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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43화 (244/388)

243. 황제의 눈 (2)

전쟁이 끝나고, 라비라타는 봉문을 선언했다. 모든 이방인에 대한 완벽한 거부를.

기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황무지 남부를 지배하고 있겠다는 의미였지만, 라비라타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라비라타는 붕괴되고 있었다. 그녀의 마력 회로가 입은 피해는 상 아시트의 가장 위대한 성물로도 쉽사리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가려 하는가?]

“모든 외지인들의 추방을 명령하지 않았나?”

[그대는 외지인이 아니다. 짐은 그대에게 며칠 간의 말미를 주고 싶구나.]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말에 미소 지으며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라비라타는 복잡한 마법진 안에서 정좌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주술을 구축하는 것에 오딘의 루네글리프 다섯 수를 사용했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실이 더 큰 것 같은데.

‘기회비용은 그만 생각하지.’

페르난데스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유물을 조정하고는 일어섰다.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나.]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아마도 곧.”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등을 돌려 궁궐을 벗어났다.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궁궐에 시립한 모든 망자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성대한 송별이로군. 페르난데스는 왕궁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르하스에게 다가갔다. 키르하스는 두 필의 기마를 이끌고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은공, 망령은 안 돼요.”

“뭐가 말이냐?”

“애당초 죽은 시체들이잖아요. 저 여자는 안 돼요.”

“대답할 가치가 없다.”

페르난데스는 말의 콧잔등을 툭툭 두들기며 진정시키고는 안장 위로 올라탔다.

저 멀리 성문을 빠져나가는 인파가 보였다. 그리고 활짝 열린 거대한 성문 너머로, 수인 호족들의 군세가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비죽 웃었다.

* * *

이바리스를 가장 먼저 벗어난 것은 에르브 공작의 군세였다. 라비라타가 친히 문을 열어 내보내 준 탓이었다.

이후, 그 행렬이 온전히 빠져나간 이후에야 제국군이 성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건 페르난데스가 라비라타에게 명령했던 것 중 하나였다. 추방 순서를 철저히 지킬 것.

“저 짐승들 눈을 좀 보시오. 버르장머리 없는 잡종들이 감히…….”

기사들은 능선 너머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내려 보는 수인들에게서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인들은 아무 말 없이, 이바리스 시를 감싸듯 도열하여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패잔병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은 패잔병에 불과했다. 에르브 공작과 라비라타의 호의에 기댄 패잔병들.

선두에서 나섰던 이들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성벽 아래에 파묻힐 때 죽었고, 남은 병력들 또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에버라드 경. 베르나르 경이 옵니다.”

기사가 작게 속삭였다. 능선 너머에서 수인 호족들의 군세가 반으로 갈라지며 제국군의 군기가 흔들렸다. 어느새 저무는 석양을 배경으로.

기사들은 구원자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베르나르의 군사들을 환영했다. 멀뚱히 그들을 내려 보던 수인들의 기세가 슬슬 삼엄하던 차에, 공성전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았던 후열이 합류하는 것이 퍽 든든했다.

“에버라드 경. 고생이 많으셨소.”

“베르나르 경. 직접 나와 주어 고맙소. 부상병들을 수습해 주시오. 제기랄, 짐승 놈들. 전장에 나서지도 않았던 놈들이 저리 오만하게 굴 줄이야…….”

에버라드는 혀를 차며 여전히 그들을 내려 보고 있는 수인들의 군단을 바라보았다.

가당찮은 것들. 저치들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된 전쟁이었거늘, 저런 냉대라니.

그때, 베르나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에버라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더 멀리, 병사들의 후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나르 경?”

에버라드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는 천천히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베르나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의 후열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페르닌. 대족장의 애첩.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가……? 그의 곁엔 하트테이커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활짝 열린 성문 너머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망자들이 보였다. 감정 없이 그의 병사들을 도살하던 괴물들이…… 저 사내에게 복종하듯, 예를 갖추고 있었다.

“저게 무슨…….”

에버라드는 영민한 사내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수인 대족장을 충동할 수 있는 자, 에르브 공작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 그리고…… 망령 군단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자.

존재할 수 없는 괴물…….

“하.”

에버라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에르브 공작은 억세게 운이 좋거나, 기이할 정도로 운명을 타고난 자가 아니었다.

세상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권력을 쥐여 주기 위해 발악한 것이 아니라…….

한 사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인가.

“베르나르 경.”

“미안하오.”

“배신을……. 무엇을 대가로 우릴 배신했지?”

“…….”

베르나르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짓과 함께 제국 후열의 병력이 일제히 산개해 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교본 그대로를 재현한 돌격 방진이었다.

