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황제의 눈 (6)
“이런 빌어처먹을. 개 같은, 비열한, 짐승과 흘레붙은 놈들!!”
세포르 공작은 어금니를 으스러지도록 깨물며 기마를 몰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패잔병의 몰골을 한 공국 병력들이 행군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었다. 단, 한 차례의.
“그 더러운 잡종들의 병력이 어디까지 도착했다던가?”
“뷜랑은 아직 건재합니다만, 라일렌, 모라스, 하펜 시가 수성 중에 있습니다.”
“제기랄. 라일렌이라면 뷜랑 바로 앞이 아니냐!”
공작의 일갈에 감히 대답하는 가신이 없었다. 수도가 코앞이었고, 명분이 확실했으며, 수도의 병력은 한 줌이 안 되었다. 실제로 출정하는 길과 리뷔에에서 대립군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공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 육천? 수도의 민병들을 다 끌어모아도 만 명이 되지 않는다. 듣자 하니 황무지에서 죄 바스러지고 간신히 끌어모은 병력이 고작 그것이 아니냐? 오히려 낭보로다. 뷜랑의 사내들이 얼마나 강인한지 알려줄 기회로구나!
실제로 세포르 공작은 에르브의 진군 소식에 희희낙락하며 진군에 박차를 가했다. 병력 공백으로 치안 유지에 차질이 생긴 수도를 지키겠다. 주도 인근의 군권을 무력으로 장악하여 제위를 이양하려는 뻔한 속셈이었다.
그리고 그 뻔한 속셈에 반대하는 선제후 따윈 없었다. 그에게 반대할 만한 선제후들은 시의 적절하게도 2황자의 반란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그 병신이 제 아비를 죽이겠다는데 한 칼 거들어 주어야겠구나. 아, 샤일드시여. 정녕 면류관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공작은 실패 따윈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 군사력이 텅 빈 뷜랑 지역은 돌연 등장한 마적 떼에게 불타고 있었다.
-삐이이익…….
어디선가 매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뷜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산길을 바라보았다. 그의 군세가 스물거리며 협로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군.”
“예?”
“척후에서 들리는 소식은 없느냐?”
“여전히 카르벨리에 대공은 팔텐노이아 인근에 주둔 중이라 합니다. 수인 대족장이 저들의 군사 몇몇을 이끌고 리뷔에 방향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 미천한 계집은 곧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 그건 괜찮다.”
세포르는 그렇게 말하며 울창한 산을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저녁. 저 산턱만 빠져나가면 넓은 평야 지대가 이어진다. 그 뜻은, 야습을 시도할 이가 있다면 저 야산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는 뜻인데…….
‘야습을 시도할 적대 병력이 이 근방엔 없다.’
세포르는 애써 고개를 털며 생각했다. 에르브 공작이 분견대를 파견한 것도 아니고, 대족장의 기병이라 봐야 고작 삼사백 기가 전부이며, 그의 군세는 만오천여 명의 대군이다.
‘하지만 찝찝하군…….’
* * *
페르난데스는 나무 위에 앉아서, 산의 협로 아래로 걸어가는 병사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페이자쉬가 짓궂게 코를 킁킁거리며 이죽거렸다.
-패배자의 냄새가 나는군.
‘이제 더 짙어질 텐데, 뭘.’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는 함께 큭큭거리며 웃었다. 귀족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명분’과 ‘체면’이었고, 세포르는 명분 싸움에서 패배한 채 회군하고 있었다.
세포르가 처음 내건 명분은 ‘황실 수호’였다. 제국 수도의 치안 공백을 자신의 군사력으로 채워 넣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 동원된 병력이 만오천이고, 공작이 스스로 전군을 이끌고 진군한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을 터였다.
이에 에르브 공작이 내건 명분 또한 ‘황실 수호’였다. 동일한 명분을 지닌 두 귀족이 맞붙을 때엔, 더 큰 군사력을 가진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회전은 불가피해 보였다.
만오천과 육천. 모든 전쟁이 양적 우위로 성패를 가름하는 것은 아니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투란 숫자 놀음이다.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는 결코 개개인의 기량으로 뒤집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명분 싸움’이다.
“파르탁. ‘약탈자’들은 어디까지 진행하고 있지?”
-명하신 대로 뷜랑을 제외한 모든 도심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공성에 성공한 지역이 있나?”
-그럴 리가요.
페르난데스가 들고 있던 횃불 안에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르탁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인 야적 떼가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한들 성벽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야적에 가담한 전사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 쭉정이들 아닙니까.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들으며 픽 웃었다. 공식적으로 뷜랑을 공격하고 있는 수인 전사들은 키르하스의 치세에 반대하는 ‘반군’들이다. 그리고 짐짓 대단한 기세로 영지 전체에서 날뛰고 있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진짜 본대. 키르하스의 부족 전사들이 모인 진짜 본대는 대황야에서 진군하고 있다. 제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했다 하더라도 부족 사회인 이상 병력 소집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노략질을 하고 있는 이들은 ‘분견대’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인들이 자랑하는 ‘불패’ 군단은 이제 막 대황야 동부 지역에 있을 것이다.
