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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52화 (253/388)

252. 행복의 조건

키르하스는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뷜랑 성은 유서 깊은 고성이었고, 제국 특유의 축성 기술로 쌓아 올린 예술 작품이었다. 그리고 고양이 계열 수인들은 높은 곳을 선호한다.

이 두 조건이 부합한 결과, 키르하스는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달맞이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수인들이 보기에 그 위치, 발코니에 이따금 비치는 대족장의 모습은,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을 수인들의 지배권 아래에 둔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이건 개인의 욕구와 정치적인 이득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을 감출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수발을 모두 물리고 오롯하게 혼자서 보내는 시간.

정치와 외교, 군사와 지배.

대족장의 의무를 내려놓고 홀로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후…….”

짙은 담배 연기가 입가에 서렸다. 대족장으로 복권하면서 다시 돌려받은 황금 마스크가 그 순간 덜그럭거렸다.

[놈이 왔군.]

카단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자칼 신이 큭큭거리며 말했다.

[네 주인이 왔다.]

“……!”

키르하스의 꼬리가 높게 솟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가면을 들어 창가 옆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대족장은 수하를 먼저 찾지 않아.”

[연기가 늘었군?]

“그건 권위가 떨어지는 행동이지. 그리고 은공은 직접 날 찾아올 거야.”

[참을성도 늘었고.]

“은공께선 아직 내가 필요하실 테니까…….”

[자괴감도 늘었네.]

카단은 싱글벙글 웃으며 키르하스의 말을 받아쳤다. 키르하스가 매서운 표정으로 가면을 노려보자, 황금 마스크가 덜그럭거렸다.

[그냥 그놈을 자빠뜨리는 건 어떨까. 넌 사냥의 신의 사도야. 물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고, 심지어 성을 점령한 역사상 첫 번째 수인까지 되었지. 언제까지 먹잇감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착한 집고양이처럼 굴 생각인가?]

“내가 이룬 것이 뭐지?”

[뭐?]

“내가 스스로 이뤄낸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었어, 카단. 내가 쟁취한 것…… 내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들 대부분은 은공께서 내게 직접 달아 주신 훈장이야.”

[패배주의적이군.]

“아니. 이건 충성심이라고 부르는 거야.”

키르하스는 발코니에서 나와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파에 몸을 늘어트리고, 그녀는 황금 마스크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사냥 신의 사도? 아니. 카단, 너와 나는 동업자야. 나는 네게 복종하지 않고, 너도 내 복종을 바라지 않지. 다만 우린 같은 이유로 손을 잡았어. ‘수인들의 자유’.”

[그래서?]

“내게 만일 종교가 있다면, 그건 만신전의 전당도, 네게 바쳐진 사냥의 천칭도 아니야. 내 종교의 이름은 세르너드고. 내 주인은 페르난데스야. 이젠 까마득히 느껴지는 그 전날. ‘그’ 도시의 지하 수로에서부터…….”

-이단심문청에 복종하지 않겠습니다.

-당신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공.

그런 대화를 했던 그 순간부터. 힘없던 어린 시절, 한낱 노예에 불과한 그녀를 거두었던 청년에게. 비록 그가 그녀를 도구로서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을 크리스탈 잔에 따랐다. 보리색 끈적한 위스키가 잔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잔을 들어 한 바퀴 흔들고는 방문을 향해 외쳤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예, 대족장!”

“페르닌이 입성해 날 찾거든,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곧장 들도록 하라.”

“……? 예, 대족장!”

필요할 때까지 참겠다.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조급함이 없을 수는 없다. 키르하스는 술을 입가에 머금고는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그녀를 찾아올 때까지 매초를 헤아릴 생각이었다.

* * *

그 즈음, 페르난데스는 뜻밖의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피엘. 지혜와 진리의 대천사. 그녀는 성내 도심지로 향하는 길 한복판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수인들의 성장이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피엘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과연 대천사의 현신이라는 것일까.

