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55화 (256/388)

255. 선악의 구분법 (3)

흔히 ‘지옥’이라 불리는 세계엔 다섯 명의 지배자가 있었으니. 이들을 대악마라.

천상 전쟁 이후 봉인되어 자취를 감춘 지 천여 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 속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 물질 세계에서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흔치 않다.

진홍대공 타이반.

비늘 덮인 여제 사다르켈리사.

악몽의 뭄토.

일곱 왕관 예카세트.

해충왕 우르카시아.

그 본신의 힘이 너무나도 강대했던 탓에 신성을 얻고, 관념이 된 대악마들. 각각 파괴, 타락, 죽음, 증오, 오염을 담당하는 신위들.

만신전 교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다뤄지는 예언서나 묵시록엔 이들의 미래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때, 이들이 다시 일어서 물질 세계를 불태우리라는.

솔직히 말하자면, 페이자쉬였던 그 시절. 그는 그 묵시록을 신봉하는 편에 가까웠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말년. 그는 세계 곳곳, 차원 곳곳에 숨겨진 대악마들의 봉인지를 찾아내고 해주법을 연구했던 적이 있다.

예언 속 멸망이 언제가 될지 모르나, 확실한 조건이 있다면 대악마의 부활이다.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대악마를 부활시킨다 하더라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이반을 부활시킨 이후 다른 대악마들은 각각 다른 파벌들에 의해 풀려났다. 과정이야 어쨌건.

그리고 타이반의 소환자이자, 당대 가장 뚜렷한 업적을 세우고 있던 페이자쉬는 모략과 정치력을 총동원해 세계 곳곳의 이단 조직들과 접촉해 정보를 빼돌렸던 적이 있다.

세계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엔 대악마들 간의 내전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에 대한 사전 작업이었다. 타이반과 그의 승리를 위해선 대악마를 다시 봉인시키는 법을 알아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천상 전쟁 시절의 봉인과, 그 해주법을 익히게 된다. 실제로 사용한 적도 없고, 사용할 방법도 없는 주문이지만. 어쨌건 ‘아는 주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각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은 추측일 뿐이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더없이 소름 끼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르난데스는 그 날로 팔텐노이아로 떠났다. 기마 한 필과 가벼운 무장으로. 더 이상 물밑에서 계략을 조율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은공? 은공!! 어디 가세요!!”

깊은 밤. 이제 막 뷜랑 시의 외곽을 벗어나려는 그의 뒤에 한 필의 기마가 따라 달려온 것이었다. 추적이 붙었을 때부터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추적자가 키르하스라는 것은 접근하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

“키르하스?”

“은공! 잠깐만. 헉, 후……. 잠깐만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

키르하스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같이 밤을 보낸 지 이제 고작 하루가 되었는데, 밤중에 그의 침소를 찾아가자 텅 빈, 무장과 장비들을 모조리 빼낸 텅 빈 방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페르난데스는, 적어도 동행할 때엔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고 대전략을 공유했었다. 잠시 헤어지더라도 어디에서 무얼 하라는 정도의 지시는 반드시 남기는 편이었다.

그건 키르하스를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그의 전략관이 서로의 치밀한 연수를 가정하고 짜여진 정교한 판도 구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돌발 행동. 더군다나 이제 막 하룻밤을 보낸 연인이 보이는 돌발 행동에 키르하스는 정신없이 기마를 몰아 페르난데스를 추적했다.

페르난데스는 말을 세우고 그녀의 접근을 기다렸다. 달이 어스름히 떠오른 밤, 곧 그녀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내가 가는 방향은 어떻게 알았어?”

“피엘이 알려 주던데요?”

아, 그 여자. 페르난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보 반사 독립체. 속칭 예언자라 불리는 족속들. 미래를 볼 수 있는 기능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를, 또 ‘현재’를 볼 수 있다. 정보의 방향성은 편향이 없고, 불특정한 정보를 반사하는 시간의 흐름에도 그 명제는 동일하게 적용되므로.

미래를 읽지 말라 했더니 현재를 읽으며 훔쳐보고 있었군. 페르난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뿐이냐?”

“은공을 따라가 보라 했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신 건가요?”

“그래. 하지만 너는…….”

