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황제의 눈 (5)
제국의 심장은 팔텐노이아에 있다. 제국 중앙의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 어떤 선제후의 지배권 아래에도 있지 않으며, 오로지 황실에 복속되어 있는 이 땅에.
팔텐노이아는 선제후들의 알력과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독립된 영지다. 황제가 세습 직위가 아닌, 각 영지의 지배권을 가진 선제후들에 의한 선출직인 탓에, 제국의 수도는 기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정 선제후가 제위를 이양받을 때마다 제국의 수도를 선제후의 주도로 옮기는 것은 막대한 행정력 손실을 야기한다. 그렇기에 시황제는 모든 선제후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완전 중립 지대를 수도로 삼았다.
먼 옛날, 팔텐노이아는 제국의 전신 ‘부족 연합체’의 회담장이었다. 부족 대의회에서 선제후 의회가 탄생하고. 대부족장이 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국가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이래로 천여 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팔텐노이아는 단 한 순간도 적의에 노출된 적이 없는 신성한 도시였다. 빛의 도시이자 문명의 요람. 최후의 방주…….
-허명이지.
페이자쉬는 비 내리는 평원에서 이죽였다. 팔텐노이아 북서부 곡창지대는, 초여름의 부슬비로 희뿌옇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래. 허명이지.’
여황제 르네 필리파의 집권기 당시에 팔텐노이아는 세 번 불탔다. 영지의 북방 경계선을 지나면 곧장 귀르, 축복받은 무역항이 나온다. 평시라면 풍부한 해상 유통망을 통한 무역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이지만…….
-북부인들이 침공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지역이었지.
칠흑의 에리크가 남부 정벌을 시작했을 당시, 트레뮐레 궁중백가는 귀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 대한 방어 병력 지원을 포기했다. 귀르 자체는 안전할 수 있었지만, 귀르 인근의 모든 해상 지역은 피로 물들었었다.
그리고 귀르를 무시한 채 진격한 몇몇 북부인들은 끝내 팔텐노이아를 침공하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카라드스카르.’
카라드스카르의 대진격 당시 르네 필리파의 가문, 카르벨리에 공국은 황야에서 벌어진 대회전에 대단히 큰 병력 지원을 투자했다. 당장 대황야에서의 전쟁에 패배하면, 그대로 카라드스카르의 진군 경로가 리뷔에로 고정될 것이 뻔했던 탓이다.
르네 필리파는 가문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제국의 거의 모든 병력이 서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에…….
-뷜랑 공작…….
제국의 행정력과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그 순간, 앙투앙 드 세포르. 뷜랑의 대공작이 독립을 선언했다. 그건 지금 상황과도 동일하다. 비록 적어도 50년은 이르기야 하지만. 뷜랑 대공작은 여전히 제위를 노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쏟아지는 빗물을 투구 아래에서 느끼며, 습한 여름날의 공기를 맡고 있었다.
젖은 철물이 물비린내와 섞여 기묘한 악취를 흘렸다. 땀과 흥분에 전 군사들은, 피가 끓은 탓에 빗속에서도 서늘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둥! 둥!
전장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물안개 저 너머, 뷜랑 공작의 군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많다. 평원의 시야 범위 내 그 어디에도 여백이 없다.
-산개진이군.
‘우리의 병력이 적은 것을 아는 거야.’
전장의 시야는 지도 위의 시각과 다르다.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바라보는 시야는 평면과 입체의 극단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
지휘관들은 냉철하게, 해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할 것이다. 적의 병력이 다소 우월하긴 하지만, 애당초 방어 병력은 공격 측에 비해 갖는 이점이 다대하니까.
그러나 병사들의 시야에선 그렇지 않다. 적의 병력은 끝이 없어 보이기만 한다. 물안개로 차단된 시야 너머에는, 뷜랑 공작의 까마귀 인장이 그려진 깃발이 가득했다.
-기세 싸움으로 몰고 가려 하는군.
뭉친 병력의 방진은 단단하다. 그러나 산개한 병력의 진영은 본디 가진 것보다 더 큰 병력으로 위장할 수 있다. 다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는 충분히 위협적일 만큼 쉽사리 무너진다.
그러나…….
“창을 들어라! 창을 들어! 겁먹지 마!”
장교들이 고함치며 아군 진영을 들쑤시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뷜랑 공작은 머저리가 아니다. 그는 대단한 야심가이며, 실제로도, 전생에 르네 필리파와 대적해 팔텐노이아를 한 차례 불태운 이력이 있다.
