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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65화 (266/388)

265. 팔텐노이아, 제국의 종언 (3)

마를린의 낯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물들었다. 강력하고 낯선 마법사가 대뜸 부랑자들이나 다름없는 방랑 마법사들의 소굴에 찾아와 실험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단 하나의 결론만을 의미한다.

‘생체 실험……!’

방랑 마법사들은 학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 말은 곧 외부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또한, 마력 회로가 몸에 박힌 마법사의 육신은 때에 따라서 대단히 효율 높은 실험체로 여겨지기도 한다.

마를린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의 모든 마법사들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압도적인 실력차에 식어 가던 분위기가 곧장 활활 타올랐다.

“고인께서 바라시는 것이 그렇다면…….”

마를린은 천천히 손을 그러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여기에선 방심을 유도한다. 그러나 말의 높낮이. 마치 사투리처럼 이어지는 기묘한 리듬감 사이에 마력이 은밀히 스미고, 선율을 그리는 악보처럼 마법이 자아내진다.

공격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 마법전에서의 기량 차가 너무나 심했다. 그러므로 합공과 기습. 마를린의 주문은 경고였다. 이 여관에 머물고 있는, 이 여관에 속한 모든 마법사들에게 발산하는 경고성 페로몬과 같은 종류의.

“대적할 수밖에!!”

-콰드드득!

-콰직!

-지이이잉!

강자에 대한 기습은 방랑 마법사의 기본 소양과 같다. 마법전의 기초는 상대방의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있으므로. 방랑 마법사들은 본질적으로 잘 단련된 암살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자들이, 짧게는 수 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을 정처 없이 방랑했던 와일드캐스트들이 동시에 주문을 얽어냈다. 적어도 일곱에서 여덟 가지의 공격 주문과 대여섯 가지의 방해 주문, 그리고 실제로 물리적인 단검 투척이 포함된, 대단히 치밀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로브 아래에서 슬쩍 웃고만 있었다.

-귀엽게 구는군.

‘귀엽게, 구는군.’

페르난데스는 품 넓은 로브 아래에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저항을 예상했지만, 예상대로 저항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즐거웠다.

짧게는 수 년에서 길어도 십수 년이라. 와일드캐스트라는 이름을 달고서 사십 년, 반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던 한 늙은 마법사에겐 그저 귀여운 수준의 재롱에 불과하다.

-캉!

가장 먼저, 단검 세 자루.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카롭게 쏘아져 날아온 단검들 중에 먼저 다가오는 것이 칼자루 끝 폼멜에 맞아 튕겨 나간다.

음울한 푸른 눈이 후드 아래에서 빛났다. 다음. 머리로 향하는 단검은 고개를 돌려 피하며 그 기세로 손을 뻗어 마지막 단검의 고리에 손가락을 끼워 가로챈다!

“뭣?!”

단검을 피하는 것. 물론 가능하다. 단검을 튕겨 내는 것? 어렵지만, 그리고 요행이 필요한 일이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탄력을 받아 날아드는 단검을, 그 고리를 공중에서 손가락 하나로 낚아채는 일? 그것이 가능한 이들은 서커스나 기사단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경악이 터져 나오는 것과 별개로, 이미 완성된 주문이 페르난데스의 몸을 향해 쏘아져 나온다. 먼저 넓게 깔린 방해 주문들은 무시한다. 마력 흐름을 훼방해 주문이 직조되는 것을 방해하는 종류의 간단한 주문들이었다.

‘어차피 마법은 못 써.’

청동 왕좌를 이용한다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그래서야 실험의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공격 주문들은.

‘이건 해제하고, 저건 막아야겠군.’

화염구나 벼락 따위의 물리적인 주문은 쓸모가 없다. 그의 실험에 필요한 것은 보다 더 세밀하고 끈적한 ‘저주’ 계열 주문이었다. 단검을 낚아챈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까딱여 수인을 쥐었다.

-콰직!

이미 생성된 주문들은 어쩔 수 없이 피해야겠지만, 그래서야 낭만이 없다. 본디 압도적인 강자란 그 움직임 한 번에도 품격이 드러나야 하는 법!

-콰아앙!

“무슨……! 방해하지 마!”

“내, 내가 한 것 아니야! 저 괴물이 한 거라고!”

마법사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날아들던 화염구와 벼락이 서로 충돌하며 상쇄했다. 분명 타게팅은 완벽했는데, 궤도가 갑자기 틀어지며 서로 부딪쳐버렸다!

