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믿음은 등불이라 (3)
자세를 다잡고 달려 나간다. 무너지는 황궁의 천장과 기둥 사이로, 벽돌 하나, 타일 하나의 세월조차 문명 사회의 역사와 함께했을 그 장구한 건축물 사이로.
인간의 시간을 담은 잔해물들을 꿰뚫으며 직선으로. 칼날이 허공을 그어 낸다. 궤적에 담는 모든 지물을 온전히 바스러트리며.
-스캉!
묵빛 궤적이 허공에 선을 그려 넣는다. 황제는 당황이 어린 표정으로 간신히 몸을 빼내어 피했다. 검? 칼질을 한다고?
[감히 인간 마법사가?!]
그의 당혹감은 빠른 시간 안에 분노로, 그리고 그보다 더 빨리 경악으로 변했다. 칼날에 담긴 무게와 속도가 범상치 않다!
-캉! 카가가각!
황제의 손. 갑각이 덮인 갈퀴가 대검의 검신을 막아 내고 흘렸다. 악마의 육신이란 일반적인 물질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력과 축복이 엉킨, 영체와 육체 사이 어딘가의 경계면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물질로는 상해를 입힐 수 없다. 단순한 철검. 아니 설령 축성받은 강철로 공격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순간, 단 한 번의 격검으로 황제의 갈퀴가 바스러져 떨어지고 있었다. 생선의 비늘을 벗기듯이 한 장, 한 장. 갑각의 외피가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나간다!
[무슨……! 이게 대체……! 너는, 너는 인간이 아니로구나!]
“그럴 리가.”
휘몰아치는 검격, 시시각각 붕괴하는 황궁의 벽돌과 지붕 사이로. 검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어전 앞에서 음울한 빛을 담은 푸른 눈이 빛났다.
먼 옛날엔 비웃었던 가치였지만. 지난 이 년을 넘어 지금에 이르며, 페르난데스는 이젠 그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베이타서스가 내린 두 가지 가호는 그 자체로 인간의 상징임을. 베이타서스의 안배는 다만 인류의 부활과 선신 만신전의 거시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인간 상징의 표상. 그 자체가 갖는 승리의 의의. 단순히 강력한 투사와 대전사를 보내어 만들어진 세계를 본산에 덮어씌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일견 무의미해 보일 고행과 도박.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물질 문명의 승리를 확정 짓는 현상 그 자체다. 그렇기에 그 당시에 베이타서스는 ‘변질되지 않는 순수한 인간의 영’이 필요했다.
패배한 인류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안배. 순수한 인간을 보내어 인간의 가치를 공고히 세우는 고행, 그 과정 전반이 갖는 의미를.
‘불굴’이라. 파괴된 잔해 사이에서 다시금 일어서 나아가라는 가호.
‘불사’라. 개인의 죽음은 끝이 아니요, 인류 전체의 승리를 향한 한 발자국에 불과하니. 의지가 무너지지 않는 한 문명은 죽지 않는다.
“괴물을 죽여 전설을 쌓아 올리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몫이었으니.”
-스캉!
반짝, 하는 빛줄기와 함께 황제의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 꼴이 퍽 우습지만, 인간의 역사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가 곧 대적의 역사다.
신화와 전설은 대개 자연 현상을 빗대어 극복하는 과정을 미화시킨 소설로 여겨진다. 그것의 진위를 떠나 인간의 신화와 전설이 갖는 진의는 단 하나뿐이다. 압도적인 현상에 대한 대적.
폭풍이 몰아치고 화산이 터진다. 지진이 건물을 무너트리고 때로는 밤의 공포와 겨울의 추위도 신화의 영역에 속했을 수 있다.
하다못해 가도를 벗어난 숲속에 사는 괴물들. 트롤이나 오우거, 거인과 같은 괴물들에서, 늑대나 곰 따위의 한낱 짐승에 불과하더라도. 인간보다 나약한 존재 따윈 없다.
초식동물에 가까운 어금니. 비슷한 덩치의 사냥개 하나도 이기지 못할 체력과 근력을 가졌으나. 인간이 그들과 다른 단 하나의 이유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그뿐이다.
