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믿음은 등불이라 (2)
그 말의 행간에서 묻어 나오는 끈적하고 명백한 적의에, 황제의 낯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부자연스러운 표정 변화다. 페르난데스처럼 근육의 수축조차도 결 단위로 분해해 인지할 수 있는 디모니카에게는 더욱.
인간의 육신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군. 페르난데스는 그 순간 다른 정보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놈은 그 내면까지 온전히 악마화되었다. 인간의 영육이 물질 세계에 존재하는 채로 악마로 변이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말년, 타이반이 그에게 제안했던 것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울컥 치솟는 혐오감을 가장된 냉정으로 억누르며, 페르난데스는 생각했다. 놈에겐 인간의 외피가 필요한 상황이다. 달리 말해, 황제라는 직위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는 상황이다.
그게 무엇일까.
“어리석은 것. 내게 대적하려 하느냐?”
“그뿐일까.”
파리 한 마리가 왱,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았다. 더 이상 타락을 숨기지 않는 황제의 몸에서부터 해충들이 꿈틀거리며 스며 나오고 있었다.
겉껍질의 작은 틈 사이로 조금씩. 바퀴벌레, 파리, 지네와 전갈……. 갖은 종류의 독충들이 스멀거리며 새어 나왔다. 왱, 위이잉, 부웅. 날갯짓 소리가 점점 시끄럽게 울려 퍼지며, 놈의 목소리가 그 사이에서 기묘한 울림을 담아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둔하고 하찮구나. 이미 너는 ‘위대한 군주’의 축복을 받았다. 네 처지를 모르느냐? 지금 이 순간이라도 군주님께서 바라신다면 네 목숨 따위는 바람 앞 등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페르난데스의 몸 안에 잠복한 역병이 독소를 내뿜으며 꿈틀거렸다. 손끝부터 검게 물들어가며 사지가 썩어 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열꽃이 올라온 주름 사이로 누런 수포가 툭툭 터졌다.
육신의 기능이 삼 할. 아니, 이 할 이하로 떨어졌다. 군왕급 악마의 저주 그 이상의 타락이다. 독소가 품은 마력은, 일반인이라면 단 한 줌으로도 핏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가 견디고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을 육신의 기능적 오류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의지, 그리고 디모니카 특유의 신성 덕이었다. 그나마도 점차 노쇠하여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바람 앞의 등불이라.”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꺾으며 중얼거렸다. 온몸을 파고든 저주……. 이 끈적한 지옥 특유의 마력. 단지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과 인성, 본질마저 좀먹어가는 지독한 마력.
-타닥, 탁!
불꽃이 튄다. 페르난데스의 근처를 부유하던 먼지나 날벌레 따위가 타닥이며 저 홀로 타올랐다. 섬짓할 정도로 차가운, 새파란 불똥이 그의 주위에서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탁, 타닥. 탁. 점점 더 조밀하게.
[……하찮군.]
무료한 듯, 황제는 손을 휘적 저었다. 그와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몸 안을 파고들었던 마력들이 일제히 그의 손짓에 감응해 가동하기 시작했다. 혈류를 타고 본격적으로 독소를 내뿜으며 활개를 친다.
두근, 하고 심장이 피를 토하듯 울컥거린다. 복합 장기 부전과 내출혈, 이에 길항하는 회복력이 만들어내는 뜨거운 열기. 그리고 주위를 비산하는 마력의 잔향.
-타닥.
“그리웠군.”
-아, 좋군. 하하, 하하하! 이 느낌, 이 감각!
지옥 마력이 불러오는 고양감. 혈류를 타고 내달리는 끈적한 이 힘이 불러오는 전능감! 세계를 발밑에 두고 오시하는 절대자의 시선. 물질 세계의 어떤 한계를 초월한 자들이 가질, 그런 종류의 전능감이 저릿하고 척추를 타고 흐른다!
영육을 살라 먹는 저주라 했던가. 아니, 저들의 말로는 축복이라 했었다. 대악마가 직접 내리는 축복은, 그 자체로 저주와 다를 바가 없으니.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 힘은 ‘축복’이다. 인간의 육신에 무제한적으로 퍼붓는 이 역병의 저주. 한 줌으로도 일반인이라면 핏물로 변할 수준의 끈적한 극독이!
-전성기의 편린을…… 잡았다.
페이자쉬가 비릿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 확실히 잡았다. 마력의 제한이 없던, 생각하는 것을 곧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그 시절의 힘을 잡았다.
