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선악의 구분법 (5)
만신의 거리. 이 시기 모든 문명 사회 대도시엔 하나씩 있는 이른바 ‘성당 지구’다. 각 교단의 교회들이 늘어서 있으며, 해당 국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교회가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이곳 팔텐노이아를 기준으로 본다면 샤일드의 교회가 그랬다. 입구 근처에 즐비한 소신들의 신전을 지나 점차 더 큰 규모의 교회들이 나타나고, 가장 안쪽엔 샤일드의 거대한 교회가 위치해 있다.
이른바 ‘재의 대성당’.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팔텐노이아에, 지상에서부터 태양을 기리겠노라는 의지가 서린 신전이다. 흐린 하늘 아래로 어스름하게 내려오는 태양빛이, 뽀얀 대리석에 부딪치며 잿빛으로 흩어져 내렸다.
페르난데스는 큰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계단의 각 층계에는 샤일드의 성경 구절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곧 황동으로 마감된 거대한 문이 보였다.
-끼이이익.
걸쇠가 없는 문이 가볍게 열렸다. 성경을 본뜬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오색 빛이 내리는 신전이었다. 문이 열리며 차임이 울려, 곧 저 멀리에서 사제복을 입은 수도사가 나타났다.
“실례지만 오늘은 금계일입니다.”
“신도로 찾아온 것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차륵.
페르난데스는 품에서 로사리오를 꺼내 올렸다. 베이타서스의 문장이 그려진 신물을 보고, 수도승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제여, 공식적인 방문은 교구를 통해 해야 함이 마땅하거늘. 이 무슨 무례란 말이오?”
“시일이 다급해 직접 찾아왔으니, 교구관 대주교님을 만나 뵙고자 하오.”
“주교님께선 지금 부재중이시니 다음 약조 후에 찾도록 하시오.”
“술 냄새가 나는군.”
“……뭐?”
페르난데스가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수도사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무, 무슨 짓이오?”
“술 냄새. 예주용 포도주가 아니라…… 증류주로군. 도수가 센. 위스키?”
“……무슨 그런 망발을! 당장 나가시오!”
페르난데스는 수도사의 손을 낚아채고는 으르렁거렸다.
“이 교구 전체에 일어난 일인가?”
“수, 술이라면 한 잔 했소. 그래! 했소! 금계일에 휴식을 취함이 무슨 죄악이란 말이오! 주께서는 금주를 말씀하지 않으셨소!”
“하지만 약이라면 아니지. 이 냄새…… 단순히 술이 아니군.”
디모니카의 후각은 수십 명 사이에서 한 사람의 체취를 구분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냄새라면 더욱 정밀하게.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약학에 조예가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데리스 허브. 단순히 증류주에 넣는 풀은 아니지. 대낮에 약을 탄 술을 마시다니. 제정신인가?”
“모, 모함이오! 그리고 그대가 무슨 권리로!”
“나는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이며, 렐리기오사 디모니카의 2급 이단심문관이다. 단순히 직렬로만 친대도 대주교에 준하며, 이 권리는 선신 만신전에 의해 보장받는다. 샤일드의 사제. 그대의 직급과 이름을 밝히라.”
“……교부. 장 베르송이라 하오.”
“장 베르송 수사. 교회의 차이를 격하고 대주교를 직접 만나 보아야 하겠네. 교구관 대주교는 지금 어디에 있나.”
페르난데스의 기세에 압도된 사제가 더듬거리며 말을 흘렸다. 그는 곧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 * *
성당의 내실. 거대한 신상과 촛대가 화려하게 장식된 주교의 방 안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 열기 전부터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 가지 약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단순히 증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달큰하게 아려 오기 시작했다. 대단히 약성 강한 마약이다.
“응? 누군가?”
자욱한 마약성 증기 한가운데에서 물담배를 물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의 눈은 희미하게 풀려 있었고, 옷섶이 반쯤 풀어져 있었다. 대주교 특유의 자주색 비단이 널브러진 것이 보였다.
“주, 주교님. 베이타서스의 사제가 입회를 청했습니다.”
“으응? 베이타서스의 형제님이시라구? 아이구, 이런. 허허. 꼴이 말이 아니구만그래!”
주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져서, 어이구! 하는 소리를 질렀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주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로군. 이게 무례라는 사실은 알고 있나?”
돌연 주교의 눈에 안광이 서리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마약으로 인한 신경증과 광증이 섞인 반응이다. 동공이 개개 풀려 있는 채로, 주교는 흥얼거리듯 말했다.
“한 교구의 교구관 주교에게 기별도 없이 찾아와 이리 무례를 범하다니! 이건 설령 황제라 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야!”
