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불씨 던지기 (5)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점점 더 속도를 줄였다.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비명도, 음산한 절규도. 어느덧 그들의 주위엔 스산하게 불어닥치는 모래바람의 마찰음뿐이었다.
“은공, 이건…….”
“쉿.”
페르난데스는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며 재빨리 수화를 했다. ‘뭔가 있다.’ 그들은 가만히 멈추어 서서 주위를 훑었다.
모래바람이 한순간, 변덕처럼 가팔라지며 먼지 아래에서 실루엣이 드러났다.
석상이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이 새파랗게 서 있는 곡도를 들고 있는 석상이 양손을 가슴에 교차한 채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키르하스에게서 두어 발자국 떨어졌다. 그는 손을 하늘 위로 올리고는, 딱. 하고 부딪쳤다. 동시에—
-콰직! 쾅!
그가 서 있던 자리로 곡도가 날아와 꽂혔다. 하나가 아니었다. 적어도 다섯 개의 곡도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모래 먼지를 뚫고 나타나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내려 꽂혔다.
페르난데스는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그는 곡도를 뻗고 있는 석상을 가만히 올려 보았다. 마력 술식이 빼곡히 박힌, 그건 일종의 골렘이었다.
‘소리에 반응하는군.’
-성능이 떨어졌어. 논리 구성 회로가 망가졌나?
‘술자의 지배력이 저하된 것일 수도 있지.’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이 있다. 그는 키르하스의 손을 잡고 그 방향을 향해 걸었다.
마력의 흐름을 일종의 물결이라 여긴다면, 가장 상류로 향하는, 가장 밀도 높은 흐름이 바로 이곳이었다.
-후우우웅…….
먼지가 점차 흩어지고 있었다. 점점 더 시야가 넓어져 간다. 하나씩, 그의 주위 사물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모래에 반쯤 파묻힌 바닥, 드러난 일부분을 볼 때 가도에 해당할 것이다. 반듯한 모양으로, 일직선으로 쭉 뻗은 가도의 바닥 타일이 수준 높은 석공 기술을 방증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의 양옆에 석상들이 서 있다. 도열한 병사들처럼 동일한 간격을 가지고, 하나씩하나씩. 시야가 더 넓어졌을 때.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파라오의 길이군.’
이곳은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였다. 파라오를 지키는, 신의 형상을 조각한 석조 골렘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도로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월과 모래 폭풍에도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슬 퍼런 예기를 흘리며…….
-후우우우웅.
바람이 먼지를 휩쓸고 지나간다. 시야가 완전히 밝아졌다. 푸른 하늘이 보일 정도로 맑게.
그는 지금 모래 폭풍이 불고 있는 지역의 정중앙. 태풍의 눈 속에 서 있었다.
맑게 트인 하늘은 동그랗게 잘려 나가 있었다. 이 장소를 중심으로 몇 미터만 더 나아가면 모래 폭풍이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매의 울음소리가 창공 너머에 울려퍼졌다. 하늘을 날던 매가 우아하게 한 바퀴 원을 그리더니, 그대로 내려앉아 길의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길의 끝엔 거대한 제단이 올라와 있었다.
[오라.]
양측에 서 있던 골렘들이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르난데스가 앞으로 나서려는데, 키르하스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는 황급히 수화를 맺었다. ‘함정 조심’. 대충 그런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이고는 발을 옮겼다. 스르릉, 칼을 뽑아 손에 쥔 키르하스가 사방을 경계하며 그의 등 뒤를 지켰다.
* * *
제단의 상층부까지 그 어떤 방해도 없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가동시켜 놓은 마력 회로조차 무색할 만큼. 제단의 곁을 지키는 석상들은 그저 물끄러미, 제단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단은 새하얗게 빛나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히 정오의 햇살을 반사하는 것이 아닌, 저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뿜는 석재로 축조되어 있었다.
음각을 파고, 황금을 채워 만든 화려한 주언과 상 아시트 특유의 석판화가 제단의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를 밟았다.