흑단 같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리고, 단정한 하얀 드레스를 걸친 채로, 그녀는 황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당신이 오늘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급적이면 미래를 보지 말라고 권고했을 텐데.”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읽었죠.”

피엘의 시선이 잠시 페르난데스의 복부에 닿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약을 건넸다.

“자상에 좋은 약제입니다.”

“디모니카의 몸엔 약이 듣지 않아.”

약성과 독성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어쨌건 육체에 인위적인 영향을 끼치는 행위다. 디모니카는 물질 세계의 거의 모든 독소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뜻은 곧 거의 모든 약제에도 내성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뭐, 어떤 것이든 장단점이 있는 법이지. 페르난데스는 비죽 웃으며 걸었다. 피엘은 그의 곁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당신의 과거를 읽었습니다.”

“좋은 꼴은 못 봤겠군.”

“당신의 현생뿐만 아니라, 전생까지도.”

그 말에, 페르난데스의 발이 멈췄다. 정보 반사가 차원을 넘어 이루어질 수 있던가?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불가능해야 정상인 일이다. 그러나 대천사라면, 그리고 차원을 넘어 환생한 존재의 과거를 읽는 것이라면. 마냥 불가능하다 여길 수는 없다.

“뭘 봤지?”

“당신의 탄생부터 임종까지.”

“그래. 깨달았군.”

“예, 제 자매들의 상황과 지금 이 세계에 대한 것들을 모두 읽었습니다.”

“대가는?”

“수명. 이제 제겐 십 년도 남지 않았군요.”

피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십 년이면 충분하지.”

“그 전에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까?”

“내 지난 이 년간의 시간을 읽었다면 봤을 텐데. 대악마 둘을 제거했고 대천사 둘을 구원했으며, 물질 문명 사회의 절반가량은 내게 협조적이야.”

“……확실히. 전생에 당신을 상대하기 그다지도 까다로웠던 이유를 알겠더군요.”

피엘은 빙긋 웃었다. 지난 삶, 언제나 서로를 죽이려 시도하던 두 남녀의 대화가 여름밤 열대야 아래에서 따듯하게 흘렀다.

“당신은 좀 재수 없었어요.”

“아무렴. 모자란 것들이 날 그렇게 보곤 했지.”

“그러니까 재수 없었다는 거예요.”

피엘의 발이 멈춰 섰다. 그녀는 부드러운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올려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생엔 확실히 그랬지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알아요? 당신은 이미 변했다는 것을.”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뭘 원하는 거지요?”

피엘은 아직까지 새빨간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페르난데스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작은 상처가 아니다. 간신히 장기를 빗겨 갔지만, 이렇게 무심히 보낼 수 있는 수준의 상흔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디모니카의 내구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결국엔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피엘은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행동. 당신의 사상. 단순히 목적만을 위한 흑마법사의 사고 방식이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만, 당신의 행동은 천변만화에 가깝군요. 그러니, 바라는 바가 과거와 정말 동일한가요?”

“대답하고 싶지 않군.”

“정말 아직까지, 아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싶나요? 그 아이의 삶을 연민하고 있나요? 사별한 전처는 어떤가요. 그녀의 삶에 다시 한번 등대가 되고 싶나요?”

페르난데스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건 분노였다. 역린을 공격받은 용이 보일 법한 분노. 그러나 피엘은 그런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페르난데스는 시선을 돌렸다.

“내겐 자격이 없다.”

“왜지요?”

“평화롭고 안온한 노년을 보내며 여생을 마무리할 자격이 없으니까. 그런 삶에 다시 한번 아리아를 끌어들일 자격이 없다. 아리아는 행복해야 해. 어쩔 수 없이 날 선택해야 했던 지난날과 달리, 그 아이는 소박하지만 충실하고…… 따듯한 삶을 보내야 해.”

“재수 없군요.”

