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불씨 던지기 (7)
모래 폭풍이 멎었다. 처음, 보르아는 전투의 흥분으로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다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점점 날이 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길이 트였다.
“어…….”
“대장, 공격할까요?”
“잠깐, 잠시만 기다려 봐.”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갑작스레 기능을 정지한 해골과 골렘들을 바라보았다. 놈들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준비하던 기사들로서는 퍽 놀라운 일이고, 또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장 저 가운데에 뛰어들어 영웅적인 분전을 하는 것은 좋은데, 결과가 뻔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옥쇄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놈들이 안광을 이글거리며 멈춰 섰다. 그리고 길이 트였다. 저 먼 대로 끝, 왕성이 보이는 저 거대한 길목부터 이곳까지 일렬로.
그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망자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다. 마치…… 왕의 행차를 보위하는 병사들처럼.
-쿠구구구궁…….
짧은 지진이 대지를 휩쓸었다. 그러자 모래 먼지 아래에 묻혀 있던 대로가 드러났다. 제국인이 가진 최고의 석공조차 감히 시도하기 어려울, 극도로 아름다운 상감이 그려진 길이 떠올랐다.
“으엇……!”
그리고 동시에, 모든 해골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기사들은 칼을 어설프게 쥐고, 당황한 채로 멈춰 섰다.
-척, 척, 척.
망령 군단 특유의 완벽한 제식으로 발맞춰 걷는 무리가 보였다.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는 골렘들이었다. 그들이 묵직한 발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그대로 작은 지진이 되어 기사들의 가슴을 떨었다.
“이거, 이거 안 좋아 보이는데요?”
한 기사가 신음했다. 저놈들 중 하나라도 공격을 시도한다면, 과연 여기 있는 부상병들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놈들이 명백히 이 방향으로 오고 있는 이상, 저들을 막아 세울 병력이라곤 자신들이 전부였다.
물러설 수는 없다. 에르브 공작의 안위가 확인되지 않았을뿐더러, 지금 저 토사 아래엔 아직까지 살아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백성들이 남았다.
기사들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칼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생존이나, 보호가 아니었다. 시간 벌이. 단 일 초라도 더 이 자리를 지키리라.
[너희가 영웅의 가솔들인가.]
저 멀리에서, 천상이 노래하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압도적인 위압감을 지닌 목소리가. 이 자리에서 그 목소리에 경동하지 않은 것은 보르아뿐이었다.
경지가 부족한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힘이 빠져 칼을 늘어트렸다. 보르아는 이를 아득 깨물며 한 걸음 나아갔다. 적어도 이야기가 통한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다. 망자들이 대화를 원한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대화가 가능하다면 시간 벌이는 충분할 터.
“그대는 누구시오!”
[질문은 짐이 했다만…… 뭐,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문화의 차이겠지. 좋다. 이방인들이여.]
-착!
동시에, 골렘들이 발을 멈췄다. 골렘들의 중앙에서 거대한, 화려한 가마가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거대한 제단 같은 생김새의 가마였다.
그 위에, 누가 보더라도 이 도시 모든 존재들 중 가장 고귀한 자로 보이는 이가 서 있었다. 그 가녀린 실루엣 위로 온갖 장신구들이 반짝였다. 시녀들이 그녀를 위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짐의 백성들이여. 짐이 가장 아끼는, 짐의 보물들이여. 짐이 누구던가.]
여인이 손을 휘적 저으며 말하자, 무릎 꿇은 수많은 병정들이 일제히. 그러나 각기 다른 목소리로 외쳤다.
[천칭의 여제!]
[이바라스의 파라오!]
[왕 중의 왕!]
[평야를 만드는 군주!]
[제국의 수호자!]
[배격자!]
[이만 맘루스의 충성받는 자!]
생전 처음 듣는 호칭이며, 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는 호칭 또한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허영심 높은 황제조차도 저런 호칭들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하라 시키진 않을 것이다.
