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73화 (274/388)

273.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 (4)

그럭저럭 평온했던 몇 주가 지났다. 에버리즈가 일곱 번쯤 혼절을 가장해 업무를 방기하고, 제피스가 수도 전체의 절반 이상에 ‘완벽한 정화 조치’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사이. 르네와 귀르의 병력이 수도에 진입했다.

팔텐노이아의 북부 관문을 통과하며 개선하는 기나긴 행렬이 이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재건축이 시작된 황궁의 관도에 서서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페르닌 경. 영애께서 오십니다.”

“보르아 경.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공작께선 이제 더 이상 ‘영애’가 아니오.”

페르난데스는 보르아의 말을 짧게 끊으며 말했다. 리뷔에의 기사들은 아직도 르네를 공녀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는 에르브 공작의 죽음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과, 아직 어린 공녀에 대한 불안함이 뒤섞인 탓이었다.

그러나 이젠 인정해야 했다. 에르브는 죽었으며 르네 필리파는 선제후가 되었고, 이제 황제가 되어야 한다.

-빰빠바밤! 빰!

군악대가 시끄러운 행군가를 부르며 앞서 나섰다. 시민들이 그들에게 꽃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수도 시민들의 생존 본능이었다. 리뷔에의 군단이 수도를 포위한 이 상황에서, 리뷔에의 선제후가 황궁으로 향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 본능.

페르난데스는 관도에서 미소 안에 두려움을 감춘 채 꽃비를 뿌리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새로이 즉위하는 황제는 폭군일까, 성군일까. 그런 종류의 불가항력적 두려움이 읽혔다.

그때, 그의 곁에 서 있던 프레이야가 프하하, 하고 웃었다.

“저게 다 돈이다! 믿겨지느냐? 꽃잎을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다!”

“저걸 다……?”

“그래!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상단에 내가 직접 저 꽃잎들을 유통했다! 여신은 이제 더 이상 생명과 봄의 여신이 아니다……. 여신은 이제 재물의 여신이 되었노라!”

그것 참, 맥라렌 교회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소리로군.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프레이야는 그의 등을 팡팡 때리며 말했다.

“그러니 인상 펴거라.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 이 여신께서 너희들 정도는 먹여 살려 주마!”

“그것 참 고맙소.”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리뷔에의 기사들도,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에버리즈와 페르난데스마저도. 일행은 다소 완화된 분위기로 한결 가까워진 군대를 바라보았다.

트레뮐레와 카르벨리에, 두 선제후의 인장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거대한 군기가 줄을 맞춰 다가오고 있었다.

* * *

“제군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르네 필리파가 카르벨리에 저택의 내원에 도착하자마 한 첫마디였다. 황궁 터를 한 바퀴 순회한 르네는 그 길로 자신의 가신들이 모인 저택을 찾았다.

로베르와 르네는 단상 위에 서서 도열한 가신단을 내려 보았다. 그녀의 눈은 오랜 행군으로 인한 피로에 메말라 있었다.

“선왕의 첫 전쟁부터 마지막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 험지를 항상 함께해 리뷔에를 굳건히 지켜낸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르네는 한 사람씩 기사들을 훑으며 말했다. ‘선왕’. 에르브 공작의 죽음을 암시하는 단어이며, 또한 리뷔에의 왕위를 르네가 계승했음을 선언하는 어휘였다.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그대들에게 있어 가장 뛰어난 주군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왕의 치세를 기억하는 그대들이라면 더욱이. 하지만, 나의 가신들이여. 내 단 두 가지를 그대들에게 약속하고자 한다. 첫째로. 그대들이 겪은 지난 몇 개월보다 더 고된 날은 이제 없을 것이며…….”

영지가 몰락하고, 제국의 황제가 리뷔에를 탐하고, 사교도들이 영지의 주도 깊숙이 파고들었던 지난 몇 개월. 모든 순간에 영지의 존망이 걸린 전쟁을 착수해야 했으며, 사지에 불과한 전투에 투입되어야 했던 지난 시간들.

