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37화 (238/388)

237. 불씨 던지기 (3)

“걸렸다아아아아!!!!”

생존에 몰두하고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 어그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장의 병사들에겐 더욱. 병사들은 모든 사건이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모든 전투가 생각보다 느리게 흐르는 기묘한 시간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날아드는 화살과 창칼이 지독하리만치 느리게 보인다. 반면, 느긋하게 접근하는 공성탑은 또 놀라울 만큼 빠르게 다가와 어느새 성벽에 갈고리를 걸고 있었다.

성가퀴 위로 제국 병사들이 비명을, 고함을, 생존에 대한 열망을 터트리며 올라선다.

밀물이 몰아치듯. 지금껏 막혀 있던 댐이 한 번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성벽을 장악해라!! 성문을 열어! 공성추! 아직인가!”

“공성추 접근 완료했습니다! 충격 시작합니다!”

해자 위의 협로를 건너 거대한 목조 성문 앞으로, 병사들의 철통 같은 방어를 두른 공성추가 접근했다.

양의 머리를 조각한 충격 램(Ram)이 뒤로 바싹 밀려났다가, 이윽고 탄성을 받으며 문을 내려찍었다.

-쿠우우웅!

“뚫어! 뚫어어어어엇!”

“당겨라! 당겨! 이제, 놔!”

목이 모두 갈라져서 피를 뱉어내면서도 병사들은 목청 높여 고함 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충격, 다시 한번 충격. 파동이 이는 것처럼 공성추가 성문을 타격했다. 우적, 하고 공성추의 충격부를 중심으로 균열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빠르고, 쉽군.”

에버라드는 전열이 성벽에 달라붙는 것을 바라보며 웃었다.

갤러리를 점거한 것은 에르브 공작이 조금 더 빨랐지만, 에르브 공작의 군단은 성벽을 장악한 이후에 곧장 왕성으로 진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당초, 이 정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방면은 라비라타의 왕궁과 가장 먼 거리에 있고, 좁은 접촉 면적 탓에 한 번에 도성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한정적이었다.

“뭐, 예상외라 할 것까지는 없지. 어디 저 멍청한 것들이 지금껏 싸워 왔던 것을 생각해 보시오.”

한 기사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에버라드는 걱정이 사라져 후련해진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지금껏 전쟁이 그리도 쉬웠지. 모든 전선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던 이유가—

‘공작이 뛰어나서가 아니야. 적들이 나약해서였다.’

그렇게 여긴다면 말이 된다.

제국군은 무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 자신과, 전쟁 귀족들의 전술 회의 또한 무능하지 않다. 그것이 못내, 에버라드를 뿌듯하게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성벽 안으로 들어선 병사에겐 황금으로 치하하겠다!”

에버라드는 흥이 올라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성가퀴의 포대가 모두 점거되어 더 이상 포환이 쏟아지지 않았다. 하늘에 그림자를 만들 정도로 퍼부어 대던 화살비도 이젠 잠잠하기만 하다.

개개인의 무용을 논한다면, 저 망령 군단의 해골들은 결코 인간의 적이 될 수 없다. 저들은 나약하고, 가볍고, 경직되어 있다. 해골들은 다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애써 창과 칼을 휘둘렀지만, 전투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정예병들은 쉽사리 칼을 쳐내고 두개골을 바스러트렸다.

거리의 이점과, 전투 병기의 이점을 잃어버린 순간, 성가퀴를 점령당한 순간에 이미 저들의 패배는 확정 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갤러리에 하나둘 갈고리를 거는 공성탑들이 늘어갈수록, 에버라드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콰아아아앙!

“성문!! 돌파했습니다!”

흙먼지를 자욱하게 올리며 거대한 성문이 부서졌다. 지금이다. 에버라드는 거칠게 외쳤다.

“제국 기병대!”

“예!”

“황제 폐하의 영광을 위하여!!”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이여, 영원하라!”

-두두두두두!