페른나데스는 말하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피엘이 현재를 볼 수 있다면. 그건 아무런 제약 없이 원격으로 대화할 수 있는 셈이었다. 일방적인 수신이 되겠지만, 적어도 사자를 보내 지시를 내려야 했던 지금보다 배는 나은 상황이 아닌가.

피엘은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의 본체는 지혜의 대천사였다. 본신의 능력을 반이나마 복원했다면, 향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도로 돌아간다. 같이 가겠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의 말에, 불안한 눈을 하고 있던 키르하스가 돌연 해맑게 웃었다. 다각, 다각. 천천히 말을 몰아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었는데. 의사를 묻지 마시고, 부디 명령을 내려 주세요.”

“함께 가자.”

“네, 은공.”

* * *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는 것이 아닌 이상. 뷜랑 시에서 팔텐노이아까지 가는 길은 험하지도, 멀지도 않다. 길이 험준하고 여정이 길었다면 세포르 공작은 결코 쉽게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포르 공작의 진군 루트를 따라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길목에는 세포르 공작이 몰락한 산맥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

있었어야 했다. 초여름에 불타오른 산이 고작 한두 달 만에 수복될 리가 없으니. 바싹 타오른 잿더미가 눈앞에 펼쳐져 있거나, 설령 빗물에 쓸려 나갔다 하더라도 수목 없이 산사태에 흉해진 민둥산이 남아 있어야 했다.

“꽃……이네요?”

“대단하군.”

대낮 여름에 꽃무덤이 만개한 산자락을 바라보는 것은 놀라운 경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받은 당혹감은 빠르게 씻겨 나갔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상황 파악과 원리를 먼저 분석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내였다. 더군다나 디모니카의 심장은 어지간한 일에도 쉽게 놀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꽃무덤을 바라보며 목청 높여 말했다.

“너무 과하지 않소?”

“하하!”

저 멀리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꽃 무리 사이에서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마차 위엔 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이 시기, 이 지역에서 볼 수조차 없는 꽃들이며, 생화였다. 아니, 생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마차 위에 뿌리내린 채로 살아 있는 풀이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프레이야가 소리 높여 외쳤다.

“경외감이 들지 않더냐! 숭배해도 좋다! 이것이 대자연의 힘이다!”

“대자연은 무슨. 신성의 힘이겠지.”

“봄과 아름다움, 꽃과 새 생명, 그 외 기타 보기 좋은 것들의 여신 님이 하신 일이다!!”

프레이야가 팔을 붕붕 돌리며 외쳤다. 다각, 다각. 마차가 천천히 다가왔다. 마부석에는 아벨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삐를 당기거나 풀지 않았는데 말들은 정확히 페르난데스의 앞에서 멈춰 섰다. 훈련받은 말들이 아니다. 말들의 눈엔 공포가 짙게 어려 있었다.

말들은 지금 자신을 이끄는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에 절어 복종하고 있는 상태였다. 용의 존재감 탓이다.

“퍽 화려한 등장이오?”

“봄의 여신이 나타나는데 범상하게 등장하리라 믿었나? 보아라, 린드부름! 내 말이 맞지 않으냐! 저 사내는 반드시 이 길목에 나타날 것이란 말이야!”

“그건 어찌 확신하셨소?”

“범인은 범행 장소를 두 번 찾는 법이다!”

“……그건 또 어디서 보셨소?”

“그 끔찍한 수도원에서 그나마 여가라도 할 것이 저잣거리 로망스를 읽는 것들뿐이더구나! 수도사들이 빌려주어 내 종종 시간을 지낼 수 있었다!”

프레이야는 시끄럽게 빽빽거렸다. 아벨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풀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나도 소문은 들었다. 그간 고생이 아주 많았더구나.”

“고생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소. 그대도 무탈해 보여 다행이오.”

“나도 큰 고난은 없었다. 여정이 짧지 않을 터인데, 마상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이런 모양이라도 마차가 더 편하지 않겠느냐.”

“고삐는 내가 쥐어도 좋겠소?”

“그래 주면 고맙겠다.”

아벨은 살갑게 웃으며 자리를 비켰다. 그녀가 등장한 순간부터 키르하스는 어쩐지 찔리는 표정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벨의 시선이 부드럽게 그녀에게 향했다.

“키르하스. 오랜만에 보는구나. 고초가 심했을 텐데, 대견하구나.”

