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팔텐노이아, 제국의 종언 (1)
그로부터 이틀 후, 에르브 공작의 접견 요청은 정식으로 황실의 인가를 받았다. 공작은 서글하게 웃으며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은 그가 기억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선제후 소집이 있을 때마다, 적어도 황실에서 리뷔에를 지원하던 시절엔 카르벨리에와 트레뮐레 두 가문의 사이가 썩 좋았기 때문에. 공작은 황실의 소집령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 그것 하나만큼은 전과 다르다. 알현실의 앞에서 환관들의 무장 점검을 받으면서도, 에르브 공작은 소름 끼치는 중압감과, 미묘한 이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차갑군.’
황궁 어전 회랑의 공기가. 그리고 자신의 품을 수색하는 환관들의 손끝이 차갑다. 시리도록.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무기질적인 표정이다. 환관들은 마치 분칠이라도 한 듯 창백한 얼굴로 기계처럼 단조롭게 공작의 품을 뒤적거렸다.
무장 점검은 빠르게 끝났다. 애초에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공작은 기분 나쁜 이질감을 애써 억누르며 천천히 열리는 회랑의 문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까지, 심연처럼. 점점이 밝히는 촛불이 무색하도록 짙은 어둠이. 주홍색 비단으로 치장된 황궁 심부 어전. 한때 빛의 전당이라 불리던 이 화려한 어전이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군.’
에르브 공작은 침을 삼키며 발을 내디뎠다. 생존 본능이 미친 듯이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어전의 어둠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본능이 눈앞의 광경을 인지하길 원하지 않았다. 시선이 미끄러지듯이 빛을 피해 벗어난다. 정면에 초점을 둘 수가 없어, 에르브 공작은 눈을 아래로 내려 깔았다.
여전히, 어전은 밝고 화려하며 사치스럽다. 그러나 그의 눈엔 온통 어둠만이 보였다. 색의 문제가 아니라, 저 내부에 있는 ‘것’의 존재감 탓에 시야가 어그러지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후드득.
울컥, 하고 코피가 쏟아져 내렸다. 에르브 공작은 콧망울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걸었다. 주홍색 비단이 깔린 길을 따라 천천히. 한 걸음씩.
“마음에 드는가?”
황제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득하게, 멀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네가 밟고 있는 것. 무엇인지 알겠나?”
“……?”
에르브 공작은 애써 눈을 부릅떴다. 밟히는 비단의 감촉이 평범하지 않았다. 본능으로 흐려진 시야에 천천히 초점이 잡히며, 물체의 형상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에르브 공작은 기겁하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이건 비단이 아니다. 그것을 비단이라 생각했던 이유는, 그 전까지 이 자리에 깔려 있던 것이 비단이었던 탓뿐이다.
주홍색 비단이 아니라……. 피로 물든, 아직까지 선혈이 배어 나오는 수의들이었다.
“이…… 무슨……!”
“하하, 놀랐나?”
저 멀리 옥좌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코에서 점점 더 많은 핏물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서도 끈적한 혈루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점점 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런. 면역력이 형편없군그래. 에르브 공작. 좋은 걸 잘 먹고 살지 그랬나?”
“너는…….”
에르브 공작은 어금니를 씹으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목이 끼긱, 하고 강제로 돌아가며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는 거의 억지로,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옥좌 위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권태로움에 찌든 눈으로 그를 내려 보며.
“제법 재밌는 짓을 하더군. 공작. 덕분에 분주했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냐……!”
“글쎄. 내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
-우드득.
어디선가 갑각질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스슥, 우드득, 파삭. 버석. 마치 곤충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소음이 귓가를 때렸다.
“모두 하찮은 발버둥에 불과하지. 결과가 정해져 있는데, 어째서 저항하는 걸까. 어리석기 그지없어.”
“너는 성공할 수 없다!”
에르브 공작은 애써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목에서 핏물이 스며 나오고, 힐끗 보이는 손등엔 붉은 수포가 잔뜩 돋아 올라 터지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구나. 여기가 끝인가. 이 일을 그에게 전해야 한다. 황실의 상황을 알려야 한다. 이대로 여기서 무너진다면…… 리뷔에의 군사들은 끝이다.
“에르브. 자네와 나는 제법 사이가 좋지 않았나. 아주 이상적인 가신과 군주의 관계였지. 나는 자네의 합리성이 마음에 들었건만, 나이가 들어 노망이 난 겐가?”
필멸하는 삶은 정말 안타깝다니까. 황제는 크, 하고 웃었다. 에르브 공작이 무어라 입을 열려 할 때, 황제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가 댔다.