“방해 주문은?! 놈이 어째서 마법을 부릴 수 있지? 이 많은 방해 주문을 모두 뚫어낸 거야??”

“아니야! 놈은 주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마력 쐐기는 완성된 주문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마력을 이용해 특수한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닌, 그저 작은 마력 파편을 주문 사이에 강제로 삽입해 해주하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주문 방해 술식들은 작은 마력 덩어리에 불과한 쐐기를 파훼할 수는 없다. 그 정도의 고위 방어 주문은 보다 복잡하고 오랜 시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 저 낯선 마법사는. 고작 마력 쐐기를 주문 사이에 틀어박는 것만으로도 완성된 주문의 방향성을 꺾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고등한 주문 시전자라는 뜻이었다!

“제기랄! 내가 한다!”

난로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거칠게 외치며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새로운 주문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며, 폭발의 잔향 속에 파묻힌 이방인에게 향했다.

노인은 엄지손가락 끝을 뜯어 핏방울을 내며 바닥에 뿌렸다. 타닥, 핏방울이 바닥에 부딪침과 동시에, 붉은 섬광이 지팡이 끝에서 튕겨 나가 검은 연기 사이로 쏘아졌다.

“됐어! 성공했다!”

“무슨 주문이었어?!”

“지크의 꼭두각시!”

“좋았어!!”

마법사들 사이에서 안도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환각 계열 주문에 통달한 학파. ‘제르메드 학파’의 고위 주술이 완벽하게 시전되었다면, 놈은 지금 무력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과연, 연기가 걷히고 모습이 보이자 좌중의 분위기가 크게 부드러워졌다. 거친 움직임에 후드가 벗겨지고 얼굴이 드러난, 대검을 움켜쥔 청년이 보였다.

“젊……군……?”

“주문은 성공한 거지?”

“당연하지. 놈이 꿈쩍도 하지 않잖나!”

마법사들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서며 웅성거렸다. 석상처럼 굳은 청년은, 반백의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을 반개하고 우뚝 서 있었다. 머리만 봐서는 늙은이인가 했는데, 이제 갓 스물은 됐을까 싶은 젊은 청년이었다.

“놈에게 물어봐. 무슨 생각으로 혼자 여기에 들어왔냐고. 어떤 변명을 하는지 듣고, 그다음에 놈의 처형을 결정하도록 하자.”

“뒤탈이 없을까? 귀족처럼 보이는데!”

“귀족이면 어떻고? 어차피 제국 치안은 지금 개판인데. 이놈 시체 하나 수로에 던져 놔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걸?”

수로에서 낯선 시체가 떠오르는 일은 이제 흔한 일상쯤으로 여겨졌다. 처음에야 경비들도 열심히 조사를 해봤지만, 조사 끝에 나오는 것이 별것 없었다.

그 빈도가 차츰 높아지자 도시의 범죄자들은 시체 은닉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그냥 수로에 던져 두면 경비병들에 의해 치워지고 마는 것이다.

설령 일이 잘못되어서 조사를 한다 치더라도 이 장소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자들 따윈 없다. 그러니까…….

“이놈은 대체 어떻게 우릴 알고 있었던 거지?”

정보가 흘렀을 리가 없었다. 방랑 마법사들을 믿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지만, 제국 수도에 있는 유일한, 신뢰할 수 있는 숙소를 외부에 팔아 치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을 이 학회에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놈은 칼을 쥐고 있지?”

“아까 움직이는 것 못 봤어? 그냥 칼질만으로 우릴 다 죽일 것 같던데?”

“괴물이구만…….”

한 마법사가 탄식하며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고작 마력 쐐기 몇 번으로 장내의 거의 모든 마법을 난도질하던 실력과 젊은 나이, 그리고 기사 못지않은 움직임까지.

“어쩌다 이런 놈이 나타났지? 이거 무슨 어디 인간 병기 같은 것 아냐? 황궁이나 선제후들이 키우는 애들 있잖아. 도살자들.”

“이 몸 좀 봐. 갑옷만 입혀 놓으면 아무도 마법사라고 생각도 못 할 것 같은데? 이게 어딜 봐서 마법사야. 기사지.”

한 마법사가 그런 말을 하기 무섭게, 난로 앞에서 마법을 조율하던 노인이 돌연 컥, 하는 소리를 지르고는 우당탕탕 쓰러졌다.

침묵이 한순간 장내를 휘감았다. 마법사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반응하지도 못하고 딱딱히 굳어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할아범. 무슨 일……!”

