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황제의 눈 (7)
일반인은, 제아무리 철저하게 훈련받았다 하더라도 ‘일반인’에겐 체력의 한계가 분명하다. 디모니카라면 모르되, 그 어떤 인간도 한나절 이상 전투를 수행하고, 휴식 없이 야간 전투를 시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페르난데스는 대단히 이해심 높은 사령관이었다. 그는 기병들의 탈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경우의 ‘기마 돌격’은 평야에서 단 한 차례를 하더라도 체력을 박살 내는 중노동이었는데, 수인 기병대가 수행한 전투는 ‘야산’에서, ‘압도적 병력 불균형’을 딛고, ‘추격대’를 등 뒤에 진 채로 ‘세 차례’나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야간 급습의 이점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 그러니까…… 산 아래까지 내려가 있으란 말이오?”
“정확히 들었다.”
“저놈들을 그냥 산중턱에 방치하고? 내일이면 적어도 선두는 평야에서 진영 구축을 끝낼 텐데. 그…… 설마, 만오천 병력과 평야에서 싸우란 뜻은 아니겠지?”
“뭐, 결과만 두고 본다면 비슷하지.”
“제기랄. 자살 돌격은 싫은데. 그건 거부할 권리가 있수다.”
기마대장이 툴툴거리는 소리에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약속하지. 결코 자네들이 두 배 이상의 병력과 마주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페르난데스는 수인 전사들의 하산을 명령했다. 다만, 삼백여 명의 기병들을 잘게 잘라서. 오십 명씩 여섯 분대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하산하길 명했다.
“혹시 기병대 운용에 대해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페르닌 공. 기병대는 분산되면 전술 행동이 불가능하오?”
“첫째로, 날 두 번 다시 페르닌이라 부르지 말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 있는데, 그건 자네가 아니야.”
페르난데스는 기병대장의 땀 젖은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병대들은 전술 행동을 할 필요 자체가 없네. 내가 말한 그 지역만 딱 붙이고 서서, 내려오는 적군을 하나씩 도려내면 그만이야.”
“……만약 두 배 이상의 적이 나타난다면?”
“그땐 퇴각해서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떠난대도 이해하지. 아, 그럴 경우엔 가급적이면 대족장의 본영에 한 번은 들르게. 자네들 위약금과 퇴직금은 두둑이 챙겨줄 테니.”
“당신, 맘에 드는군.”
기병대장은 악동처럼 짓궂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운 짐승은 사납게 다뤄야 하고, 수인들은 특히. ‘나쁜 놈’이라는 수식어에 더 끌리는 족속들이었다.
-뭐, 적어도 ‘나쁜 놈’이라는 부분에서 꿇린 적은 없지.
‘전생에 했던 짓이 고작 ‘나쁜’ 같은 귀여운 형용사를 붙일 수 있던가?’
-그럼 뭐. 거친?
‘제기랄.’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 * *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세포르 공작은 교본 그대로 쌓아 올린 것 같은 숙영 진지를 구축했다. 시간은 다소 걸리지만, 야습에 대해서 거의 완벽한 방비를 한 셈이었다.
고작 한 줌의 기병대로 만오천 대군을 기습할 정도의 담대한 야전 지휘관이라면 분명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깊은 산 속의 밤은 치명적일 정도로 야습에 적합하니까.
“병사들의 긴장이 도를 지나치는군.”
“병사들은 패전 중에 일어난 추격전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린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다!”
세포르 공작은 기사들에게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한 지방의 공왕이자 대영주로서, 세포르 공작은 자신의 가신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유능한 지휘관이자 사령관이었다. 실질적인 패전 없이 그의 권위가 손상될 만큼 허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와 그의 병력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일 뿐.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그건 사령부의 생각에 그친다는 것이다.
사령부의 사기는 병사들의 사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반대로 병사들의 사기는 사령부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그리고 추격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다. 부관들이 제아무리 목청껏 결과적인 승리와 적들의 계략을 선동한다 하더라도, 긴 거리를 행군한 병력들에게 가시적인 성과 없이 다시 그 길을 행군해 귀국하라는 명령은 패배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기습이라도 했으면 덜 억울하겠군.”
세포르는 술잔을 움켜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산속의 고요함이 병영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누구의 생각일까. 누구의 계략이었을까.
-불이다! 불이다아아아!!!
-물!! 물을 끼얹어!!!
그때, 사방에서 고함이 들렸다. 지휘부의 막사 안에 있던 기사들과 세포르 공작은 거의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급히 막사 천막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온 산이 불타고 있었다.