“저 은공이랑 잤어요!”

“……?”

“……!”

“……??”

순간 바람이 멎었다. 키르하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시 한번 곱씹어야 했다.

페르난데스는 상황 파악과 현상 분석에 능통한 사내이며, 디모니카의 심장은 어지간한 일로 놀라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파편화된 생각들을 추슬렀다. 시간이 멈춘 것 같군. 기왕 멈춘 것, 몇 시간 정도만 건너뛰어 줬으면 좋겠어.

-하하하하!! 이래서 정조 관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멍청한 것아!

페이자쉬는 거의 입이 찢어지도록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비틀어댔다. 다행히도 저 소리는 페르난데스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지 않은 점은, 그나마 페이자쉬가 있는 페르난데스와는 달리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그저 고요한 여름날 아침의 백색 소음만을 들으며 굳어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 * *

아벨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여상한 표정으로, 어쩐지 뻣뻣해진 몸으로 자리를 비켰다. 좁은 마부석에서 비켜 봐야 그리 큰 자리가 만들어지진 않지만, 어떻게 간신히 한 사람이 앉을 수준까지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앉아라.”

“……조금 좁은 것 같소만.”

“앉아라.”

“알겠소.”

용의 존재감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말들이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딱딱하게 굳었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의 예민한 후각에 아벨 특유의 체취가 느껴졌다.

키르하스는 별말 없이 마차 뒷칸에 올라탔다. 꽃이 엉겨 붙어 있는 탓에 거의 소파만큼 푹신해 앉기 좋았다.

다각, 다각.

마차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산중의 협로를 따라 이동했다. 바람이 이는 소리를 제외하면 거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 주문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겠어. 오, 주문명도 이미 정했지. 무려 시그니쳐 스펠이야. 신과, 용과, 이단심문관도 닥치게 만들 수 있으니. ‘키르하스의 나 쟤랑 잤다.’ 어때.

‘제발 닥쳐.’

-이 주문은 영체까지 닥치게 하진 못해.

‘제발 부탁이니까 닥쳐줘.’

-‘페르난데스의 닥쳐주세요.’.

‘대답 안 할 거다.’

-‘페르난데스의 심통’.

‘…….’

옆에서 페이자쉬가 끊임없이 이죽거렸다. 불편한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야의 목소리였다. 아벨과 페르난데스는 거의 동시에 귀를 쫑긋거리며 애써 정면을 바라보았다.

“음…… 분위기가 이상하구나! 그래, 키르하스. 뭐라 말이라도 해보거라!”

“어떤, 어떤 말을 할까요?”

“아무 말이나 좋다! 아, 참. 나와 린드부름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아느냐? 우린 여비도 없이 제국의 반을 육로로 종단한 것과 같다!”

“어떻게 하셨는데요?”

프레이야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외쳤다.

“꽃을 팔았다!! 귀족 여식과 귀부인들에게 생화를 잔뜩 팔고 여비를 충당했느니라! 여신은 이제 부자다! 북부의 아이들과 달리 이 지역 인간들은 꽃의 소중함에 아낌없이 동전을 던져 대더구나!”

그야말로 돈이 복제가 되는 수준이 아니냐! 프레이야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그건 진기한 공연을 보고 관람료를 던진 것과 같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데 말이다! 새 생명을 잉태했다는 뜻이더냐?”

“……!”

“…….”

“……?”

“음…… 아니구나! 네게 새 생명의 기척은 없다! 으음! 노력이 부족했구나, 페르난데스!”

프레이야의 외침에 공기가 한결 더 묵직해졌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성호를 그으며 품 안에서 로사리오를 꺼내 들었다.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그건 그럴 때 쓰는 물건이 아니야.

‘기도에 상황이나 근원은 중요하지 않아, 페이자쉬. 너와 달리 난 사제야. 기도는 진심을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해. 신성 주문 써본 적 있어? 난 있어.’

페르난데스는 그답지 않게 빠르게 말을 이어 쏘아붙이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아벨이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에 이야기를 좀 해 보아야겠구나.”

시간이 기왕 멈추거나 느리게 흐를 요량이면. 차라리 몇 시간 정도는 건너뛰어 주었으면 좋겠다. 페르난데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했다.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그리고 간절히.

그러나 언제나처럼 신들은 대답하지 않으며,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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