명분 싸움이다. 제 영지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 제국의 수도를 지원하겠다며 전병력을 끌고 오느냐. 이런 종류의 조롱이 귀족 사회에 퍼질 것이다. 세포르 공작의 체면은 이미 바닥을 치게 되었다.
체면 때문에라도 세포르 공작은 뷜랑으로 향해야 했다. 더군다나, 키르하스가 말하지 않았는가.
-저들은 나의 지배에 반하는 역도들이니, 내 직접 그들을 단죄하겠다.
단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장소가 어디겠는가. 반역자들이 뷜랑에 있으니, 본군을 이끌고 뷜랑으로 향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세포르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제 꾀에 제가 빠진 격이지.’
수도를 지키겠다는 논리와 정확히 동일한 논리로 키르하스가 군사를 움직였다. 아직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적이 남아 있겠으나, 최악의 경우 회전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었다.
영지 내에서 회전이 발생하면 인근 지방이 모두 불타고 폐허가 된다. 영지의 생산성이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세포르는 최대한 빨리 영지 내의 반군들을 정리하고, 키르하스의 명분을 파괴해야 했다.
반란군 단죄를 우리가 대신했으니, 이에 대한 사례를 바라오. 이런 종류의 그림이 그에겐 최선이리라. 그러므로.
“놈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 반대로 행하라.”
전생 시절, 세포르는 수도를 불태운 두 번째 사내였다.
그리고 페이자쉬는 수도를 불태운 세 번째 사내이자.
수도를 ‘파괴’했던 첫 번째 사내였다.
“자, 가르침을 주자꾸나.”
그의 말과 함께 산의 능선에서 대기하던 삼백여 명의 기병들이 일제히 능선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키르하스가 자랑하는 가장 강력한 기병대. 문명 사회에선 그저 ‘짐승’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처음으로 문명 사회를 향해 제 어금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산길을 지나던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마의 질주는 대단히 요란하므로 쉽게 감춰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긴 행군이 가져온 피로 탓에 인지하는 것이 늦었다.
-끄아아아악!
-적습이다!!
행렬의 중앙에서 비명이 솟았다. 세포르 공작은 즉시 인상을 구기며 부관에게 외쳤다.
“척후의 보고에 산중에 적병이 없다 했을 텐데?!”
부관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당황했다. 공작은 혀를 찼다. 그는 재빨리 칼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적습이다! 기병을 보내라.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시간을 벌어라!”
“예, 전하!”
변경 선제후들의 기사들은 중앙 귀족들의 기사와 질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오랜 전투로 수준 높은 훈련을 쌓아 올린 이들이다. 기사들은 갑작스런 기습에도 겁을 먹지 않은 공작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외쳤다.
기사들이 산길을 따라 질주했다. 울창한 수풀 탓에 기마의 속도가 나지 않았다. 공작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 산은 명백히 기습하기 가장 적합한 형세를 하고 있다. 세포르는 군략에 무능한 정치 귀족이 아니었으며, 그는 입산 전부터 척후를 보내 산로의 위협을 확인했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척후가 나태하게 확인한 탓에 적 병력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적의 수가 많지 않다!’
척후병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의 병력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포르는 말머리를 돌려 달리며 외쳤다.
“마법사들!! 적진을 파악하라!!”
수가 얼마 되지 않는 병력, 그 전체를 마법사들로 구성하지 않는 이상 마법전에서 아군이 명백히 우월할 터. 세포르 공작의 말에 마법사들이 황급히 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 * *
-생각보다 잘 싸우는군.
‘세포르 공작은 멍청하지 않지.’
단순히 힘만 센 멍청이는 제국의 수도를 불태울 수 없다. 세포르는 자신의 야심을 실제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 야심가였다.
-그 편이 좋은 점이지만.
‘그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멍청이보다는 이용하기 편하니.’
제 힘만 믿고 성질에 못 이겨 날뛰는 놈들은 까다롭다. 행동 범위가 예측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세포르 공작처럼, ‘어느 정도’의 머리와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엉킨 놈들을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손쉬운 일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놀이 지는 하늘 위로, 마력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법전이 전개되는 현상이었다.
적의 군종 마법사가 얼마나 될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수십 명분의 마력을 압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력의 총량으로 압도하는 것만이 마법전의 성패를 가르는 척도가 아닐뿐더러, 페르난데스는 이를 혐오하는 인종 중 하나였다.
‘섬세함이 부족해.’
-급하게 만든 주문이 다 그렇지, 뭐.
‘쯧, 마법사라는 것들이.’