“황제는 할 수 없지. 하지만 내겐 가능하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주교가 어어, 하는 사이에 공기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물담배 끝에 걸려서 타들어 가고 있던 약초가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페르난데스는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어 주교의 얼굴에 부었다. 푸흡! 하는 소리와 함께 주교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다시 눈을 뜬 주교에게는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짧은 사이에 몇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마법을 배웠군.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 엔마기카 출신인가?”
“디모니카.”
“마법이 아니라 유물이었던가.”
주교는 짧게 탄식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디모니카의 몸엔 마력이 깃들 수 없는 것이 정설이니, 그의 오해를 굳이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었다. 페르난데스가 멀뚱히 서 있자, 주교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유물임이 틀림없겠군. 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수준의 유물이라면, 그래. 디모니카들에겐 필요한 유물이겠지. 그래, 이 늙은이를 찾은 이유도 알겠구만…….”
“이야기가 빠르겠군.”
-드르륵.
페르난데스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는 대검을 빙글 돌려 바닥에 박았다. 단단한 돌바닥이 힘없이 밀려 들어가며 대검의 칼날이 묵직하게 박혀 들어갔다.
차륵, 하고 그 위로 작은 사슬에 걸린 로사리오가 타고 내려왔다. 촛불 아래 일렁이는 로사리오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주교가 짧게 혀를 찼다.
“고해를 하려 하나?”
“교단성사 대리지권이 있으니, 죄인이여. 항변을 시작하게.”
“몇 해 전이었다면 모르되 우리 교회는 그대의 사법을 인정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뭐, 이리되어 차라리 다행이군.”
주교는 눈을 감고서 단정히 무릎을 꿇었다.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 아래로, 늙은 주교의 주름이 일그러졌다.
“약을 시작하고 술을 입에 댄 것은 세 달 전이네.”
“무슨 일이 있었지?”
“많은 일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주교는 말을 흐리며 점점 더 과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 *
어떤 사건이든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팔텐노이아 샤일드 교구에 찾아온 사건 또한 그랬다.
“황제가 면담을 요청했었네. 밤마다 기이한 악몽을 꾸는데, 이것이 징조가 아닐까 하고.”
“무슨 악몽이었지?”
“아주 이상한 꿈이었네. 새하얀 지네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사람들을 품에 끌어안는 꿈이었지. 두렵고 기이한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빛무리와 함께 내려왔다고 했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더군.”
페르난데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얀 지네?
“최근 복잡하게 변하는 국제 정세와 왕실 권위의 약화로 인한 불안 증세라 판단했네. 나보다는 오히려 어의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지. 그에 대해 말하자, 황제는 이미 어의의 처방을 받고 있다고 했네.”
“어의라.”
“궁중 의관들이 내어준 약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화를 냈다네. 황제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 보였어. 마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정이 올라와 얼굴이 붉고 눈이 노랗게 바래 있더군.”
주교는 고개를 젓고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간단한 축성을 드리고는 황제를 보냈네. 그 이후로 사흘에 한 번씩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성미가 날카로워지더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채로, 말끔한 복식으로 와서 이젠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더군.”
“스스로 떨쳐냈단 말인가?”
“떨쳤다 표현하는 것이 옳겠나? 아니, 그건 떨쳐낸 것이 아니야. 씐 것에 가깝겠지. 황제는 이제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했네.”
그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황제의 모습은 분명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 그건 단순히 제국의 지배자가 갖는 자연스러운 위엄 따위가 아니었다.
기묘한 이질감이었다. 인간에게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이질감. 늙고 신실한 주교의 마음속엔 어떤 의심이 피어올랐다. ‘악마에게 씌었다.’라는 이질감이.
“왜 이단심문청에 요청하지 않았지?”
“황제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네. 내가 황제의 얼굴을 본 순간, 황제는 내 마음을 본 게지. 그는 내게 속삭였네.”
[노력해 보거라.]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당연히 주교는 파발을 보냈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샤일드의 교황청에도, 베이타서스의 교황청에도, 공의회당에도, 그리고 이단심문청에도.
“하지만 그런 신고는…….”
“그래! 그런 신고 따윈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나도 그걸 나중에야 알았네!”
주교는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선 억울함과 슬픔, 고통과 광기가 얽혀 절절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그리고 보름, 마침내 한 달이 지났을 때에도 답신이 없었지. 계속, 계속 보냈네. 가능한 파발을 모두.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엄선하기도 하고, 상행에 몰래 첩자를 파견해 보기도 했지. 하지만 답신이 없었단 말일세!”
버림받은 것인가?
팔텐노이아의 샤일드 교구는 교단 최대 교구 중 하나이며 가장 권위 있는 교구에 해당한다. 그런 자리의 교구관 주교이자 선출권 추기경이라 한다면 결코 교회 자체에서 그를 버릴 리가 없다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인가. 대상이 황제라서 교회 입장에서도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단 말인가? 그 시각에도, 시시각각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리에 이따금 들쥐 떼가 들이닥쳐 소동이 있었다.
