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62화 (263/388)

262. 선악의 구분법 (10)

어슴푸레한 새벽녘, 아벨은 스르륵 눈을 떴다. 본디 용의 육화인 그녀에겐 수면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이따금씩 잠에 들곤 했다.

“좋은 아침이구나.”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침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잠을 자는 패턴은 사흘에 한 번이다. 그리고 그건 페르난데스의 일반적인 수면 패턴이기도 했다. 사흘에 한 번, 다섯 시간.

디모니카의 육신 기능성이 유지되는 최소한의 휴식 시간. 아벨은 페르난데스와 같은 패턴으로 잠에 들고, 함께 일어나는 순간이 좋았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텅 빈 침상뿐이었다.

“……대체 가만히 있는 법이 없구나.”

아벨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몸을 정돈했다. 영체에 가까운 탓에 생리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으니, 잠결에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는 것뿐이었지만.

* * *

복도는 서늘했다. 팔텐노이아는 지리상 따스하고 온난해야 했으나 사시사철 도시 상공을 뒤덮고 있는 대기층 탓에 겨울이 매섭고 여름이 서늘한 편이었다. 창밖에서 푸른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뿌연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혹시 그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내원 정원에 있습니다.”

“고맙구나.”

아벨은 아침 청소를 하는 시종에게 인사를 받으며 내원으로 향했다. 제국 최고의 권력가인 일곱 선제후들이 거하는 각자의 저택이 초라할 리가 없다. 공작의 저택 또한 그랬다.

내원으로 향하는 복도와 넓은 회랑엔 회화와 태피스트리가 화려하게 걸려 있고, 세련된 목조 난간이 덩굴처럼 유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벨은 그 부조를 손끝으로 쓸어 만지며 걸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내원을 보기 전까지는.

* * *

‘몇 번 했지?’

-백아흔셋.

‘일곱 번만 더 하고 좀 쉬자.’

흡, 하고 페르난데스가 팔을 구부렸다. 그의 전신 근육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꿈틀거렸다. 그는 후원에서 두 손가락으로 바닥을 짚은 채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꾸드득.

어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디모니카의 육신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무게 전체를 두 손가락으로 지탱하며 균형을 잡고 그대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은 무인의 소양이라기보단 차라리 곡예사의 그것과 같았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아물어가던 상처가 툭툭 벌어져 핏방울이 맺혔다. 팔뚝을 휘감은 두꺼운 근육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떨렸다. 천천히 팔을 굽혀 이마로 바닥을 톡 치고, 다시 천천히 뻗어 나가며 하나.

‘백아흔넷.’

-우득!

‘아이고, 시원하다.’

재활 훈련을 겸한 물리치료다. 육체의 내구성보다 출력이 높은 탓에 직접 몸을 타격하며 지압하게 되면 근육이 상한다. 조금 더 적절하고, 조금 더 세밀하게 완급을 조절한 충격이 필요했다.

지난 전투가 가져온 체력 소모가 심상치 않았다. 제아무리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물리적인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한계가 명백한 법이다. 제대로 된 조치가 없다면 천천히 망가져 가는 것이다.

몸이 망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다. 전투 이후 검신을 닦고 칼날을 갈아내는 것처럼, 정확히 그 정도의 감각으로 그는 육체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혹사였다. 의사는 페르난데스의 몸을 진찰한 뒤에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 말했다. 단순히 피부가 갈라져 출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체내의 독소를 빼는 과정에서 전신 혈맥을 한 차례 찢어 버렸던 탓에 내장까지 깊게 상한 것이다.

-후두둑!

결국 핏줄기가 어깨를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왼손으로 땀이 흐르는 눈가를 한 차례 훔치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선 탓에 시야가 반전되어 보였다. 그 너머로 아벨이 빵이 담긴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 일어났소?”

“……‘일어났소?’라고 했느냐?”

“음?”

“당장 일어서거라!!”

아벨은 쾅! 하며 바닥을 찍었다. 페르난데스는 몸을 튕겨 가볍게 자세를 바로잡고는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벨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네 몸이 아니냐. 왜 그리 험하게 구느냐!”

“내 몸이니까 이러는 것이오만.”

“뭐라고?”

“다른 누가 내 대신 나의 일을 해 준다면, 기꺼이 이양하고 더 나은 방도를 찾아보겠소. 하지만 아벨.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내가 희생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자원이 내 몸이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수통을 뜯고 물을 벌컥거렸다. 그 순간에도 그의 몸에 난 잔상처들에선 여전히 핏방울이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느냐?”

“무엇이 말이오?”

“네게 남은 시간 말이다. 페르난데스.”

