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 (3)
팔텐노이아의 각 관문으로 오고 가는 파발과 행상,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선제후들의 첩자들의 수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출입한 이들의 세 배가 넘었다.
관문 수비대의 피로 호소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쯤. 페르넨데스 또한 할 수 있다면 피로를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거의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황실의 행정 귀족 대부분은 황제에 의해 죽었고, 죽지 않은 귀족들은 거의 대부분 타락해 있는 상황이었기에. 수도의 행정 상황은 진공 상태나 다름없었다.
“피곤해요.”
“나도 그렇소.”
“쉴까요?”
“이것만 끝내면 그렇게 하시오.”
“그 말이 지금 몇 번째였지요?”
“삼백이십하고 다섯 번째요.”
“당신 싫어요.”
“나도 그렇소.”
에버리즈와 페르난데스는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신분으로 페르난데스는 수도의 어떤 행정 업무에도 인가권이 없었던 탓이다.
에버리즈는 황녀이기에 앞서, 제국 황실의 궁내 대신이었다. 황제의 타락 이전까지 원내부 서경을 맡았던, 지금 이 시점에 유일한 고위 행정 귀족이었다.
따라서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 앉혀 두고 서류에 사인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업무는 페르난데스가 처리하고 있었던 탓에, 에버리즈의 역할은 그저 분류된 서류를 한 차례 읽고 서명하는 것뿐이었다.
“그냥 다 도장을 찍어 버릴까요?”
“누군가는 내 작업을 검수해야 하오.”
“……틀린 적이 있었나요? 지난 이틀 동안?”
그들은 이틀 밤을 지새우고 여덟 시간 수면. 이후 다시 이틀 밤을 새우는 루틴을 반복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경우엔 그마저도 시간 낭비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에버리즈는 민간인에 가까운 육체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컨디션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회복기를 갖는, 지옥의 스케줄이었다.
대화하는 순간에도, 페르난데스의 눈은 서류철의 행간을 읽으며 동시에 붉은 표식을 남기고 있었다. 인가할 것, 거부할 것. 결재할 것. 반려할 것…….
“당신 혼자 하면 안 되나요? 제가 본 어떤 행정 귀족보다 행정을 잘 보는데……. 아니, 당신 사제 아니에요? 이단심문관?”
“맞소.”
“이단심문관 주 업무는 이단을 붙잡아서 형장에 세워 놓고 불 지르는 것 아니었나요?”
그게 이 시대 사람들이 할 법한 일반적인 편견이기는 했다. 교회가 직접 퍼트린 이단심문관들에 대한 인식이다.
이단심문관은 공포, 실적, 소문으로 존재해야 하는 기관이다. 이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이미 이단의 존재가 확실해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교회는 이단심문관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교묘하게 조작했다. 두렵고, 불가항력적이고, 신비로운 전문가들. 특정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이단의 행동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견이다. 이단심문관들은 탁상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단 사건에 대한 정황 조사들을 분석하고, 이단의 은거지를 추정하고, 그들을 추적하고, 때때로 그들의 신분이 강대할 때에 법리적 근거나 정치 역학을 고려해야 하지. 모든 이단심문관들은 기본적으로 무력보다 행정력을 필요로 하오.”
“그건 의외네요……. 그냥 가서 다 태워 버리고 찢어 버리는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을 하는 몇몇이 있긴 하오.”
페르난데스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디모니카 형제들을 생각했다.
-죽어라! 이단 사교도 버러지들아!!
그러나 그들조차도 임무에 투입된 이후에야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 뿐, 그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그걸 들지 못하면, 신실함을 입증하기 어려울 걸세!
-걱정 말게, 형제들이여! 으리야압!
-마, 막토! 세 번을 들다니!!
음. 페르난데스는 짧게 탄식하고는 다시 펜을 쥐었다. 한창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에버리즈가 진절머리를 내며 허리를 쭉 폈다.
“이건 시간 낭비예요. 어차피 다음 행정부가 들어오면 그쪽이 처리해야 할 문제들 아닌가요?”
“그 새로 들어올 행정부와 당신, 그리고 나는 어쨌건 같은 배를 타야 할 사이인 게 문제가 아니겠소.”
페르난데스는 에버리즈의 투덜거림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버리즈는 끙, 하고 신음했다.
황제가 악마에 의해 타락했다는 것이 교황청에 의해 공표된 지금. 전쟁 초기부터 황제를 적대했던 로베르 황자와는 달리 에버리즈 황녀의 입지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트레뮐레 가문의 실권을 로베르가 쥐고 있는 이상 그녀는 뒷배 없는 몰락 귀족의 영애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 정치적, 그리고 ‘생물학적’인 생존을 위해서 그녀는 반드시 다음 황제와 손을 잡아야만 한다.