대기 중에 섞인 자연 마력을 애써 정수하여 가냘픈 회로 아래에 틀어박아 가며 사용하던 청동 옥좌의 그것과는 상궤가 다른 힘. 대악마의 힘. 너무나 강력한 탓에 그 자체로도 신성을 품었던, 천상 전쟁 시절 대악마의 힘.
그 저주가, 그 마력이 그를 죽이고자 혈류 속을 유영하는 지금 이 순간.
-우드득!
바싹 마르고 뒤틀린 손가락이 천천히 정면으로 뻗어 나와, 허공을 움켜쥔다.
잡았다.
페르난데스는 고요함 속에 미소 지으며 움켜쥔 손을 비틀었다.
영혼을 불태우는 저주가 박살 나며, 그 사슬이 낱낱이 끊어져 한 조각 마력으로 화한다. 조각 난 마력들이 그의 몸 안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육체를 좀먹어 간다.
녹아내린 팔뚝에서 힘이 빠진다. 힘줄이 늘어지고 근육이 흩어지며 혈액이 응고한다. 죽음이 가깝다. 생명의 끝, 차라리 주마등마저 보일 정도로 아슬한 그 경계면에 한 발을 걸치고—
그러나, 육체는 다만 소모품에 불과하며.
신성을 머금었던, 디모니카의 육신은 마력을 거부했으니…….
생사의 경계면에서 비로소 마법의 진의를 손 아래에 가둘 수 있다.
‘우습지 않나. 우리는 한 번 죽어야 마침내 마법사가 되는군.’
-한 번 죽어서 잃었던 힘이니, 다시 죽어 되찾는다면 그럭저럭 각운이 맞지.
‘좋아. 적당히 자조적이군.’
페르난데스는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두근. 심장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듯 피를 토했다. 육체의 기능성은 이제 일 할 아래. 의학적인 관점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자살……이냐?]
“죽어야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지.”
영혼을 울리는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 흐름을 따라, 허공을 움켜쥔 손등 위로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본을 보여 준다 했던가. 대악마의 마력을 품었다면, 저처럼 하잘것없는 데에 소모하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 주마.
페르난데스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페이자쉬의, 다섯 왕좌의 손아귀.”
* * *
“당장 확인해라! 당장!”
수도의, 그리고 수도 인근의 모든 마법 학회에선 경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각 학회의 학회장에 준하는 인사들이 직접 뛰어다니며 지금 수도 하늘 위로 펼쳐진 거대한 마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대마법엔 반드시 전조 증상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너무나 짧다. 너무나 빠르다. 마치 한 사람이 펼치는 개인적인 마법인 것처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마법사들의 머릿속에선 현실과 그들이 알고 있던 지식 사이의 충돌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팔텐노이아의 모든 마법 학회들은 서로를 견제한다. 몇몇 집단의 돌발적인 마법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 서로는 서로의 대마법을 견제하고 방어하기 위한 최대한의 조치를 취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마치 개인이 부리는 것처럼 황궁 위에 펼쳐진 이 거대한 마법은 어떤 전조 증상 없이 돌연 나타나 하늘 위에서 대지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형상은 마치 손아귀와 같다. 대지를 움켜쥐는 악마의 갈퀴처럼 거칠고 폭급한. 다만 파괴만을 위해 축조된 형상이었다.
마력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마법사들은 그 광경에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현상을 잡아먹는 마법이군.”
그 규모가 거대해서 그렇지, 발동 기제 자체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스치는 공간 안의 모든 현상을 파괴하는 주문이다. 황궁을 둘러싼 수십 겹의 방어 술식이 저항 없이 녹아내리듯 박살 나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저건 재난이다. 황궁에 알려. 우리 마탑은 이 일과 상관이 없다고……. 그리고 오늘 이후로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봉문해라! 만신전 교회에 우리의 무고를 알려라! 어서!”
최근 제국을 향한 교회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저런 종류의 마법적 재난이 발생했다면 교회가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색출하려 들 것이다. 그럴 경우 높은 확률로 이단 조사가 시작될 텐데, 수도 한복판에서 마법 재난에 대한 죄과를 물으려 한다면 피는 반드시 마탑이 본다.
수도, 팔텐노이아에 위치한 크고 작은 일곱 개의 마법 학회가 그날 밤 동시에 봉문을 결정했다. 다른 학회 중 어떤 이들이 저지른 일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 * *
“괴물이군……!!”
이제 말레디카라 불리게 된 그림자 학회의 마법사들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다섯 개의 거대한 기둥이 지상을 향해 뻗어 나오며, 매가 사냥감을 움켜쥐듯 황궁을 으스러트렸다.