그리고 능선 너머에서 수인 호족들이 천천히 다가와, 어느새 에버라드의 군사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발악할 텐가?”

분명 먼 거리였을 텐데. 사위가 긴장으로 고요해지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물…….”

“제국은 참 이상한 국가지.”

페르난데스가 여상한 말투로 말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군사들은 감히 키르하스와 함께 있는 그를 적대하지 못했다.

지난 전투에서 소모되지 않은 수인들이 그들을 포위한 이상. 대족장의 말 한마디면 그들 모두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썩어 문드러진 토양을, 놀라울 만큼 뛰어난 체제로 유지하고 있지. 부패한 관리와 타락한 귀족들이 넘쳐나 그 악취가 사방을 찌르는데, 견고한 체제와 부유한 영토는 천 년이 지나도록 고스란히 유지되니.”

-다각, 다각.

그의 기마가 다가올수록, 에버라드는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대륙 동부권의 기술력, 행정력, 그리고 오랜 시간 축적된 사료들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것이 아닌 부분이 없지. 군사와 행정의 범위를 넘어, 문화의 영역에서 제국은 이미 대륙의 절반을 장악했다. 자,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과연 이 대황야 동부의 문명이 전과 같을까?”

대황야 동부. 제국과 남부 소국들, 그리고 동부 왕국 연합에 이르는 거대한 권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은 천 년의 기나긴 시간 동안 하나의 견고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단단한 토양 위로 쌓아 올린 시간은, 고스란히 문명 사회의 지혜로 치환할 수 있다.

전화에 휩싸이지 않은 제국 중앙의 대서고에는, 설령 문명 전역이 멸망하더라도 한 세기 안에 복구할 수 있을 수준의 자료가 모여 있다.

문벌 귀족들과 제국의 석학들은, 체계적인 학술 환경을 구축하지 못한 다른 소국들과는 그 궤가 다른 정보량을 소유하고 있으며.

제국의 공업과 상업은 이미 하나의 패러다임을 이룩하고 있다.

작게는 마력등에서부터, 크게는 제철, 조선, 건축과 석공, 약학과 의학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멸망은, 적어도 대륙 절반의 멸망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다. 부패한 토양에선 작물이 자랄 수 없다. 퇴비의 수준을 넘어서, 이미 토질 자체가 오염된 상황에선 불가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치 신이 점지한 것처럼, 제국엔 한 세대에 수십 명씩. 놀라울 만큼 뛰어난 인물들이 발굴되곤 한다.

견고한 체제가 보장하는 학술 환경 탓인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인가.

페르난데스는 그것이 항상 궁금하곤 했다.

대체 저놈들은 왜 안 망하는 거지? 거의 모든 외부 세력들의 침략을 받아내면서도, 꿋꿋하게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페르난데스는 그것을, 자존심이라 해석했다.

제국민들이 갖는, 제국에 대한 자긍심.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를, 가장 오래된 국가를 유지하는 이들의 자긍심.

건국 이래로 단 한 번도 깃발이 꺾인 적 없는 위대한 국가의 백성들이 갖는, 본능적인 자긍심이라고.

“괴물…….”

“그래. 너는 멍청하지 않지. 놀라운 일이야. 이런 머저리들 사이에서 너와 같은 인물이 나타날 수 있다니. 그리고 그런 인물이…… 이리도 영락할 수 있다니.”

귀르의 불타는 성채 기사단장, 에버라드. 전생에 안면이 있는 자는 아니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 놀라운 일이다. 전생에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영웅이 아니었던 존재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이.

저 사내에게 주어진 정보는 지극히 적었다. 그저 상황과 추측으로 그의 정체를 유추해냈을 것이다.

비상하고, 냉철하다. 단 세 마디를 나누기도 전에, 다만 베르나르의 표정과 주위의 분위기만으로 이 모든 사건의 배후를 지목해낸 것이다.

“죽이기엔 아깝군.”

“…….”

에버라드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 목을 움츠리고 있다가, 벙긋거리며 웃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선 저 짐승들이 돌연 공격할 기세였는데, 대족장의 애첩이 갑작스레 자비를 베푼다는 듯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에버라드는 여전히 차갑게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말 아쉬워.”

“결투를.”

에버라드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는 칼자루를 으스러질 듯 쥐고,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그의 본능은 칼을 뽑길 거부하고 있었다. 비록 제국 중앙의 기사단은 반쯤 문벌 귀족들의 동호회로 전락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의 자리를 따낸 것은 그의 노력과 자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저 사내는 자신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다. 몰락한 선제후를 영웅으로 만들고, 수인들에게 모종의 이윤을 제공해? 아니, 그건 오판이었다.

