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제국의 사절 (3)
“하하하! 걸작, 걸작이로군! 자네!”
페르난데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베르는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참 파안대소하다가 눈물을 슬쩍 훔치며 르네를 바라보았다.
“카르벨리에 공작 영애,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반면 르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킹메이커? 대족장을 만들어? 비센테 왕을 옹립했다고? 뭐야, 두 왕국의 개국공신인 데다가 원탁 기사? 이단심문관이고, 대주교급 사제라고? 이 남자 나이가 내 또래 아닌가? 왜 거물인데……?’
보이는 것보다 단단한, 바위 같은 사내라고 여겼던가. 옥석이 묻혀 있는 화강암 같은 사내라고 생각했던가. 그래서, 잘 가꾸어 빛나게 만들겠다는 욕심이 일었던가.
르네는 혼란을 잠재우고 떨리는 눈으로 로베르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사내는 그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다. 아이언사이드의 총수, 암살과 정보 수집, 파괴 공작과 기타 특수 작전을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행하는 황제의 그림자들.
말로는 황제와 반목한다고 하는데, 그것조차 황제의 함정일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녀는 애써 표정을 풀어내며 말했다.
“식견이 좁은 외국인의 과분한 언사입니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목 위로 단두대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슬쩍 웃고는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게, 영애. 내 말했을 터인데, 피차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아, 그대가 그리 겁이 난다면 내 달리 묻지. 세르너드 경, 그대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경은 제위에 관심이 없을 테니까, 앙겔.”
페르난데스는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말했다. 로베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는?”
“아이언사이드를 부릴 수 있는 황족이, 황제가 되는 가장 쉬운 방식은 불만을 가진 제후에게 직접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지.”
“흐음……. 그런가? 그럼 달리 어떤 수가 있는가? 내 이번 착수는 제법 자신이 있었는데?”
“제후의 반란을 지원하고, 황제를 충동하고, 제후들 사이에 이간계를 펼치고, 결정적인 순간에 제후들을 암살해 승전을 조작하고, 명성을 쌓아 영웅이 되고, 최후에 황제와 황녀를 죽인다.”
-오싹.
르네는 그 담담한 어투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언사이드를 완벽하게 통솔하고 있는 이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면. 제국 최고의 정보 조직이자 암살 사보타주의 달인들이 전쟁의 뒤에서 암약한다면…….
그 순간부터 전쟁은 그저 요식행위일 뿐, 계략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순간 지휘부가 통째로 암습이라도 당한다면 어떤 강군이 있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으리라.
그렇게 영웅이 된다. 제국의 반군들을 무찌른다. 제후들 사이에 이간계를 펼치고,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제후는 과감히 잘라낸다. 각 제후국에 괴뢰 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황제와 황녀를 죽이고 트레뮐레 궁중백가를 계승한다.
그 이후엔, 선제후들의 제위 의회가 열린다. 합법적으로 황위를 계승하면. 그 순간부터 제국은 세습 황족의 시대로 돌입한다.
“그 방식, 분명 매력적이지만. 지금까지 다른 황제들이 왜 그 수를 쓰지 않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명분.”
다른 황제들에게도 아이언사이드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황제들도 자신의 권력이 가문을 이어 영원히 계승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들은 왜 저 계략을 펼치지 못했는가. 답은 간단했다. 명분. 이 세상의 어떤 음모도 저 정도 규모의 작전을 은폐할 수는 없다. 반드시, 실행 과정에서, 누군가는 알게 된다.
이를테면 이단심문청, 이를테면 샥시시, 이를테면 이너 서클이나, 페이른 왕립 정보부. 또는 아이언사이드 내부의 배신자들. 그 누가 되었든 변수는 존재한다.
저 계획은 모든 사건에 변수가 단 하나도 없을 경우에만 성립한다. 아니라면, 황제의 폐위와 가문의 멸문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반드시 제국이 몰락할 것이므로.
“중간에 그 음모가 어그러지고, 누설된다 하더라도 떳떳할 수 있는 명분.”
가문의 멸문, 유서 깊은 선제후 가문의 몰락을 막아낼 안전장치. 명분. 귀족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나의 명분은 무엇이 되겠나?”
“황제의 타락.”
“……이단심문청은 거기까지 예상하고 있었나?”
이번엔 로베르의 표정이 굳었다. 리뷔에에서 일어난 사건의 배후가 황실이라 본다면, 그 타락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눈앞의 청년은 그 사건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전에 파견되었다. 작전의 시작 지점 자체가 황제, 그리고 로베르의 계략 시작 이전이다. 선수를 빼앗겼다.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로베르는 문득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제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뭐, 그렇다 치세. 타락한 황제를 몰아내는 인물이 황자라면 누구도 믿지 않겠지. 좋아, 거기까진 아주 훌륭해. 그렇다면 왜 카르벨리에 영애인가?”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듣고선 르네를 바라보았다. 르네의 떨리는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리하고 굳세지만 아직 어리다. 아직 너무 순수하다.
