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작전 보고서 : 들불
“저는 반대예요.”
이백 번쯤부터는 횟수도 세지 않은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젠 어깨를 으쓱이지도 않으며 묵묵히 걸었다.
“저는 반대예요. 저는 반대예요. 저는 반대예요.”
“…….”
“저는! 반대! 예요!!”
“…….”
“은공!!”
키르하스는 빽 소리를 지르며 양손을 그의 눈앞에 휘적거렸다. 페르난데스가 그제야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팔짱을 끼고는 외쳤다.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 저택에서 쉬고 있거라.”
“그 여자 보러 가요? 지금? 그거언 절대 안 되죠! 당연히 따라갈 거예요!”
“그럼 조용히 따르거라. 암행이다.”
“흥! 어차피 이 도시에서 저희 얼굴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알아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 안 보이세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시민들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동시에 창백하게 질리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비켜섰다.
그녀의 정체가 수인 대족장이라는 것. 그리고 페르난데스의 정체가 호족 연합의 참모장이라는 것이 수도 시민들 사이에 공공연히 퍼졌다.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소문이란 크게 부풀어 오를수록 강력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권력은 칼끝과 공포를 먹으며 자라난다. 수도 시민들은 제국 역사상 처음 마주하는 외국의 침략자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두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 혐오감도 함께 있겠지.”
“어리석은 것들입니다. 물지 못할 거라면 어금니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것도 모르니……. 문명인이라는 것들의 특징이죠. 울타리가 튼튼해 상처 입어본 적 없는 녀석들의.”
제아무리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하더라도 수인들은 여전히 공공연하게 암거래되곤 하는 상품이었다. 그리고 제국 시민들의 눈에 수인 호족이란 난세를 잘 타고나 군벌을 이룬 야만인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지금 한 선제후가 수인들에 의해 몰락했으며,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가 수인들과 손을 잡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키르하스의 눈이 대족장의 것으로 변했다. 그녀의 품에서 서늘한 살기가 내비쳤다.
“그만.”
-탁.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잠시 불만스러운 그르렁거림이 손 아래에서 울렸다. 야수를 제어하는 듯한 감각이다. 소름 끼치는 야성과 살기를 억누르는 감각.
“그래서 그런데, 저는 정말 반대거든요. 은공? 황제와 결혼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평생 목줄을 차게 되는 일이라구요.”
“키르하스. 그 얘긴 끝났다. 평소의 작전 배역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된다니까.”
“아뇨! 제국 국서가 작전 끝났다고 실종이라도 된다면 그게 보통 일인가요? 얼굴도 남들한테 다 알려질 텐데, 그럼 이제 기밀 작전들은 어쩌시려고요!”
“앞으로 기밀 작전을 내가 직접 지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
오랜 계획이 얼추 완성되었거든.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들은 골목과 골목을 지나 수도의 빈민가 깊숙한 곳을 향해 걸었다.
* * *
렐리기오사 말레디카. 교황청에 의해 공식 인가가 난 집단은 아니며, 영원히 그럴 가능성조차 없는 집단이다. 이들의 역할은 첩자이자 버림패였다. 언제든지 정리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이단과 사교도들, 그들의 목 아래에 칼날을 심어 두고 마음 내키는 대로 쓰다 버릴 하찮은 팻감들이다.
이들 또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다. 다만 이에 반발하지 못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그들 목젖 아래에 도사린 칼날. 이단심문청의 눈.
한번 얼굴이 알려진 이상 도망치면 반드시 잡히고, 잡히면 반드시 화형당한다. 일반적으로 이단심문관들은 이단과 사교도들에게 철저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이단에겐 그 칼날이 더 무거울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리고 다음 이유, 어쩌면 가장 큰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공포’.
“제기랄. 제기랄…….”
“그…… 좀 진정을 하시오.”
“진정이 되게 생겼어? 그분이 직접 오신다잖아! 이 며칠 그냥 편지만 달랑 보내시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 보지.”