전생 시절, 진홍대공의 악마들은 마법에 능하지 않았다. 이들은 파괴와 폭력의 화신들이었으며, 전략과 계략, 그리고 마법과 같은 부분에는 무능한 편이었다.
그리고 진홍대공이 가장 총애하던 마법사이자, 그의 유일한 마법 전력이었던 페이자쉬는. 전생 시절 단 한 차례의 마법전에서도 패배한 적 없었다.
-화르르륵.
수인이 겹쳐졌다. 마력이 부족하다고?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진짜’ 마법사란, 한 줌의 마력으로도 수십 줄의 회로를 자아낼 수 있는 법.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마법. 그 섬세한 묘리를 가르쳐 주도록 하자.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손가락을 얽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헤일로가 피어올랐다.
* * *
“아직인가?!”
“거, 거의 다 되었습니다. 전하!”
공작의 궁중 마법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문을 외웠다. 탐색 주문을 산 전체에 펼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충분한 마력과 시간만 있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라. 그사이, 세포르 공작의 측면을 기습했던 적들은 정확히 식량 수레에 불을 놓고 사라졌다. 기사들이 도착하기 전 아군의 종심을 깊게 찌르고 순식간에 빠져나간 것이다.
신묘한 기마술이다. 울창한 숲속에서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중갑 기병 편제를 위주로 굴리는 제국 기병대엔 불가능한 일이다.
‘빌어먹을 짐승 놈들.’
접전 지역에서 들려온 정보에 따르면 적은 삼백여 기의 수인족 경기병들이었다. 적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 참이지만, 자신의 현명함에 뿌듯해하기엔 세포르의 자존심이 적이 많이 상한 차였다.
“서둘러라! 놈들이 모두 빠져나가기 전에 놈들의 목을 내게 가져와라!”
“예, 예! 전하!”
반면 궁정 마법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주문은 분명 완성되어 있었다. 창공에 흐르는 마력은 온전히 아군의 것이었고, 이 야산 내부에 적의 마법사가 마법전을 시도하는 흔적 따윈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요란하게 숲을 뛰어다니고 있을 적의 기병대나, 심지어는 이를 추적할 아군 기병, 그리고 척후들의 움직임까지. 숲은 완벽하게 고요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주문이 완성되어 숲의 모든 지역이 한눈에 내려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모습은 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주문이 실패한 것인가?”
“아니, 주문은 완벽하오. 이 지역은 온전히 아군의 마력장 아래에 복속되었소!”
“대체 이게 무슨…….”
세포르 공작이 마법사들의 보고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의 병력이 세 차례의 기습을 추가적으로 받아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빌어먹을…… 잡종들.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전하,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제기랄. 진영을 구축하라. 숙영을 실시하고 군세를 모아! 내일 낮에 다시 이동한다!”
세포르는 물잔을 집어 던지며 외쳤다.
* * *
페르난데스는 나무 위에 앉아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사들을 내려 보았다. 땀과 피에 푹 절어 있는 수인족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말 위에 늘어져서 수통을 뜯어 물을 마시며 헐떡였다.
“수고가 많았다.”
“놈들이 이 산에서 하루 묵고 갈 계획인 것 같은데, 더 찔러 보려다간 우리가 아작 날 것 같아 뒤로 뺐수다.”
“잘했다.”
세포르 공작은 교본처럼 정교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병력이 지금의 두 배만 되었어도 급습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을 것이나, 오랜 전투로 지친 기병들을 이끌었다가는 전멸하기 십상이다.
페르난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었다면 탐색 주문을 하지 않아도 놈들의 수뇌부는 아군의 수적 열세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제 어쩔 셈이요? 고작 하루 반나절 번 걸로 만족할 생각이신가?”
“그럴 리가.”
“내일부터는 조금 다를 거요. 오늘 놈들의 보급 수레를 집중적으로 조져 놓았으니, 놈들이 대가리가 있다면 그것부터 막으려 들겠지. 오늘 같은 요행은 바랄 수 없을 거요.”
“요행이라.”
공작의 전 병력이 산을 모두 넘는 데엔 삼 일이면 충분하다. 그 뒤로는 넓은 평야 지대가 이어지고, 수적 열세를 감추며 하는 야습이 오늘처럼 수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키르하스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페르난데스가 이 지역에서 버는 시간은 고스란히 키르하스의 명분으로 이어질 테니까.
“자네 사냥을 해본 적이 있나?”
“……뭐요?”
“곰이나, 트롤, 오우거 같은 큰 짐승들을 말이다.”
“우린 대황야의 전사들이오. 그쪽 같은 허여멀건한 샌님들이랑 다르지. 우린 날 때부터 사냥꾼들이었단 말이오.”
“그럼 잘 알고 있겠군.”
페르난데스는 빙긋 웃으며 기병대장을 내려 보았다.
“자신보다 큰 짐승을 잡을 때는 먼저 놈을 몰아가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