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선악의 구분법 (8)
토굴의 길목이 점차 좁아지고, 열기와 습기는 이제 거의 호흡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농밀해졌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광원이라곤 산발적으로 명멸하는 마력의 흐름뿐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작은 광원으로도 그의 야간 시야는 충분했다.
곧 문이 나타났다. 거미와 지네 등의 해충들이 서로의 뒤를 물고 있는 조각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위로, 지옥의 언어가 거친 필치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만물의 종말이며]
[창생의 단초이다.]
원을 그리며 이어진 해충들의 조각 그 정 가운데에 종양과 포자를 묘사한 작은 문양이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건틀릿 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힘껏 그 조각을 내려찍었다.
쾅! 조각이 파괴되며 내부에 틀어박혀 있던 마법진이 구동한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돌았다.
곧 석문에 조각된 그림들이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거미가 지네를 삼키고, 지네가 바퀴벌레를 씹어 먹으며 복잡한 똬리를 틀고. 그 위로 그려져 있던 문장이 뒤틀렸다.
[만물은 우리를 향해 달리고]
[우리는 만물에게 뻗어 나간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라.]
고위 악마가 만든 던전 특유의 퍼즐이었다. 구구절절한 수수께끼와 은유로 문을 봉인시킨 것이다. 마법을 사용해 풀어내려 한다면 너무 과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힘으로 파괴하려 한다 해도 마찬가지이니.
-어울려 드려야지.
물론 이 문장 자체는 알고 있는 것이지만,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시동어를 입에 담고 싶지는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말했다.
“부패.”
-철컹!
페르난데스의 주먹에 의해 파괴되었던 조각에서부터 동심원이 퍼져 나가며 석문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더운 열기가 훅 불어닥쳤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사지의 말단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단순하고 교활한 함정이다. 문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수수께끼에 응해야 하고, 수수께끼에 응한 이들에겐 언령 저주를 걸어 버리는.
단순하고 교활하지만, 같잖다.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고는 앞으로 나섰다. 점점 좁아지던 통로에서 벗어나 석문 안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대기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큰 공동, 드높은 천장 빼곡히 형광 버섯들이 자라나 있고 그 바로 아래엔 검붉은 살더미 하나가 뭉쳐 있었다.
감각이 사라진 탓에 몸을 가누는 것이 썩 수월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칼을 옆으로 끌어내리고는 정면을 노려보았다. 살더미 너머에 붉은 안광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의 정원에 찾아온 것을 환영한다. 필멸자여.]
악마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제법 먼 거리에서 말을 했음에도 바로 귓가에 울려 퍼지는 종류의 소리였다.
[당황했나. 아니면 공포에 질렸나. 필멸자여. 신을 마주하는 순간이 처음인가?]
쉬이이익, 뱀이 기어다니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희미하게 발광하는 버섯 아래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해충들이었다. 무수한 해충과 쥐, 그리고 뱀 따위가 뭉쳐진 형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철퍽, 철퍽, 하며 놈의 부속지 말단이 벽을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동의 모든 벽면에서 새빨간 안광이 빛났다. 곤충의 날갯짓과 턱을 딱딱거리는 소리들이 기묘한 불협화음으로 음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너희 사제들은 신을 영접하길 꿈꾸며 일생을 바치지. 눈물겹구나. 네가 간구할 신과 대의는 진정한 힘 앞에선 그 어떤 조력도 내릴 수 없도다. 너는 평생을 바쳐 환상을 위해 살아온 셈이다.]
“적어도 그 말은 맞군.”
페르난데스는 뻣뻣하게 굳어가는 뒷목을 우득, 하고 풀며 말했다. 지독할 정도로 중첩된 저주 탓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데에도 전력을 다해야 했다.
“환상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
하지만 설령 천 번을 되산다 한들 그리하겠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치켜들었다.
“내가 두려운가?”
[뭐라고?]
“같잖은 수작에 하찮은 함정이라. 나를 두려워하는구나, 느하리픽시.”
어둠 속 실루엣이 잠시 멈칫했다. 안색이나 목소리 따위로 놈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놈이 느꼈을 감정은 손에 잡힐 듯 뻔했다. 당황. 놈은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나를 아는가……?]
“물론. 해충의 군주 느하리픽시. 더럽혀진 자. 신뢰할 수 없는 자. 황록색 재앙. 부패의 사도. 형체 없는 자. 내가 아는 것이 고작 네 이름뿐이리라 생각했느냐?”
[너는 누구냐?]
“틀렸다. 네가 해야 했을 질문은 ‘누구’가 아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여야 했다. 악마. 그리고 그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놈의 언령은 물리적인 저주가 아니다. 석실의 봉인을 담당하던 저주는 물리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녀석이 아니었다.
놈의 저주는 마치 개구리가 뱀을 마주했을 때에 겪는 일과 같다. 육체와 영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건 ‘인식’의 저주였다.
