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선악의 구분법 (1)
페르난데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키르하스는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세상에, 내가, 결국, 해냈어. 중간중간 구름이니 햇살이니 꽃잔디니 하는 소리가 섞이긴 했지만, 활자를 조합하면 대충 그런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꼬리가 살랑거리며 부드럽게 흔들렸다.
“은공.”
“왜.”
“은공.”
“듣고 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그래.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후후.”
키르하스는 칭얼거리듯 말하며 그에게 몸을 실었다. 결코 무겁지 않았지만 묵직했다. 그녀의 몸보다, 물리적인 무게보다. 마음이.
“당신을 사모합니다.”
“…….”
그 탓에 대답이 늦었다. 그녀의 감정은,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거절해야 했다. 이미 할 것 다 해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이기적인 행동 같지만, 확실히 선을 긋는 편이 나았다.
지금 키르하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환상이다. 그가 의도한 동경이다. 지하 수로에서 그녀를 건져 내며 꾸준히,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 주입시킨 일련의 환…….
“그만.”
“뭐?”
“그만 생각하세요.”
키르하스의 청동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따금 아벨이 하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낭만이 없어요. 은공께서는.”
“키르하스.”
“지난번에 말했던 ‘죄책감’인가요? 제가 원래 가져야 했던, ‘키르하스’의 운명이 아니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뭐?”
“정말, 진심으로. 제 운명이 오직 수인 대족장이자, 황야의 방패이자, 문명의 수호자. 이런 수식어들로만 이어진다고 생각하세요? 다인 왕의 후계자, 원탁 기사, 엘프 여왕의 사절, 대족장의 애첩, 대주교, 대악마를 살해한 자.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경?”
그 이름들이 당신의 운명이었나요? 키르하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페르난데스를 향한 분노가 아니다. 이건, 서러움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농밀한 설움과, 그리고 애착이 흘렀다.
“운명이 존재하나요? 존재하긴 할까요? 우리의 미래는 반드시 고정된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린 시간의 꼭두각시에 불과한가요?”
“……아니. 운명은 없다.”
이미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 운명론에 대한 것을 고민하기엔 너무 많은 사건들을 겪었다. 운명이 정해져 있더라면, 결코 영웅은 타락하지 않고, 결코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고, 결코 살아야 할 자들은 죽지 않을 터.
그리고 결코, 세상은 구원받을 수 없을 터.
그러니, 운명은 없다. 없어야 하며, 없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야 했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건 내가 너를…….”
“구했고, 키웠고, 이뤄 냈기 때문에? 아니에요. 모든 기사들이 주군을 사모하지 않고, 모든 짐승들이 제 사육사에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에요. 양이 목동을 사랑할까요? 염소가 농부를 사랑하나요? 은공, 당신에게 저는 그 정도의 존재인가요?”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그 정도의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 맞았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결코 그렇지 않았으니까. 키르하스는 영리한 여인이며, 대답 없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이미 수천 마디 문장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녀의 예측은 군청색이었다. 쪽빛보다 짙은 남색 눈동자. 페르난데스의 색. 그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
승리의 색.
키르하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저를 구하실 때, 제게 해 주셨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이유보다 목적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말이었지.”
“예, 지금도 그런가요?”
“…….”
“저는 아녜요. 이제 저는 목적보다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당신께 충성하고,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 그 끝에 얼마나 대단한 대의가 걸려 있고, 어떤 찬란한 목적성을 가진 채 움직인다 하더라도 제게 그런 것들 따윈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키르하스는 선언하듯 말했다.
“제게 모든 행동의 이유 단 하나는 당신의 이름이고, 제가 앞에 나서 피를 흘리고, 때론 피를 보아야 한다면 그건 오직 당신이 그걸 바라기 때문입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당신이 제 이유예요. 그리고 제겐 이제 이유가, 목적보다 소중합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몸을 타고 올랐다. 긴, 검은색 머리칼이 페르난데스의 이마 위로 늘어서 그림자 졌다. 그 사이로, 보석처럼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나쁜 사람. 역할이 바뀐 것 아닌가요? 전 처음이었는데, 왜 제가 당신을 설득하고 있나요?”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키르하스가 입을 열어 다른 말을 하려 할 때,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영원히 계속되길. 키르하스는 눈을 스르륵 감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체취가 꿀보다 농밀하고, 암청색, 그 세련된 빛깔의 매혹이 그녀를 감싸 안는 기분이었다.
