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불씨 던지기 (6)
자세를 잡는다. 칼을 끌어당겨 중단으로. 단번에 하늘을 찢을 기세로. 다인 왕의 대검, 그 묵색 강철이 빛을 빨아들이듯이 검게 일렁인다.
치이익—, 하고 혈관 내부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신성은 마력을 거부한다. 사제는, 더군다나 디모니카는 체내에 마력을 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 그 경지와 업이 정점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사제는 결코 완성된 전사의 힘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치이이익!!
핏줄이 불거지며 혈관 내부를 흐르는 신성이 격렬히 반발한다. 그러나 억눌러 담는다. 매 순간 흩어지는 마력을 매 순간에 다시 되잡아 이끈다. 그렇게 한 바퀴.
전신에 마력이, 실낱같은 마력이 흐른다.
-스르륵.
머리칼이 저 스스로 떠오른다. 정점에 도달한 검사가 전투를 준비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어떤 경계면을 조심스레 내디디며 한 발자국 앞으로.
[평행선이구나.]
라비라타의 한탄이 들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 희미하게 이명이 뒤섞이는 청각 너머로.
-마법을 써라.
오늘 하루 단 한 번의 마법도 사용하지 않은 지금. 청동 옥좌의 잔량은 충분했고, 라비라타는 대마법의 사용으로 허약해진 상황이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능히, 손쉽게 그녀를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이라 불러도 좋고, 머저리라 욕한다 한들 좋다. 마법을 사용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신념이었다.
페이자쉬의 삶이 형틀이라. 후회로 점철된 장절한 비극이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업을 잇고 행한 일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비극이다. 그러니 결코…… 결코. 쉽고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 있더라도 결코.
그러니 이것은, 참회이며, 순례이고, 또…….
[짐은 대적하겠다. 구원자여. 우리의 운명이, 그 끝이 종말뿐이라 하더라도 맞서리라. 빈손으로 강물을 퍼 가라 한들, 그렇게 하겠다.]
연민이다.
[짐은…… 결코 죽을 수 없다. 짐의 죽음은 과거의 죽음과 다르다. 짐의 죽음이 곧 이들 전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 아니, 우리의 영혼이 과거의 모사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정지는 죽음이 아닌 소멸이다. 결코, 짐은 짐의 백성들을…… 결코…… 사토 밑의 먼지로 남아 영원토록 삭아 잊혀지게 하지 않겠다!!]
저 불쌍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하라.”
매 순간에 혈액이 날뛴다. 신성을 품은 혈액이 격렬히 끓어오르며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극도로 정밀한 마력 컨트롤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의 육신 내부의 마력은 소실되었을 것이다.
실낱같은 마력이 혈관 위를 달린다. 매 순간에 소모되며, 또 매 순간에 보충되며. 타오르는 신성 그 너머로. 섬전처럼, 마력이 달렸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자세를 다잡아…… 뛰었다.
* * *
칼날이 허공을 긋는다. 하늘 저 위부터 그 아래로 곧게.
곧장, 라비라타의 양옆에 시립한 시녀들이 뛰어들었다. 라비라타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수인을 짚었다.
-삐이이익!
라비라타의 옥좌, 그 위에 앉은 매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활개 쳤다. 매가 창공 위로 올라가고,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캉!
페르난데스는 양옆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협공을 후려쳐 밀어냈다. 시녀들의 검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두 미이라는 양손을 교차하며 곡도를 뽑아 휘둘렀다.
-캉! 카득!
이건 시간 벌이다. 예기가 흐르는 검술, 분명 놀라울 만큼 정교하지만…… 검의 길에 의(意)가 없다. 저들의 눈, 가면 아래에서 안광 흘리는 눈에도 영만 남아 있을 뿐, 혼이 없다.
-캉!
칼을 튕겨내 밀어붙인다. 가볍디가벼운 몸이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동시에 빙글, 칼을 돌려 막았다. 다른 시녀가 날카롭게 파고들어 내지른 곡도가 대검의 검신에 물리며 밀려났다. 그대로 반원을 그어 밀어내고 그 틈을 타서 전진.
라비라타의 목전까지, 단 세 걸음. 그사이에 달려들어 그에게 검을 찔러 들어오는 시녀들의 연격이 도합 서른 합. 그 모든 공세를 물리치며 다시 한 발자국!
[짐의 백성들은 잊혀지지 않으리라!]
라비라타의 외침이 들렸다. 페르난데스의 칼이 그대로 그녀의 목을 향해 달렸다. 닿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수인이 완성되고, 강대한 마력이 창공에서 내려 꽂혀 그녀의 몸에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극도로 확장된 인지의 순간에. 페르난데스는 라비라타의 수인을 ‘이해했다.’
‘축조, 조성, 구축, 제물…….’
-그리고 환각. 제기랄. 이런 저력이……?
