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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36화 (237/388)

236. 불씨 던지기 (2)

라비라타 왕조의 도시, 이바리스는 그 어느 순간보다 흉포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낮의 열기가 지면을 달구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너머로 보이는 황색 석벽들은 상고 아시트 제국의 자취를 보이고 있었다.

색색의, 화려하게 염색한 아마포가 이바리스의 외성을 물들이고, 그 아래로는 고대의 제언과 영웅들의 부조가 사치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그 광경에는 분명 타인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인들은 상 아시트의 망령 왕조들을 두려워한다. 이는 반쯤 본능적인 것이었다.

짐승의 머리를 쓴 신들의 흉상이 수인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카단, 사냥의 신 카단 또한 상 아시트 시절 선신 만신전에 속했던 신이다. 수인들에게 아시트 제국의 모습은, 그들의 향수와 외경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들이 많았다.

비록 망령에 불과하지만. 싸늘한 해골 아래에 어설픈 지성으로 움직이는, 과거를 모사하는 망자들에 불과했지만. 저들 하나하나는 살아 있는 유적이자, 유물이며, 또한 역사였다.

“은공, 제 수하들은 전투를 포기했습니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에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리하라 명했다.”

“저는 은공과 함께하겠습니다. 하나, 제 군단을 제외한 병력으로 충분할까요?”

“당연히 충분치 못하지.”

페르난데스는 이바리스의 흉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군이 진군하며 일으킨 흙먼지는 족히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관측이 가능할 수준이다. 실제로, 아슬하게 투석 사거리 외부까지 바싹 진군시킨 군단을 향해서 적들의 포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력포. 드워프 특유의 마법 공학 기술이 접목된 강대한 대포. 저 함포의 일제 포화는 설령 서펜트킹의 기함이라도 무너트릴 힘이 있다. 하물며 저 성벽은 어떠한가.

리뷔에의 내성 첨탑보다도 높은 성벽과 그 아래로 흐르는 깊은 해자까지.

이바리스는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였다. 더군다나 라비라타는 지금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으니. 마법전에서도 크게 유리하다 볼 수는 없었다.

-끼이이이익! 쿵!

군단의 중앙에서 제국 공성 기술자들이 쌓아 올린 공성탑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의 높이를 고려해 만들어진 거대한 탑들이, 병사들과 기마의 군가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위용이 넘치는군요.”

키르하스는 짧게 혀를 찼다. 유목 민족인 수인 호족들에게 공성전이란 대단히 낯선 개념이었다. 그들이 만드는 정착지용 목책은 기마의 힘으로도 능히 부수고 진입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나 제국군은 물질 세계 그 어떤 군단보다 공성전에 능한 이들이다. 이들의 전투는 비록 대단히 정직한 편이었지만, 외려 그 우직함이 저들의 강점이리라.

제국군은 철저히 검증된 교본에 따라 전투를 진행한다. 제국 원수부의 전략가들이 수 세기에 걸쳐 쌓인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교본으로. 정공법이지만, 다채로우며 위협적이다.

영지 간의 갈등, 분열기 제국의 숱한 내전들, 외부 세력과의 전쟁까지. 그들의 하나의 국가가 오랜 시간 유지되며 쌓아 올린 경험의 총화다. 성탑을 높게 쌓는 제국 성채들의 특징 탓에, 저들은 공성전의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외성을 깨는 것에는 제국군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외성을 깨면 전쟁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시가전이 남았지. 키르하스. 망령 군단과의 전투는 시가전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키르하스는 짧게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털털 흔들었다.

“시가전이라면, 도심지에서도 싸움이 일어날 것이란 뜻입니까?”

“그래. 저들은 오직 왕성만 지켜내면 그만이다. 저 거대한 성채와 그 내부의 도심 지역들은 일종의…… 미관을 위한 잡동사니에 불과해. 망자들에게 가옥과 시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망령 군벌에게 시가지란, 평시엔 사치품이지만 전시엔 전장으로 돌변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외성이 뜯긴 요새는 항복하기 마련이다. 주민과 거주 지구를 모두 잃은 성채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것이 없는 망자들에겐. 시가지란 압도적으로 아군이 유리한 전장이 된다. 미로처럼 얽히고 좁다란 골목엔 전쟁 병기들이 들어설 수 없고, 병사들은 쉽사리 고립되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외성을 파괴하는 것에 전력을 소모한 제국군은 그들에겐 낯선 ‘시가전’이라는 개념에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당황은 고스란히 피해로 치환된다.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 타서 짧게 웃었다.

“그렇다면 경고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국군에?”

“적어도 카르벨리에 공작에게는요. 카르벨리에 공작은 이번 전투에서 후방 배치를 거부했습니다.”

“흥이 많이 올랐나 보군.”

