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선악의 구분법 (2)
제국 북부에서 지금 가장 유명한 자를 고르라 한다면, ‘패륜아’ 로베르를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근 단 몇 개월 만에 귀족 사회 최고의 문제아로 거론되고 있었다.
황제의 둘째 아들이자, 수완 좋은 행정 귀족으로 알음알음 이름을 떨치던 그는 귀르의 군권을 장악하자마자 친황제파 선제후들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전쟁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다음과 같다.
패륜아, 전쟁광, 사략 해적, 신의 없는 자, 트레뮐레 궁중백가의 수치…….
“그렇게 말하는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오?”
로베르는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안경을 벗었다.
그는 김이 부드럽게 오르는 커피잔을 쥐고 한 모금 들이켰다.
“뭔가요?”
“내게 한 차례 이상 공격을 받은 자들이지. 달리 말해, 지금 친황제파 선제후들이 하는 말이란 뜻이오.”
로베르가 픽 웃으며 그리 말하자 르네가 따라 웃었다.
이 둘은 지금 해상 함대, ‘트레뮐레 사략선’이라 불리는 함대에서 항해하고 있었다.
해상 지도를 내려 보며, 로베르는 붉은 칠이 된 도시들을 헤아렸다. 벌써 다섯 군데. 저들에게도 머리가 있다면 지금쯤 알아차렸을 것이다.
로베르의 함대는 친황제파, 개중에서도 흡혈귀에 타락했다고 파악된 친황제파 해상 도시들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명분으로, 트레뮐레 사략 함대는 가문과의 계약이 끝나 무소속 해적 집단이 되었다. 트레뮐레 백작가는 ‘그 해적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나, 대단히 유감스럽다.’라고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약탈당한 다른 가문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개소리하지 마라.’
‘그럼 대체 왜 사략선을 로베르 트레뮐레가 이끌고 있나.’
이런 귀족 사회의 여론에 대한 트레뮐레 백작가의 대응은 아주 간단하고, 아주 완고했다.
‘조작된 허위 사실과 정치적 모략에 대해선 대응하지 않겠으며, 로베르 베나티에 트레뮐레 경은 지금 지병으로 근신 중에 있다.’
그랬다. 리뷔에 사절 여정에서 병환을 얻은 로베르는 지금 귀르로 귀국하여 병세를 다스리고 있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주장에 대해 의심하는 귀족들, 특히 친황제 계파 귀족들의 영지에는 어김없이 트레뮐레 사략 함대가 나타나 노략질을 시작했다.
자고로 법과 소문은 멀리서 시작되지만, 해적의 창과 칼은 코앞에 있는 법이다.
“그 얘기나 더 해봐요. 정말 믿기지가 않더군요. 세포르 공작이 몰락했다는 이야기요.”
“아, 지금 아주 뜨거운 이슈라오.”
르네의 물음에 로베르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깍지를 꼈다. 그의 모습을 보고는 르네가 픽 웃었다. 귀족보단 해적이 더 어울리는 사내였다.
“세포르 공작의 군단이 도적들에게 패배해 해산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그 얘기를 모르는 이가 없더군요. 심지어는 제 부관도 그걸로 호들갑이던데, 사실인가요?”
서부 지방에서 들려온 소문이 제국 전역을 강타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강대한 선제후 가문 중 하나였던 세포르 공작령이 고작 도적들에게 몰락했다는 자극적인 소문이었다.
지위를 막론하고 지금 제국의 모든 신민들 중에 그 소문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한순간에 위대한 선제후 가문이었던 세포르 공작가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만육천 명의 군대가 고작 수백여 명의 도적들의 기습으로 해산되었으며, 앙투앙 드 세포르 공작은 도주 중에 형편없이 전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소문의 진실에 닿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눈앞의 사내였다.
아이언사이드의 총수, 제국 최고의 정보 집단을 손에 쥔 사내 로베르.
“모든 소문이 거짓인 것은 아니지.”
“……정말 도적들에게 정규군 만육천 명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인가요?”
“수백여 명의 군사들이 만육천 명의 군단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오.”
“군사들?”
“그건 도적이 아니었소, 카르벨리에 영애. 오히려 정예병들이었지. 대족장 키르하스 하트테이커를 따르는, ‘하트시커즈’. 그들보다 뛰어난 기사단은 이 대륙에 흔치 않을 거요.”