선제후 의회가 열리기 전, 그리고 모든 선제후들이 아직 서로를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녀의 말은 차기 황제의 제위에 도전하겠다는 뜻으로 통했다.

“둘째로. 더 이상 그대들이 다른 주군을 맞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 중 가장 어리고 미숙한 이가 노회하여 은퇴하기까지 죽을 생각이 없다. 그대들 모두가 이승을 떠나 저 먼 전당의 품으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 그대들을 지키는 그늘이 되리라. 그대, 리뷔에의 용사들이여. 이 두 가지 약속에 대해 내가 그대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충성]. 선왕 에르브 공왕에게 향했던 것과 같은 무게의 충성. 리뷔에의 법의 귀족들과는 달리, 대검 귀족들이 기꺼이 바쳤던 종류의 충성을.

상호 호혜적인 가신 관계를 떠나서, 진정코 하나의 주군에게 종속된 진실된 충정을 바란다. 르네가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자, 내원에 도열한 기사들의 눈이 빛났다.

이들 모두가 지난 50년 전쟁에서부터 지금까지 에르브 공왕과 함께 사지를 건너 모인 정예들이며, 이들 중 가장 어린 기사조차도 50년 전쟁의 야전 지휘관으로 복무했었다. 드높은 명예만큼이나 자긍심 높은 기사들이다.

-쿵!

그런 그들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원 안뜰에 장검을 박아 넣었다.

“리뷔에를 위하여!”

“카르벨리에를 위하여!”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가 내원에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만세.”

고맙다는, 치하하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르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내원을 떠났다. 기사들은 그녀가 내원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 * *

“자, 그래서 계획은 있겠죠. 페르닌 경?”

싸늘하고 권위적이던 표정은 응접실로 들어가는 순간 벗어던졌다. 르네는 히죽거리며 응접실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댔다.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전장을 직접 쏘다닌 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약하고 어리숙한 공작 영애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완성된 선제후이자 공왕으로서, 그녀는 삐뚜름하게 고개를 꺾으며 웃었다.

“무슨 계획 말이오?”

“내가 직접 가신들을 모아 놓고 했던 첫 번째 연설이잖아요. 황제가 되겠다고 아주 선포를 한 셈인데 의회에서 표결을 얻지 못해 낙방하면 무슨 꼴이겠어요.”

처음 제위에 오를 것을 주장한 사람이 당신이니, 마무리도 잘 지어 보시죠. 르네는 뻔뻔하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이제야 카르벨리에 여제답군.

‘직접 만난 적이야 없다만.’

전생 시절 카르벨리에 여제와 공식적인 외교 서한을 몇 차례 주고받았던 적이 있다. 행간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성격은, 단적으로 말해 폭군의 것에 가까웠다.

화통하고 직설적이며 꾸밈이 없다. 이는 제왕의 미덕이 아니지만, 군왕의 미덕이긴 했다. 그리고 그 시절 성군은 살아남을 수 없는 난세였으므로. 제국은 가장 자신에게 걸맞은 황제를 갖추었다고 보아야 했다.

여걸. 지옥의 악마들을 대적하며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맞이하는 시대에도 굽힘 없이, 구김 없이. 자신의 땅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앞서 나아가 전장을 질주하던 폭군의 모습이 지금 그녀의 얼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운명은 없다. 하지만, 이럴 때면 꼭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운명대로라면 세상이 멸망하겠지. 적어도 없길 바라 보자고.

페이자쉬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짧은 감상 이후, 페르난데스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냥 계십시오.”

“응……? 뭐라고 했죠?”

“그냥 계셔도 충분합니다. 최대한 조용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제후들이 의회를 소집할 생각이던데요. 트레뮐레 궁중백도 조속히 그렇게 하자고 하고 있고요.”

“물론 의회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제국의 기반이 완전히 박살 나기 전엔 치세를 하셔야지. 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계시면 그걸로 좋소.”

