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황제의 눈
라 메르티옹의 귀족 거주구는 대단히 삼엄한 경비로 보호받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이라고 수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귀족 거주구로 흘러드는 상수도와 흘러나오는 하수도가 다른 구획에 비해 배는 많았다.
따라서, 귀족 거주구의 중심지로 향하는 지하 수로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아이언사이드는 마치 수로의 모든 길목을 외우고 있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철퍽.
수로는 단순히 오염된 폐수만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끈적하고 질척한, 지독한 시취.
부패한 사체가 만들어내는 악취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바닥이 질고, 머리가 아릿해지는 악취다.
“음…….”
두건으로 코와 입을 막는 것 정도로 이 악취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면면은 준신, 용, 기사, 그리고 아이언사이드였다.
신화적인 존재거나, 마법사거나, 아니면 적어도 육체에 마력을 사역할 수 있는 인물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묵묵히 앞으로 걸으며 워커들을 처리했다.
“청소부가 된 기분이군.”
“왜, 나쁘지 않은 경험이지 않아? 귀족 나으리께서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해보겠어.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하자고.”
“첫째로, 난 귀족이 아니다. 아이언사이드.”
-스겅.
기사는 칼을 휘둘러 워커의 목을 쳤다. 그는 검날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걸지 마라.”
“까탈스럽기는. 거기 당신들은 좀 괜찮아? 목표가 머지않았어.”
“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그래. 지독하구나.”
아벨은 씁쓸한 눈으로 진창 위에 떠내려가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처리한 망자가 물경 마흔 구를 넘는다. 이 망자들…… 흡혈귀들에 의해 일어난 망자들은 전신이 부패할 때까지만 존속하므로, 저들은 적어도 보름…… 그간의 겨울을 생각할 때 적어도 두어 달 안에 만들어진 사체들이란 말이로구나.”
“그래. 싱싱한 시체들이지.”
“그렇다면 이 참극을 벌인 존재는, 두어 달 동안 적어도 하루에 한 사람 이상의 생명을 탐했구나. 오랜 시간, 능숙하게.”
“……그렇겠지.”
아벨의 말에 아이언사이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벨은 꿈틀거리는 시체의 이마에 칼날을 올리고는 스륵, 하고 내렸다.
시체는 짧게 경련한 이후 움직임이 멎었다. 아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생물은 필연적으로 생의 시간 동안 다른 삶을 삼키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설령 흡혈귀라 하더라도.
모든 흡혈귀들이 자의로 사람의 생혈을 마시는 것은 아니며, 모든 흡혈귀들이 자의로 흡혈귀가 된 것 또한 아니다.
페르난데스의 말투를 빌려 보자면, 그래. 참작의 여지가 있다.
생존을 위해, 비탄 속에서 태양을 피해 하수구 밑을 거닐며 이따금씩 생존을 도모한다면. 비통한 일이지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수호룡은 그것이 인간들이 벌이는 죄악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한다.
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자가 영양을 포식하는 것이 죄악이 아니듯이. 그건 구축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증오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체들은…… 썩은 피가 고여 있다. 시체의 팔과 다리엔 깊은 자상이 있다.
단순히 부패했기 때문이 아닌, 생전에 입었음이 명백한 상흔으로 인해 절뚝이고 있다.
“생존이 아닌 유열을 위해, 단순히 쾌락을 위해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지독하구나.”
아벨은 사체의 머리에서 칼을 뽑아내며 말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칼을 털어내고는 앞장서 걸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뒤를 따랐다.
* * *
쇠창살 너머에서 잠시 멈춰 서서, 아이언사이드가 조심스레 락픽을 꺼내 들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쇠창살이 열렸다. 훅, 하고 더운 공기가 불었다.
“여기부터 영주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야. 다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조심하자구.”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낡은 문이 열렸다. 음울한 횃불이 타닥이고 있는 긴 복도가 나타났다. 선명한 혈향이 그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
작은 소리가 들렸다. 복도의 중간, 조그마한 문들이 뚫린 곳을 통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일반인보다 못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없다. 모두들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적어도 다섯 개의 문이 이 복도에 늘어서 있었고, 모든 문 안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과, 광기에 전 웅얼거림이 들렸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문 하나를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아빠가 여기 있어. 아빠 손 잡아. 착한 우리 딸. 우리 딸.”