* * *
젊은 기사왕의 분노를 실체화하는 것처럼. 라 메르티옹의 내부, 화려했던 공왕의 궁궐은 거대한 화마에 집어삼켜져 불타오르고 있었다.
몇 주간의 기나긴 공성전 끝에 라 메르티옹은 함락되었다. 동부 왕국으로 향하는 비단길의 중심부. 황금으로 쌓아 올린 역사의 종언을 구현하듯이. 더없이 거대하게, 다신 일어설 수 없도록.
“이제 어디로 향하시겠습니까.”
기사왕은 투구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들끓는 분노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직접 목도한 현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지역, 귀족들의 거주지 팔 할 이상은 흡혈귀들의 동굴로 전락해 있었다.
프란츠리트가 멸망하며 과부 거미 해안선을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가 왕자의 신분이던 당시 일이다. 그는 그때 느꼈던 분노를 되새기고 있었다.
끔찍한 곳이었다. 모든 시민들이 그저 잠재적인 식량으로 취급되고, 더 효율적으로 혈액을 보급받기 위해 묶인 채 조금씩, 피를 흘려 그릇에 담아 내는 가축의 삶이었다.
인간은 가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신념으로, 비센테 왕은 그 시절, 헬르가 왕자 시절에 과부 거미 해안선에 남아 있던 흡혈귀 잔당들을 모조리 불태워 없앴다.
“황제가…… 의도한 일이라 했나.”
“예, 전하. 그자는 자신의 수족들을 흡혈귀로 만들어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자 또한 흡혈귀가 되었겠지?”
“황제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춘 것이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대낮이었습니다.”
“…….”
원탁 의회의 상임 마구스, 실베릭의 말에 비센테는 입을 다물었다. 몇몇 문헌에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고위 흡혈귀들은 태양빛에 면역력을 갖추고 있다.
데이 워커. 한 흡혈귀 혈족의 가주를 맡는, 흡혈귀들의 군주. 정황상 황제는 반드시 흡혈귀일 것이고, 그런 그가 태양 아래를 당당히 활보했다면. 그의 정체는 데이 워커라는 뜻이었다.
-콰드득.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비센테는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칼자루를 으스러질 듯 쥐고는, 천천히 손을 떼어 투구를 벗었다.
새파란 눈동자 안에 불길이 담겨 일렁였다. 다만 타오르는 성 앞에서 이를 반사한 광채가 아니다. 그의 눈은 지금 분노로, 그리고 위대한 데인 왕가의 혈족 특유의 정의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하. 재고하셔야 합니다. 이 지역의 정화는 대외적으로 공표될 겁니다. 황실에서도 쉽사리 왕국을 도모할 명분을 만들어 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그러나 황실을 직접 적대하심은 현명치 않습니다.”
“우리 혼자라면 그렇지.”
-절그럭.
비센테는 말의 고삐를 돌렸다. 그의 갑주가 마찰하며 묵직한 소음을 내었다.
“그 말씀은……?”
“동부 왕국의 연합 의회를 열어라. 모든 왕가의 의견을 모으겠다.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어렵지만, 지금 황실은 내분으로 허약하기 이를 데가 없다. 우리가 제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가 아니겠느냐?”
왕은 대의를 위해 검을 쥐리라. 그러나 검을 휘두르는 손길은 반드시 현명한 사고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법.
왕의 행동은 비단 개인의 행위나 실책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결단은 곧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니.
비센테는 어리석지 않다. 정의감만으로 거인에게 도전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흡혈귀가 인간을 착취한다는 명분, 제국의 내실이 그 어떤 순간보다 취약한 상황이라는 정황.
