중엔 대단히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지. 그래, 담대하다는 이야기는 있었어도 이렇게 화통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소문이 실제보다 덜했군.”
“트레뮐레 경에 대한 수많은 찬사 중엔 소탈하다는 평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인상 깊소.”
“하하, 하하하! 세르너드 경. 피차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데. 본론으로 넘어가 보는 것이 어떤가?”
로베르는 한참 웃고는 정원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길게 몸을 누이고, 당당하게 다리를 꼬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오만하게 빛났다.
“킹메이커. 경은 다음 제위에 오를 이가 누가 되리라 생각하나.”
“킹메이커?”
“실각할 것이 빤히 보이던 비센테를 왕위에 올린 사내가 아닌가. 하트테이커 대족장도 아마 자네의 작품이었겠지? 마치 거리 극단의 로망스를 보는 것 같았지. 자네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을 때 말이야. 내 수하들이 자네를 부르는 음성기호일세. ‘킹메이커’.”
“단순히 재무서경은 아니었군.”
“그래. 내 사과하지. 내가 부하 관리에 소홀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었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그 덕에 50년 전쟁이 마무리되었으니.”
“하하. 이런…….”
페르난데스는 당당하게 말하는 로베르를 바라보며 실소했다. 오판했다. 이 사내는 아이언사이드에 줄을 대고 있는, 유능한 황자가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짐승이 있었다.
‘아이언사이드의 물주가 아니라…….’
-아이언사이드 그 자체였군.
‘아주…… 유능해. 놀라워.’
대체 왜 전생에 이 사내가 제위를 노리지 못했던 것인가. 르네의 정치 공작이 그의 예상보다 더 치밀하게 펼쳐졌던 것인가?
“이제부터 나를 제국 황자, 트레뮐레 백작가의 차남, 제국의 재무서경, 귀르의 궁내대신…… 이런 잡스러운 직위로 여기지 말게나. 나는 제국 특임대 제1부, 아이언사이드의 그레이서클. 그 총수, 앙겔일세.”
“놀랍군. 정말로.”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데?”
“그럼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나, 앙겔?”
“재밌어 하는군. 알베르트.”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손을 들어 입꼬리를 쓰다듬었다. 그조차도 놀랄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래, 인정해야 했다. 전생의 영웅들을 만나 그들의 뒷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그보다는.
세상의 비밀을 파고드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이건 이단심문관의 자세가 아니라, 흑마법사의 탐구욕에 가깝다.
“다시 묻지. 누가 다음 제위에 오를 것 같나?”
그리고 이건, 대륙 최고의 정보 조직을 다스리는 수장이 출제하는 시험이다.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히윽?”
그리고 이 소리는 미래의 황제가 내는 딸꾹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