아벨은 인간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멸자들을, 개중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필멸자들을 사랑한다. 모든 필멸종 중에서 인간이 가장 화려하고, 가장 밝게 타오르기에. 아벨은 그 빛에 매혹되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인간을 사랑하므로. 그녀는 그녀의 오랜 삶을 인간을 관찰하는 데에 보냈다. 당대에 있어 아벨은 그 어떤 인물보다 더 인간의 육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인간의 육신이 갖는 한계를 알고 있다. 베이타서스뿐만이 아니다. 인간에게 축복을 내린 신들은 그 긴 시간 동안 한둘이 아니었고, 신성을 소화해 낸 인간이 갖는 능력의 끝 또한 알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더 특출 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필멸자들에겐 한계가 있다. 평균치를 논하는 것이 아닌, 최대 상승폭의 절댓값을 냉정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벨은 페르난데스가 언제나 칼날 위를 걷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녀는 인간을 잘 안다. 인간의 한계 또한. 그 가련한 목숨까지도.

“네 생명이 얼마나 남았더냐?”

수명이 다해 죽은 디모니카는 없다. 디모니카의 무덤은 언제나 악마의 면전이었으니.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전생을 기준으로 남은 수명을 역추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선 거의 아흔에 가깝게 살았다. 그 시절에도 고난 속에서 살았으니 대단히 장수한 편이었지만, 지금의 고난에 비할 바는 아니다. 불사의 축복을 잃은 이래, 그는 오직 디모니카의 자연 치유력만을 믿고 몸을 사용했다.

디모니카가 일반적인 인간보다 1.5배가량 더 산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지금까지 누적된 격무로 단축된 수명을 얼추 계산해 보자면…….

“길면 십 년. 짧으면…… 삼 년.”

잘 먹고 잘 쉬고, 또 좋은 처치를 받았다 하더라도 인간이 입은 상처는 그 이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수복하기 위해서 육체는 수명을 소모한다. 아주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라도.

디모니카. 신의 신성을 몸에 품은 존재들의 경우엔 그 폭이 더욱 세밀하다. 수명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소모되고 있으리라.

아벨은 슬픈 눈으로 페르난데스의 벗은 몸을 바라보았다. 상의를 입지 않고 있던 탓에 그의 몸에 빼곡히 그려진 흉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심장 위에 박힌 대못 같은 관통상. 어깨에서 길게 쇄골까지 이어진 자상, 그 아래로 거미줄처럼 쳐진 찰과상과 자상. 양 팔뚝에 깨진 유리처럼 흩어진 무수한 상흔들까지…….

반백이 된 머리칼, 저 희끗한 머리는. 적어도 그녀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다.

이제 이 년이다. 고작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청년은 얼마나 많은 수명을 불꽃처럼 불태웠단 말인가. 그간의 노고가 준 유일한 보상이라곤, 덧없는 잿빛처럼 바랜 머리칼뿐이었다.

어떤 상처에도, 어떤 고난에도 멈춤 없이. 넘어지더라도, 비틀거리더라도, 무너지더라도. 다시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앞으로. 결코 멈춰 서지 않으며 앞으로.

마치 불길처럼…….

‘마치 불길 같지 않습니까. 어머니.’

‘불길?’

‘저와 제 기사들. 제 병사들과 그들의 어버이들을 보십시오. 저들의 자손. 그 자손의 자손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저들은 결코 기꺼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어찌 제가 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불길의 시대라. 그러하니 인간의 시대라. 먼 옛날 그녀의 아들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한 삶의 태도 그 자체를 정수로 벼려낸 것 같은 사내를 마주하며, 아벨은 슬프게 웃었다.

‘어찌 내가 저 사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벨은 슬픈 눈을 감추지 못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땀을 닦아내고는 옷가지를 걸쳤다.

“앞으로 잠은 매일 자도록 할 것이다.”

“시간이 아깝소.”

“여덟 시간을 잠들어 네 삶에 여덟 시간이 더해진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그렇게 한 밤과 다른 밤이 모여 하루가 될 것이니.”

아벨은 사흘에 한 번 잠을 자도 기능성이 유지된다는 말에 숨겨진 뜻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다른 디모니카들은 결코 저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흘은 가능한데 나흘이 불가능하다? 아니다. 의지만 충분하다면 나흘, 닷새, 어쩌면 엿새라도 잠을 자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기능성이 상실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그 최소한의 조건이 사흘이란 뜻은…….

‘사흘이 디모니카의 육신이 갖는 한계라는 뜻이며.’

페르난데스는 지난 이 년 동안.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언제나 한계까지 몸을 굴리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고쳐야 했다.