한 사내가 사슬에 묶인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사내는 조그마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사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극도의 분노가 기사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이언사이드는 기사의 어깨를 짚었다.
-으드득.
기사가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이언사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 모두를 구하며 빠져나갈 수는 없어. 우리 목표는 영주뿐이야.”
“저…… 모습을 보고도…… 무시하란 말인가?”
“이봐, 이너 서클 나리. 우리 감수성을 운운하기엔 너무 더러운 꼴을 많이 보지 않았나?”
데인 왕국의 이너 서클은, 그 존재 자체가 제국의 아이언사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인의 암살, 테러, 정치 공작과 사보타주. 당연히 왕국 내의 가장 더러운 치부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성이 바닥을 구르는 지독한 광경에도 익숙해야 했다. 모든 그림자 아래에서 악마가 웃음 짓는 시대였으므로.
눈을 돌리면, 잠시 한눈을 팔 때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독을 먹이는 광경 따윈 일상적이기까지 하다.
가혹한 수탈, 들끓는 도적, 퍼져 나가는 역병, 광기 들린 마법사의 실험, 이종족과 괴물들의 습격.
이런 세상 위에서 소작농과 농노들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고, 이건 봉건제를 유지하는 동부 왕국 연합 전반에 걸쳐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비극이다.
그러므로, 익숙해져야 한다. 그녀의 말에 기사는 눈을 내려 깔고는 으르렁거렸다.
“우리가 여기에서 뭘 하면 되지? 이 일을 고발하는 정도라면 지금 복귀해도 문제가 없을 텐데.”
“적어도 영주 목은 따야지. 놈의 머리를 들고 가야 증거라도 챙기지 않겠어?”
아이언사이드는 차갑게 말했다. 단순한 목격 증언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나 흡혈귀의 머리를, 심지어 흡혈귀가 된 영주의 머리를 들고 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시점부터는 성전 선포가 가능해진다. 영주의 타락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대영주의 것이라면 영향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신전 교회의 휘광을 등에 업지 않는다 하더라도, 데인 왕국의 원탁 의회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전통이 있다.
[편력 전쟁]. 귀족과 왕족들이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고 한 사람의 편력 기사로서 수행하는 전쟁. 소속과 신분을 넘어 대의를 위해 헌신하겠다 맹세하는 전쟁. 모든 원탁 기사들의 만장일치하에 일어나는 전쟁이.
지금 시대에 와서 그것은 위명뿐인 전통이었으며, 역사에 기록된 마지막 편력 전쟁이 400년 전의 것이었으나. 초대 기사왕 데인이 매장 교단을 상대로 벌였던 첫 편력 전쟁 이후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나.”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이 맞아. 비센테 왕은 작은 증거 하나로도 기꺼이 성전을 선포할 사람이니까.”
비센테 왕이 원탁 의회에 갖는 지배력은 이미 봉건 왕국의 것을 넘어섰다. 그는 이미 당대에 신화를 이룩한 영웅이었으며, 원탁 기사들은 대영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기사다.
타락한 마녀의 술수와 전설 속 매장 교단의 부활, 그 모든 사건을 정리하고 망자들의 군단을 분쇄하며 일어선 왕이다. 그의 위신은 봉건 왕국의 왕이 아닌, 절대 왕정의 그것에 육박하므로.
그가 선언하는 편력 전쟁 선포가 원탁 의회의 의결에서 반려될 가능성 따윈 없다. 국내의 모든 정세를 파악한 이후에 짜여진 설계였다. 기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의기를 이용한 계략이었구나. 하지만…… 거부해야 하는가.’
기사의 눈이 사슬에 묶인 사내에게 닿았다.
수염과 머리칼이 덥수룩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거의 나체에 가까운 사내의 더러운 몸엔 딱지 앉은 흉터가 가득했다.
바싹 마른 가냘픈 몸, 그리고 손에 쥔…… 작은 손. 날카로운 것에 의해 잘려 나간 듯 환부가 깔끔한, 작은 손을 꼭 쥐고.
사내는 덜덜 떨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딸. 울지 마. 울지 마……. 무서운 아저씨들이 올 거야……. 아빠가 계속 옆에 있을게, 울지 마.”
그런 종류의 속삭임이 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든 방에서, 일관되게. 광인의 울부짖음이. 피붙이를 잃어버린 광인의 울부짖음이…….