에버라드의 외침과 함께 기마 위에서 이 순간만을 대기하고 있던 기병대가 돌격을 시작했다. 제국 중앙 원수부 직할 기사들. 오직 승진과 더 큰 명예를 위해서 스스로의 무예를 단련해 온 중앙의 정예 기병들이 하나 되어, 적의 심장에 틀어박히는 쐐기처럼 돌격하기 시작했다.

완파되어 크게 열린, 흙먼지 자욱한 도심 내부를 향해서!

* * *

“이제 충분히 몰아넣었군.”

페르난데스는 하늘에 떠다니는 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릴 리가 없겠지만, 어쩐지. 매의 움직임은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매는 이리저리 활개치며 날아다녔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그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정교한 마력의 흐름은 결코 저 매가 일반적인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했다.

“더 기다릴 셈인가, 라비라타?”

모든 방면의 외성이 점거되었고, 심지어 먼저 성벽에 올랐던 에르브 공작은 병력을 이끌고 시가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성벽 곳곳에선 제국군을 의미하는 화려한 깃발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포대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성벽 위에서 화살을 당기던 망자들은 움직임 없는 유해가 되어 바닥에 쓸려 내렸다.

외성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너무나 손쉽게. 모두의 예상보다 배는 더, 손쉽게.

-삐이이이이익!

매가 하늘 너머에서 울었다. 그리고 동시에, 왕궁을 향해 대마법전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의 머리가 일제히 터져 나갔다.

* * *

아무런 전조 없이, 어떤 비명 없이. 사람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간다.

제국의 전투 마법사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머리 없는 시체들은, 마력 회로를 강화하는 마법진 위에서 하나둘 힘없이 쓰러져 내렸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광경이어서, 마법사들을 지키던 당번 기사들과 병사들은 경고를 외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그나마 가장 담대한 고참병 하나가 숨죽여 말하는 정도였다. 전투가 한창인 전장에서 전투 마법사들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병사가 뒤늦게 몰아친 현실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다.

-쿠구구구궁……!!!

“아…… 아아아…….”

병사는 자신이 후방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마법사들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성벽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허물어지고 있었다.

* * *

-쿠구구구궁!!!

진동이 아니다. 이건 이미 지진이었다.

말들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병사들은 달리던 자세 그대로 뒤엉키며 쓰러져 아우성이었다. 성벽에서부터 불어닥친 거대한 흙먼지에 그 누구도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절규와 절망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이 시기의 성벽이란, 단적으로 말해 정물이다. 산이나 들판, 또는 바다처럼. 풍경에 해당하는 정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연’의 영역에 있는 정물이 허물어지는 것은…… 산사태나 해일과 비교할 수 있을까.

병사들 대부분이 성벽 인근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병사들을 통솔할 대검귀족들과 현장 지휘관들마저 성벽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태는 더 악화되어만 갔다.

“라비라타…… 대단하군.”

이 시기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은 두 가지 부류였다.

완전한 후방, 이 압도적인 자연 재해를 먼발치에서 볼 수 있기에 충격보다 경외감에 전율하는 부류와.

-쿠구구구구궁!!

하늘 너머 빼곡히, 그물처럼 짜여져 지상으로 흘러내리는 빛무리를 볼 수 있는 자들.

마력 회로를 몸에 박고, 마력의 흐름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들.

마법사들이다.

페르난데스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유사처럼 휘몰아치는 아름다운 마력의 흐름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 편린 하나하나가 극도로 세밀한 주문이며, 그 모든 주문들이 흐름을 이루고 휘몰아치는데도 마력의 오용과 누수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검사가 정점에 도달하면 신체에 마력을 흘릴 수 있듯이, 마법사가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마력 그 자체를 사역할 수 있게 된다. 경지의 영역을 논할 때에, 지금 라비라타가 보인 신기는 신화적인 수준의 마법이었다.

다만…….

-저 정도 마법을 아무런 대가 없이 사용했을 수가 없다.