“한계까지 몸을 굴리는 것은 고약한 버릇이다. 언제나 사람이라면 세 푼 이상의 여유를 지니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느냐?”

“나는 바보가 아니오. 그 정도는 이미…….”

“아니. 너는 바보가 맞다. 내가 본 어떤 인간보다 영민하지만, 그 어떤 인간보다 미련하구나. 페르난데스. 네겐 여유가 없다. 한계까지 몸을 사용하고, 그리하고도 체력이 남는다면 또 다른 일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마치…… 일이 없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그건 강박이다. 아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의 전생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무엇 때문에 멈춰 있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목표 의식. 그리고 죄책감. 후회. 회한. 그러한 감정들은 그가 멈춰서 잠시 숨을 돌리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찾아와 그를 괴롭힌다.

사흘에 한 번 잠드는 이유. 그것이 기능적이라는 핑계를 제외하고 본다면 아주 간단하게 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한계까지 피로한 몸이 기절하듯 잠들어야 하는 이유.

“꿈을 꿀까 두려우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이따금씩 네가 평소와 달리 편안히 잠들 때면, 언제나 내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무언가 다른 일감을 찾고 있더구나. 악몽을 꾸느냐?”

“그건 그저 피로가 빠르게 풀렸기 때문이오.”

“아니지 않느냐. 왜 내게 그보다 더 빨리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도울 방법을 수만 가지라도 함께 찾아줄 수 있었다. 왜 내게 의지하지 않느냐. 페르난데스.”

나는 네게 이토록 의지하고 있거늘. 어째서 너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단 말이냐. 아벨은 그에게 다가가 땀 흐르는 목덜미를 옷깃으로 닦았다. 페르난데스는 피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 권리이기 때문이오.”

“권리……라고?”

“내 과오를 후회할 권리. 내 삶을 형틀로 삼아 이고 갈 권리. 내가 나일 권리. 그건 나의 것이오. 아벨.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후회를 들이켜려 할 수는 없소.”

마법사는 학자들이다. 세계의 신비와 비의를 논리와 이성으로 분석하여, 마력이라는 자원으로 새로운 흐름을 직조하고 증명하는 학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법사들은 그 어떤 이들보다 감상적인 존재가 된다. 밤하늘의 별빛을 다만 마력의 흐름으로 관찰하는 형이하학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이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닿지 못한 비의의 극한을 다만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이상을 그려내며 그것을 향해 팔을 뻗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관념을 현상으로 여길 수 있으며, 또한 현상을 관념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자들. 그런 자들의 사고방식을 하고 있기에, 페르난데스에게 후회란 단순한 관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건 삶의 지표이자 나침반이며, 등대였다. 후회와 회한은 그에게 형틀인 동시에 동력이었다.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마음 속 자원. 육신은 차라리 소모품이다. 그러나 후회는 귀중품이다.

그에게 현실은 지옥과 동의어다. 매 순간, 그의 삶은 시간만큼의 부채를 그의 영혼에서 뜯어가는 고리대금업자나 다름없었다. 그의 구원이 아니라, 그의 후회에 대한 구원을 위해 걸어가겠다 맹세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후회는 설령 그 어떤 이가 된들 꺼내 갈 수 없는 그의 심상 세계 속 보물이다.

“페르난데스.”

“그만두시오.”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팔을 떼어내며 옷을 입었다. 흉터 빼곡한 나신이 넓은 옷감 아래로 감추어졌다. 그 이후에 보인 것은, 언제나와 같은 무뚝뚝한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대가 싫어할 소식은 그뿐만이 아닐 테니.”

“……무엇이 더 남았느냐?”

“마침 잘되었소. 내 가장 걱정했던 것이 그대의 반응이었건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할 수 있다면 좋소.”

페르난데스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선악의 구분이 희미해진 시대가 오고, 고결함은 역사나 동화에서 찾아야 할 가치로 전락했소. 아벨레사스. 그대는 내가 만난 가장 고결한 존재이므로.”

아벨은 페르난데스가 건넨 종이를 천천히 읽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믿고 싶지 않다. 그녀는 종이 위에 늘어져 있는 싸늘한 단어들 위에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눈동자가 그녀를 얽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소. 길어도 십 년. 누구도 찾지 않을 깊숙한 산자락에서 시간을 보내시오.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닐 것 아니오.”

그 말을 들으며 아벨은 종이를 구겼다.

“이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네가…… 했다고? 어째서?”

“황제가 혼란을 원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그자가 세속의 환란을 유도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네가 그 일을 부추겼느냐?”