다행히 르네 필리파는 에버리즈를 죽이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에버리즈의 향후 목숨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위 이양 이후 르네의 치세가 공고히 된 다음엔 에버리즈를 살려 둘 명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곤란하지.’
좋든 싫든 에버리즈는 대천사다. 네 명의 대천사를 모두 살린 채로 세계를 구원해야 하는 입장에서 에버리즈는 자신의 살 자리를 궁리해 두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유일한 행정 귀족으로서 무너지는 수도를 붙잡아 명맥을 유지시켰다는 공로는 반드시 훗날 도움이 되리라.
아마 황제령 소도시의 영주 대리 정도의 자리를 맡은 채 살아남지 않을까.
“아…… 시라다스트 경…… 절 구해 주세요.”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시라다스트 경과 무슨 사이요?”
“저를…… 구해 준 분이시죠?”
에버리즈는 얼굴을 살포시 붉히며 속삭였다. 페르난데스는 기지개를 켜며 자세를 바로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분께선 끔찍한 악마와 마술사들이 우글거리는 황궁 서탑에 홀로 찾아와 함정과 악마들, 그리고 마법들을 모두 몸으로 깨부수셨어요…….”
페르난데스는 쉽게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눈이 뒤집힌 디모니카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길을 비켜라, 이단 쓰레기들아!!
아무리 봐도 반할 만한 모습은 아닌데…….
“저는 너무 무섭고 서러웠어요. 갑자기 감금된 것도, 갑자기 이상한 마법을 뒤집어쓰는 것도요.”
“소용이 없었나 보오?”
“네. 그 무능한 마술사들의 마법은 제 몸을 상하게 하지 못했지요. 놈들은 제 무능을 탓하기 전에 저를 감금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죠.”
에버리즈의 눈이 멍하게 풀렸다. 그녀는 지난날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흑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한 마법사들은 공주를 납치해 실험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약물을 먹이고, 끔찍한 마법진 위에 앉혀 두고, 끊임없이 주문을 퍼부었다.
그러던 와중에 비명이 탑을 뒤흔들었다.
* * *
“사교님!! 놈이 2층에 진입했습니다!”
“놈이 어떻게 여기에 침입할 수 있었지? 다들 뭣들 하는 게냐!”
“막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잔악한 인간들이 겁에 질려 덜덜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이.
탑의 최상층으로 연신 ‘사제’라는 작자들이 올라와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몇 층이 뚫렸다. 어떤 마법을 돌파했다. 함정 지대가 파괴되었다. 소환한 악마들이 도륙당했다.
마법사들의 모든 조치가 실패로 돌아가고, 사교와 고위 사제들이 점차 패닉에 휩싸여 갈 때. 마지막 보고가 올라왔다.
“피하십시오……. 사교님. 놈이 곧…….”
-콰직!
헐떡이며 외치던 하급 사제의 가슴에 새파란 빛이 도는 철검이 솟아올랐다. 핏물이 사교의 얼굴에 후드득, 튀었다.
가슴이 꿰뚫린 사제가 스륵 밀려나 쓰러지고, 열린 문의 어두운 틈 사이로 차르륵 하는 쇠사슬 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앞길은 주의 인도함이라, 어둡고 깊은 밤을 헤맬 때에도 나 길 잃어 떠돌지 아니하니…….”
문이 열리고, 낡고 헤진 로브를 입은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깊은 상처에선 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사내가 후드를 젖히며 주위를 훑었다. 아니, 훑어본 것이 아니다.
그의 눈에선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드러낸 것은…….
“나를 보라. 이교도 너의 최후를 목도하라. 너희의 죄악에 두려워하라. 나는 주의 검이오—.”
-콰직!
“또한 주의 분노이며—.”
-으드득!
말 한마디에 한 명씩. 그에게 다가가는 사제들이 으스러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확히 적의 위치를 포착하고 휘두르는 검격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놈은 혼자야! 앞도 보이지 않잖나! 공격해!”
사교가 거품을 물며 외쳤다. 그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제피스의 고개가 그 방향으로 스륵 기울었다.
마법에 당한 듯 꿈틀거리는 핏물이 그의 두 눈에 얽혀 있었다. 천천히 그 사이가 벌어지며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드러났다. 지옥의 악귀조차 두려워할 살기였다.
“참회하라.”
-콰득!
그걸로 끝이었다. 다섯 명의 고위 흑마법사들이 시체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조각난 사지가 날아다니고 피가 난무하는 폭풍을 만들어내며, 로브를 입은 사내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왔다.
에버리즈는 그때 생각했다. 악마가 무고한 이들의 피를 몰고 온다면, 이 사내는 악마의 피를 이끌어 길을 닦으니. 이자는 진정 천사가 아닐까.