갓 수확한 곡식들이 죄다 썩어 들어가고 파리가 꼬인 일이 있었다.
처음 보는 기이한 역병이 돌아 수도의 한 지구가 완전히 폐쇄된 일도 있었으며,
하수 처리장에선 실족 사고가 빗발쳐 인부들이 부족해진다고도 한다.
그리고,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더 지난 즈음에. 황제가 그를 찾아왔다.
[따라오거라.]
황제의 낯은 이제 완전히 창백해져 있었다. 술기운과 병색이 완연하던 모습을 지나, 이젠 거의 시체로까지 보일 정도로. 밀랍처럼 굳은 얼굴로 입꼬리만 슬쩍 올려 웃으며, 황제는 그를 어디론가 호송했다.
황궁이 아니었다. 어딘가…… 눈이 가려진 채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주교는, 처음 보는 기이한 토굴로 안내받았다. 곧 그의 눈에서 안대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본 광경은…….
“그 피…… 그 살점…… 그걸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까? 어떻게 말하는 것이 바르겠나?”
“지옥.”
“그래. 그건 지옥이었어……. 지상에 만연한 지옥이었네…….”
피와 살점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어시장 가판대에 올려진 생선들처럼. 말 그대로 ‘널려’ 있었다. 밀랍같이 창백한 사람들이 그 사이를 오고 가며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만지작거렸다.
시각적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 그가 떠올린 것은 단 하나였다. ‘실험실’. 광기에 전 예술가가 조잡한 화풍으로 펼쳐낸 마법 공방처럼 보였다.
천장에, 바닥에, 그리고 기둥에 매달려 꿈틀거리는 것은.
“신이시여. 결코 아니었다면 좋으련만. 그건…… 인간이었을 것일세.”
절망에 빠진 주교를 향해 황제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주교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가장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를 만난 모든 이들은 너보다 앞서 나갔으니. 네 앞에 놓인 길을 보거라. 저들이 너의 미래다.
“그 실험체들이 그렇다면?”
“맞아. 내가 보냈던…… 가장 믿을 수 있는 파발들과 첩자들이었네. 외부에 연락이 가지 않은 이유? 단순해! 황제가 그들 모두를 이용해…… 어떤 실험을 벌이고 있었네. 얼마나 되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안에서 죽어 가고 있었겠나? 응?”
주교는 분노에 차 외치다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그는 다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칩거했다. 그와 접촉한 이들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음날 그의 눈앞에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탓이다. 주교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탓이로다.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다.
“그러니 그대도 그리되겠지. 아, 주여. 주여…….”
주교는 더듬거리며 테이블 위에 쓰러진 술병을 들었다. 대부분 바닥에 쏟아지고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귀하다는 듯 그는 덜덜 떨며 혀로 병의 입구를 핥았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술병을 낚아챘다.
“아?”
“가로되, 관목 아래 저 작은 화초들조차도 양지 밖으로 뻗어 모두 하늘을 바라 오르니.”
“……이와 같이 바람과 섬김엔 귀천이 없으며 다만 다함만이 있으리다. 또한……”
“또한. 주의 덕은 햇살과 같아 높은 산과 너른 들을 가리지 않고 나리니.”
“……그런즉, 주의 품 안에 우리는 모두 귀한 양이오, 주 샤일드는 우리의 선한 어버이시다.”
페르난데스는 술병을 똑바로 세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박았던 칼을 뽑아 휙 돌리자 주교가 움찔 떨었다.
“선신 만신전이 보장하는 나의 권한으로 판결하자면, 그대에겐 혐의가 없다. 샤일드의 주교.”
“나는 죄인일세. 나의 부덕함과 오만함이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었다네.”
“어찌 행한 자 앞에서 당한 이가 죄인을 청하겠나. 단 한 사람. 죄를 범한 이가 있다면 그건 그대가 아니다.”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황제가 그대를 찾을 걸세.”
“그리하라지.”
사태를 파악하고 어떻게 잠입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그쪽에서 먼저 공세를 취한다면 오히려 좋다. 페르난데스는 등을 돌려 기도실 문고리를 쥐었다.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죽임당할 걸세! 상대는 그저 타락한 속세의 귀족이 아니야. 황제는…… 악마일세!”
“그리고 나는 렐리기오사 디모니카(악마사냥꾼)일세.”
-끼이익.
문의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닫혔다. 그 순간 페이자쉬가 속삭였다.
-귀여운 짓을 하는군.
‘그러게. 그 업계 선배로서 본을 보여 주어야지.’
작게는 황제지만 크게는 악마…… 아마도, 고위 악마에 준하는 존재가 거해 있다면.
악마 사냥꾼으로서. 아니, 악마술사의 까마득한 선배 된 입장으로서 찾아가겠다.
페이자쉬의 코웃음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성큼 걸어 성당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잿빛 하늘이 넓게 깔린 도시가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