“쉿.”
-우드득, 파삭.
곤충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더 시끄럽게 울렸다. 에르브 공작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황제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자네는 우리와 하나가 될 걸세.”
“그가 널 막을 것이다……!”
에르브 공작은 피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곧 시야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피눈물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눈꺼풀이 뜨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에르브 공작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허물어지며 외쳤다. 그가 널 막을 것이다. 너는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아.
르네 필리파. 내 딸아.
* * *
회의실은 암운이 감돌고 있었다. 공작의 기사들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전장을 내달릴 때의 용맹함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그저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싸늘한 엄숙함이 어둑한 회의실을 잠식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그저 가만히, 차라리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겁쟁이들.
‘그렇게 얘기하지 마. 페이자쉬. 저자들도 이해하고 있어.’
-이해와 인정은 다르다. 저놈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어.
‘그건 고집이나 두려움이라기보단…… 충성심이지.’
페르난데스는 이죽거리는 페이자쉬를 다독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작의 기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 유족을 위로하는 것도 사제의 몫이지. 페르난데스는 쓰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공작은 소천했을 것이오.”
아마도라는 말은 삼켰다. 기사들에게 헛된 희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공작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사실과 다름없었다.
공작이 황궁에 입궐한 지 닷새가 지났다. 살아 있다면 연락을 취했어도 한참은 전에 했어야 할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공작의 군단은 그저 그 자리를 지키며 제도의 식량을 축내고 있을 뿐이었다.
“…….”
공작의 가신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슬픔을 삭이는 중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그건 두려움에 의한 도피가 아니라 충성심에 의한 미련에 가까웠다.
“카르벨리에 공작이 소천한 지금, 나는 경들에게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하겠소. 경들에겐 세 가지 선택이 남아 있소.”
페르난데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 지금 군영에 카르벨리에 공작에 준하는 명령권자는 없소. 이는 달리 말해 설령 보르아 기사단장이라 할지라도 군령 전체를 통솔할 수 없다는 뜻이오. 그리하니,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공작 영애에게 찾아가 군세를 재정비하는 것이오.”
귀르를 중심으로 해상전을 이어 나가고 있는 르네 필리파 공작 영애. 지금 리뷔에군에 유일하게 정통성 있는 주군으로 받아들여질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옳소. 이는 하책이오. 공작 영애는 지금 명분상 반황제 파벌이며, 카르벨리에 공작은 친황제계로 명분을 쌓았으니. 공작이 목숨을 바치며 쌓아 올린 명분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될뿐더러, 군영을 북부로 돌리면 서부 리뷔에 지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지금 카르벨리에 공작군은 제도 팔텐노이아를 수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해 모든 방향으로 진출이 가능하며, 동시에 리뷔에에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위치를 점거했다는 뜻이다.
북부의 귀르로 향한다면 당장 군세를 통솔하여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는 있겠으나, 리뷔에의 안전과 공작의 명분 모두를 잃게 된다. 그 이후에 카르벨리에 공작은 그저 야심 많은 선제후 중 하나로 전락해 차기 제위를 노릴 수 없게 될 것이므로 하책이다.
“두 번째 제안은 황실로 진격하는 것이오. 공작의 복수라는 만족감, 지금 당장 당면한 보급과 자원, 황실을 점거하고 황제를 폐위해 얻을 수 있는 수천 가지 이윤이 있소.”
그의 말에 회의실 기사들 중 삼분의 일가량이 움찔 떨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피며 남몰래 혀를 찼다.
이 자리의 기사들은 적어도 지휘관에 준하는 고위 간부들이다. 그런 자들의 식견이라 칭하기엔 적이 무능한 행동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기사들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페르난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이는 하책조차 되지 못하는 실책이오. 당장 공작의 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공작의 소천이 황제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카르벨리에 공작 가문은 후일 역사에 길이 남을 반역가가 될 것이오. 소천한 공작의 명예는 물론이고, 가문의 존속마저 위태롭게 되겠지.”
그 말에 앞서 경동했던 기사들이 창백하게 질렸다.
귀족들 사이엔 오랜 불문율이 있다. 배신을 하더라도 세련되게. 본디 귀족이라 함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라는 뜻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면전에서 배신을 시도하지 않는다.
귀족 사회의 명분은 단지 소문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귀족의 존귀함을 증명하는 것은 혈통이고, 오랜 혈통이 의미하는 것은 ‘신뢰성’이다. 그 가문에 대한 존중은 그 가문의 신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들은 결코 앞에서 배신하지 못한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오로지 모략으로만 원하는 바를 이뤄내야 하는 존재들이다.