저 사내의 눈은 고작 그런 지엽적인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저자는 처음부터, 제국의 멸망만을 바라보며 수를 놓고 있었다. 저자의 눈에 이 자리의 모든 존재는 그저, 체스판 위의 기물에 불과할 터.

에버라드는 저 음울한 눈의 청년이, 더 이상 청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회하고, 잔혹하며, 강대한 괴물로. 시대와 국가를 내려 보는 거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귀족의 자존심이자, 또한 기사단장의 의무였으며, 마지막으로…… 저 사내가 말했듯이, 제국민의 자긍심이었다.

제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괴물에게 맞서는 제국민의 자긍심이었다.

“결투를 신청한다. 대황야의 페르닌. 나는 귀르의 에버라드 드 로앙이다.”

“결투라. 대가는?”

“내가 이긴다면 내 군사들의 목숨을 보장해라.”

“하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대단하군.”

에버라드는 처음부터 자신과 자신의 군사들이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마지막 도박을 하는 것이다.

놈은 이 순간에도 최선의 수를 다했다.

실제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베르나르의 눈빛이 바뀌고 있었다. 에버라드는 자비를 구걸하는 대신, 긍지를 보이며 배신한 제국 군사들을 충동하고 있었다.

너희는 제국민의 긍지가 없느냐고.

대단한 기개이며, 그것이 반드시 죽을 자리라 예상한 상황에서 던진 수라는 점에서 더욱 높게 평가할 만했다.

베르나르의 군사들은 그 수가 적지 않다. 베르나르가 에버라드의 손을 들어준다면 전황은 난전으로 번질 것이다. 지금이야 조용히, 수인들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겠지만…… 제국군 전체를 적대하며 난전이 번지면 반드시 부차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소문을 이용해 영웅을 만들어야 하는 페르난데스의 입장에서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며, 에버라드는 이 순간에 그 사실을 깨닫고 도박을 던진 것이다.

‘왜 이런 놈이 전생엔 이름도 없이 묻혔지?’

-그러게 말이다. 쉽사리 묻힐 인재는 아니었을 텐데.

페르난데스는 짧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자루를 쥐었다.

“정말 대단하군. 네 판단이 옳다. 베르나르는 지금 갈등하고 있겠지.”

“……!!”

“그러니, 베르나르. 잘 봐 두고, 신중하게 선택해라.”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칼을 뽑아 올렸다. 그와 동시에, 에버라드 또한 칼을 뽑아 치켜들었다. 저놈의 계책은 분명 완벽했지만, 단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어설픈 자존심은, 반드시 공포 아래에서 꺾이는 법이며,

페이자쉬는 공포를 통한 지배에 익숙한 사내였다.

-두두두두두!

두 필의 기마가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석양이 핏빛으로 물들고, 수인들과 인간들, 패잔병과 그들을 포위한 군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서걱.

칼이 석양을 담아 번쩍이고, 깨끗한 호선을 그으며 돌았다. 칼을 잡은 손이 핏물을 뿌리며 허공에 치솟고—

-스겅.

몸이 양단되며,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세 번의 검격이 단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그것이 양손 대검으로 펼쳐진 검술이라는 것을, 보고도 쉽게 믿는 자가 없었다.

“자, 베르나르. 옥쇄하겠느냐, 보전하겠느냐.”

“충성하겠습니다.”

석양을 등지고 그림자를 내리며,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그의 등 뒤로 화살이 쏟아지며 패잔병들의 머리 위로 빗발쳤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중앙엔 한 비보가 전해진다.

제국 서부 원정군, 라비라타와의 전쟁 도중 괴멸.

생환한 잔존 병력은 군단 규모의 체제 유지를 실패하고 에르브 공작의 군단에 흡수됨.

불타는 성채 기사단, 전멸.

레반스 기사대, 전멸.

제국 중앙 2군단, 전멸.

그리고 그 뜻은, 지금 황실엔 수도 권역의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곤 무장 병력이 전무하다는 뜻이었으며—

“폐하!! 폐하!! 데, 데인, 데인 왕국의 급보가…….”

데인 왕국의 비센테 1세. 기사왕이 직접 선언한 [편력 전쟁].

열한 명의 원탁 기사.

물경 삼백이십여 명의 기사들을 포함한 이천오백 기의 기마병이 제국의 동부로 향하고 있는 이 순간에, 동부 요새를 수비하기 위해 파견할 병력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권력은 언제나 칼끝에서 나온다. 황제의 지난 수십 년의 전쟁 실패와, 최근에 이어진 이 사건으로.

“폐하…… 뷜랑 공작이…… 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선제후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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