기사들은 그 기세에 압도되며, 그리고 다소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망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신을 섬기는 사제들처럼 경건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호칭을 외쳐 대었다.
[그만.]
여인의 말에 모든 병사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여제는 홀로 담담히 말했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짐은 이들의 주인이며, 그대들이 침략한 이 도시의 군주이다. 자. 격이 맞는 대상은 어디에 있느냐? 짐은 평화를 논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도다.]
“……!!”
그 말에 보르아는 깜짝 놀랐다. 평화? 다 이긴 전쟁에서 직접 사령관이 친전하여 평화를 요청한다? 전쟁사의 상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저런 행동은 패전국의 왕이나 할 짓이었다.
대화가 통하는 망령을 처음 본 것도 있었으나, 그 망령이 말한 첫마디가 평화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다. 보르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평화……? 평화라고 하였소……?”
[네 말투를 지적하지 않겠다. 짐은 이해심이 많도다. 하지만 그대가 짐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려 한다 하더라도 짐에 대한 모욕이로다. 짐은 격이 맞는 상대와 대화를 원한다. 대령하라.]
“죄, 죄송하오……. 합니다…… 어…….”
보르아는 말을 높여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고귀한 핏줄이라 하더라도 전쟁에서 적국의 귀족에겐 결코 존대를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나…… 저 망령이 화를 낸다면 그 대가가 지금 여기 전부의 목숨이 아니겠는가.
“주군께선 지금 저 모래 아래에 계십니다. 저희도 주군을 찾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최대한 비굴하지 않게 말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보르아는 갑작스레 고위 왕족과 대화한다는 이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아, 사령관이 직접 전선에 친전했었다는 말이냐? 놀라운 일이다. 감탄스러운 일이다. 경의를 표하마.]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적 저었다. 동시에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들이 스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모래들은 원래 저들이 가지고 있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보르아가 숨을 두 번 들이마시기도 전에, 이 온 사방을 덮고 있던 거대한 사구가 어느새 황토색 성벽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아래에, 지금껏 파묻혀 있던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몇몇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또 몇몇은 아직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보르아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감전된 것처럼 펄쩍 뛰며 달려나갔다.
“전하! 전하!!”
그 사이에 그들의 주군이 있었다. 기사들은 거의 동시에, 체면을 차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달려갔다. 죽은 시체를 치우고, 다친 병사들을 일으켜 세우며. 그 아래에 쓰러져 있던 그들의 주군에게…….
“비켜라!!”
보르아는 가장 앞에서 주군을 부축하던 기사를 쳐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건틀릿을 벗어 던졌다. 피가 진득하게 묻어 나온 손가락을, 주군의 코 아래에 밀어 넣었다.
“숨을…… 숨을 쉬신다…… 전하께선 살아 계신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다들 목소리를 낮춰라! 전하께선 저 아래에 묻혀 계셨다! 어찌 무사하시겠느냐!”
보르아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조심스럽게 에르브 공작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공작은 숨을 헐떡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보르아는 다급히 그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전하, 하명하십시오!”
“손 치워라.”
“……예?”
“냄새가 심하다. 손을 치워라, 이놈아.”
-탁!
에르브는 보르아의 손을 치우며 스스로 일어섰다. 잠시 비틀거리던 그는 고개를 탈탈 털어 모래를 쏟아내고는 픽 웃었다.
“제기랄. 살았군.”
“전하……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십니까?”
“오냐. 거의 조상님들을 뵐 뻔하긴 했구나. 호들갑 떨지 마라. 이게 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으니.”
“지금 말씀 올릴 때는 아니긴 하지만…… 이게 최악이 아니었다면 대체 언제가…….”
“네가 여덟 살 때 어디서 구했는지 장검을 빼들고 적장의 수급을 따올 테니 말 한 필을 내어 달라고 외칠 때가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에르브는 픽 웃으며 걸어 나갔다. 기사들은 지금의 상황도 잊고 킥킥 웃으며 공작의 곁에 섰다. 다친 병사들이 그들의 뒤에 남아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적들의 기세와 숫자 또한 여전히 압도적이었지만, 오히려 기사들에겐 이제 여유가 보였다.