로베르의 말에 르네의 눈이 커졌다.
세포르 공작이 카르벨리에 공작가를 적대했으니, 당연히 키르하스가 움직이는 것은 예상 안의 일이었고, 실제로 키르하스는 지금 뷜랑 시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키르하스의 본대는 서부에 있다. 제국 중앙에서 일어난 교전에 직접 본대를 투입할 수는 없었다는 뜻인데…….
“수인들 군단이 은밀히 제국 내부로 침투했다는 뜻인가요?”
“만육천 군대가 회전을 했다면 결코 소문이 그런 식으로 나진 않았을 거요. 회전이 아니었소, 공작 영애. 말 그대로 야습이었지. 정보원들의 말에 의하면 산지에서 일어난 화공이었다고 하더군.”
로베르는 수도 인근의 한 산악 지대를 짚었다.
팔텐노이아 서부 끝에 위치한 산자락이었다.
“이 근방의 숲이 모두 전소할 정도로 큰 불이 일어났다고 하오. 근처 모든 마을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게. 그리고 그 숲 안엔…….”
“세포르 공작이 있었겠군요.”
“그렇소. 화공이었소. 소문 중 몇 안 되는 진실은, 삼백여 명의 기병대가 만육천 명의 병력을 무너트렸다는 것이오. 누가 그들을 지휘했는지 예상이 가시오?”
“설마…….”
“맞소. 세르너드 경이오.”
로베르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본디. 제아무리 아군이라 하더라도 이토록 과도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이 지휘부에 있다면 경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업적이 도를 지나치면. 이를테면 삼백여 명의 기병으로 만육천 명의 대군을 무너트렸다는 것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실제로 이뤄낸 존재가 있다면.
그때부터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경외의 대상이다.
화공은 손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대단히 까다로운 전술이다. 불길은 예측할 수 없어 피아를 가리지 않으며, 특히 산지의 화공은 결코 반드시 아군에게 유리하게 흐르지 않는다.
또한 불이라는 것은 밤에 더 눈에 잘 띄는 법이다. 만육천 명이 주둔하고 있는 주둔지 인근에 불을 놓으면, 불이 번지기도 전에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 순간부터는 토벌이 시작될 것이다.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만육천 명이 작정하고 수색하면 결코 산 안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러면 끝이다.
대군을 상대로 삼백여 명을 이끌고 정면 승부를 봐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이 사내가 한 짓을 보라.
만육천 명의 눈에 띄지 않고, 밤중에, 진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큰 불을 질러, 하루아침에 그들을 전멸시키고 공작의 목을 잘라냈다는 이야기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로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법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다. 공작가의 군대엔 분명 수준 높은 전투마법사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으니까.
페르난데스가 이끌던 삼백여 명이 전원 전투마법사라 하더라도 힘든 일을, 기병대를 이끄는 와중에 성공한 것이다.
괴물. 로베르는 그자를 그렇게 판단했다. 불가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괴물.
적어도 전장에서 그를 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난 서부 원정의 결과를 미루어 볼 때, 그자는 ‘건드려선 안 되는 사내’였다.
“어쨌건 그 덕에 서부 지방은 정리가 끝난 상태요.”
“드디어 황제가 포위되었군요.”
“저자는 내전이라 생각하겠지만.”
동부 지방은 비센테 왕이 이끄는 병력과의 전쟁에, 서부는 카르벨리에 대공의 손에 온전히 들어왔고, 북부 지방의 해안선은 트레뮐레 백작령이나 다름없다.
황제와 친황제 계파 선제후들은 사면이 포위된 상태나 다름이 없다. 완벽한 다면 전선의 형성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이 일련의 사태들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서부의 카르벨리에는 황실 수호를 기치로 삼고 있고, 동부의 비센테는 단순 소요 사태일 뿐이며, 북부는 통제 불가능한 해적들의 산발적 기습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이들 모두가 물밑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언사이드가 로베르의 수중에 있는 이상. 결코.
“그래서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귀르로 귀항해서 전면전을 준비할 때인가요?”
“아직 아니오. 귀르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소.”
로베르가 지도의 한 켠을 짚자, 르네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북부 항구도시 트넬. 몽포아 백작가의 영지다.
“이 항구를 습격한다고요? 몽포아 백작가는 그리모아르 후작의 가신이에요.”