“혼란 속에서 어떤 종류의 정연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더 큰 혼란으로 그 계획 자체를 뭉개는 편이 더 수월하니까.”

들이는 품과 얻을 수 있는 이득 사이의 기회비용에 사람 몇의 목숨은 그리 무겁지 않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선언했다.

“그렇소. 내가 그 일을 교황에게 전했소. 더 큰 혼란을 가져오라고. 황제의 수를 빼앗고 변인을 통제해서 모든 변수들을 내 손 안에 쥘 수 있도록.”

아벨은 떨리는 눈으로 다시 한번 종이를 내려 보았다. 그건 짧게 간추려진 보고서였다.

* * *

교황령 : 성전군 선포.

목표 지역 : 각급 수도원 및 산하 기사단의 거점에서 레바인테르 제국 방면 전역.

작전 목표 : 이단 정황 포착 및 섬멸.

작전 경과 :

1) 파괴된 거주지 : 13개소.

2) 총 사망자 : 8,412인의 의심분자.

3) 포착된 이단 정황 : 현재까지 3건.

4) 파악된 위협 요인 : 전무.

총괄 책임자 : 성 바울 3세.

총괄 지휘관 : 성십자 구호기사단장 파반니 백작 비토 뱅상.

주께서 바라시니.

그리되리라.

* * *

“언제……?”

“열흘 전이오.”

“열흘 만에…… 열세 개 마을이 불타고 팔천오백여 명이 죽음을 맞이했구나.”

“아니. 그보다 많을 거요. 저 보고서가 오늘 새벽에 도착했지만, 작성 시일은 며칠 전이었으니.”

교회의 병력들이 각 지방에서 진군하며 그 길목에 있는 마을들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파악된 위협이 전무하다? 그건 생존자를 남기지 않았다는 고풍스런 은유였다. 말 그대로,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

“왜냐……?”

“황제는 이 제국 전역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소. 나조차도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광범위하고 은밀한 마법진을. 각 변과 각 항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모든 마을들을 불태우라 전했소.”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 필요하다면, 그렇다면 조사를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나씩 알아내어 최소한의 손실을…… 그런 방법은 없었단 말이냐?”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실, 그는 단어를 골라내고 있었다.

‘그게 최소한의 피해였소.’

‘내게 시간이 부족했소.’

‘다른 방법이 없었소. 알지 않소?’

‘내 일을 대신할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내 기꺼이 다른 방도를 찾아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내가 직접 현장을 지휘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변명에 불과했다. 꺼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변명을, 또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유치한 애정의 또 다른 발현일 수도 있었다.

변명 대신,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녀가 떠나길 바라며. 그녀가 그에게 실망하고, 그를 매도하고, 혐오하며 떠나길 바라며…….

진창을 밟으며 거닐어야 할 미래에. 그 질척하고 더러운 길에 그녀가 함께하지 않기를 바라며.

-후회하지 않겠나?

‘우리 후회에 한 점 더한들 티가 나겠나.’

-그렇지 않지.

페이자쉬가 끙,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스륵.

무언가가, 그의 뺨을 스쳐 뒤로 빠져나갔다. 청량한 향기가 코끝에 어리고, 감은 눈 아래로 어둑하게 그림자가 졌다.

톡, 하고 따듯한 물방울이 그의 뺨에 떨어졌다.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 같은 새파란 눈동자였다.

하,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입술이 포개어졌다. 따듯하고, 달콤한 숨결이 서로의 호흡에 얽혔다. 아벨도, 그도 서로 눈을 감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저 똑바로, 영혼 그 자체를 바라보듯 서로를 직시하며—

입술이 떨어졌다.

“난 마음을 읽을 줄 모른다. 페르난데스. 용은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방법을 몰라.”

“……?”

아벨은 눈물 젖은 눈으로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말하지 않으면 모른단 말이다. 네가 이고 있는 것들, 네가 생각하는 것들. 네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말하지 않으면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추측하면 할수록 더 커지고, 더 끔찍해져만 가더구나. 못된 녀석. 어찌 그런 세상을 산단 말이냐. 어찌 세상을 혼자 살아가려 한단 말이냐. 나는 네 옆에 일렁이는 그림자에 불과하더냐?”

“아벨…….”

“나는…… 나는.”

-와락.

무겁다.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그 마음이.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흐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어깨 위를 적셔 들어갔다.

“나는 그저, 네 악몽을 나눠 이고 싶구나.”

그건 어쩌면 그녀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의 고귀함 그 자체를 더럽히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 가시밭길과 진창으로 나아가겠노라 말하는 아벨이 눈부셔서.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속삭이며 그녀의 떨리는 등을 조심스레 토닥일 수밖에 없었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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