어쩌면, 진정한 천사란 성화에서 보는 것처럼 오색찬란하고 티끌 한 점 없는 밝은 빛이 아닌, 지옥의 길을 악마의 피로 다지는 자들이 아닐까.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녀의 말에 사내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겸허하게 몸을 숙여, 에버리즈의 양손을 결박한 사슬을 맨손으로 끊어 버렸다.
“칼을 든 무부요.”
* * *
에버리즈가 열성적으로 내뱉는 제피스의 무용담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그때 제피스가 했을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미화되어 있기는 했을지라도 저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제피스 형제가 당황했었겠군.’
한창 신나서 악마를 때려 부수며 디모니카의 힘을 온 세상에 떨치는 단순 무식한 돌격.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민간인이 누구냐 물었을 때 당황했을 것이다.
어…… 이단심문청에선 파문당했는데, 너무 열을 냈나? 제피스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더듬다가 그냥 용병이라 대답한 것일 터였다.
그러나 에버리즈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 압도적인 힘으로 사악한 이들을 격퇴해 첨탑에 갇힌 공주를 구해낸 용사. 그러고도 이름 한 번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용병에 불과하다 말하는 겸허함까지.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기사도 로망스였다. 에버리즈의 반짝거리는 눈이 퍽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런데. 시라다스트 경과 친한 사이신가요?”
“그럭저럭…… 제피스 형제께 직접 무예와 경험을 전수받은 사이요.”
“제자……쯤 되시는 분이셨군요!!”
에버리즈는 활달하게 외치며 허리를 쭉 폈다.
“그럼 혹시 시라다스트 경 취향을 알 수 있을까요? 선호하는 타입이라든가?”
“아마도 좋아하는 여인상 같은 것은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에버리즈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남색가……셨다는…… 말씀……?”
“아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요. 제피스 형제가 정결의 서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앞에선 정결했다는 말이었소.”
실상 이단심문청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보이긴 했다. 이성에 대한 호감을 표하는 이단심문관이란 존재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단심문관들은 분류별로 다음과 같았다.
엔마기카.
-이단 유물이다! 이건 수집해야 해!
-봉인 성소로 가져가! 이거 며칠은 분주하겠군. 후후.
헤레티카.
-클클, 여길 찢으면 제 동료를 팔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아직 참회하지 마라, 이단. 그건 화형대에서 하면 되니까. 큭큭.
그리고 디모니카.
-오오…… 세르지오 형제가 한 손으로 350파운드를 12회 쳤다네! 찬양할지어다!
-막토 수페를라우도! 형제여! 신실함이 배가 되었군!
그 작자들이 여자 얘기를 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페르난데스가 떨떠름하게 잡생각을 떨칠 때, 에버리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럼 당신이 도와주시면 되겠군요!”
“응?”
“시라다스트 경처럼 경건한 기사들을 몇 분 본 적이 있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평생 독신으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왜 당신을 돕소?”
“흑마법사니까?”
에버리즈의 눈이 사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죽여 능청스럽게 웃었다.
“황궁을 단번에 으스러트린 것이 당신이었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건 황제가…….”
“그렇게 시라다스트 경을 납득시킬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저는 아닐걸요. 저는 당신이 사용한 마법을 알고 있어요.”
“……무슨 소리요?”
“황궁 하늘을 뒤덮던 그 거대한 마력. 손아귀 형상의 마력 기둥들……. 왠지는 모르겠지만…… 본 적이 있어요. 잔악하고, 끔찍한 마법사. 파괴와 죽음, 학살을 불러오는 전령. 그런 환시를 봤습니다.”
대천사의 영혼으로 인해 흑마법사들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당연히 그 영혼이 깨어나고 있을 것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전생을 기억했소?”
“……전생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아직 그 정도로 영혼의 동화가 심해지지는 않은 것인가?
하지만 그 애매한 동화 탓에 충격적인 광경에 대한 기억이 일부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전생 시절, 대천사들이 그리도 두려워했던 마법을 직접 목도한 셈이니.
그렇다면 곁에 두어야 했다. 다른 대천사들은 각자 단단한 지지 기반을 가진 채로, 목줄 하나 이상을 채워 두고 떠났지만…… 에버리즈는 아니다.
그녀의 신분은 가문에서 버림받은 영애에 불과하고, 그녀가 자칫 계획에서 엇나갔을 때 제어할 수단이 필요했다.
“제피스 형제님의 취향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군.”
“후후, 제 진심을 알아주셨군요!”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오. 누굴 죽이는 것 말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일 테니.”
“제 각오가 나약해 보이던가요?”
“아주 믿음직스럽군.”
페르난데스는 르네 필리파와 결혼할 수 있다. 그것이 계획에 필요하다면. 그러므로 제피스 또한 그런 상황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계획에 필요하므로.
-나쁜 새끼.
‘칭찬으로 듣겠어.’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어쨌건 해야 할 일은 산적했고, 적어도 며칠 뒤 르네 필리파가 황궁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대관 준비를 끝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