으드득, 기사는 이를 갈며 칼자루를 납도했다. 그는 거친 몸짓으로 아이언사이드를 밀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복도를 지나 한참을 더 거닐었다.
* * *
라 메르티옹의 대영주. 베르망 드 바레스. 제국의 여덟 선제후 중 하나이며, 지금의 황제를 옹립할 시점부터 지금까지 쭉 친황파의 입장을 고수했던 제후.
동부 왕국에서부터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손아귀에 쥐고, 막대한 금전을 불리며 황금을 통해 권력을 쌓아 올린 대귀족. 황실의 자금줄이라 일컬어지는 사내.
“그런 녀석에게 황실에서 호위 하나 붙이지 않았다고?”
아이언사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영주관의 복도를 거닐었다. 아무리 새벽이 깊었다 한들, 이토록 인기척이 없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이 저택은 완벽하리만치 깔끔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거미줄은커녕 그 흔한 먼지 한 톨조차 보이지 않는 수준의 완벽한 관리다. 대리석과 청동으로 이루어진 계단참과 복도, 그리고 그 위를 덮은 붉은 융단까지도.
황금을 발라 만든 저택이나 다름없다.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나오는 가장 값비싼 사치품들로 온 사방을 덧칠해 놓은 것 같았다.
아이언사이드는 조심스레 그 위를 걸어가며 속삭였다.
“이상해.”
“함정이란 뜻이냐?”
“우릴 꼬여 내려 했다면 굳이 지하실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았을 거야. 어째서 아무도 없지? 황제가 이놈을 방치했을 리가 없는데.”
그 순간, 프레이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방치라……?”
“왜 그러시나?”
“방치…… 이상하지 않으냐?”
프레이야는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의 인간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뭐?”
“뭔가를 먹었던 흔적이 적어도 일주일 안엔 없었다는 뜻이다. 그 사람들의 위장엔 아무것도 없었어. 피부에 드러난 상처들도, 그저 생명력이 다해가는 과정에서 치료가 늦어져 곪았을 뿐이지. 일주일 이내에 생긴 상흔은 없었다.”
봄의 여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녀는 꽃봉오리와 봄바람, 그리고 탄생을 주관하는 여신이며, 또한 죽은 자들을 품으며 에인헤랴르로 빚어내는 여신이다. 그 누구보다 산 자의 수명에 민감한 여신이었다.
“노예로 잡은 이들의 고통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고문이 없다는 점에서 일단 기각이긴 하지만…… 이자들은 흡혈귀가 아니냐. 아무리 식량이 귀하지 않다 한들, 제 가축을 일부러 굶기는 짓을 하진 않을 게다. 하다 못해 묽은 귀리죽을 내어 준다 하더라도, 무엇이 되었든 삶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이 바르다.”
설령 비상식량이 아니라 놀잇감으로 잡아 놓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기껏 잡아다 공을 들여 고문까지 해두고 그대로 굶겨 죽이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짓이다.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했다. 북부인의 감성으로 볼 때, 단순히 잔인한 환경에 시선이 분산되지 않는 탓일까. 그녀는 효율성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일주일…….”
아이언사이드는 그 말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눈을 크게 치켜뜨며 움찔 떨었다.
“내가 이 지역에 파견된 것이 일주일이야.”
“그때부터 포식을 멈추었다는 뜻이냐?”
“내 행동을 미리 알았다고?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나? 아니, 그럴 수는 있지. 배신자야 늘 있을 수는 있지만…… 하지만. 왜?”
대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버리며 도망을 쳤다? 심지어 증거조차 그대로 남겨두고?
불가능하다. 아이언사이드 내부에 첩자를 두었다면, 도착하는 요원을 암살하면 그만인 일이다.
그렇다면 왜…….
“황제가 이 도시의 영주를 반드시 지키려 할 것이 분명하느냐?”
“그건 당연하지.”
“그리고 황제가 미리 그대들의 움직임을 알아챘다고 했느냐?”
“아마도.”
아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자루를 쥐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계단의 상층부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그대들의 행동을 저지하고, 영주를 지키려 하지만, 영주의 행실이 외부에 드러나선 안 될 때 쓸 수 있는 패가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충의를 다하지만, 개인의 신념이 확고한 암살자가 있다. 영주의 악행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자가. 난 그런 자를 황야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군지 알겠느냐?”