그들의. 리뷔에 기사단의 편제 그 중심은 언제나 공작의 존재였다. 공작의 생존이 확보된 이 순간엔, 기사들에겐 더 이상 긴장감과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공작은 그들을 쓱 훑어보았다. 많이 살아남았구나. 장하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에르브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내려 보고 있는 여인에게 향했다.
여인은…… 그 복식은 망자의 것이었고, 황금 가면은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아 그저 권위적이었지만. 그 아래에서 빛나는 안광은 어쩐지, 흐뭇하다는 듯 보였다.
오히려 제국 귀족 나부랭이들보다 배는 인간적이군. 에르브는 픽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대가 나를 살렸군.”
[그렇다. 그대는 짐을 죽이려 했지만.]
“자비로운 처사에 감사드리오.”
[대화가 가능하더냐? 그대의 상태가 온전치 않다면 짐은 며칠의 말미를 더 내어줄 수 있다.]
“더 이상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 걱정은 감사하오만 난 괜찮소.”
에르브가 웃으며 말하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평화를 제안한다. 짐의 영토 밖으로 나선다면, 그 길의 안전을 보장해 주마.]
“우리가 다시 그대를 도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도 좋은 것이오?”
[그 보장은 다른 이가 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다만 짐의 호의다.]
“우리를 보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무릇 군왕의 자질은 가신의 태도라. 열세 앞에서도 당당하며, 위급한 순간에 군왕의 안위를 먼저 살피니, 난세의 영웅이며 치세의 대왕이 될 자로다. 짐은 그대와, 그대의 가신들이 기껍다.]
에르브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라비라타가 이어 말했다.
[혹자들이 말하길 우리는 죽은 자들이며, 우리의 도시는 죽음의 땅이라. 그러니 자랑스레 말하라. 그대의 덕이 그대의 군사들을 구원했으니. 그대는 저들의 으뜸이로다.]
“좋게 봐주는 것 참 고맙소만…….”
에르브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라비라타와, 그녀의 군대를 보았다. 예기가 삼엄하고, 그 숫자가 성벽 위에서 대적했던 것보다 배는 많았다. 싸우면 필패다. 저 정도의 군세와 설령 평야에서 회전으로 마주했더라도, 승기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너무 얕봤구나. 에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방금의 전투에서 사망했을까. 아마 첫 진입에 들어섰던 이들 대부분은 주검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의 병력과 달리 제국군은 더 넓은 성벽에서, 더 급하게 도성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피해는 공작의 곱절은 많았을 것이다.
패전했다. 에르브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패배는 낯설지 않다. 50년간 술탄과의 전쟁은 승전과 패전의 교환이었다. 그 언제나 패배가 아니라, 생존이 더 중요한 법.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적어도 나의 군대는 결코 그대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소. 내 이름을 걸고.”
[믿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소. 염치 불고하고…….”
[말하라.]
“이 전장엔 나의 병사들 말고, 다른 군사들이 함께 참여했었소. 아직 살아 있는 병력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복귀하고자 하오. 하지만…….”
[그들이 훗날 짐에게 창칼을 돌릴 수도 있다. 그 말을 하고자 하는가?]
“그렇소.”
라비라타는 손을 휘적, 하고 저었다. 곧 지진이 일어나며 건물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모래 바람에 휩쓸려 허물어졌던 건물들과, 스스로 터져 나갔던 외성까지.
이 도시의 모든 구획이 깨끗하게. 전투 이전의 상태로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었다. 저 멀리, 웅장하게 서 있는 첨탑과 망루들. 그리고 거대한 외성벽까지 온전하게…….
[그들 중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자가 있다면, 적어도 오늘 그들은 죽지 않으리라.]
“감사……하오.”
[짐의 호의는 거래였다. 그대는 짐에게 감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라. 짐은 더 이상 이방인과의 접촉을 즐기지 않겠다.]