‘그래. 백래시가 어마어마하겠지.’

언제든 손쉽게 이런 대규모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면, 라비라타는 이미 문명 사회를 통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 마법을 사역하기 위해선 전성기 시절 뭄토 수준에 육박해야 했다.

라비라타가 뭄토의 콘클라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상 아시트 최고의 영웅들 중 하나였다는 의미였기도 했으나. 반대로 뭄토보다 명백히 수준이 낮은 마법사였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므로.

-지금이 기회다.

‘좋군.’

모든 병력이 사토 속에 묻혔다. 저 마법 한 번으로 그 아래의 모든 병력이 전멸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극단적인 낙관론이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저건 전열을 흐트러트리고, 피해를 강요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물리적 충격보다 정신적, 시각적 충격에 더 치중한 마법이다. 저 아래에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이미 그 병사는 모든 사기를 잃고 퇴각에만 치중할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키르하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으, 은공. 지, 지금. 지금…….”

“고작 성벽이 무너지는 것 정도로 왜 그래?”

“예…… 예?”

“우린 세계수가 불타는 것도 봤잖아. 그 위에도 있었고. 대악마도 만났고. 이제 와서 고작 저 정도로 감탄하기엔 우리가 겪은 일들이 너무 많지 않나?”

그의 말에 키르하스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군요.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십니까? 퇴각을 하려 하십니까?”

“네 도움이 필요하다. 키르하스. 우린 정면으로 돌파할 계획이야.”

“저…… 안으로요?”

“정확히 말해선, 라비라타의 왕궁으로. 라비라타는 더 이상 살아 있어선 안 된다.”

수인 호족 연합과 에르브 공작이 안정적으로 황야의 남부 지역을 정리해야 했다. 라비라타는 전생엔 없던 변수 중 하나였고, 후일 일어날 카라드스카르와의 전쟁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반면 카라드스카르를 확실하게 저지해냈던 키르하스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페르난데스는 고삐를 꽉 쥐며 박차를 찼다.

“따라와. 지금부터 우린 암살자가 될 거다.”

“뭐, 평소에 하던 일들이군요.”

적의 기지 종심으로 파고들어 적의 수괴를 죽인 후에 생환한다. 이런 방식으로 바라볼 때에 지금껏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이단심문청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던 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페르난데스가 피식 웃자, 키르하스는 재빨리 말을 몰아 페르난데스의 앞으로 치고 나가며 외쳤다.

“제가 길을 잡겠습니다!”

“믿겠다!”

키르하스의 눈은, 본능적인 영역에서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건 어떤 마법적인 작용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이 갖는 특수성 탓이다.

전생의 키르하스. 정확히 말해서 뭄토의 수평 세계 속의 키르하스에겐 수많은 업과 격이 쌓여 있었고, 카단과 함께 넘어오는 과정에서 키르하스의 영혼과 합쳐지며 괴리가 발생했다.

본능 어딘가에 숨겨진 다른 세상의 ‘완성형’ 키르하스가, ‘이것이 답이다.’라고 외치는데 지금의 키르하스는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그 영적 괴리감이 발현된 것이 그녀의 눈이었다.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충분한 격을 쌓아 올린 이후엔 자연스럽게 사라질 능력이겠지. 그 이후부턴 특수한 능력이 아니라, 냉철하게 판단하여 내린 결정이 되겠지.

영웅의 격이란 그런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자조하며 그녀를 쫓았다. 그로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숙명적인 능력이다. 평생에 걸쳐 그런 자들과 대적하고, 쫓겨 다니며 그가 얻은 것이라곤 치열한 생존 본능과 비열한 계략뿐이었지만.

어쨌건. 그런 영웅의 탄생 과정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그녀가 성장하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았던 그로서는. 키르하스의 경쾌한 외침과 행동이 못내 대견하기만 했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흙먼지 속으로, 전장을 가득 휘몰아치는 마력과 토사의 안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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