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황제의 눈 (9)
불에 타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끔찍한 것이 있다면, 불에 탄 사람을 보는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화재 현장의 구릉지를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검게 탄화된 잿더미 위로 아직까지 매캐한 연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메마른 탄내음이 코 안을 파고들었다.
-우드득.
발치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뭇가지 따위가 아니다. 그건 소사한 인간의 유해였다. 페르난데스는 그 감촉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불에 탄 사람의 뼈는 놀라울 만큼 쉽게 부서진다.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숙여 잿더미 안쪽을 쓸었다. 까맣게 타들어간 두개골이 손 아래에서 드러났다.
텅 빈 안저 너머로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명, 신음, 절규, 간청.
-감상적이군.
그의 등 뒤에서 페이자쉬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손을 털며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필요한 일이었어.”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화재의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더 많은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잿더미 아래에서 완전히 어그러진 모습일지라도, 페르난데스는 사람과, 짐승과, 나무의 탄 흔적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제 와서 참회라도 하나? 먼저 죽은 사람들에게 ‘아이고,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고 절이라도 하려나? 오만하고, 위선적이고, 구역질까지 나는군. 위장이 있었다면 진짜 토했을지도 모르겠어.
페이자쉬가 천천히 페르난데스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정신 차려. 전생에 너는. 나는……. 아니. ‘우리’는 학살자였어. 그럴 필요 없는 죽음까지도 기꺼이 손수 만들어내던 쪽이었지. 도시와 마을, 국가와 요새. 우리를 가로막던 모든 잡것들을 차별 없이 불태웠었다.
“윤리의 문제가 아니야. 페이자쉬. 그런 고리타분한 이유가 아니다.”
-그럼 뭐지? 이봐,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이놈들에겐 죽어야 할 이유와 죽일 방법이 적어도 수천 가지는 있었고,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그뿐이야.
그것뿐이다. 페이자쉬는 마지막으로 짧게 끊어 말하고는 스르륵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대답 없이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에 문득,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찾았군. 페르난데스는 거침없이 다가가 잿더미 아래에 반쯤 파묻혀 있는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만신전의 인장이 박힌 액체 화염 플라스크가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특정 조건하에, 만신전의 액체 화염은 완전히 연소될 때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을 만들어 낸다. 마법이라기보다는 연금술에 가까운 비약이며, 완전히 연소된 이후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깔끔한 도구였다.
유일한 흔적을 제거한 페르난데스는 손을 털며 일어섰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안.”
창 한 자루를 어깨 위에 비스듬히 걸치고, 우묵한 눈으로 다가오는 청년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삐죽한 말총머리와 총기 넘치는 눈매가 인상적인 청년이다.
“페르난데스.”
“여긴 어쩐 일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다리안은 창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말했다. 기세가 흉험했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하나만 묻지. 자네가 한 짓인가?”
“맞아.”
“이유는?”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페르난데스의 말에 다리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천천히 창날을 감싼 천을 풀었다. 태양창이 먹구름 낀 하늘 아래에서 스스로 번쩍였다.
“삼백 명으로 만오천 대군을 분쇄했다는 수인족 야전 사령관이 자네였군. 그래, 자네 말고 호족 연합에서 누가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어.”
“왜 나를 막지? 황제의 명령인가?”
“그래. 황제는…… 누군가에게 과도한 무력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도한 무력이라?”
“뷜랑이 대족장의 손에 넘어갔어. 그리고 대족장이 카르벨리에 공왕과 한패라는 건 지나가는 코흘리개도 아는 일이지. 이미 카르벨리에 공왕의 권위가 너무나 드높아졌다. 그런 와중에, 삼백여 명으로 만오천을 이긴 명장이 그들 사이에 있다는 소문은…… 과하지.”
다리안은 눈을 감고 창을 거꾸로 박아 넣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의형제. 진심이었다. 칼을 나누며 느꼈던 그 날의 감각은…… 그리고 지금도. 난 자네가 날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이라 믿어.”
“이해라. 흡혈귀의 편에 서서 민간인의 고혈을 착취하는 신전 기사를 이해하란 뜻인가?”
“적어도 자네와 나는 목적과 과정을 혼동하지 않을 테니까.”
다리안은 씁쓸하게 웃으며 창을 겨눴다. 키잉, 창날이 공기를 가르며 서늘하게 울었다.