“지나치게 많은 승리를 거두긴 했지요. 외부에서 보기엔 정말 오만해질 만한 업적이긴 합니다. 매 전선에서 선두에 나서 항상 종심을 파괴하고 승리를 일궈냈으니까요.”

“공작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것이 좋다, 키르하스. 그자는 50년 전쟁과 함께 태어나 그 안에서 자랐고, 마침내 종전까지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의 삶 전체가 전장과 함께였었어.”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매가 날고 있었다.

매의 날갯짓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마력의 흐름이 읽혔다. 그는 짧게 속삭였다. 시작되었군.

-피유우우우웅! 쾅!

성채의 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회백색 궤적을 그리며 푸른 하늘을 찢어발기듯이. 제국의 전열과 그 너머의 공성탑을 향해 라비라타의 군단이 포격을 시작했다.

“다소 험한 전장이 될 게다. 키르하스.”

“은공께서 가시는 길인데, 가시밭길이라고 마다하겠습니까.”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전선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국군이 진군을 시작했다.

* * *

사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망령 군단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에버라드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전열! 방패 들어!! 방패 들어어엇!!”

“방패!! 올려라아아!!”

-두두두두두두!!

철판을 얽어 놓은 방패 위로 화살이 떨어져 내렸다. 전신에 판금갑을 두른 에버라드조차도 쏟아지는 화살의 충격에 움찔 떨었다. 강맹하다. 그는 바닥에 꽂힌 화살 하나를 뽑아내 살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낡고 삭은 화살이다. 어떻게 이런 위력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제국군의 군용 활이 갖는 최대 사거리보다 더 먼 거리였다. 여기까지 날아온 화살에 방패가 찢어지고 군사들이 다쳐 쓰러졌다.

이런 공세가 가능했으면서 왜 지금까진……?

에버라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 파공성이 하늘을 찢으며 다가왔다.

“화포다아아!!”

에버라드의 고함에 군사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곧 그들이 서 있던 자리로 포환이 떨어졌다. 쾅! 장정 서넛은 족히 들어갈 큼직한 포흔을 남기며 연기가 솟아올랐다.

“앞으로! 앞으로 가라! 진군하라!”

멈춰 서서는 안 된다. 에버라드는 날카롭게 주위를 훑었다. 하마 기사들이 공성탑 인근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나아가고 있었다. 탑만 무사하다면, 외성 갤러리에 공성탑이 걸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전투는 끝난다.

-피리리리릭!! 콰아아앙!!

포환 하나가 공성탑의 외곽에 부딪쳤다. 공성탑 하나가 비틀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쓰러졌다. 그 아래에선 고함과 비명이 소용돌이치다가, 곧 잠잠해졌다. 그런 광경이 이 전장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끔찍하군. 에버라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끔찍해. 투석기가 아니라, 엘프들이 사용할 법한 포대를 쓴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었다.

제국에서도 몇몇 주요 도시와 항구에 저런 마력 포대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발사 간격과 파괴력을 지닌 포대는 없었다. 그건 그저 포신에 새겨 놓은 마력 회로를 점화시켜 철구를 날려 보내는 정도의 병기에 불과했고, 유지비와 제조 단가가 끔찍하리만치 높은 탓에 사실상 예장용 병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다. 서쪽에서 깃발이 올라오고 있었다. 에르브 공작의 군기였다!

“제기랄, 더 늦을 수는 없다! 진군하라! 속도를 높여라! 멈춰 서면 죽는다!”

에버라드의 외침에 병사들이 천천히 속도를 높여 진군하기 시작했다. 화살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고, 방패벽이 부서질 때마다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힌 병사들이 허물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 자리의 제국 중앙군은 수도, 그리고 사기도 질적으로 다르다. 적어도 공작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죽음과 비명, 그리고 전장의 열기로 달아오른 에버라드는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전진하라! 퇴각하는 자들은 내 직접 목을 치겠다!”

* * *

이바리스의 서쪽 성벽으로 에르브 공작의 병사들이 진군하고 있었다. 이바리스는 남쪽 끝에 큰 강을 낀 도시였고, 서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으로 세 방면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주력군은 동쪽과 북쪽이다. 제국 군단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공성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서쪽. 한 변이 짧은 사다리꼴 형태의 도시 구조상 가장 성벽이 짧은 곳은 에르브 공작의 진격로였다.

성벽의 길이가 짧다는 뜻은 전선의 구축이 조밀하고, 밀집된 병사들이 포대에 더 크게 노출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또한 왕성과의 거리가 가장 먼 탓에, 군공을 올리기에 과히 적합하지 않은 방면이었다.

에르브는 이를 알고도 수락했다.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짧은 성벽을 향해 대군이 진격한다 한들 한 번에 공성탑이나 사다리를 걸 수 있는 한도는 명백히 한정적이었다. 제국군보다는, 군단의 규모가 작은 그가 더 적합했다.