르네 필리파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예측 불허’였다. 평생을 종군 사령관으로 보냈던 아버지의 슬하에서 조용히 지내던 규중처녀가 돌연 전쟁을 지휘하고, 심지어는 사략 함대까지 이끌어가며 온 사방을 약탈하고 공격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황제가 제 아비를 적대하는데 제 아비는 그런 황제를 지키겠다고 나섰으며, 황제의 아들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르네는 그런 황자와 손을 잡았다. 일반적인 상식 아래에선 있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 탓에 선제후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르네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카르벨리에 공작 위를 계승한 지금, 제국 내에 그녀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단일 군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선제후들이 반공작파를 만들 생각도 할 수 없겠지.’

황제의 타락이 교황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된 지금 이 순간, 친황제파 계열 귀족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당장 이단 심판이 자신의 영지와 가문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제후들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다. 대체 저 여자는 뭐지? 뭘 원하는 거지?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거지? 그런 의심들이 모이고 모이면—

‘실체를 과포장하지.’

두려움은 허상을 남긴다. 인간의 상상력은 미지의 존재를 더 크게 부풀려 떠올린다. 지금 영애의 우방은 당장 트레뮐레, 그리고 베이타서스 교회와 서부 대황야의 군벌이다. 여기에 더 무엇이 있을까? 저 여자의 정치력이라면 어디까지 손이 닿았을까?

어쩌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선제후들은 이미 손을 잡지 않았을까?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빈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사각, 사각. 그는 거침없는 손짓으로 종이 위에 글자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선제후는 여덟이오.”

뷜랑의 세포르 공작가.

리뷔에의 카르벨리에 공작가.

귀르의 트레뮐레 궁중백가.

이 셋 위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엮으며.

“뷜랑은 하트테이커 대족장의 괴뢰 정부로 전락했지. 세포르 공작가의 어린 가주는 사실상 선출권을 가진 꼭두각시란 소리요. 일단 한 표. 당신이 한 표. 로베르 백작이 한 표.”

세 개의 표결이 모인다. 이미 여기에서 거의 반수를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제위의 공고함은 선제후의 지지도에 따라 갈린다. 이후 르네가 진정한 절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선 완벽한 승리가 필요했다.

선황제가 만장일치로 제위를 이어받은 이후 50년 전쟁이란 대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처럼.

“라 메르티옹의 바레스 공작가는 멸문했지.”

데인 왕국의 기사왕 비센테 1세. 그의 손에 의해 라 메르티옹이 멸망했다. 제국이 하나된 상황이었다면 동부와 제국 사이에 거대한 전쟁이 일어났을 터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소 흐지부지 이어지고 있는 느슨한 전쟁이 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넷인데. 이 중 셋이 친황제파라 할 수 있소.”

장송의 블랑퓌네르 변경백가.

디안의 푸아티에 공작가.

트루아의 아르낭 후작가.

친황제파 선제후들이자, 황제의 이권 사업에 한 발 이상을 걸치고 있던 자들. 개중 몇은 타락했을 것이고, 몇은 힘과 재물에 취해 손을 잡았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조사가 진행되기 전엔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저들을 들쑤실 수도 없었다. 당장 건드리기 힘든 벌집이다.

“이들 중 그대와 원한이 없는 자들이 있겠소?”

“없겠지요. 저 치들의 휘하 영지들을 한 차례 이상씩은 약탈했으니.”

“그런 지금. 그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소?”

“……뭔가요?”

“조용히 있는 것이오. 저들이 먼저 몸이 달아 접촉하기 전까지.”

어차피 중심점이 되어 주던 황제가 사라진 지금, 저 세 선제후들은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며 몸을 웅크리고 있을 공산이 크다. 누가 적인가, 누가 아군이 될 것인가. 카르벨리에 공녀의 제위 등극은 이미 막을 수 없는데,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제후들은 결코 먼저 몸을 굽히지 않는다. 그건 자존심 이전에, 자본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먼저 약세를 드러낸 자들은 결코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없다.