압도적인 외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 언제나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 타협하지 않는 것.
강인한 오우거나 트롤 따위가 동굴에 살아가며 곤봉을 휘두를 때, 인간은 성을 쌓고 무리를 이루어 강철로 무장했듯이. 인간의 생존법은 그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장구한 투쟁의 역사였다.
비록 그것이 때로 구차하고, 비루해 보일지라도.
인간의 역사가 곧 불굴의 증거다. 모두 잃어 무너지더라도, 잔해 속에서 다시 타오를 불길에 대한 증명이다!
-카가가가가각!
“기도하라.”
너는 인간을 마주하고 있으니.
-캉!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사냥감으로 여겼더냐.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초식동물로 여겨졌더냐. 오냐, 그렇다. 그랬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라도 반드시, 이를 이겨 내 일어설 방도는 있는 법이니.
엔마기카, 축적된 지식으로 적을 해석하고.
헤레티카, 어떤 상황에서도 적을 추적하여.
디모니카, 가장 치열한 장소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으니.
-스캉!
“간절히.”
이단심문관은 곧 인간 의지의 표상이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우리를 마주하고 있으니, 기도하라. 간절히!
페르난데스의 검이 마침내 황제의 두 손을 자르고, 허공을 빙글 돌아 내리꽂혔다. 섬전처럼, 묵색 궤적이 황제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카각, 가슴을 뚫고 들어가 그 반대편 바닥을 내려찍은 상태로, 페르난데스는 그의 머리 위에 로사리오를 늘어트렸다.
황제의 겹눈이 로사리오를 훑고는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
믿을 수 없다. 이단심문관은 그저 끈질기고 짜증 나는 ‘인간’에 불과했다. 놈들의 무기는 결국 만신전에 대한 존중과 권위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불과했다. 놈들 하나하나는 결국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그런 가냘프고 하찮은 존재가 자신에게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위선자. 가증스러운 위선자들! 너희 모두가 그러했지만 개중 가장 역겨운 위선자로다! 네가 한 일을 보아라. 네가 사역한 힘을 보아라! 네가 가진 힘과 네가 지닌 심성, 네가 해 온 짓거리를 보거라! 기도? 기도라 하였느냐? 너는 어느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네 신에게? 네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
황제의 목소리가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윙윙 울렸다. 놈의 몸이 조각나며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 한 조각, 한 조각이 군집을 이룬 날벌레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해충들이 허공 위에서 유영하며 군집을 이룬다. 타닥, 타닥. 서로의 날갯짓이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놈의 몸을 이룬 군집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간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거꾸로 꽂은 자세 그대로 숨을 몰아쉬어 호흡을 다잡았다. 격렬한 격검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악마의 마력이었다. 제아무리 디모니카라 한들 육체가 온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놈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악마화한 본신을 택한 이상, 놈은 돌아갈 길을 잃었다. 더 이상 놈은 인간의 황제로 남아 있을 수 없다.
황궁이 무너지고 제위가 끊겼다. 선제후들의 분열을 막아 낼 정치적 명분이 사라졌으니, 이제 더 이상 레바인테르 제국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국의 종언이다.
여기에서 저 시끄러운 놈을 완전히 끝장낼 수만 있다면 말이지. 페르난데스는 칼을 빙글 돌려 어깨에 걸치고는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의 분노에 찬 괴성이 점차 고조되어 갔다.
[너는 실패할 것이다! 누구도 이 땅을, 어느 누구도 이 땅을 지배할 수 없다. 오직 짐만이! 이 제국은 오직 짐의 것이며,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영원히!]
-쿠구구구궁!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로, 그는 악마의 몸을 살폈다. 육신을 버린 것까지는 좋았어도, 놈의 몸은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마법 실패에 따른 백래시, 우르카시아 소환에 놈이 퍼부었던 노력과 마력이 고스란히 타격으로 돌아와 놈의 영체는 바스러지기 직전에 있었다.