그 두 가지 미끼가 눈앞에서 흔들린다면. 오랜 세월 제국의 그림자 아래에서 세금을 지불하며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동부 왕국 연합의 군주들은, 마침내 반목을 멈추고 칼자루를 돌리리라.
동부 왕국 연합은 이름과 달리, 대단히 아슬한 규약으로 얽힌 집단이다. 각자의 왕국은 언제든 서로를 향해 어금니를 드러낼 준비를 마친 맹수들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서로를 향해 엄니를 드러낸 짐승들로 남지 않으리라. 이제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연맹’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제국의 피로 동부 왕국의 검을 담금질할 것이다. 비센테 왕은 그들의 모든 기사들에게 귀국을 명했다.
라 메르티옹이 불타오른 날로부터 세 달이 지나기 전. 동부 왕국 연합의 연합군이 진군을 시작했다.
대륙의 짧았던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독한 여름이.
* * *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절. 태양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이 시기를 기념하기 위해 샤일드에게 봉헌하는 축일이며, 이 시기 만신전 교회의 권역에 있는 모든 도시, 모든 마을들은 축제가 한창이다.
페르난데스는 색을 입힌 아마포 휘장이 요란하게 걸린 거리를 걸었다. 그는 축제 인파 속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국의 동부와 서부가 각각 외부 세력의 침략에 의해 무너진, 이른바 ‘치욕의 봄’이 지나고. 뭇 제후들은 이제 궐기를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가장 먼저 군세를 지휘한 세포르 공작은 가문이 풍비박산 나며 무너졌다. 여덟 선제후 가문 중 하나가 몰락한 것은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모든 선제후들은 이 일을 세포르의 실책 이상의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선제후들은 결코 상대를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몸을 도사린 사자들이며, 토끼를 잡을 때에도 전력을 다할 맹수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세포르 공작의 능력과 위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세포르는 머저리가 아니다.
-세포르는 수도를 점거할 수 있는 수준의 대규모 정규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도적 떼로는 결코 선제후의 정규군을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세포르 공작을 처리한 것은 도적 떼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물론 생각과 달리 각 선제후들은 세포르 공작의 죽음을 ‘어리석은 귀족의 하찮은 죽음’으로 절하해 소문을 퍼트렸지만, 그것과 실제로 그들이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므로 제후들은 이제 일종의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나서서, 세포르 공작을 무너트린 모종의 배후 세력을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세포르 공작의 선례를 보고 알 수 있듯이 그자는 만오천 명의 대군을 하룻밤 안에 궤멸시킬 수 있는 강대한 적수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파악할 수 없는 난상. 그 혼란했던 봄이 지나 각 선제후들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분별한 군축 경쟁을 시작한 지금.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도화선에 가장 먼저 불을 놓은 자는 반드시 다른 모든 이들의 공세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모든 선제후들의 목표는 먹음직스러운 제국 수도일 터였으며, 다른 이들의 손길이 닿는 것을 견제할 것이므로.
동부 왕국 연합의 군세가 제국 동부 지방을 타격하기 전에, 제국이 한 차례 더 크게 앓아야 했다.
거북이처럼 단단히 웅크리고, 발톱을 갈고 있는 이 거대한 화약고 속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터트릴 수 있을 것인가.
“페르난데스 수사님.”
그때, 골목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고, 제법 먼 거리였다. 이 인파 속, 그 정도 거리에서 그를 불렀다는 것은 그가 디모니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베오른 실드베인 수도원장님의 전언입니다.”
“그대는?”
“역십자 구호기사단의 파르다로입니다. 주의 성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페르난데스는 마주 인사하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파르다로는 로브 아래에서 손을 뻗어, 자그마한 사슬 엮인 로사리오를 꺼내 들었다.
열쇠검과 역십자, 그리고 창날이 얽힌 문양. 역십자 구호기사단의 문장이었다.
“수도원장님께서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의 형제들이 아니라, 그대를 불렀다고?”
“지금 본청 사제들은 모두 수도원장님의 명에 따라 근신 중에 있습니다.”
“뭐……?”
페르난데스는 그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완고한 이단심문관이 임무를 모두 멈췄다고?