* * *
화마가 달린다. 비가 내린 직후의 초여름. 자연스레 발생한 산불이 아니다. 설령 기름과 화약을 들이붓는다 하더라도 이 계절, 이 기후에 이렇게 거대한 불을 단숨에 지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마법이다!! 마법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살수해라! 당장!!”
세포르 공작은 혼란에 휩싸인 병영을 가로지르며 고함쳤다. 그의 궁중 마법사들이 저 멀리에서 주문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명령보다 먼저, 마법사들은 화재 진압을 시도하고 있었다.
“말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부, 불이 났습니다!”
“나도 눈이 있다, 경! 그대의 봉급이 이렇게 아까워지는 것은 처음이군.”
세포르 공작의 분노에 노마법사는 목을 움츠리며 겁에 질렸다. 그에 비해 한참 어리다 하더라도, 공작은 태생적인 지도자였다. 그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마법사의 목을 뜯어 삼킬 듯 불타고 있었다.
“설명해라!”
“마법적인 불길입니다. 하지만, 마력의 흐름이 전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부리기 위해선 사전에 광범위한 마력 흐름 감지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숙직 마법사도, 그리고 지금조차도 마력의 흐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
“……그러니까, 마법사가 마법을 부린 것이 아니라. 유물이나 시약을 사용한 겁니다!”
마법사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 세포르 공작은 이마를 감싸 쥐며 잠시 멈췄다가, 그를 잡아먹을 듯이 외쳤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제기랄. 펠퍼린! 궁중 마법사의 직위가 아깝지도 않나? 지금 이유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 난리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지, 언제쯤 해결될 것인지. 그런 것들을 설명하라고 내 자네에게 봉급을 쥐여 주고, 영토를 내어주고, 실험을 지원해 주고, 계집들을 끼워 준 것 아니냐!”
“유, 유물의 경우엔 조금 더 해결이 복잡하지만. 이런 수준의 유물은 반드시 기록이 남습니다. 이 정도의 화염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유물은 적어도 제국 동부 근방엔 존재하지 않고…….”
“다음 설명!”
“유, 유, 유물이 아닐 경우엔 두 가지 시약이 이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해결책을 내놓으라 외치려던 세포르는 순간 멈칫했다. 모든 전략, 모든 계략은 일정한 ‘리듬’이 있다. 계략을 수립하는 수뇌부들과 그 결정권자들이 갖는 특정한 ‘버릇’이다.
그건 체스의 기보와 같다. 착수의 방향과 목적성이 갖는 동일감이다. 그리고 세포르 공작은 지난 50년 전쟁의 종군 내내 에르브의 지휘부에 속해 있던 대귀족이다.
‘카르벨리에, 그 우직한 사내가 벌일 법한 계략은 아니야.’
‘수인들? 아니, 놈들이 제국을 충동하기 위해 이런 섬세한 계략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기반이 부족해. 놈들의 전략은 평야의 회전에 집중되어 있어. 이런 종류의 전술은 평야 유목민들의 방식이 아니야…….’
‘누군가. 카르벨리에와 수인들을 충동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세포르의 눈이 밝게 빛났다. 누군가. 제국을 분열시키려 했다? 왜? 무엇을 위해서?
모든 계략에는 목적이 있다. 단순히 ‘할 수 있기에’ 펼쳐지는 정교하고 섬세한 계략 따윈 없다.
“누구냐. 어디냐?”
“마, 만신전의 ‘액체 화염’과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흐르는 불’. 그리고 아포타자르 왕조가 가진 ‘화염포’. 이 셋이 이와 유사한 효과를 가집니다. 전하!”
“교회, 아세아스, 망령 군주.”
세포르 공작은 말을 멈추고 잠시 머리를 움켜쥐었다. 범위가 너무 넓다. 그리고 저 세 집단은 제국을 멸망시킬 이유도, 동기도, 목적도 없는 놈들이다. 당연히 선제후 중 하나라 여겼거늘…….
“전하! 지, 진화가 불가능합니다!”
“무슨 개소리냐?”
“불, 불길이 꺼지지 않습니다. 아니…… 마법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뭐라?”
“누군가가…… 어떤 대마법사가 이 근방에 있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문을 준비하던 마법사 하나가 달려와 부복하며 말했다.
“대마법사라 했느냐?”
“어디서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예, 전하. 저희가 마법을 시도할 때마다 마력 쐐기가 날아와 박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짓이라고?”