다섯 왕좌의 손아귀가 가져온 효과는 아주 단순하지만, 대단히 강력했다. 황궁을 중심으로 펼쳐진 마법진, 그리고 황궁에 걸린 수많은 보호 주문과 놈이 직접 아로새긴 악마 숭배의 주술들을 모조리, 단 한 순간에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 파괴의 현장에서 놈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놈의 영육이 빠른 속도로 사그라드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너희 모두는 이제 군단에 복종하리라. 너희의 시체 위에 부패의 군주께서 도래하실 것이니! 너, 위선자야! 감히 그 끔찍한 힘으로 선의를 입에 담은 가장 역겨운 위선자야! 너는 무엇을 믿기에 누구에게 기도하라 말을 하느냐!]
황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손짓에 따라 황궁이 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수도, 이 황궁 전역에 깔린 마법진이 놈의 생명을 짜내며 주문을 자아 올리고 있었다.
‘해석할 수 있겠어?’
-소환 계열인데.
‘촉매는 하늘이야.’
-하늘이 아니라, 빗방울이야. 그래. 해석할 수 있겠군.
페르난데스는 고함치는 황제를 무시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해가 자욱하게 어린 하늘 저 너머에서 악의에 찌든 어떤 종류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아래로 나리는 검은 빗물. 이 한 방울, 한 방울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느껴진다. 수도 전역을 뒤덮는 악의의 창칼처럼.
‘소환 매개를 빗방울로. 제물은…….’
-제국 시민 전부.
이 비에 맞은 민간인은 그 즉시 오염되어 악마로 변하거나, 악마를 소환하는 제물로 취급되어 녹아내릴 것이다. 그 위에, 놈의 말대로 부패의 군주가 이끄는 군단이 도래하겠지.
이 도시는 끝장이겠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워커 사태나 흡혈귀 준동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막을 방법은?’
-마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놈의 목을 쳐야지.
‘칼이 닿을까?’
-그 분야는 내가 답하기 어려운데…….
페이자쉬가 씁,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 몸을 쓰는 분야는 페르난데스의 역할이었다. 그는 주의 깊게 거리를 살피며 몸을 도사렸다. 놈이 폐허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 탓에 칼날을 힘 실어 휘두를 각도가 마땅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건 해 보긴 해야지. 페르난데스는 칼을 빙글 돌려 등에 차고는 도약을 준비했다.
그 순간, 폐허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 속 등불이다.”
페르난데스도, 황제도. 갑작스런 목소리에 움찔 떨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파된 황궁 어전의 석주들 위로 한 인영이 올라서 있었다.
“가로되, 너희는 의를 행하라. 너희는 선을 바라라. 너희는 덕을 좇으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에게 정을 더하시리라.”
-저벅.
작지만 묵직한 발걸음. 낡고 해진, 빗물에 푹 젖어 볼품없는 로브가 스륵 하고 말려 올라갔다. 그 사이로 살풋 빛나는 것이 보였다.
로사리오가 감긴 세인트메탈 장검. 대단한 성검도, 어마어마한 성유물도 아닌. 축성받은 철검에 불과한 그것이.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형장의 단두대 날처럼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피스…… 형제님……!”
“난 더 이상 이단심문관이 아닐세. 세르너드 수사.”
후드 아래에선 나이 든, 그러나 단단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제피스는 페르난데스를 슬쩍 바라보고는 픽 웃었다.
그는 황제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하지만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수사를 대리하여, 나 이곳에 겸허히 한 사람의 신도로서 입회하였으니. 수사의 권한에 대리하여 이단 재판을 시행하겠다.”
“종교재판 사법권, 이단즉결 처형권, 구마용 군이양지권, 교단성사 대리지권. 만신전이 보장하는 위 권한으로, 그대의 입회를 보증합니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피고의 죗값은…….”
제피스가 석주를 박차고 황제의 머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페르난데스는 팔을 길게 뒤로 젖히고 있는 힘을 다해 대검을 집어 던졌다.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열쇠검이 발리스타처럼 날아갔다. 황제의 몸 바로 앞에서, 제피스는 몸을 빙글 돌려 허공에서 대검의 칼자루를 낚아챘다.
“사형이다!!”
양손에 한 자루씩 칼을 들고, 늙은 디모니카가 힘껏 칼날을 모로 그었다. 세인트메탈 장검과 열쇠검이 교차하며 파란 빛무리를 허공에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