르네 필리파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선황제에 못지않은 압도적인 승리일 것이다. 그건 모두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반군을 이끌어 승리한 황제는 선황의 치세와 비교될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그들은 르네가 먼저 협상 테이블을 꺼내 오길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선제후 의회가 다가올 때까지, 침묵이 감돈다.

그리고 그 불안한 고요 속에서 쐐기가 날아와 박힌다.

“그리고 교황과의 협상 조건에 한 줄을 추가하시오.”

“그게 무엇인가요?”

“대대적인 이단 조사.”

“하지만…… 선거 이전에 선제후들을 먼저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자칫 독립을 선언하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아주 끔찍해질 거예요.”

“일이 그렇게까지 가지 않도록 조율해야지. 이단 조사는 이단 조사이되, 선제후를 향한 것이어선 안 되오. 선제후의 영지 내부에 암약하는 이단들을 조사해야지.”

“그런 쉬운 일이 가능하겠어요? 지금껏 드러나지도 않았던 사교도 집단들을 때맞춰 이 타이밍에 잡아낸다고요?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정치적 역공세에 시달릴 거예요. 교황의 권위도 추락할 거고요.”

“그건 걱정 마시오. 반드시 성공할 테니.”

페르난데스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어 올렸다. 르네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받아 읽다가 멈칫했다.

“이게…… 다……?”

“제국 내부에 숨어든 사교도 집단들의 근거지와 규모요.”

“이단심문청이 이미 이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고요? 대체 왜 지금껏 구제하지 않았나요?”

“아, 새로 창설된 전문 집단이 따로 있거든. 이건 제법 따끈따끈한 정보란 소리요. 아직 교황도, 이단심문청의 수도원장도 알지 못하지.”

엄밀히 말해서 말레디카는 아직 승인도 나지 않은 불법 집단에 불과했지만, 어쨌건 쓰임새 많은 녀석들이니. 페르난데스는 히죽 웃으며 이어 말했다.

“거래 조건이 한 줄 더 추가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

“뭔가요?”

“로베르 베나티에 트레뮐레 궁중백의 누이와 파문 사제 한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오.”

파문 사제라 하여도 제피스의 신실함을 의심하는 이는 교회 내에 그 누구도 없다. 그가 만에 하나 자식이라도 갖는다면 당장 베이타서스의 신도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에버리즈는 엄밀히 말해서 대단히 높은 작위 계승권을 지닌 귀족이었다. 로베르가 자칫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에버리즈의 자손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교황은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성직 선제후 둘을 얻게 된다. 트레뮐레 궁중백과 카르벨리에 공작. 세속 사회에 영향력을 구사하려는 교황의 입장에선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다.

“그걸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교황도 위험을 감수할 것이오. 저 세 영지를 성심성의껏 들쑤시겠지. 그럼 끝이오. 그대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친황제파 선제후들이 저 스스로 몸을 굽히고 들어올 것이오.”

“그렇다고 저들을 용서하란 뜻은 아니겠지요?”

“일단 제위를 받아 내기만 한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사가의 몫이 아니겠소? 그대가 평판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마음에 들어요.”

르네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건넨 보고서 뭉치를 소중히 갈무리하다가, 문득 물었다.

“아, 에버리즈 백작 영애 말인데. 그 여자도 결혼에 동의했나요?”

제아무리 강력하고 권위 있는 선제후라 하더라도 다른 선제후 가문의 혼사에 멋대로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물론이오.”

“그…… 파문 사제라는 분도?”

“그게 중요하겠소?”

“하긴,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페르난데스의 악의 섞인 미소를 바라보며 르네는 같은 종류의 미소를 지었다. 르네는 테이블을 치우고는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페르난데스의 눈앞에 하늘거렸다.

“결혼하죠, 우리도.”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면. 좋소.”

“조건?”

“동침하지 않을 것. 감정을 갖지 않을 것. 각자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을 것.”

“그건 친구보다 못한데요?”

“결혼이 그런 것 아니겠소?”

그렇게 말하며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르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이게 아닌데.’ 하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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