팔텐노이아는 지난 천 년간 단 세 번 불에 탔다. 한 번은 북부의 침공이었으며, 다음은 지금 진군하는 저 강력한 군사 지휘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본을 보여 주어야겠어.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의 세력. 당시 이르기를, ‘진홍대공의 창’이 만들어 낸 업적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말에 미소 지으며 지휘부로 향했다.
* * *
“세포르 공작의 군세는 도합 만육천, 개중 천오백 명이 기병대요.”
베르나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기병대장으로서 그는 아군의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칠천. 놈에 비해 반수 이상 적지. 제기랄. 지원 요청이 모조리 거절될 줄은 몰랐소.”
“정말 몰랐나?”
“…….”
에르브의 말에 베르나르는 대답할 수 없었다. 황실의 권위가 바닥에 추락했으며, 황제의 지원 요청을 받을 대부분의 병력들은 각자의 영지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데인 왕국의 진군으로 제국의 동부 권역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 트레뮐레 백작가는 때론 정치로, 때론 직접적인 전투로 황제의 팔다리를 끊어 놓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제국 황실을 향해 지원을 보내줄 친황제파 선제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몸을 사리며, 오히려 뷜랑 공작이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데인과 트레뮐레에 공격받지 않은 친황제파 선제후들은, 피아 구분을 할 수 없어 침묵하는 중이었다. 귀르의 배신은 황실의 권위에 장례식을 치러 준 셈이니까.
“이런 와중에도 황제는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는군.”
“폐하께선 지금 분주하시지요.”
제국 궁중부 원내서경, 피에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부유한 행정 귀족 특유의, 따듯하고 온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피에르는 황제의 입장을 대변해 파견된 자였다.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를 단순한 스피커로 여기지 못했다. 기묘한 분위기…… 얼음장 같이 차가운, 그리고 어딘가 비틀린 분위기가 그에겐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인가? 퇴로라도 물색하고 있나?”
“하하…… 카르벨리에 대공. 폐하께선 결코 제국의 수도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키르하스의 뒤에 서서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흡혈귀인가?
‘지금 낮이잖아.’
-데이 워커일 수도 있지.
‘릭터 수준의 흡혈귀가 고작 황제의 수하 정도로 만족할 리가.’
흡혈귀들이 지닌 태양의 저주를 이기어 낼 수 있는 수준이 되려면, 한 혈족의 수장 정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프란츠리트 혈족의 릭터가 그랬듯이.
“황제 폐하께선 작금의 사태를 보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길 원하십니다. 지금도 세포르 대공에게 평화 사절을 보내고 계시지요.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와중이니, 가능하다면 누구의 피도 보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제 와서 앙투앙이 곱게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물러날 것 같소?”
“물론 그렇지 않겠지요. 하지만 어찌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피에르의 말이 옳았다. 누구의 피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리라. 그러나 에르브도, 키르하스도. 아니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지 않았다.
황제가 피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 리가 있는가. 애당초, 이 자리에 황제의 병력 따윈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싸우게 된다면 승산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8할.”
피에르의 말에 키르하스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키르하스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피에르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귄위가 가득한, 나른한 청록색 눈동자가 맹수처럼 빛났다.
“그것도 너희들이 개짓거리를 한다는 가정 탓에 2할을 뺀 수치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야전 사령관은 언제나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지요.”
“미꾸라지처럼 말하는군. 나는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제국 귀족.”
키르하스는 고개를 털털 흔들며 뒤로 손을 뻗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손에 담뱃대를 쥐여 주고는 불을 붙였다. 키르하스가 스읍, 하고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귀족의 표정이 굳었다. 회의실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그리고 그런 그녀를 누구도 저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그녀의 권력을 대변하고 있었다.
“적들은 멍청하게 퍼져 있고, 뭉쳐 있지 않은 보병은 기병들의 먹잇감이다. 저놈들은 그걸 몰라.”
“기병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대족장? 베르나르 경. 대답해 보시지요.”
“……아군 기병대의 수가 적보다 적습니다. 의기가 충천한다 하더라도, 승산은 높게 쳐 봐야…….”
“10할.”
키르하스는 베르나르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턱을 까딱이며 대답했다.
“내가 데려온 나의 부하들은 태어날 때부터 말 위에서 모유를 물었고, 어린 시절 공놀이 대신 사냥을 하던 짐승들이야. 너희로 따지자면 그래. ‘기사’ 계급 정도가 되겠군. 저들 기병이 천오백이라 했나? 그중에 기사는 얼마나 되지?”
“그저 기사를 계급이라고만 이해하신다면…….”
“그래. 전투에 참가해 직접 창에 피를 묻혀 본 적 있는 기사라고 정정하지.”
“그렇다면 많아도 삼백이 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기사들에게 마땅한 영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사라는 작위는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한 기병대를 모조리 기사로 채워 넣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다.