제아무리 완벽한 기반을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전생 시절, 리뷔에와 카르벨리에 공작의 격이 트레뮐레를 상회하고 있다 하더라도.
저 여인이 눈앞의 짐승을 이기어 내고 정치 공작 하나만으로 제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닐 것이다.
추론이 아니다. 간단한 소거법이다.
-단순히 정치 공작만으로 뭇 선제후들을 꺾고 저 사내를 이겨서 제위를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그건 나라 해도 불가능할 터.’
-그러므로, 르네가 황제가 된 것은 저 사내도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고…….
‘황위를 언제든 찬탈할 수 있는 사내가 굳이, 리뷔에에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정답을, 그리고 미래를 알고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소거법.
“경이 이 영지에 직접 내방했다는 것이 그 대답이 될 것 같군.”
“내가?”
“앞서 말했듯이, 경은 명분과 힘과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소. 그런데 그러지 않았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방증이오. 황실 바로 아래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편이 위험부담이 적을 테니까. 그대는 황위를 원하지 않소.”
“……그래서?”
르네의 떨리는 눈과, 로베르의 흥미가 어린 시선이 페르난데스에게 모였다.
-전생 이 시기. 저놈은 카르벨리에 공작, 또는 르네 필리파와 모종의 협약을 맺었다.
‘황위를 지원하는 대신, 어떤 종류의 이권을 챙겼겠지.’
-아마도 아이언사이드.
추론이 아니라 확신이다. 모든 선제후들을 무력으로 무릎 꿇리는 것이 아닌 이상, 제위는 반드시 선출직이 된다. 한 세대를 넘어 세습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선제후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선 대단히 많은 피와, 명분이 소모될 것이다.
제국의 혼란은 곧 외적의 득세로 이어진다. 술탄은 그 틈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동부 왕국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나약한 속국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황제가 펼치는 계략은 어마어마한 위험부담을 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방식이 있다면…….
다른 방식. 영원히 제위를 세습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그리고 제국의 국력에 타격을 주지 않을…… 온전한 제국을 삼킬 수 있는 방식이 있다면.
그건, 누가 되든 황위에 오르는 이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트레뮐레 궁중백은, ‘궁중백’이다. 궁궐의 모든 대소사를 감찰하는 궁내부 대신의 지휘를 갖는다. 그리고 아이언사이드는 정보, 첩보, 암살, 파괴 공작의 달인이다. 그 둘의 조합이라면 능히 가능하다.
트레뮐레 궁중백의 권한, 귀르의 자본력과 입지 조건, 아이언사이드에 대한 지배력이 합쳐진다면. 황제의 배후가 되는 것은 오히려 수월하리라.
다른 이들이라면 불가능하다. 그런 수준의 모략은 이미 기예에 가깝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 이 청년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무력과 지력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지모.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내가 황위를 원하지 않고, 황제를 옹립할 수 있는 사내가 선제후를 찾아왔소. 카르벨리에 대공? 가능은 하지만 부족하지. 황제의 타락이라는 명분을 앞장서서 수행하기 위해선 더 나은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오. 여론전의 중심은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는, 매력적이고 새로운 영웅의 등장’이 되겠지.”
“새로운 영웅이라?”
“백성을 보듬을 수 있는 군주. 아름다운 외모와 굳센 기개. 낡은 구세력을 청산할 수 있는 젊고 화려한 영웅. 정치 선전물로 더없이 완벽한 인물이 있지 않소.”
로베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침묵했다. 정원의 관목 그 아래, 달빛도 걸러내는 무성한 그림자 아래에서 그의 푸른 눈만 반짝하고 빛났다.
“이거 입궁하는 대로 부하들에게 징계를 내려야 할 일이로군.”
잠시간의 침묵이 끝난 뒤, 로베르는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 밝고 경쾌해져 있었다.
“킹메이커? 웃기는 소리지. 사실, 저 호칭은 비꼬는 것에 더 가까웠다네. 놀라운 업적이지만, 과연 그 자신의 능력이었나? 일신의 무력이야 원탁 기사가 되며 입증되었지만, 그 남자가 정녕코 이 모든 사건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나? 가능한 일인가? 우연이 아니었나?”
“…….”
“우연이 아니었군. 정보 조직이란 놈들이 이렇게 둔해서야. 이단심문청에서 이토록 제국의 정세에 깊게 파고들었을지 정말 몰랐어. 교회의 정보력이 상상 이상으로 치밀하군.”
로베르는 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살 두껍게 덮인, 제국의 황자로 태어나 안온한 삶을 보낸 자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단단한 손이었다.