피엘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가 눈을 부릅뜨자, 그녀는 다독이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답기는 해요. 타인의 감정을 재단하는 그 성미가 어딜 가겠어요.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당신은 행복한 적이 없어요. 그런 당신이 감히 누구의 행복을 단정 짓고 있는 건가요?”

“뭐?”

“행복에 대해 아나요? 당신이 아리아와 함께할 때 당신은 행복했나요? 죄책감과 부채 의식, 책임감과 연민. 그건 행복이 아니죠. 하지만 당신과 달리, 아리아는 그 시절 행복했어요.”

피엘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천천히 골목 너머로 걸어 나갔다.

“이 일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에. 그 이후에 당신도 당신의 행복을 찾기를 바라요. 달리지만 말고, 가끔은 걸어요. 세상이 앞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당신의 발밑에도, 당신의 머리 위나 당신의 뒤에도 존재하니까.”

그리고, 다음엔 당사자 의견도 들어 보면서 결정하세요. 재수 없는 양반아. 피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따듯하게 웃었다.

“다행이에요. 당신이 페이자쉬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 당신은 이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가 되었군요.”

“악당을 회개시켜 기쁘다는 표정. 아주 짜증나.”

“실제로 기쁘니까. 자매들의 생각이 맞았군요. 저는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긴 했었어요.”

피엘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쫓지 않았다. 그는 하, 하고 웃고는 도심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 * *

“대족장님, 페르닌 경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경비의 말에 문 너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발코니 창문이 열려 있는데도 실내엔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재떨이 위에 타고 남은 담뱃재가 쌓여 있고, 빈 술병이 탁상 위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어떤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키르하스.”

“…….”

키르하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꼬리가 움찔거리고, 다시 늘어지고, 또 바싹 서고, 다시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키르하스?”

“7,314.”

“뭐?”

“7,315.”

키르하스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이 다가갈 때마다 꼬리가 흐느적거리며 움직였다.

“7,316.”

“무슨 소리야?”

“두 시간 일 분 오십칠 초. 은공께서 입성 이후 저한테 올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잡으면 닷새 하고도 열네 시간이네요. 은공.”

-끼이익.

의자가 삐걱거리며 돌았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내려 보았다.

곧 풋, 하는 웃음이 터졌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꽃처럼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페르난데스 또한 마주 미소를 지었다.

“다녀왔어.”

“고생 많으셨어요. 은공.”

키르하스는 성큼 걸어 페르난데스의 품에 안겼다.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는데,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떼어 내려다가. 그녀의 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대족장의 직위는 그가 그녀에게 억지로 떠안긴 것에 가깝다. 전생과 달리 그녀는 스스로 수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그녀는 그녀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강요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그녀는 압박감과 부담감을 간신히 이겨 내며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스무 살 어린 처녀가 대뜸 한 종족의 수장이 된 꼴이다. 그녀가 제아무리 영웅의 자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는 전생의 키르하스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내가 그렇듯이.’

전생과 다르다. 페르난데스에게 그건 공포와 부담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전생과 달리 발생하는 사건들. 예상치 못한 변수들. 통제할 수 없는 변인들. 매 순간 긴장감 속에 새롭게 개량해 나가던 전략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서. 전생과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구원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어둡고, 적들은 예측할 수 없으며, 전황은 언제나 불리하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전생과 다르니. 세계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생과 다르니.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생과 달리. 그에겐 행복을 추구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언젠간. 그런 자격을 갖출 수도 있지 않을까.

이기심일까, 오만함일까. 위선일까. 자기 변론일까.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서라도.

“너도 고생이 많았다. 키르하스.”

행복하고 싶다고. 그 순간 페르난데스는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키르하스는 머리를 덮는 페르난데스의 두꺼운 손에 움찔 떨더니, 파! 하고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서로를 교차했다.

짧은 침묵 후에, 키르하스의 꼬리가 페르난데스의 다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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