한 걸음씩 더.
그리고 마침내, 그는 제단의 최상층에 도착했다.
“…….”
세 사람이 있었다. 아니, 세 ‘것’이 있었다. 생전의 모습을 거의 완벽히 보존한 미이라가, 화려하게 치장된 깃털 부채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왕궁 시종의 복식을 하고, 온갖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두 미이라가 보였다.
그리고 그 시녀들의 가운데에 ‘그녀’가 누워 있었다.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보석 벌레들로 꾸며진 거대한 옥좌 위에……. 페르난데스 또한 놀랄 만큼 아름다운 미녀가 보였다.
아니, 미녀의 가면이다. 아마도 생전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겠지. 황금과 갖은 염료로 섬세하게 조각된 가면을 쓴 미이라가 그 위에 누워서,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라비라타…….”
[짐의 이름 중 하나지.]
천상의 선율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본디 망령 군주의 병력은 성대가 없어 물리적인 음성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그의 정신에 직접 언어를 구사하는 일종의 마법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이 정도의 섬세함이라.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사실상 허세에 가까운 낭비였다.
[구원자여. 어찌하여 그대가 우리를 공격하는가?]
놀랍게도, 라비라타에게선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수천 병력을 모래 아래 파묻어 버리고, 망령들을 풀어 모래 더미 아래에 깔린 생존자들을 수확하라 명령한 이치고는.
“구원자라.”
[네가 아시트의 어둠을 물리쳤으며, 짐과 아시트의 영웅들에게 빛을 돌려주었으니. 아시트는 그대에게 빚이 있다. 구원자여. 어찌하여 짐을 적대하는가?]
아, 그걸 아는 녀석이었군.
페르난데스가 판단하기로는, 라비라타는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다. 뭄토가 되살린 콘클라베라는 집단 자체가 상 아시트 시절 가장 위대한 군주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강대한 마법사였기에, 자신을 사로잡은 뭄토의 주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박이 풀림과 동시에 자연스레 깨달았으리라.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고.
그러니 구원자라.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대악마의 어둠에서 그녀 자신과 그녀의 백성들을 구원해준 구원자라. 그리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너희의 시대는 천 년 이전에 이미 끝을 맺었다. 산 자에겐 산 자의 세상이 있는 법이니.”
[그렇다면 사자(死者)는, 설령 그들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곱게 죽어 먼지가 되어야 한단 뜻이냐?]
“너희의 의지는 마법으로 짜여진 허상에 불과하다. 영은 유지되었으되 혼은 사라졌고, 백은 희미하며 성은 뒤틀렸지. 뭄토는 꼭두각시가 필요했을 뿐이니, 너희의 영혼을 온전히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너흰 너희가 생전이라 생각하는 그 인물들의 그림자에 불과해.”
[그림자라고 했느냐.]
라비라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시녀들이 부채를 치우고는 조심스레 물러섰다.
[맞다. 피부에선 더 이상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고, 어떤 악기도 아름답게 연주하지 않으며, 어떤 음식도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림자라. 우리가 생전의 행동을 모사하고 있을 뿐이라 했느냐.]
“그렇다.”
[아니다.]
얇은 보라색 휘장을 걷어내며 라비라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정오의 햇살 아래로 그녀의 황금 마스크가 반짝 빛났다.
[생명을 규정하는 정의가 무엇이더냐. 삶을 구분하는 기준이 고작 유기체의 활동성에 그친다 하더냐? 누가 감히, 어느 누가 감히 우리의 의지를 ‘모사품’이라 멸칭할 수 있다더냐. 너는, 너희 산 자들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죽어가느냐?]
라비라타는 분노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말하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탄생부터 탄생에 대한 열망과 명백한 자유 의지를 품은 채 태어났느냐? 너의 첫 들숨과 날숨은 그저 저열한 본능이었을 따름이고, 네 육신은 그저 너의 부모가 가진 형질을 뒤섞은 모사품에 불과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그저 부모의 모사로 그치겠느냐?]