그러나 그의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신 툴툴거렸다.

“전하,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저 겁쟁이들이 오줌 싸며 도망칠 때에도 우린 항상 선두에서 진격했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이런 찬밥 신세라니요.”

“그게 불만이냐? 오히려 다행인 일이 아니냐. 우리에게 집중되는 화력이 본대보다 한결 적지 않으냐.”

“위협이 줄었다고 기뻐하란 뜻입니까?”

“이 녀석아. 당연히 기뻐해야지. 네 군사들이 땅에서 솟았더냐, 하늘에서 떨어졌더냐? 저들 하나하나가 리뷔에의 백성들이다. 저들의 피해가 최소화된다면 응당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에르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투구를 쓰고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수치심에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성을 아꼈다면 전쟁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고, 설령 나섰다 하더라도 군공을 쌓겠다고 지금껏 전선 최선두로 진격하진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자조를 모르는 기사들은 그의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심, 저들이 바보 같은 충신들이라 다행으로 여겼다.

‘하긴, 그런 바보들이 아니었다면 나 같은 가라앉는 배에 계속 매달려 있지도 않았겠지.’

리뷔에의 몰락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곁을 지킨 기사들이다. 당연히 정치 공학에 해박할 리가 없었다.

에르브는 따듯한 눈길로 기사들을 바라보고는,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서 너희의 백성들을 지켜라. 기사 서임식을 떠올리고, 앞으로 나서라. 나의 기사들이여. 죽음을 두려워 말라. 다만 약자의 죽음을 지켜볼 자신의 비겁함만을 두려워하라.”

“예, 주군!”

기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전선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진격하라. 나서라! 너희의 왕이 너희와 함께 진군하고 계시다! 그런 외침이 전선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피리리리릭!

포환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방면의 포환은 공성탑을 부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사실, 공성탑만 부수면 되는 일이 맞았다. 수성의 입장에서도, 공성탑을 걸 수 있는 성 외벽의 거리가 짧아 이 방면에 놓인 공성탑은 세 개에 불과했다.

“탑이 무너지거든 탑을 버려라! 중요하지 않다!”

에르브는 소리 높여 외쳤다. 그는 곧 그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애당초 그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놓았었다. 성벽 바로 아래까지 진군할, 화살을 맞으며 시선을 끌 중장보병들과—

“준비는 되었느냐?”

“예, 전하!”

성벽에 사다리를 걸 병사들로.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공성탑은, 제국 공병들이 만들어 넘겼다는 시점에서부터 사용할 생각조차 없었다.

‘저기에 무슨 짓을 해 두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성벽을 타 넘어 군공을 세울 기회를 기꺼이 양보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공성탑엔 반드시 무언가 문제가 있을 것이고, 공작은 공성전이 결정된 순간부터 사다리와 그에 맞는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다리가 걸렸다! 당겨!!”

“당겨라아아아!!”

전열에서 병사들이 외쳤다. 사다리의 끝에 매달린 갈고리가 외성의 갤러리를 긁으며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큼직한 방패를 머리 위에 얹고, 병사들이 하나둘 사다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 너희들도 따라라. 어디 우리가 병사들보다 늦게 성벽을 밟아서야 되겠느냐!”

“하하, 전하. 춘추를 생각하시고, 이런 일은 젊은 저희에게 맡기시지요.”

“어딜! 너희 열댓이 동시에 덤벼도 난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다! 하하, 이 녀석들 코흘리개들이 아장거릴 때부터 봐 왔거늘.”

“눈먼 화살을 조심하십시오, 전하. 부디 저희 뒤에서 따르시길.”

“그렇다면 너희가 나보다 앞서 뛰면 되겠구나! 하하하!”

공왕은 검을 뽑아 외치며 병사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적의 화력이 공성탑과 전열에 집중된 이 시기, 공성탑은 미끼에 불과했다는 것을 적들이 깨닫기 전에 성벽을 넘어야 했다.

뜨겁구나. 좋다. 에르브 공작은 살아온 인생 그 자체가 전쟁의 기간을 의미하는 사내였다. 전쟁이 시작할 시기에 태어나, 전장에서 걸음마를 떼고, 전장이 한창 격해질 때에 기사 서임을 받았던 사내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이 끔찍한, 당장 눈먼 화살이 바이저 아래를 뚫고 들어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격렬한 전장이. 오히려 그의 피를 끓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나이를 잊고, 고함치며 달려나갔다.

그의 기사들이 그와 함께 뛰었다.

“공왕의 친전이다! 전군! 진군하라!!”

그 어느 전선보다 병사들의 사기가 드높았다. 에르브는 예민한 촉감으로 전장의 공기를 읽었다. 승전의 향기가 났다.

물론, 이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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