‘그 짧은 새에 다섯 수를 맺었다고?’
수인을 중첩할수록 마법의 난이도가 배로 뛴다. 수인이란, 전투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대신해 손으로 펼치는 도해. 마력 회로의 연산식을 오직 손가락의 얽힘으로 대체하여 마력의 흐름을 조율하는 방식이다.
다수의 수인을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하나의 수인이 그 위에 겹쳐질 때마다 회로를 거치는 마력의 변수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모든 변인을 통제해야 하는 입장에서, 연산 난이도는 제곱으로 증가한다.
그러므로 다섯 수.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맺어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고난도 주문을 칼 한 번 휘두를 시간에 다섯 번. 지금 저건…….
‘목숨을 걸었군.’
주문의 완성 여부와 관계없이. 일정 난이도 이상의 주문은 백래시를 강요한다. 보통은 회로의 과부하로 마법 능력의 상실, 혈류의 역행으로 발생하는 내상 정도에 그치지만. 저런 과격한 주문은 영혼을 태울 것이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발악.
그래. 저건 발악이다. 손쉽게 죽어주지 않겠다는 발악. 일격을 위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성벽을 허무는 주문을 펼친 라비라타다. 그녀의 발악이라 한다면 얼마나 악독할 것인가……!
-막아야 한다.
‘아니. 돌파한다.’
그러나, 돌파한다. 자신감도 오만함도 아니다. 이건 업이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되돌려 자세를 다잡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라비라타의 손에서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 * *
모래 폭풍이 해일처럼 제단 위를 휩쓸었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칼을 쥔 힘이 잠시라도 약해진다면 금세 격류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쏴아아아…….
모래 낱알이 갑주에 부딪치며 타닥였다. 불똥이 튈 정도로 거센 마찰이었다. 맨살이 드러난 손등과 양 뺨은 이미 할퀴고 찢어진 상처로 피가 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쏴아아아…….
모래가 멎었다. 페르난데스는 희미한 시야를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이, 그리고 넓은 대지가 보였다.
-환각이다.
‘알아.’
단순히 주문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단지 마법 주문만으로 그에게 환각을 심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뭄토 수준의 힘이 필요했다.
라비라타의 주문은 그보다 더 섬세하고 교묘하여, 소리와 빛, 마력과 촉감을 모두 동원했다.
모래가 부딪쳐온 그 순간, 페르난데스는 환각 주문을 인지했다. 인지와는 별개로 주문의 파훼는 시도할 수 없었다. 이미 완성된 주문이었다.
-스르륵.
바람이 불었다. 그가 서 있는 제단의 아래로, 드넓은 도시의 정경이 보였다.
거대한 도시.
사람들이 활기차게 웃고 떠들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때, 이 도시가 살아있는 존재들의 것이었을 때의 정경일 것이다.
거대한 왕성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폭포가 강을 이루고, 도시 전역으로 뻗어가 식수를 공급하고 있었다.
완벽한 석조 공예로 만들어진 수로들과, 그 수로 위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 멱을 감거나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저 멀리. 웅장한 외성 너머로 번쩍이는 창칼을 들고 움직이는 병사들마저…….
‘아시트.’
상 아시트 제국이 온전하던 그 시절의 모습이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이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글쎄…… 네 그 바위 같은 심장에도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없더냐?”
그의 뒤에서 한 여인이 걸어왔다. 화려하고 가벼운, 몸의 실루엣을 거의 그대로 드러내는 의복을 걸친. 위대한 파라오의 모습으로. 타박, 타박. 맨발이 제단 위를 걸으며 가벼운 발소리를 냈다.
“한때 위대했으므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의 죽음이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던 시절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모든 것들에 진실함이 있던 시절이.”
라비라타는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곧 후, 하고 웃었다.
“네 말대로다. 우리는, 콘클라베들은 뭄토에 의해 죽음 너머에서 일어서며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으로 쌓아 올린 업과 격을 잃고 전락한…… 추락한 그림자이며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을 증명하는 요소를 하나씩 쥐고 있었지.”
“그게 뭐지?”
라비라타는 휘적, 하고 손을 저었다. 허공에 빛무리가 반짝이며 지도를 그렸다.
곧, 그녀의 손길에 따라 지도가 한 구획씩 빛을 내뿜었다.
“마흐라스의 알타락은 명예를. 프타하의 투탄 가르텝은 정복을. 대사제장 파프테트는 수집을, 타니스의 아포타자르는 생존을.”
네 군데. 페르난데스 또한 알고 있는 지도였다. 세부적인 위치에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저들 모두가 각각 콘클라베의 봉인지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짐. 이바리스의 라비라타. 짐은 보호를.”
“그래서 다른 종족들과 적대했군.”
“그래. 산 자들의 눈에 우리들은 괴물에 불과할 테니까.”