“군단 규모의 마법전이 아닙니다. 실제로 저희는 지금 이 근방 전역을 아군 마법사들의 권역으로 삼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이 행동에 직접 개입하는 대항 세력이 전무합니다.”
“그런데 마법이 어떻게 실패한단 말이냐?”
세포르 공작은 군사학의 달인이다. 제국 교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기병도, 보병 방진도 아닌 마법 전력의 분석과 파악이었다.
제국 장교 군사학교 출신으로서, 세포르 공작은 군단 규모의 마법전 개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전장을 기준으로 그 지역의 마력 흐름을 쟁탈하는 행위.
창공을 가로지르는 마력의 흐름을 움켜쥔다면, 이 전장 전체에 대규모 군용 마법을 쏟아낼 수 있게 된다. 마법전이란 그 흐름의 쟁탈전이나 다름없다.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기에 이를 이르길. ‘고요의 전투’라. 한 치의 실수와 한 번의 패배가 전장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그러니 저 마법사의 말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지역의 마력을 온전히 장악했다면, 적 마법사는 마법을 시도할 수조차 없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러니 개인입니다! 대규모 전투 마법이 아니라, 개인의 마법 발현까지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고정된 장소에서 대규모 마법을 시도하고 있으니…… 이를 역추산해서 저희의 흐름을 끊어 놓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이야기는 제외하고, 간추려서.”
“예, 전하. 적은 단 한 사람이고. 저희…… 전부의 마법 전력을 상회할 만큼 노련한 전투 마법사이며, 심지어 마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적확하게 흐름만 끊어내고 있기에……. 위치를 특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법사는 그리 말하며 비참함 속에 입술을 깨물었다. 세포르는 이젠 허탈한 웃음만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털털 웃고는 말했다.
“그래서 지금 네 결론이 그것이냐? 누군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법은 사용할 수도 없고, 우리는 야산 한가운데 불길 속에 만오천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채로 고립되었다고?”
“……예. 전하.”
“제기랄, 하하. 하하하! 제기랄! 너희 전부를 해고하고 너희 녹봉 전체를 그 마법사에게 지급하고 싶군. 왜, 안 되나? 그 마법사 단 한 사람이 우리 뷜랑의 모든 전투 마법사들을 상회하는데?”
“이건 단지 테크닉일 뿐이고, 전쟁 범위에서 일어나는 마법전은 반드시 그 총량으로…….”
“제기랄, 그딴 헛소리는 집어치워! 내게 필요한 것은 내 병사들을 살릴 방법과 지금 너희의 아가리에 처넣을 장검 한 자루뿐이다!”
세포르는 그렇게 외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지휘부 장교들을 향해 고함쳤다.
“이 무능한 머저리들은 잊어라! 직접 돌파할 것이다!”
“전하! 병사들이 모두 흩어질 겁니다! 이 밤중에 불길 속에서 병사들의 퇴각 경로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내 병사들은 모두!! 뷜랑의 영민들이다! 제기랄. 제국 안에서 길을 잃는다고 저들이 그 자리에 정착이라도 할 것 같으냐? 다들 잘 들어라!”
세포르는 당장 박차를 걷어차며 질주했다. 혼란에 휩싸인 병사들조차도 그의 기세에 눌려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세포르는 목청 높여 외쳤다.
“뷜랑의 아들들아! 다만 살아라! 살아서 하산하고, 살아서 다시 모여라. 너희의 어버이가, 너희의 부인과 너희의 자식들이 뷜랑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생존을 도모하고, 지금 짐승들의 약탈 아래에서 신음하는 너희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창칼을 들고 뷜랑으로 모여라!”
그는 핏대가 오른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혼란과 공포, 피로와 고통에 전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패배가 아니다. 탈주나 탈영도 아니다! 다만 생존이다! 너희의? 나의? 아니!! 너희 가족들의 생존을 말하는 것이야!! 뷜랑의 아들들아. 다만 살아라!!”
그는 그렇게 외치고는 칼을 뽑아 들어 지휘부의 기사들을 가리켰다.
“너희, 나 뷜랑의 주인이자 위대한 세포르 공작가의 가주. 앙투앙 드 세포르가 명령하겠다. 길을 열고 너희의 부하들을 살려라! 달려라!!”
“예, 전하!!”
기사들은 결의에 찬 눈으로 외쳤다. 곧, 숙영지의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화염 속으로. 대낮처럼 밝은 대지와 칠흑으로 내려앉은 하늘의 경계 그 아래로.
불길이 이글거리는 산로. 길 하나 없는 험지. 그 모든 것들을 뚫어내며 다만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