효과는 단 하나. 몸이 굳는다. 거기에 분위기……. 악마가 필멸자들을 위협하고 타락시키는 가장 단순한 트릭. ‘분위기’다. 압도적인 형상으로 압박하고, 거기에 말주변을 섞을 때에. 심지어 몸이 굳은 상태에서 무력하게 이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어떤 인간이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으랴. 이 악마의 함정은 교묘하지만, 저속하기 그지없었다. 만일 페이자쉬가 직접 나서서 이런 광경을 목도한다면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한마디 했을 터.
-기품이 부족하다.
본디 저주라 함은 기품 있어야 한다. 아니, 마법이라 한다면. 함정이라 한다면 격조 높아야 마땅하다. 적을 직접 타격하지 않고 저 스스로 압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치밀한 심계에는, 그에 걸맞은 고귀함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저열하다. 이 악마의 함정은…… 수작은……. 놈의 거대한 형상? 그건 공포에 질린 복어가 제 몸을 부풀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나의 이름이 불길이다.”
신성 주문의 조건, 기도, 기원, 기적. 페르난데스의 육신에 이미 기원과 기적이 어려 있으므로, 다만 필요한 것은 기도였을 뿐. 페르난데스의 말과 함께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금 한 차례 맥동했다.
-두근.
심장의 혈류에 섞인 악마의 저주와 우르카시아 계열 악마들이 내뿜는, 대기 중의 독소들이 뭉치고, 흩어지고, 육신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이는 쉽사리 정화할 수 없는 지옥의 역병이다.
그러나, 저속하다.
-두근!
심장이 다시금 크게 맥박 쳤다. 신성을 품은 혈액이 해일처럼 밀려나가며 악마의 저주를 분쇄하고, 파편으로 삼아 피부와 피부, 전신 혈맥에 흩어 버렸다.
[멍청한 짓거리를……!]
악마가 클클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놈이 벌인 저주이므로, 놈은 지금 페르난데스가 하고 있는 행동을 뻔히 알 수 있었다. 저주를 잘게 파편화시켜 전신에 흩어 놓는다? 그건 차라리 저주를 가속화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역병과 독소가 온몸에 흩어지며 페르난데스의 피부 위에 붉은 반점과 검게 죽은 종양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갑주 아래로 드러난 피부가 온통 얽어지며 끔찍하게 뒤틀렸다.
마치 노인의 살결처럼 우글거리는 주름과 그 아래로 흐르는 썩은 체액들이 보였다.
[저 스스로 죽음을 향해 뛰어가는구나. 그래. 해 보거라. 네 발악이 나를 미소 짓게 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웃고 있어라.”
갈라진 목소리가 노인의 것처럼 뒤틀린다.
-두근!
전신의 힘이 빠지고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지만, 심장만큼은 여전히 거세게 뛰고 있었다. 잘게 찢어진 저주를 더 가늘게, 조금 더 세밀하게!
모래알처럼 흩어진 저주의 파편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더 곱게 분쇄하여—
-저주란.
페이자쉬가 웃었다.
‘마법이란.’
노인의 목소리로, 노인의 살갗과 눈빛으로. 주름지고 병 들린 눈매로. 여전히 악마를 바라보며, 그러나 음울한 푸른 눈은 그 사이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채로.
-마력의 흐름을 조율해 만들어 내는 현상에 불과하니.
‘파편화된 저주는 달리 말해 육신에 간섭하는 쐐기이며.’
마력 쐐기는 상대방의 마력 흐름을 끊고 상대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그 흐름을 인도하는 방해 술식이다. 마법전의 기초이며, 대단히 섬세한 기술이다.
그리고 저주로 인한 역병. 그건 육체라는 메커니즘에 개입해 육체가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발생시키는 일종의 방해 술식으로 상상할 수 있다.
다만 그걸 실제로 행하는 이가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어느 누구에게라도 육신은 하나뿐이니, 이건 실패하는 순간 자살과 다름없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육신은 목표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니.
떨리는 손가락, 건틀릿 아래에서 주름지고 피 흘리는 손가락이 뻗어져 나와 악마의 안광을 향해 허공을 짚는다.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손짓으로. 힘겹게…….
[무슨 짓을……?]
“기도하라.”
혈액을 타고 흐르는 파편들이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 놈의 저주를 저 스스로 완성시킨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역병의 저주가 완전히 전신에 퍼졌다. 숨을 쉴 때마다 부패한 혈액이 쿨럭이며 코끝에 흘러내렸다.
[무슨 헛소리냐. 너는 이제 죽는다. 저주가 완성되었도다! 네 스스로 발악한 덕분에 감사하게도. 하하! 네 목숨이 얼마나 남았다 여기느냐? 몇 분? 몇 초?]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간절히.”
-휘적.
손가락이 허공을 느슨하게 움켜쥐며, 흐느적. 힘없이 흔들렸다. 그 광경을 보며 악마의 눈이 웃음 짓기 시작했다. 놈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우며 쩌렁쩌렁 퍼져 나갔다.
파편화된 저주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육신이 빠르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혈액을 타고 흐르던 신성이 사그라들며, 이젠 심장 외의 모든 구역이 기능을 정지하기 시작했다.