지금은 우선 정보 수집을 해야 할 때였다. 페르난데스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수도원장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나?”
“제피스 형제님이 수도로 향했다 전해 달라 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금하셨을 텐데.”
교황이라면 분명 황실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금했을 것이다. 교황과 페르난데스는 거의 비등한 수준의 정략적 사고방식이 가능했으며, 교황은 페르난데스가 하고 있는 행동들을 보며 그의 전략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섣불리 황제를 공격할 리가 없었다. 아직 시기상조였다.
“예, 제피스 형제님께선 파문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분께선 홀로 황실로 향하셨습니다.”
“형제님답군.”
황실의 타락을 눈치챘다면, 그리고 그 황실을 비호하는 샤일드 교회의 행적을 눈치챈다면 제피스는 반드시 행동할 것이다. 교황이 막아서더라도, 어떤 수를 쓰든.
-놀랍군.
페이자쉬가 짧게 감탄했다. 페르난데스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고의 저변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이 한 방향만 보고 있으면 틀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라니까.’
처음의 대전략에 몰두하다 보니, 판도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죽은 것일까. 페르난데스는 자조했다.
전략에 능하고 노회한 교황도, 판도를 직접 짜내며 전략을 수립하던 페르난데스도 아닌. 완고한 이단심문관이 생각한 단순하고 직선적인 사고가, 전략의 핵심에 더 근접해 있었다.
‘변수가 필요한 이 시점에, 변수가 나타났군.’
-그럼 이제 불을 더 크게 질러 볼 때가 됐지.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사는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성자를 직접 만나 잔뜩 굳은 모습이었다.
“구호기사단 소속이라 했던가.”
“……예? 예, 형제님.”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만. 교황 성하께 서신을 전달해 줄 수 있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제국은 한 차례 앓아야 했다. 수도를 노리고 있는 선제후들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동부 왕국 연합의 군세가 그 도화선이 되어선 안 된다. 선제후들이 외부 세력에 대항해 군세를 정비하는 순간, 분열을 조장하려던 그의 계획은 어그러지기 시작할 터.
분열은 반드시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귀르의 조력, 카르벨리에 대공의 대립군. 뷜랑의 수인들. 이 정도의 기물로는 아직 판도 전체를 그려낼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판도를 뒤집어 버리면 어떨까.
[샤일드 교회의 팔텐노이아 교구, 대대적인 이단 조사를 요청.]
이 정도면 될 것이다. 제국의 수도 팔텐노이아. 샤일드의 모든 교회 중 가장 거대한 이 교구를 베이타서스 교회에서 전수조사하겠다는 성명서가 발표된다면, 샤일드 교회는 반드시 반발한다.
신들의 이해관계와 교회의 이해관계는 전혀 다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이해관계는, 설령 선의와 신실함을 근간으로 둔다 하더라도 결코 온전히 이타적일 수는 없다.
가장 거대한 교구를 불태우겠다는 베이타서스 교회의 선언은 분명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지난 규탄 성명문과는 무게가 다른바.
교회가 교회를 적대하고, 만신전은 더 이상 ‘만신의 신전’으로 불리지 아니할 것이며.
다시금, 종교가 세속 사회와 손을 잡아 세력을 탐하게 될 것이니.
-이거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구만.
‘기분 내지 말라고. 이게 다 세상을 위한 일 아니겠어.’
-개소리가 늘었구나. 하하!
페이자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쨌건, 더 이상 선제후들은 방관하지 못할 것이다.
샤일드의 교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제국은 기본적으로 국교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 말은 곧 만신전 교회의 권역이 난립하고 있다는 뜻.
세속과 교회가 아무리 철저하게 분리된다 하더라도, 정치는 어쨌건 종교와 깨끗하게 구분될 수 없다.
친황제 계파 선제후령에도 베이타서스 교회가 있고,
반황제 계파 선제후령에도 샤일드 교회가 있으니.
더 큰 혼란을, 더 큰 내분을.
제국이 앓아야 한다면. 세계 전체를 열병으로 물들이리라.
‘종교 전쟁’이라는 열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