사전에 예고된 마법이 아니었으므로, 그들 또한 이 현상을 수월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 다른 범인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저건 ‘그’의 마법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가 그때 너무 무례하게 군 것은 아니었겠지? 응? 아니었다고 해 주게.”
말레디카들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서로에게 되물으며 몸을 떨었다. 저런 짓을 황궁 한복판에서 태연히 저지를 수 있는 자와 한순간이라도 대적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으므로.
“뒷일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이단심문관이라 하지 않았나. 최근 베이타서스 교회가 황궁을 적대하고 있었으니, 이 기회에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심산이 아니겠나.”
“이단심문관……? 하, 저게?”
굳이 선악을 가름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저건 결코 ‘선신 만신전’의 힘이 아니다. 그보단 차라리 악마의 것에 가깝다. 오직 파괴와 죽음만을 불러일으킬, 그런 종류의 힘이었다.
“차라리 흑마법의 대선배를 마주한다 한다면 믿어지겠군.”
* * *
-쿠구구구구궁!!
고성이 비명을 내지른다. 성채에 걸린 수많은 보호 주문, 지옥의 힘을 빌어 그 위에 덧칠한 수십 겹의 대마법 주문들이 일거에 박살 나며 그 조각조각이 떨어져 성의 천정과 첨탑들을 허물어트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당혹감 속에서 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는 이미 인간의 것을 초월했기에, 그는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다섯 갈래의 힘줄기가 황궁을 움켜쥐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 순간에 보호 주문들이 단번에 박살 나고도 여력이 남아 물리적인 피해를 야기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불가능하다. 불가능해야 했다.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대체 어떻게?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이것이 대악마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가 해낼 수 있는 일. 그 극한이다.”
무제한의 마력. 신성을 품을 수 있을 수준으로, 극도로 밀집된 마력을 개인이 활용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올바른 활용법이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수준의 압력을 몸으로 견뎌야 했지만. 일반적인 마력 회로라면 이미 그 형체조차 남지 않고 불타올랐을 정도의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가장 적확한 활용법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선언하며 손을 움직였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그 손짓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견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절도 없는 손짓. 그러나 마법의 편린이라도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경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수인이다.
정밀함을 논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도 하나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 수준의 곡예. 천려의 일실이라도 허락되지 않는, 극한의 기예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한 수. 그 한 수에 고성의 첨탑이 허물어져 내린다. 다시금 한 수, 황제의 전신에 깃들어 있던 악마의 힘이 순간 주인을 잃고 강탈당한다.
[이……게……!!]
악마의 힘을 강탈당했다. 수많은 제물을 바치고 얻어낸 지옥의 호의가. 한순간 저자의 손짓 아래에 굴복했다. 비단 힘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가, 그의 영적 존재감이 설탕 녹듯 사그라들고 있었다!
[어째서 죽지 않는 것이냐! 그 힘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단 말이야!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너는 누구냐!]
-쿠구구구궁!
황제의 저항은 거칠었다. 지금 페르난데스가 하는 짓은 계약을 가로채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었다. 지옥과의 계약에 따르는 부담은 고스란히 황제가 지고 있고, 그 대가만을 훔쳐 가고 있는 짓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보는 것으로도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넙죽 당해줄 수는 없다. 황제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사이에서 겹눈이 뜨이고, 그의 비단옷 아래에서 날카로운 곤충의 갑각이 치솟아 올랐다.
-우드득!
황제의 양손이 집게처럼 변하고, 턱이 갈라지며 그 아래로 체액이 흘렀다. 등이 찢어지고 날개가 솟구친다. 악마의 형상. 피를 삼키는 파리의 모습이었다.
[아버지! 위대한 주군이시여! 저자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주소서!! 저를 버리시나이까!]
황제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사고는 단순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힘을 인간이 다룬다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목도했다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었다.
우르카시아. 그의 힘이다. 그가 저 인간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왜 자신을 버렸단 말인가?
물론, 우르카시아가 의도한 것도, 그가 힘을 내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페르난데스의 혈액 속에서 맹렬하게 반응하던 마력들이 빠르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무제한적으로 전신을 휘감던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놈이 당황했군.
페이자쉬가 킬킬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바라보았다. 손 위로 얽어 들던 역병의 징후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다시금 전신에 힘이 돌기 시작했다.
육체의 기능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반작용으로 더 이상 마력이 기동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저주로 인해 좀먹었던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에 가까웠지만. 전능감이 사라지는 만큼 생명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스르릉.
마력이 부족하다면 힘으로.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거꾸로 쥐고 천천히 뽑아 올리며 생각했다. 전생과 달리 그의 힘은 단지 마력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마법사의 시간이 지났다면, 이제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이단심문관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