“그리고 그리모아르 후작은 반황제파다?”
“아주 대표적인 반황제 계파 인사죠. 지난 선제후 의회 당시 트레뮐레 백작가에 가장 격렬히 반발했던 가문이 아니던가요?”
“그렇소. 그 이후로도 꾸준히 그랬고.”
“몽포아 백작가가 그리모아르 후작을 배신한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소.”
로베르는 의자에 몸을 깊게 늘어트리며 커피를 마셨다. 그는 수평선 너머, 저 멀리에 있을 항구를 생각하며 말했다.
“흡혈귀 사건이 보고되었거든.”
대부분의 흡혈귀 사건들은 황제의 파벌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몇몇, 소규모의 흡혈귀 사건 ‘정황’들이 반황제 계파 영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황제가 흡혈병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려 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는 영향력 확보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을 먼저 다스릴 생각을 해야 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치적 술수를 부리려 한단 말인가?
그의 지도엔 수많은 점들이 찍혀 있었다. 흡혈귀의 소행으로 보이는 소규모 사건들에 대한 표식이었다. 표식들이 제국 전역에 점점이 찍혀 있었다.
* * *
그 시각 페르난데스는 아이언사이드 요원이 암중에 건넨, 로베르의 것과 동일한 지도를 보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 발생한 흡혈귀 사건에 대한 요약 보고서와 함께.
-낯이 익군.
페이자쉬는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내려 보았다.
불규칙한 점들이 얼룩처럼 번져 있는 지도였다. 마치 이단심문청 수도원장실의 지도처럼. 각 사건의 발생은 상호간에 어떤 연결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낯이 익다.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에, 그는 이런 지도를 본 적이 있다.
청동 천칭단이 페이른 왕국 전체에 그렸던 악마 소환진.
개별적인 악마 사건들을 일련의 마법진 구성 회로로 삼아 국가 전역에 아로새겼던 그때의 사건처럼…….
그러나, 청동 천칭단의 마법진을 한발 앞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의 기억 덕이 컸다. 전생에 놈들이 했던 것들을 알고 있기에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황실의 타락과 제국의 내분, 흡혈귀의 개입이라는 변수는 전생과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제부터 모든 의구심은 추측과 추론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르난데스는 오랜만에, 진득한 논리 퍼즐을 푸는 심정으로 지도 앞에 앉아 있었다.
국가 단위 마법진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론화되기까지 아직은 먼 미래였다. 그러므로 페르난데스의 추측은 억측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로 점 단위를 선으로 이어 마법진을 만든다는 것은 별을 보고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수준의 기예다.
많은 생략과 수많은 추측이 얽힌 애매한 형상을 그려내는 행동이다.
같은 점의 배열도 어떻게 선을 긋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가 된다. 고작 이 정도의 정보로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한 마법진을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알고 있는 마법진이 아니라면.
-아니야.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봐. 이 부분을 중추어절로 삼고 이쪽 방면에 논리변환자를 삽입한다 치면 여기에서 여기까지. 제1 핵심절이 만들어져.’
-그렇게 치면 차라리 여길 이쪽까지 쭉 긋는 편이 나아. 그게 회로 누수가 덜해. 반복어절을 이 부분에 삽입하고 이쪽 지방 전체를 순환자로 치환하는 편이 낫지.
‘그건 지금 시대에 나오기엔 너무 세련된 수법 아니야? 조금 더 눈을 낮춰야 할 텐데.’
-가능한 한 적을 강하게, 가능한 한 아군을 약하게. 이게 전략의 기본이니까.
‘아주 대단한 전략가 납셨어. 페이자쉬.’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는 지도를 바라보며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의 테이블엔 어느새 휘갈겨 쓴 메모와 쪽지가 탑처럼 쌓여 올라가고 있었다.
이 지도를 받아 든 지난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수많은 마법진을 그리고, 그만큼을 폐기했다. 어떤 것도 가능하고, 모든 것이 허황된 추측으로 보였다.
-그냥 인정하자. 이건 과민 반응이야.
백예순두 번째 마법진을 폐기하며 페이자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경험과 사고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하는 토론인 탓에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이 뜻은 서로의 단점과 무지를 보완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의견은, 다른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반박하는 방식으로 논리의 허점을 검산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수준이 동일하기에, 논리에 허점까지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무의미한 반복 노동이 밤새 이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가 추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군.’