“……황제의 눈.”
태양창, 다리안 쉬라이크. 제국 최강자. 황제의 창. 샤일드의 선택받은 자. 황제의 번견…….
지난 50년 전쟁 동안, 가장 많은 제국 귀족을 암살한 사내.
“나와서, 네 행동에 대해 변호하거라.”
아벨이 말하자마자 계단 상층의 복도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화려한 응접실이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지독한 혈향이 풍겼다.
끈적한…… 다만 하수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신선한 피의 냄새가.
“다리안 쉬라이크. 그대도 타락했던가?”
“그런 섭섭한 소리를.”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각자 무기를 빼 들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응접실은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시체들이 널려 있다. 가슴이나 머리에 하나씩 구멍이 난 채로, 시종들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진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사이에, 두 사내가 있었다.
뚱뚱하고 창백한, 고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중년 사내와, 화려하게 빛나는 창을 어깨에 비껴 끼고, 바닥을 내려 보고 있는 청년이.
“이 치들은…… 제국의 이름으로 단죄했다.”
“이자들은…….”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와 손톱. 시체들은 모두 흡혈귀였다. 이 거대한 저택에 시종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이유가 있었군. 아이언사이드는 차가운 눈으로 뚱뚱한 중년 사내를 노려보았다.
“바레스 공작이 저지른 짓을 생각한다면, 목을 베어야 하는 자는 이 불쌍한 피해자들이 아니다. 다리안.”
“공작의 목숨은 황제 폐하의 것이고, 폐하께선 공작의 삶이 얼마간 더 유지되길 바라신다.”
“왜 그 말을 따르지?”
아이언사이드는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며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너는 샤일드 교회의 신전 기사다, 다리안. 어째서 흡혈귀의 말을 따르느냐?”
“제국이 무너지면, 더 많은 피가 흐를 테니까.”
다리안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은 상처 입은 짐승의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바르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르지 않다 하더라도 무고한 자들의 피는 더 적은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 제국의 환부를 뜯는다? 황자의 계획을 따르면 제국은 더 이상 제국으로 남아 있을 수 없어.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겠지.”
흡혈귀의 포식은 개인의 것에 그친다. 교회의 권위가 살아 있는 이상, 흡혈귀들은 결코 일정 이상의 선을 넘는 행동을 저지를 수 없다.
한 사람의 악행이 흐르게 할 피는, 한 집단의 전쟁이 흐르게 할 피보다 명백히 가볍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더 작은 방관.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 만들어낸 작위적인 평화.
무엇이 더 올바른가. 정의란 무엇인가.
다리안은 확답할 수 없다. 그의 신념은, 다른 신전 기사들과 같은 ‘무고한 이들의 평화’였다. 권력에 대한 야욕 탓에 황제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스스로, 황제의 마지막 안전장치가 되기를 자처했다. 황제가 타락했고, 그의 행동이 피를 불러일으키지만. 황제를 단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더 거대한 해일을 부르게 될 것이므로.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는 한도 안에서 황제를 감시할 인물이 필요하다. 다리안은 타락한 황제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맹세했다. 오욕과 진창에 몸을 담아도, 선을 향해 행하기로.
그러므로, 그의 창은. 샤일드의 신물, 태양창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다.
“황제는 필요악이다.”
제국을 좀먹는 암 덩어리라 하더라도, 환부를 절개하는 즉시 환자가 죽을 정도로 진행되었다면 품고 가야 한다.
“대안이 없구나.”
“그대는……. 페르난데스의 연인이로군.”
“나를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는 위인이었지. 그대가 있다는 것은…… 그가 결국 황자와 손을 잡았다는 의미인가.”
다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라면. 수인족을 잔혹하게 휘어잡으며 타락한 흑마법사들을 휘하에 거두고, 대악마를 향해 진격했던 그라면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그의 얼굴을 보아서, 그대들이 물러나는 것을 눈감아 주겠소.”
“쉬, 쉬라이크 경! 저 역도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닥쳐라.”
다리안은 벌벌 떠는 공작의 목덜미에 창날을 드리우며 말했다.
“가라. 너의 주군에게 나의 뜻을 전하라. 그리고 아벨. 페르난데스에게 독대하고 싶다 전해 주시오.”
“언제, 어디에서 만나고 싶으냐?”
“내가 찾아가겠노라고 전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