신성은 마력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신성이 없는 육신은, 마력을 포괄할 수 있다는 뜻이며.
역병의 저주란, 마력을 통해 육신 기능에 개입하는 일종의 쐐기이고.
마력 쐐기의 역주술 기법은.
-내 장기지.
와락, 하고 페르난데스의 손이 허공을 움켜 쥐었다.
동시에 그의 피부가 갈라지며, 검은 핏물이 안개처럼 그의 몸 주위로 뿜어져 나갔다.
* * *
악마는 작은 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의 안개를 바라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그의 눈은 모든 혈족들의 시야와 이어져 있으니, 저 작은 인간은 사각 없이 전신이 온전히 보였다.
놈은 최후의 발악을 위해 썩은 피를 몸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차라리 저 조치가 몇 분만 일렀다면 모르되, 지금은 그저 자살에 불과하다.
이미 저주가 전신에 퍼진 상태에서 역병 들린 혈액을 모조리 뽑아낸다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과출혈로 인한 사망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피부와 근골 전체를 들어내지 않는 이상 놈은 그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자욱한 피 안개 아래에서 검푸른 눈이 번쩍였다.
-스륵.
힘없이, 안개 너머에서 손이 뻗어 나와 허공을 휘젓는다. 가냘픈 손짓이지만 이해할 수 있다. 저건 수인이다. 마지막 한 수일, 그리고 허무하게 스러질 발버둥에 불과할.
[축조]. 모든 마법의 시작.
-쿠르륵.
허공에 흩어져가던 핏물들이 다시 뭉쳐 든다. 그건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악마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지?
[응집]. 사방에 흩어진 마력들이 그 손짓에 따라 모여든다. 각각의 혈액엔 저주가 응고되어 있고, 저주는 곧 마력이다. 그 점과 점이 이어 붙으며 선이 되고, 선이 허공에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마법……진?]
일반적인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릴 때엔 지면이나 사물 따위에 평면도를 그려 넣는다. 그건 마법의 진의를 최대한 단순하게 다루는 회로다. 진정한 마력 회로는 입체적인 형상을 띠기 마련이므로.
손이 다시금 허공을 쥐어 튼다. [결속]. [사슬].
-스르륵.
다른 손이 뻗어 나와 수인을 보완하고, 또 다른 손이 뻗으며 다른 수인을 짚어 낸다. 그렇게 나온 손이 여섯.
[손이…… 여섯 개라고?]
동시에 피 보라 아래에서 불타는 안광이 늘어난다. 그 또한 여섯. 악마는 저 안개 아래에 잠긴 존재가 더 이상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여섯 손과 세 머리를 가진 괴물……!
마지막 수인이 허공을 움켜쥔다. 여섯 개의 손이 동시에. [나침반]. 그리고—
뭉쳐지던 피 보라가 한 점에 집중되며, 창의 형태를 띠고.
그 형상이 마치 창날과 같다는 것은 인지하기도 전에—
“페르난데스의…… 진홍창.”
섬광이 악마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 * *
‘내가 네 것을 발전시켰으니, 이건 내 시그니처 스펠이라 칠 수 있지.’
-내 걸 따라한 거니까 내 이름을 붙여야지. 애초에 이건 내 진홍창을 카피한 거잖아.
‘자기 복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네가 나잖아.’
-하하, 이런.
페이자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썩은 핏물이 모조리 빠져나가 정신이 아찔하고 팔다리가 후들거리지만, 혈관을 잠식하던 악마의 통제가 사라지며 디모니카의 육신이 다시금 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 며칠은 정양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상관없다. 그는 정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파스스스…….
사방에서 먼지가 흩어진다. 죽은 해충들의 날갯조각, 다리, 턱조각 따위의 작은 부스러기들이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의 몸을 잠식하던 악마의 저주. 그것을 놈이 통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놈의 힘이 자신의 몸에 이어져 있었다는 소리다.
그 사슬을 따라 올라가면 놈의 본체가 있다. 이를 위한 나침반. 적의 좌표를 역추산하여, 오직 그 하나만을 파괴할 창날이니.
“하찮은 몰골이로구나.”
[그르르륵……!!]
공동의 한복판, 썩어 있던 살더미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진홍창의 파괴로 인한 여파다. 그리고 그 가장 깊은 곳에, 살더미가 만들어 낸 작은 굴 아래에 으스러진 구더기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놈의 본체다. 구더기 왕 느하리픽시. 숙주의 몸에 파고들고, 자신이 생육한 해충들을 부리며 영향력을 퍼트리는 악마.
썩어 부푼 살더미를 걷어내면, 놈의 본체는 하잘것없다.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고는, 칼날을 들어 올렸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네놈은 누구냐!! 네놈이, 네놈이 대체 어떻게!]
“피고의 죗값은 사형이다.”
-콰직!
칼날이 구더기의 목을 따고 바닥에 박혔다.
황제가 직접 일궈 낸 사육장이 파괴되었으며, 아마도 놈을 배후에서 조종하려던 군왕급 악마가 죽어 나자빠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황제 본인뿐.
끝이 보인다. 이 질척한 싸움의 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