-뭔데.
‘‘왜’ 야.’
-뭐?
‘왜, 대체 왜 이런 조잡한 짓을 저지르는가.’
너무 기본적인 의문이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만일 이게 정말 모종의, 어떤 마법진을 만들어내려는 황실의 수작이라면.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가.’
마법진이란 당연하게도 마법을 구현하기 위한 절차다. 그러니 마법진을 그린다는 것은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의미이고, 마법엔 반드시 목적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마법진인가를 추측하기에 앞서서, 지금 놈들이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준비한다면 대체 그걸로 뭘 하려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왜?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가.
당장 당면한 놈들의 상황이 결코 이롭지 않은데. 제국의 상태가 결코 안온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자신들의 영향력과 행동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이룩해야 할 것이 있는가.
-그러니까. 마법진이 아니라 통제력을 잃은 흡혈귀들의 독립적인 행동들이라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니까.
‘합리성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일단 하나만 가정하자고. 이건 마법진의 전초 단계다. 이것만 생각하고 봐 봐.’
-그래서?
‘놈들이 ‘어떤’ 마법진이 필요하고, 그걸 심지어 ‘국가 단위’로 구상하려 한다면. 이 시점에서 놈들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말이야.’
황실은 지금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입지를 급속도로 잃어버리고 있었다. 황제가 바라는 것이 자신의 영원한 제위라 한다면, 지금은 그에게 있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그가 대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들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은밀하게 마법진을 그리고자 한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란 뜻인데…….
-글쎄, 신이라도 소환하려나 보지?
‘페이자쉬.’
-뭐. 농담한 것 가지고 정색하지 마.
‘그게 아니야. 페이자쉬.’
페르난데스가 돌연 펜을 집었다. 그는 침착하게 지도 위에 선을 그려 내었다. 한 수, 한 수. 정밀하게. 마치 진짜 마법진을 그리는 것처럼 섬세하게.
-…….
페이자쉬의 짜증 섞인 투덜거림이 잠잠해졌다. 어느새 그도 진중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과 점을 이어 마법진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의 목적을 파악하고 상대방이 만들려는 마법진을 분석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몇 가지 조건이 더 얹어져야 하는 법.
그러나. 마법진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이미 알고 있는 마법진의 경우다.
-이런 맙소사.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마법진의 모습을 보며 페이자쉬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백육십 하고도 세 번째 마법진 도안. 페르난데스의 손 아래에서 완성된 마법진은…….
‘신이 아니었어. 페이자쉬.’
우르카시아. 해충왕. 역병의 신. 곪아드는 자들의 군주. 형체 없는 자. 구더기 둥지의 주인.
대악마. 신성을 지닌 존재.
흡혈병은 질병의 한 종류다. 오랜 세월, 신에게 받은 저주가 퇴적되며 만들어진 질병.
그리고 흡혈귀가, ‘신’의 힘이 필요다면…….
‘황제가 우르카시아를 소환하려 들었군.’
-제기랄. 이건…….
‘황실이 개문지(開門地)야. 팔텐노이아를 중심으로…….’
페르난데스는 우당탕, 하고 넘어지는 의자를 신경 쓰지도 않으며 급하게 일어섰다. 그는 황급히 무장을 챙겨 들고 칼을 돌려 찼다.
시간이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황제의 마법진은 아직 구성 요소가 부족하고, 완성되려면 시일이 더 걸리겠지만. 심지어는 완성 직전에 이르면 대악마의 소환으로 인한 징조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나타나겠지만.
그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다. 신을, 신성을 지닌 존재를 물질 세계에 소환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제물이 필요하다.
전생. 베이타서스의 네 천사들을 소환하기 위해 만신전 교회들은 신들의 유물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열쇠검과 같은 종류의 1급 유물들을.
대악마를 소환하기 위해서 황제가 무엇을 바치려 들까. 무엇을 바쳤을까. 어떤 짓을 저지르려 할까. 일반 민간인들의 영혼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황제에겐 딸이 있다.
전생엔 없던 딸이.
대천사가.
‘제기랄 베이타서스!!’
너는 나의 네 딸들을 구하라. 그 문장엔 여러가지 뜻이 함의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딸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그냥 ‘위험’ 정도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