“마법사도, 기사도 아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던 마법사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년. 페르난데스가 우득, 하고 목을 풀며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는 철컥, 칼을 다시 집어넣고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목걸이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작은 사슬에 엮여 있는 상징물…… 로사리오였다.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이지.”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었다.

* * *

검은 연기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몸을 향해 날아드는 주문을 느끼고는—

그대로 몸을 내주었다.

-꼭두각시군.

‘제법 정교한걸?’

페이자쉬가 클클 웃었다. 제법 정교한 수준이다. 몇 수 정도 아랫줄로 쳐줄 법했다. 수십 년을 홀로 방황하며, 오로지 실전에서 마법을 익혀야 했던 학파 없는 노마법사에겐 재롱 수준의 주술이다.

주문이 순식간에 몸을 잠식해 들어간다. 마력 회로를 정지시키고 육신의 지배권을 강탈하는 종류의 주문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몸엔 마력 회로가 없다는 것.

그리고, 디모니카의 육신이 갖는 마법 저항력은 고작 이 정도 수준의 마법으로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완성되지 못한 주문이 그저 몸에 넓게 둘러져만 있다면, 파편화시키는 일은 너무나 수월하다는 것.’

-우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육체 내부 어딘가에서 울려 퍼졌다. 실존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건 어떤 감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환청이다. 육신 전체에 넓게 퍼져 있는 주문식들이 바스라지며 설탕 조각처럼 흩어지고—

-콰직!

가루가 되어 파편 하나하나가 자그마한 마력 조각 수준으로 떨어진다. 당연히 주문 자체의 효과는 애저녁에 사라진 지 오래. 다만 남아있는 것은 시전자가 술법의 유지를 위해 이어 놓은, 마력의 단말뿐.

-칭!

마력의 단말을 가로챈다. 순식간에 페르난데스의 손가락에 따라 주문 전체가 잠식되어 간다. 타깃이 잡히며 놈의 위치가 보였다. 당장 이 손을 거두며 마력을 조합하면 놈의 목숨은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놈을 죽일 필요까진 없다. 그저 무력화. 아니, 주문을 역으로 돌려주는 편이 더 품위 있는 행동이겠군.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보통 새롭게 창안한 주문의 실험이라는 것이 단번에 성공하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저주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더라도, 기물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주문을 시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성취다. 드디어 디모니카의 육신을 거의 손상하지 않고도 직접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악마들을 상대해야 했다면 이런 복잡하고 귀찮은 짓을 자처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우르카시아, 해충왕의 악마들은 다르다. 주술적인 역병과 저주 주문을 사용하는 해충들을 상대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주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놈들은 머릿수로 상대해오는 편이니. 그의 입장에선 마력 공급처가 사방에 산재해 있는 셈이다!

주문의 성공과 함께 곧 파괴의 잔향이 흩어지며, 여관의 형태가 다시 드러났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반개한 상태로 주위에 몰려들어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어딜 봐서 마법사야? 기사지!”

이 말은 참을 수 없군. 페르난데스는 목을 풀며 말했다.

“마법사도, 기사도 아니다.”

마력 회로도 없고, 더 이상 신비를 연구하고 탐색하지 아니하니 마법사라 자칭할 수 없다. 그저 주문 시전자일 뿐.

명예도 없고, 충심으로 섬기는 주군 또한 없이 그저 칼을 들어 사람을 치니 기사라 자칭하기엔 모자라다. 그저 도살자, 살육자, 살인마에 불과하다.

약간의 자조를 섞어 말하자면, 그의 처지는 기사나 마법사를 자청할 상황이 아니었다. 호칭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지만,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칼 든 살인자를 좀 더 품위 있게 설명하자면.

“이단심문관이다.”

이쯤 되겠지. 페르난데스는 창백하게 질린 좌중을 훑으며 웃었다. 익숙한 얼굴이 많군. 쓸모가 있겠어.

그림자 학회, 너무 진부한 이름이다.

칼림부르크 마법 학회? 지금 와서 생각해 보자면 그건 실패의 상징이었다.

이들을 거두고 새롭게 이름을 짓는다면 다른 칭호가 필요할 것인데. 흑마법사와 방랑 마법사, 추방자들을 모아 놓은 집단의 수장이 이단심문관이라면…….

‘적절한 이름이 있지.’

페르난데스는 로사리오를 길게 늘어트리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너희는 렐리기오사 말레디카(Religiosa Maledica; 죄악의 수도원)로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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