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33화 (234/388)

233. 만들어진 영웅의 시대 (4)

베르나르는 기사단장이란 직함을 농으로 따낸 것은 아니었다. 정점에 이르렀다 표현하긴 어려워도, 적어도 그 가닥을 잡아 이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수준의 검사였다.

그러나 디모니카의 육체는 정점에 이른 검사와 대등한 수준을 만들어 내며—

-챙!

“크……흑!”

검술의 영역에 있어서, 페르난데스는 결코 경험이 얕다 말할 수 없다. 악마와 괴물을 무찌른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종류의 검술. 강자와 맞서는 이의 기교.

다리안의 창, 카하레페프의 검, 에리크의 도끼. 그리고 데인 왕의 대검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당대, 동시대 최강자의 반열을 논하는 이였으며—

-콰득!

본디 검술이라 함은, 강자의 피로 살찌우는 괴물이다. 페르난데스의 칼이 베르나르의 장검을 튕겨 내고 그 틈을 파고든다. 힘도, 그 힘을 배분하는 기술도. 그 역량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이……놈!”

베르나르의 목에 핏대가 선다. 농락당하고 있다. 놈은 원한다면 단숨에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번의 격검에 반드시 두세 차례 이상의 위기가 있었고, 격검이 이어질수록 그의 균형은 치명적일 정도로 엉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호흡이 버거울 지경이다. 베르나르는 칼을 곧게 세우고 뒤로 물러서 헐떡였다. 놈의 자세는 상단, 칼은 평범한 제식 장검. 검술의 유파는 동부 왕국의 것에 가깝다. 그러나…… 그 칼을 들고 있는 놈의 기세는 짐승을 상대하는 것만 같다.

“이게…… 고작 애첩이라고?”

“나도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그림자 속에서 하얀 이빨이 반짝였다. 굶주린 짐승이 어금니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베르나르는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지원이 오리라 생각하며 기다리는 건가?”

“…….”

격검이 적어도 열 차례 이상 이어졌다. 이렇게 시끄럽게 싸웠는데 아직까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베르나르는 초조한 눈으로 페르난데스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막사들 사이에선 연회장의 소음이 여전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사들이 있다.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날 죽이면 네놈도 무사하진 못할 게다! 나는 레반스 기사단장이야. 내 주군은 황제 폐하시며, 제국 중앙 행정부가 너를 징벌할 것이다!”

“날 그만 실망시켜라, 남작. 네 가치가 점점 더 떨어지는군.”

“……무례한 놈!”

호통을 치며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칼자루를 쥔 손은 미약하게 떨리기만 할 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사선(死線)이다. 이 선을 넘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건 수많은 전장을 거친 노련한 기사의 본능이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눈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무례한 태도와 거침없는 격검에도 불구하고, 귀족적이고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외모. 단단하고 큰 체구. 빈틈없는 자세와 기도…….

기사단장의 자리는 물론, 힘과 기술로 따내는 것이 아니다. 기사단은 뒷골목 갱단이 아니므로. 기사단장은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이가 되는 자리가 아니다.

복무 이력, 경험, 업적, 존중. 그리고 정치. 그 모든 것들의 총화다. 당연히 기사단 내부에는 기사단장보다 강한 기사들이 몇 사람 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눈앞의 청년이 보이는 기도는 그 느낌이 달랐다.

생명을 단위로 여기는 존재가 보이는 시선. 전투를 다만 승리의 과정이라 생각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 강자가, 그것도 진창을 이기어 내고 마침내 올라선 강자가 보일 법한 눈.

기사단 내의 강자들과 이 사내를 비교하자면, 검술의 영역에선 어쩌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의 영역에서, ‘업’의 영역에서의 간극이 선명하다.

도저히, 이십 대 청년 기사의 눈이 아니다. 레반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천천히 칼을 집어넣었다.

“날 죽일 생각이 아니군. 원하는 게 뭐지?”

“이제야 좀, 쓸모가 보이는군. 남작.”