라비라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망령 군단은 물질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이었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그들이 되살아난 그 자리에서 요새를 만들고 도시를 증축하고, 아직까지 지하에 매장된 다른 이들을 불러 깨워내며 버텼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든 파라오들이 지배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페르난데스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힘을 비축하는 것인가?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니 변수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그나마 제 흐름대로 주도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변수라.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다만 ‘살아 있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망자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겠는가.
“어려운 부탁이 되겠느냐.”
“이 정도의 주문을 고작 설득을 위해 사용한다고? 백래시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글쎄. 그대를 죽일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라비라타는 침울한 눈으로,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필멸자. 그녀가 살아 있던 시절에 무수히 많은 영웅과 용사들을 만났으나 저런 존재를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마력을 단숨에 간파하는 눈, 마력 회로에 서슴없이 간섭하는 마력 파장과, 혈관 안을 내달리는 신성. 가장 강력한 전쟁 병기들을 칼 한 자루로 부수어 내는 무력까지.
그러니, 그녀가 선택한 전술은 설득이었다.
“설령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후에 무엇이 남겠느냐?”
저 사내를 죽이면 인간들이 물러나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망령 군단은 파라오의 힘에 따라 그 능력이 제한된다. 외성에서 있었던 대마법으로 라비라타의 병력은 당분간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셈이다.
저 사내를 죽이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면 지금 전장을 유지하는 다른 마법들이 깨어진다. 그 뒤로는?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이 전부가 된 그녀의 병력들은 한 줌도 되지 못한 생존자들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질 것이다.
어차피 외통수였다. 어디로 가든 죽음 이상의 결과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라비라타는 설득을 시도했다. 그녀의 목전에 달려든 정체 모를 암살자에게.
“저들은, 짐은……. 우리는. 잊혀지고 싶지 않구나.”
필멸자는 죽음 이후에 만신전의 심판을 받는다. 각각의 신들이 소유한 차원으로 넘어가, 그들이 신봉하는 신들 아래에서 영생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망자들. 뭄토에 의해 반쯤 비틀린 채로 일으켜 세워진 이 망자들의 미래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영도, 혼도, 백도, 성도. 파괴의 순간에 바스라져 흩어질 뿐.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소멸이다. 영체를 유지할 모든 요인들이 그저 미력한 에테르가 되어 사방에 흩어지는 결말을 맞이하고, 이들의 유해는 세월의 풍파 아래에 삭아 없어지며 가루가 될 것이다.
그런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사라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어찌해야 하겠는가.
라비라타는 한탄했다. 어찌해야 하겠는가…….
저 사내가 물러선다 하더라도, 저 사내를 죽인다 하더라도, 설령 지금 이 도시에 침입한 필멸자들을 모두 쫓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이, 그 다음과 다음이.
머지않은 미래에……. 결국, 인간들은 그들을 구축해낼 것이다.
아무런 연민도, 자비도 없이. 집 안의 거미줄을 치우는 정도의 심정으로. 기꺼이.
산 자의 얼굴은 너무 오랜만이라, 표정을 다잡을 수도 없었다. 라비라타는 무표정하게, 안색에 어떤 변화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래를 하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내려 보며 말했다.
‘계획을 좀 틀자.’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복합적인 요인이라고 해 두지. 적어도 라비라타가 물질 세계에 대해 완전한 중립을 선언한다면, 그리고 파라오의 군단이 나에게 복속한다면. 나쁘지 않은 기물 하나가 확보된다.’
-이 해골들을 모래 아래 파묻어도 같은 결과가 나올 텐데. 이 지역은 수인과 에르브 공작이 지배할 것이고, 그 둘 모두 어차피 우리의 병정들이 될 거야.
‘미래를 생각한다면 하나라도 더 많은 병사들이 남는 것이 좋아.’
-쯧.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수인을 짚었다. 한 수, 한 수 섬세하게. 화륵, 검은 헤일로가 그의 머리 뒤에서 불길을 내뿜었다. 곧 그의 손을 타고 사슬 한 줄기가 내려와, 라비라타의 목에 걸렸다.
“이건…….”
“너희의 존재를 긍정하고, 너희의 생존을 보장하겠다.”
“대가는…… 무엇이냐.”
“너희의 모든 것.”
라비라타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늘진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리하겠다.”
그건 복종을 넘어, 대황야가 정복되었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라비라타의 손을 마주 잡으며 생각했다. 아포타자르는 강자의 편에 서는 파라오이며, 대황야의 수인들은 그의 손아귀 안에 있고. 에르브는 그가 만들어낸 영웅이 될 것이다.
제국 서부부터 대황야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 그의 명령권 아래에 들어왔다. 계획을 바꾸자. 이 정도의 군세라면 능히, 황제를 대적할 수 있다.
머지않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