라비라타는 그리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가 제단 위로 올라가, 화려하게 꾸며진 왕좌에 앉자, 골렘들이 일제히 제단을 등에 지고 일어섰다.
라비라타는 천천히 그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고, 해골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하, 살았…… 살았습니다.”
“그래. 후…….”
공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발을 헛짚고 비틀거렸다. 보르아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하려 하자, 공작은 보르아의 팔을 가볍게 쳐냈다.
“놓아라. 아직 적진이 아니냐.”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온몸이 아주 부서질 것 같구나. 너희는 내색하지 마라. 적진에서 사령관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야 있겠느냐.”
공작은 픽 웃으며 기사들의 부축을 떨쳐내고 스스로 걸었다. 그의 등 뒤로 핏물이 진득하게 스며 나오고 있었다.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 뒤로 함께 걸었다.
* * *
“우, 우린 살았소!”
“닥치시오.”
에버라드는 흥분해 떠드는 귀족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며 모래를 털어냈다. 그들 또한 에르브 공작과 파라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니, 이 도시에 살아 있는 모두가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저들과 가까이 있는 몇몇만 들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입을 다물게 시킨다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용의주도하게도, 파라오는 그 대화를 모든 도시에서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도시의 끝과 끝까지. 그들의 대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화 협정을 맺어? 자비를 보인다고? 영웅…… 영웅이라…….
에버라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이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병사들을 잃었다면, 그랬다면 이보단 나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제국 군단이 전장에서 전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면 황제는 선제후들의 병력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차라리 사태가 온건하게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제국의 전력이 집중된다면 고작 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있는 망령 군단 정도는 정리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상황이 문제였다.
“헌데 지금 저 해골 우두머리가 무슨 소릴 한 것이외까?”
“우릴 정치적으로 매장하겠다는 뜻이오.”
멍청한 돼지 같으니. 에버라드는 경멸의 시선을 숨기지 않으며, 옆에서 생존의 기쁨에 감격한 귀족에게 대답했다.
“그, 그게 무슨…….”
“모든 병사들이 이 일에 대해 떠들겠지. 한둘이 아니고, ‘모든 병사들’이! 어찌 숨길 것이오? 어떻게 입을 막을 수 있겠소. 거리마다 음유시인들이 제국의 위대한 영웅과, 그에게 감화된 망자들의 군주에 대한 미담을 퍼트리겠지. 선제후의 덕망이 드높아지니 참으로 보기 좋겠소. 아니 그렇소?”
에버라드의 말에 살아남은 귀족들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아둔한 것들을 고위 귀족이라고……. 에버라드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우리 시대에 괴물이 탄생한 것이오. 정치 생명이 황제 폐하와 비견될 수 있는 괴물이.”
에버라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대체 누구의 생각이란 말이냐.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망령 군주가 제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이런 행동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진심으로 저것이 ‘적국 군주에게 감화된’ 왕의 태도란 말이냐. 아니…… 아니다.’
중앙 귀족들은, 설령 기사단의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정치적인 생물들이다. 그들은 상대의 의사를 정치와 관련지어 파악하는 것에 있어서는 달인의 영역에 닿아 있다.
그러니, 에버라드는 이 일을 정치적 쇼맨십이라 파악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굳이 저 대화를 도시 전역에 퍼트릴 리가 없었다. 에르브 공작이 한 짓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 전장에 나서서, 같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있다. 이 사태에…… 제국의 정치에 해박하고, 망령 군주와 연계할 수 있으며, 어쩌면 수인 호족들을 충동할 수도 있고, 에르브 공작의 뒤를 봐주고 있는 누군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에버라드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괴물이 있을 수가 있나.’
아무래도. 죽다 살아나서 과민해진 모양이다. 에버라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귀족들과 함께 퇴각을 준비했다.
‘그래. 그런 괴물이 있을 수가 없지.’
모든 것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판도라 보는 것은 억측이다. 차라리 모든 것이 우연이고, 제국에게 대단히 악의적인 우연이라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