만일 기사들이 황실을 공격한다면, 설령 실제로 공작이 황제의 손에 암살을 당했다 하더라도 모든 누명은 공작의 기사들이 지게 될 것이다. 그날로 귀족 사회에서 공작가는 끝난다.
“세 번째. 내가 경들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제안이오. 경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대로 이 지역을 평소처럼 수호하시오.”
그 말에 모든 기사들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이 시기 기사들은 단순히 힘이 강한 장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현장 지휘관들이었고, 최소한의 경우라도 기초적인 전술 개념은 익히고 있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현상 유지는 퇴보와 다르지 않다. 시간은 적과 아군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며, 아군이 멈춰 있는 동안 적은 진보하기 마련이다.
전쟁은 매우 상대적인 경쟁이다. 전쟁의 승리 조건은 단 하나뿐이다. 적보다는 나을 것. 적이 어떤 책략을 짜내고, 어떤 수를 둘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단지 멈춰 있는 것은 얼핏 하책으로 여겨졌다.
페르난데스는 유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베이타서스 교회의 성전군이 선포되었소. 교회 소속의 모든 성당기사단들이 일제히 이곳 팔텐노이아로 진격하고 있소.”
페르난데스는 손을 뻗어 지도에 재빨리 세 군대를 표시했다. 각각 역십자 구호기사단, 성 요한 순례기사단, 제5 고행단. 베이타서스의 대표적인 무력 기관들을 의미하는 표식이 그려졌다.
“또한, 동부 왕국 연합의 연합군이 라 메르티옹을 넘어 자클랭과 디안 지방으로 진군하고 있소. 동부 방면의 친황제 계파 선제후들은 이를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지.”
제국 동부 지방의 세 거대 세력. 친황제파 선제후령 메르티옹, 자클랭, 디안에 붉은 칠이 더해졌다. 실제로 그쪽 지방은 지금 피와 불로 붉게 물들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귀르. 트레뮐레 궁중백가는 지금 북서부 방면의 아르낭 공작가와 전쟁을 벌이고 있소. 황제가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마지막 친황제 계파 공작이지. 자, 이제 황제는 모든 손발이 끊어진 상태요.”
메르티옹의 대공, 바레스.
디안의 공작, 푸아티에.
자클랭의 공작, 그리모아르.
트루아의 공작, 아르낭.
친황제파라 말할 수 있는 네 가문이 모두 당면한 영지전을 감당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이다. 제국이 제아무리 강대하다 하더라도 모든 선제후들이 각자의 전쟁에 몰두한 이 상황에서, 황제에겐 어떤 군권도 남아있지 않다.
제국 전역은 지금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 귀르의 트레뮐레가 카르벨리에 공작과 손을 잡았으며, 뷜라의 세포르 공작가는 수인 호족 연합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견제할 수 있는 가문은 남부. 장송의 공작 블랑퓌네르 가문뿐이오.”
“그들은 황제를 증오하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의 아군이란 뜻이 되겠소?”
“적의 적은…….”
“아니. 두 굶주린 이리가 있다면 한 마리 사슴을 두고 경쟁할 뿐이오. 블랑퓌네르 가문은 결코 경들이 먹잇감을 독점하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자, 보르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시점에 저들이 군사 행동을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블랑퓌네르 공작은 어리석지 않거든. 지금 전역을 보시오. 모든 제후들이 서로를 향해 어금니를 드러낸 상황에서, 유일하게 ‘명예로운’ 입장을 카르벨리에 공작이 차지하고 있소. 블랑퓌네르는 결코 선제 공격을 감행할 수 없소.”
귀족은 면전에서 배신하지 않으므로. 충성심과 명예를 직접 증명한 카르벨리에 공작은, 단적으로 말해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상 결코 무너지지 않는 명분을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경들은 적어도 동부, 또는 북부의 사태가 진정되기 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최선이오. 평시라면 하책이겠으나, 지금이라면 유일한 방도가 되겠지.”
공작의 군단은 수도를 빙글 둘러 전개한 방어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를 반대로 뒤집어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 황제를 확실히 포위하고 있는 유일한 군대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제에게서 명분이 단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이를테면 공작의 암살 사실과 같은 종류의 명분이. 제도를 수호하는 군사들은 그 순간 반전하여 제도를 포위한 침략자로 돌변할 것이 분명했다.
폐회가 선언되었다. 기사들은 각자 애써 납득한 표정을 지으며 삼삼오오 떠나갔다. 공작의 죽음이 명백히 공표된 회의에서, 섣불리 입을 여는 가신 따윈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들 모두가 떠나기를 한참 기다리고는, 의자에 앉아 지도를 바라보았다.