-이거 제법 흥미롭구만.
페이자쉬가 킬킬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싸늘하게 라비라타를 바라보았다.
라비라타는 시종이 공손히 올린 잔을 받아 들었다. 잔을 든 라비라타가 그 안의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 내었다.
-쪼르륵…….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포도주다. 대단히 오래된, 삭고 썩어서 걸쭉해진……. 라비라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고, 태어난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죽기 위해 사는 존재라는 의미가 되더냐? 아니다. 우리는 대악마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나, 놈의 꼭두각시가 되기 위해 축조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전부를 의미하지는 못한다.]
라비라타는 물끄러미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반박할 말들은 많았지만, 저 파라오를 논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이 삶을 증명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주제에 대한 고민은, 지금의 페르난데스에겐 더없이 무거운 화두였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있는가.
저건 분명 라비라타의 본심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설득하기 위해 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득이라니? 콘클라베의 파라오들은 결코 타인을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주장할 뿐.
라비라타의 저 말들은…… 분명 진심일 것이고, 또한 간절할 테지만. 그녀답지 않다. 파라오답지 않다. 상 아시트 시대의 파라오들이란, 설득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주장하는, 그리고 지배하는 존재였을 뿐.
-약해져 있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스르릉, 모래 먼지가 달라붙은 칼집 아래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검이 뽑혀 나왔다.
약해져 있다. 페이자쉬의 말이 옳았다. 라비라타는 기울어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대규모 마법을 부렸다. 그것은 페이자쉬의 시그니처 스펠에도 대적할 만한 섬세하고 고등한 마법이었다.
페이자쉬는 당년에도, 시그니처 스펠을 사용할 때마다 극심한 백레시를 겪었다. 고작해야 콘클라베. 그 정도의 인물이 그런 수준의 마법을 부린다면 분명 손해가 만만치 않을 터.
망령 군단은 파라오의 힘에 따라 권세가 변한다. 지금 저 아래. 망령들의 반응과 굼뜬 움직임이 라비라타의 부진을 방증하고 있었다.
“네 말이 옳다, 라비라타. 너희의 존재는 단순한 모사품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지.”
[그렇다면 구원자여. 짐과 평화 협정을 맺을 생각이 있나?]
“그래서 더욱 미안하구나.”
페르난데스의 말에 라비라타가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물었다.
[무엇이?]
“너희의 의사를 존중하고, 너희의 삶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이미 늦었다.”
-스릉.
칼날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대검의 검신이 똑바로 라비라타를 향해 뻗었다. 그 첨단에 선 라비라타를 향해서.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숙였다.
뭄토의 봉인이 예상보다 빨리 풀린 것. 콘클라베가 날뛰게 된 일. 뭄토를 격살하며 콘클라베 개개인에게 자유 의사를 준 일들에 이르기까지.
나의 업이다. 모든 일을 내 탓이라 돌리는 종교인들의 자세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그의 업이다. 이를 짓밟는 것들조차도.
어차피 꼭두각시에 불과해? 적어도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페이자쉬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더라도.
꼭두각시라. 누가 감히 이 세상을. 그 자신을. 진정코 자유롭다 여길 수 있는가. 이 수평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페르난데스에겐……. 모든 사건이 거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했다.
산 자의 그림자이며, 생전의 모사품이라 한다면. 그 또한 다를 바 없다. 페이자쉬의 그림자이며, 페이자쉬가 바라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사품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리라.
‘네 삶이 너의 형틀이니. 죄인이여, 나아가라.’
카단의 시련을 떠올렸다. 사냥의 신이 내리는 형벌은 ‘삶’이었다. 페이자쉬의 삶은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된 비극이었고, 이를 계승한 페르난데스에게도 같은 형틀이 묶여 있다 하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라비라타.”
[……무엇이냐.]
“기도해 주마. 너희의 신에게, 너희의 언어로……. 간절히.”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