“황제는 제국 백성들의 목줄을 쥐고 있어. 제국이 무너진 이후엔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나? 한 사람의 흡혈귀가 잡아먹는 인간은 하루에 한 명꼴이야. 그러나 제국의 분열, 그 이후에 도래할 전쟁에서는…… 하루에 수만 명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는다.”
“웃긴 일이지. 다리안 쉬라이크. 샤일드와 베이타서스의 차이가 말이야.”
페르난데스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대검을 밀어 올렸다. 묵빛 대검이 뿌연 하늘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한 사람의 악인을 죽이기 위해 수백 구의 무고한 시체가 나타난대도 그리하리라.’ 내가 교회에서 배운 교리는 그렇더군. 불필요한 희생은 없다. 부족한 희생만 있을 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뛰어올랐다. 칼이 허공을 수놓았다.
* * *
칼날이 만들어낸 돌풍에 잿가루가 흩날렸다. 먹을 머금은 붓이 도화지를 그어내는 것처럼, 두 사람의 사이 그 아슬한 간극 속에서 화풍이 피어올랐다.
-캉!
두 사람의 병장기가 맞부딪칠 때마다, 그 강한 힘의 와류가 흐름이 되어 잿더미를 흐트러트렸다. 비처럼, 바람처럼. 아니. 해일처럼!
-카드드드득!
창날을 훑으며 대검이 미끄러져 내린다. 그대로 떨어지면 손가락은 물론, 손목까지 으스러질 일격이다. 그러나, 다리안은 창대를 가볍게 쳐올려 공격을 튕겨내며 그 틈으로 창날을 박아 넣었다.
-부우웅!
창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벌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틀어 궤도에서 몸을 빼내며 대검을 빙글 돌렸다.
-카앙!
창날이 얽히고, 그 사이를 대검이 파고들고. 이를 튕겨낸 창이 심장을 향해 벼락처럼 내려 꽂힌다. 합을 맞춘 두 무희의 칼춤처럼. 수 초에 수십 차례 검격이 오고 가지만 서로의 몸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경지에…… 올랐군!”
다리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놀라운 일이다. 신전 기사들은 기실 신앙심 투철한 기사일 뿐,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사제였다. 그리고 사제의 육신은. 교회의 기름 부음 받은 육신엔 마력이 스밀 수 없거늘.
-콰아앙!
대검이 창날을 튕겨낼 때마다, 페르난데스의 머리칼이 스스로 떠오른다. 그건 체내에 마력이 흐른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창날이 그의 몸을 향해 떨어져 내릴 때마다, 매번 최적의 순간에 몸을 빼내고 있었다.
그건, 고된 수련을 통해 극한까지 단련된. 달인의 전투 본능이었다. 검사들이 ‘경지’라 부르는 어떤 경계. 그 사이를 걷는 자들이 보이는 검술이다.
“그 나이에, 그 검술이라니. 그 나이에, 그런 심계라니. 정말…… 놀랍군.”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
“뭐, 검술은 살인 기술이고 전략은 학살을 연구하는 것이니.”
거친 검격 속에서도 두 사람은 여상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다. 칼날의 마찰이 만들어내는 불똥, 격렬한 움직임에서 피어오르는 잿더미 사이에서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날이 저물며 땅거미가 진다. 잿가루가 흐드러진 두 사람의 대지는, 이제 단단한 토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위의 모든 잔해물들은 바람결에 흩어 사라지고—
흑과 백. 빛과 어둠으로 구분되는 무채색의 공간에서 두 사람의 춤사위가 이어진다. 격렬하게, 강렬하게. 단 한 수의 칼질로도 서로의 목을 취할 수 있는, 치명적인 살수가 오고 가는 와중에.
“그날 기억하나?”
다리안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는 자세를 다잡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유쾌함마저 느껴지는 시선이다. 천성적인 무예광. 다리안의 성미를 볼 때, 그는 지금 격렬한 전투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우리가 처음 칼을 섞은 날 말이야. 자네가 그랬지. 서로 숨기는 수가 있으니 그만하자고.”
“그래.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칠 테니 말이야.”
“자네가 그렇겠지.”
“그럴까?”
페르난데스는 감히 다리안의 거리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그 또한 자세를 갖췄다. 상단 베기. 거산이 앉은 듯 장중하게. 천천히 양팔을 들어 올리며 꼿꼿하게.