“끝났느냐?”
문이 열리며 아벨이 들어왔다. 그녀는 회의 내내 회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소.”
“이야기는 밖에서 들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 내가 군략에 밝은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에 황제는 바보가 아니다.”
“물론 그렇소.”
황제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황제는 대단히 영민한 사내라고 가정해야 했다. 각각 일대의 군웅들인 선제후들 사이에서 오직 정치로 만장일치를 얻어내려면 그 정도의 머리는 당연히 갖춰야 한다.
그러므로 황제가 그저 멍청히 당하고만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낙관론이다. 기사들과는 달리 페르난데스는 황제가 가만히 제국의 멸망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삼자의 눈으로 볼 때에, 아벨도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황제는 반드시 블랑퓌네르 공작가에 손을 뻗을 것이오. 황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지원 요청이 될 테니까.”
황제의 파벌은 지금 손쓸 틈 없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책략을 부리려 한다면 블랑퓌네르 공작 외엔 없다.
어떤 조건이 붙든 황제는 블랑퓌네르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가 이렇게 선언한다 가정해 보자.
-카르벨리에 공작은 알현을 요청한 이후 암습을 시도했으며, 제위 무력 찬탈 시도는 근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카르벨리에 공작의 군사들은 수도를 무단 점거하고 인근 국경선을 포위하고 있으며, 이에 황제는 이들을 반역도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블랑퓌네르 공작은 당장 얼씨구나 하며 진군을 개시할 것이다. 황제가 수도의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단 몇 주 정도만 버텨내면 카르벨리에 공작군은 수도와 블랑퓌네르 공작에게 앞뒤로 포위가 된다.
지금 황제가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계략이 그것이다. 서부 원정과 오랜 몰락으로 무너질 대로 무너진 리뷔에 공국과는 달리 블랑퓌네르의 장송 공국령 군사들은 군사력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자들이다.
거점을 잃고 유기된 공작군은 수도의 성벽을 넘지도 못한 채로 압살당할 것이다. 다만 지금 황제가 그 방법을 짜내지 못한 이유는…….
“황제의 지원 요청에 블랑퓌네르 공작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했거나.”
“아니면, 블랑퓌네르 공작의 군세가 소집되어, 이미 진군을 시작했거나.”
황제의 침묵은 다만 시간 벌이일 수도 있다. 블랑퓌네르 공작의 군단이 이곳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행군 시간을 벌기 위해 황제가 침묵하고 있다 여긴다면, 지금 상황은 최악이 될 것이다.
리뷔에의 기사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고, 그 끝은 몰락뿐이다.
하지만 전쟁이란, 군사력 이전에 시간으로 먼저 승패를 가리는 종목이다. 시간 싸움이라 한다면 페르난데스 또한 자신이 있는 방면이니.
“동부가 몰락하거나, 귀르의 트레뮐레 궁중백이 전쟁에 승리해 수도로 향하거나, 베이타서스 교회의 성전군이 먼저 수도로 도착한다면 우리의 승리요.”
“그리고 저 세력들보다 블랑퓌네르 공작이 먼저 수도에 도착한다면 우리의 패배가 되겠지.”
“아니, 황제의 승리 조건엔 한 가지가 더 필요하오.”
“그것이 무엇이냐?”
“황제의 선언. 블랑퓌네르가 설령 먼저 도착한다 하더라도 황제가 카르벨리에 공작을 반역자라 선포하지 못한다면, 명목상 카르벨리에 공작가는 황실 수호의 기치를 내세운 충성스런 가문이오. 결코 선제 공격을 받을 수 없지.”
그의 말에 아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말은 맞는 말이지만…….
“황제를 직접 억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이곳 인간들은 명분 때문에 황실을 직접 공격할 수 없다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그 명분이 카르벨리에 공작가의 목숨을 연명시키는 유일한 동아줄이 아니냐.
아벨이 그리 묻자, 페르난데스가 빙긋 웃었다.
“물론 그렇소. 공작의 가신들이 황실을 공격하는 순간 블랑퓌네르 공작은 물론이요, 모든 선제후들이 카르벨리에 공작의 세력을 공격할 명분을 얻게 되지. 그래선 아니 되오.”
“그렇다면 어떻게 황제의 입을 막을 셈이냐?”
“공작의 기사들에겐 방법이 없소.”
앞서 기사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들에겐 단 세 가지 선택지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페르난데스에겐 한 가지 선택이 더 남아 있다.
그는 품 안에서 로사리오를 꺼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단 조사.”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