페르난데스가 피식 웃었다. 그는 느긋하게 칼을 납도하고는 손을 들어 가볍게 휘저었다. 베르나르의 눈엔 마치 그것이 수인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쩐지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파직!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전서용 마력 장치에서 대뜸 파열음이 들렸다. 베르나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장치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충 만들어졌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고장이 난다고?

“넘겨라.”

페르난데스는 베르나르의 손에서 장치를 빼앗아 가서 잠시 훑어보았다. 견고하게 만들어졌지만, 복잡한 마법이 깃든 물건은 아니었다.

“좌표 고정식이고, 문장 송출 기능만 있고, 수신부는 제거되어 있군. 특정 파장을 송신하는 회로가 있고…… 감도 범위를 늘리기 위해 다른 기능들을 포기했군. 암호화 기능은 있고, 복호화 기능은 빠져 있군. 저속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 가로채면 이용하긴 쉽겠어.”

“마력 설계학을…… 배우나? 수인 호족 전사들은 그런 걸 배우나……? 마법사는 아니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마법사지. 내가 그럼 뭘로 보였나?”

이건 마법사식 농담이었다. 적어도 마법사들에겐. 베르나르에게 그건 농담 같은 악몽이었다. 그는 이런 존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반쯤 전설이거나, 그도 아니면 잠투정 심한 아이들을 겁주는 용도의 동화책에서.

“악, 악마……. 악마였군. 그 힘. 그리고 마법! 에, 에르브 공작이 정말. 정말로 악마와 손을 잡았단 말인가……!!”

페르난데스는 잠시 멈칫했다. 이런 오해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해명하기보단, 이용하는 편이었다.

“내 정체를 알았다면, 네가 할 일도 알고 있겠지?”

“나, 난 영혼을 팔지 않을 것이다. 악마!”

‘그건 줘도 안 갖는다.’라고 말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잔량이 아직 한 수 정도는 남았다. 감각 증폭과 소음 차폐 이후 오늘 한 번 더.

그리고 기왕 사용할 생각이라면 조금 더 극적인 방법이 좋을 것 같군.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었다. 조금 더 효과적이고,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주지 않으면 뺏지 못할 것 같나?”

“뭐, 뭣?”

손이 부드럽게 반원을 그렸다. 천천히, 놈도 두 눈으로 똑바로 확인할 수 있게끔 천천히. 촤륵, 하고 사슬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의 손목에서부터 마력이 길게 이어져 베르나르의 목에 늘어졌다.

“이익!!”

-촤르륵!

베르나르가 황급히 팔을 들어 막으려 하나, 경장에 대마법 수단 하나 없는 상태에서 저항할 방법 따윈 없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주문을 거는 것은 흔적이 남아서 꺼리는 일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오히려 좋다.

“이제 네 영혼은 나의 소유다. 남작.”

사슬의 끝, 목젖 아래부터 명치까지. 검은 문신이 그려지며 흑마법의 잔향이 남았다. 기척을 지우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아주 강렬한 흑마법이다. 또렷하게 피부를 파고드는 지배의 문장에 기사단장은 침을 삼키며 자신의 몸을 내려보았다.

-피리리릭, 펑!

폭죽이 터졌다. 하늘이 순간 밝게 물들며, 긴 음영이 내리 앉았다. 검은색 헤일로가 불경한 빛을 담으며 타올랐다. 베르나르는 다가오는 청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건 체념이었다.

* * *

‘생각보다 레반스 기사단장은 손쉬운 상대였어.’

-우리 때를 생각하면 쓰나.

전생 시절, 일국의 기사단장은 모두가 정점에 도달한 무인들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영웅을 제련하므로. 국가 단위의 분쟁이 거의 없는 이 시기, 기사단장이 행정 관료의 성격을 띠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모닥불을 내려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마법 잔량이 회복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지금쯤이면 르네 필리파의 병력이 귀르에 입성했겠지.’

-황제의 시선이 온통 서부에 몰려 있으니까. 연전연승이라 짜릿하겠군그래. 50년 전쟁의 목표치를 바로 눈앞에 둔 상황 아닌가.