너무나 많은 빈틈이 보이지만, 반대로 어떤 빈틈도 확신할 수 없는. 곰덫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치명적인 기세였다.
다리안은 입술을 핥으며 창날을 빙글 돌려 말아 쥐었다. 우득, 하고 힘줄이 팔뚝을 따라 솟았다.
“그럴걸. 자네만 발전한 줄 알았나?”
페르난데스의 자세가 거산과 같다면, 다리안의 기세는 해일과 같다. 바다 아래에서 시작되는 물결처럼.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징조도 없으나, 자연재해와 같은 흉맹함을 품은 채.
-콰득, 콰득.
두 사람의 칼날이 동시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쏘아져 나갔다. 칼이 얽히고, 비틀리고, 마침내. 서로를 스쳐 지났다.
-키이잉…….
태양창, 금색 빛무리가 섬전처럼 페르난데스의 복부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연민검. 묵빛 대검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다리안의 다리를 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빙글, 하고 서로의 무기가 서로의 곁에 틀어박혀 저 스스로 떨렸다.
“제기랄. 졌군.”
“비겼지.”
“졌어.”
다리안은 툴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칼날이 발목을 파고드는 꼴은 막았지만, 충격에 발목 관절이 으스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치료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온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페르난데스의 상태도 위중하긴 마찬가지였다. 핏물이 울컥이며 배를 타고 스며 나왔다. 두 사람의 격돌로 기세가 꺾인 와중에도, 다리안의 창은 페르난데스의 복부를 꿰뚫었다.
“페르난데스. 샤일드 교회는 공식적으로 황제를 지지할 거야.”
“교회 전체의 입장인가? 교황이 직접 성명문을 낼 계획이라고?”
“그래. 우리 교회는 황제가 일으킬 참사보다, 황제가 죽고 난 뒤에 생길 참사를 더 크게 경계하고 있다. 내 입장도 같아.”
“그 대가로 뭘 받았지?”
“황제는 샤일드를 국교로 선언할 거다. 만신전 교회의 으뜸으로.”
“세속 정치와 손을 잡았군.”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다리안은 창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잘못된 일인가? 세속은 만신전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고고한 척. 고아한 양 뒷짐 지고 물러서서 세속 군주들이 저 스스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꼴을 지켜만 보는 것이 정녕 올바르단 말인가?”
“교회의 권위는 세속 사회의 중립에서 나온다. 다리안 쉬라이크. 실수한 거야.”
“중립을 선언할 세속 사회를 유지는 시켜야 할 것 아닌가.”
다리안은 팔을 뻗어 페르난데스를 일으켜 세웠다. 페르난데스는 쿨럭이며 다리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전투와 부상으로 인한 앙금 따윈 그 사이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만신전 교회는 없다. 다리안. 베이타서스 교회는 이 일을 묵과하지 않을 거야.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가 되겠군. 교회는 분열될 거야.”
“……그래. 오백 년 전으로 돌아가겠지.”
공의회의 선언 이전. 만신전 교회가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절. 세속 사회의 개입에 오히려 교회가 더욱 적극적이던 그 시절로.
“한 가지 더. 황제는 카르벨리에 공작을 죽일 거야.”
“명분이 없을 텐데. 지금 카르벨리에 공작은 구국의 영웅이야. 수도 신민들이 모두 그를 영웅으로 여기고 있다.”
“맞아. 그리고 황제는 수도에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가 숭상받는 것을 싫어하지. 심지어 그게 선제후라면 말이야.”
“위험한 짓을 하려 드는군.”
“지금 황실 상황은 그보다 끔찍해. 공작은 황실 연회에 초대를 받을 거고…… 그러면 끝이지. 이미 막을 수도, 걷잡을 수도 없네.”
다리안은 씁쓸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보게 된다면. 자네에게 다시금 칼을 겨누게 되더라도 자네를 증오하지는 않을 걸세.”
“봐주지 않을 생각인데.”
“하하. 그거 무섭군.”
그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다리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절뚝거리며 걸어 나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 밤, 달 없는 어두운 밤. 잿더미 위에서. 페르난데스는 비를 맞으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샤일드 교회의 지지 선언과, 이에 대한 베이타서스 교회의 규탄문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