“새로운 영웅을 만나니 흥겹군. 세르너드 경.”
“나 또한 즐거운 자리였소.”
페르난데스의 손을 쥐고 가볍게 악수한 이후, 로베르는 슬쩍 말했다.
“하나 틀린 것이 있었네.”
“무엇이오?”
“제위의 세습, 아버지의 타락, 분열을 조장하는 황실과 뜻대로 분열되는 선제후들……. 내 명분은 그것이 아니었다네.”
로베르는 르네를 바라보았다.
“바르지 않으니까. 황제가 백성의 피를 원하는 것은 바르지 않으니까. 제국이 유지되기 위해서 전쟁이 그 동력이 되어야 한다면, 그건 바르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미 범람한 핏물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테니까.”
“이상주의자였군, 당신.”
“그대도 그렇지 않은가?”
동부 왕국의 정세에 직접 끼어들어 목숨을 걸고 연합의 분열을 막았다. 이후엔 서부 호족 연합을 하나로 결속하고 전쟁의 틈바구니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걸고 활약했다.
단순한 책략가와 모략가는 결코 전선에 나서지 않는다. 행동하는 책략가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환상 속의 괴물이다. 책략가의 입장에서, 로베르와 아이언사이드 첩보부는 페르난데스를 ‘운 좋은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운 좋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머리 좋은 이상주의자였다. 이상이 확고하고, 그를 실현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실현할 계획을 직접 수립할 수 있는 인물이다.
환상 속의 괴물이다. 그리고 환상은 언제나 동경을 가져오는 법. 로베르는 경계 대상이 아니라, 영웅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행보가 그의 야망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제의 배후에서 암약하는, 세습되는 절대 권력을 탐하는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일이다.
“난 그런 이상주의자가 좋네. 세르너드 경.”
“나도 그렇소. 앙겔.”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바라보며 르네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왜 다들 제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죠?”
“말씀하시오.”
“저는 그냥 꼭두각시가 되라는 뜻인가요? 제가 그걸 달갑게 받아들일 것이라 여겼나요?”
“아니, 아니오. 카르벨리에 공작 영애. 무슨 소리요?”
로베르는 픽 웃었다. 그는 카르벨리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는 필연적으로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사내고, 뭇 선제후들은 일말의 서슴 없이 그렇게 할 돼지들뿐이요. 백성의 피를 탐하지 않을 황제, 백성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황제. 타인의 슬픔에 슬퍼하고, 타인의 기쁨에 흥겨워하지만 그 중심을 잃지 않을 황제.”
“…….”
“충분히 현명한, 충분히 사려 깊은, 그러나 충분히…… 순수한. 위대한 황제. 그대는 그렇게 될 수 있소.”
“날 언제 봤다고 그렇게 고평가하시는 거지요, 로베르 황자?”
“3년 전, 귀르에서 내 우연히 그대가 지나가던 노파를 부축하는 것을 보았소.”
전쟁이 한창이던 제국, 귀르에서 열린 사교회가 있었다. 이곳 리뷔에와 귀르는 먼 거리였고, 전쟁의 참화는 귀르를 스쳐가지 않았다.
50년 전쟁으로 분주한 공작은 선제후 대리로 자신의 딸을 보낸 적 있었다. 열다섯 소녀에게 일임하기엔 과도한 책무였지만, 공작은 자신의 딸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그녀는 충분히 잘 해내었다. 영민하고 지혜롭게.
그 모습을, 로베르는 먼발치에서 보았다. 시장 골목을 지나는 선제후들의 행렬, 좁디좁은 관도를 지날 때. 쓰러져 헐떡이는 노파의 팔을 잡아 부축하던 어린 귀족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 소녀가 선제후 대리이며, 리뷔에의 공작 영애이며, 평생 살며 단 한 번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철부지여야 정상인 그 어린, 규중 처녀가 선제후 대리의 역할을 단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처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로베르는 직감했다. 영웅의 재목이다. 굳이 그녀가 황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완벽한 다른 인물들이 더 있다 하더라도. 굳이 그녀가 황제가 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없다.
리뷔에와 카르벨리에 공작을 처리하려는 황제의 계략과, 자신을 배신한 아이언사이드 내부의 배신자들을 방기했다.
공작의 죽음과 무너지는 리뷔에에서 우뚝 서서, 빛을 향해 달리는 영웅을 연출하기 위해서.
계획이 틀어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직접 사절로 가겠노라 청했다. 영웅의 재목을 확인하기 위해.
바라던 대로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는 만족했다. 이단심문관의 개입은 예상 밖의 변수였지만 계획엔 차질이 없다. 오히려 이편이 더 낫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기사가 군주에게 대하는 예의로.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황제 폐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