‘본디 적이 가장 나약해지는 순간은, 적이 가장 즐거워하는 순간인 법.’

페르난데스는 만지작거리던 장치를 내려놓았다. 견고하지만 단순한, 보급용 마법 장치. 결코 자신의 최측근에게 하사할 고급 장비가 아니다. 레반스 공작은 버림 패였다.

‘아니면, 놈은 애당초 사람을 버림 패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거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군.

‘그래. 존중해 드려야지. 최선을 다해서.’

수백만 백성의 머리 위에 저 홀로 군림하는,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의 유일한 황제 폐하께. 가장 달콤한 극독을 진상할 시간이다. 페르난데스는 탁, 하고 장치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마법 잔량이 회복되었다.

-화르륵!

어두운 막사, 자그마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음울한 녹색빛을 띤다. 잠시간의 노이즈가 얽히고, 페르난데스는 소파에 몸을 길게 늘이며 모닥불을 내려 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체라드 블론드테일에 대한 영향력이 어느 정도지?”

[주군께서 제게 갖는 영향력만큼, 체라드 또한 저에게 복종합니다.]

“놈에게 죽으라 명한다면 죽겠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불길 속에서 파르탁이 음울하게 킬킬거렸다.

[하지만 그 어린 수인족 꼬마가 죽어야 한다면, 죽게 되겠지요.]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었다. 영혼, 또는 극독. 무엇이 되었든 목줄을 채워 두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페르난데스가 파르탁에게 가했던 금제만큼 지독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 말은, 페르난데스가 파르탁에게 죽으라 명한다 한들 순순히 죽어 주진 않을 생각이라는 은유적인 협박과도 같았다. 그 기개, 마음에 드는구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하명하십시오.]

“모든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지금 전투는 총 다섯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중 셋은 무의미한 소규모 교전에 불과하니 논외로 하고도, 적어도 라비라타의 해골들과 연수한 반군의 본대는 건재합니다. 모든 전투에서 패배를 원하신다면, 라비라타는 무력으로 정복하셔야 할 겁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며칠이 필요하더냐?”

[사흘 안에 다른 전선의 모든 수인들을 패퇴시키겠습니다. 피해는 어느 정도가 적합할는지요.]

“가능한 한 많은 피가 필요하다. 제국에도, 수인에도.”

[악마를 소환하려 하십니까?]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웃음을 멈추고 불꽃 속을 들여다보았다. 파르탁은 덤덤히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그럴 능력과 동기가 충분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황제가 가장 기꺼워할 상황이 아니겠느냐.”

[라비라타도, 악마도, 수인들도 버림 패로 생각하시는군요. 영웅을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네 첫 질문이 그것이 아니었더냐? 괴물과 악마를 잡아내는 이는 응당, 영웅이 되어야지. 동화책을 한 편 써 보자꾸나.”

[즐거운 일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제국은, 그리고 황제에겐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제국 귀족의 사회에서 명분과 체면이란 더 클수록 더 강한 힘을 갖게 된다.

악마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서부 황무지에서 수인 호족 군벌 사이에 악마가 도래했다는 이야기가 돈다면 반드시 황제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공론화시키고, 리뷔에를 몰아넣을 함정을 파겠지.

뭐가 되었든 좋다. 리뷔에 대공의 선전이 수인 호족들과의 은밀한 뒷거래였다고, 그리고 그 대가는 제국 군대의 핏물이었으며, 그 결과 악마가 도래했다고. 증거는 짜맞추면 될 일이고, 이미 리뷔에 공작령에는 악마 사교도의 활동이 신고된 상황이다.

“즐거워해라.”

부디, 이 상황을 즐겁게 여기길 바란다. 황궁 내부에 틀어박혀서 은밀하게 암계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기꺼이 행동할 때에 그 틈이 더 커지는 법이니.

전쟁은 병사의 피로 영웅을 담금질한다. 그리고 베이타서스는 전쟁의 신이다. 페르난데스는 제국 동부 방면의 지도를 내려보며 생각했다.

술이 달콤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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