기사와 동행하는 종자들, 그리고 그 종자를 수행하는 수행원들. 그들 모두가 기마술의 달인들이므로. 당장 창칼을 쥐여 주어 기병대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작의 천오백 기병대 중에 실질적으로 위협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자는 그보다 적다.
그러나, 수인들은 그렇지 않다. 수인들의 기병대는 그 수가 곧 기마 전투의 전문가들이란 뜻과 같다. 키르하스의 병력은 고작 오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단순히 ‘기사대’의 숫자로만 친다면 적의 전투력을 상회할 것이다.
“나머지 놈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라 해. 밀리지만 말고. 뛰며 싸우는 것은 나와 내 짐승들이 할 테니.”
키르하스는 오만하게 말하며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길게 누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뒤로 꼬리가 탁탁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꼬리로 페르난데스의 종아리를 쓱 감았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했죠? 멋있죠? 그래. 잘했다. 그런 의미로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꼬리를 꾹꾹 눌러 주었다.
“흐긱?”
“……?”
“큼. 크흠. 담배가 맵군. 페르닌.”
회의는 큰 결정 없이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수도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전투 지침은 모두 짜여진 상태였으므로, 피에르는 전략의 방향성을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막사를 벗어나야 했다.
* * *
병력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수준까지 다가왔지만, 전투 나팔이 울리지는 않았다. 명목상 뷜랑 공작은 ‘빈 수도를 수호하겠다.’라는 이유로 진군한 것이었던 탓에, 그들 스스로 방어군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선제권은 에르브에게 있었다. 그리고 에르브는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마무리 지을 생각 자체가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의견이었다.
“보급이 길게 유지되진 않을 걸세.”
“알고 있소.”
진군 당시, 페르난데스는 지연전을 요구했다. 수도 앞에서 두 군세가 치고받는 상황이 일어난다면, 황제는 단기 결전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필요는 없다.
최대한 세포르 공작의 발을 묶어야 한다. 그의 영지 주도인 뷜랑은 서부 국경선 너머 북부로 조금 더 올라간 지역에 있다. 그리고 그 뜻은, 리뷔에의 인근이란 의미였다.
서로의 출발지가 비슷하다 했을 때, 세포르는 언제든 쉽사리 아군의 보급선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급선은 리뷔에를 통한 것이 아닌, 수도에서 자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실의 보급선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가장 유력한 인근 영지인 귀르가 황실을 배반한 이 시점에서 황제의 자본력이 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적들 또한 그러할 테니까.”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백만의 군세가 있다 한들 굶주린 군단은 더 이상 군단이 아니다. 그리고 보급이란 충분할 필요가 없었다. 보급의 가장 중요한 점은 단 하나뿐이다.
‘적보다는 많을 것.’
전투가 발생할 때까지. 군단을 유지시키는 보급양이 적보다 많기만 한다면 그 총량 자체는 유의미하지 않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아군의 군세를 움직이지 않고, 적의 보급망을 무너트릴 가장 좋은 방책을 가지고 있었다.
-화르륵.
페르난데스의 손짓과 함께, 모닥불이 암녹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늙은 수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주군. 시작할까요?]
“그래. 네게 약속한 대로.”
파르탁이 요구한 수인족의 ‘이득’에 대해, 페르난데스는 ‘선제후의 부유한 영지를 약탈하라’고 명했다.
수인은 재물을 얻어 기쁘고, 에르브는 적보다 많은 군량으로 전투를 준비하니 기쁠 것이다.
그날 이후, 대황야에서 이어진 수인족 군세가 인근 모든 영지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세포르 공작은 분개하며, ‘외부 세력과 결탁해 제국을 팔아넘겼다.’라고 에르브 공작을 성토한다.
그러나 에르브 공작은 ‘내 영지 또한 약탈당했다.’라고 공표했으며.
키르하스는 비통한 표정으로 세포르 공작의 사절에게 말했다.
“나의 실책이다. 내 부재를 틈타 부족 내에 배신자들이 또 나타났으니, 참으로 수치스럽구나. 내 친히 그 배신자들을 징벌하겠다.”
그녀의 선언과 함께 더 많은 수인들이 뷜랑 공작령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세포르 공작은 이를 갈며 철군을 명했다.
“본디 진군보다 철군이 어려운 법이오.”
“그리고 선제후 간의 내전은 명분 싸움이니, 우리가 먼저 놈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겠지.”
“전쟁에 확신이 어딨겠냐마는,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놈이겠지.”
페르난데스와 에르브는 같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세포르 공작이 수도의 경계선을 밟은 지 삼 일. 전투 한 차례 없이 공세와 수세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