“내가 말을 더듬으면 어쩌지? 아아, 제기랄. 왜 내가 회장을 맡아 가지고는. 말을 더듬으면 목을 치지 않을까?”
“설마 그러겠소? 음…… 혹시 기강을 잡겠다고 본보기로 처형당할지도 모르긴 하겠군.”
“으아아아, 제기랄!”
이들은 페르난데스를 알고 있다. 페르난데스의 실력과 무자비함까지도. 단순히 정체 모를 고위 마법사가 윽박지른다고 이토록 철저하게 몸을 굽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분’께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진짜 예언자나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이걸 다 알고 있어?”
“정보 반사 독립체들은 보통 정신이 온전치 못하지 않소. 그분께서는 이지가 멀쩡해 보이셨는데?”
“무슨 소리야. 손짓 한 번에 황궁을 으스러트린 사람이 맨정신일 리가 없잖아!”
페르난데스가 지난 며칠간 이들에게 내렸던 명령은 지극히 단순했다. 어딜 가라. 어디를 조사해라. 어느 누구를 찾아라. 어느 누구를 암살하라. 자신이 부리는 수족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종류의 지시였다.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한눈 팔지만 않으면, 명령한 시간 안에 반드시 완수할 수 있다. 이들은 페르난데스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점점 더 소름이 끼쳐 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듣고 나가 보면, 그자는 반드시 그 지방의 토착 사교도였다.
어느 장소를 확보하란 명령에 직접 나가 보니, 이단 방파가 비밀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조사하라는 지역을 파 보면 악마가 봉인된 고대 던전이 튀어나왔다.
모든 명령이 이런 식이었다. 원인 없이 결과만 주어진 상태로, 그저 맡은 일만 하다 보면 알아서 해당 지역이 정화되곤 했다.
심지어 그림자 학회에서 파악조차도 하지 못했던 지방 방파에 이르기까지. 페르난데스는 모르는 것 하나 없어 보였다.
-턱. 턱.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말레디카 요원들은 입술을 꽉 깨물며 두려움 속에서 그림자 아래에 숨었다.
이들의 비밀 거점 가장 높은 단상엔 이들이 직접 성심성의껏 깎아 만든 옥좌가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옥좌가. 그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몸을 피하며, 그들은 다가오는 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끼이이익…….
문틈 사이로 빛이 들었다. 바로 옆에 선 자의 침 넘기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고요가 감돌았다. 그 무거운 공기 사이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턱, 턱.
긴장감에 식은땀이 흘러 눈이 감겼다. 로브를 입은 반백 머리의 청년과 호리호리한 수인족 여인이 아무 말 없이 그들 사이의 길을 걸었다. 이윽고, 청년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사한 것을 보니 반갑군.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페르난데스 나름의 농담이었다. 듣기에 따라서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 싶다. 그러나 이 자리의 마법사들 중 그 말에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렐리기오사라는 이름씩이나 받아 놓고도 전혀 수도원처럼 보이지 않으니 참 문제가 크다.”
“고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들…… 저희가 어찌 수도사가 되겠습니까.”
“왜 아니겠느냐? 너희는 지금부터 수도사인데.”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교황청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고급지였다. 그는 천천히 다리를 꼬며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느냐?”
“설마…… 교황이 진정코 저희를 인정했다는 뜻입니까?”
“그래. 조건이 붙었지만, 그럼에도 너희는 이제 공식적으로 이단심문청의 소속이다.”
페르난데스가 손을 휘젓자 두루마리가 스스로 떠올라 마를린의 눈앞에 떨어졌다. 마를린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고는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집어 들어 읽었다.
“이단심문관은…… 아니군요?”
“그런 반짝이는 직함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저희의 안전은 어디에서 보장받을 수 있겠습니까?”
“안전 보장이라? 어디 계속 해 보거라.”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웃었다. 그림자 깊게 드리운 단상 위에서, 새하얀 어금니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 자리에 그것을 단순히 웃음으로 취급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내 너희를 직접 보고 정비함은 오늘 이후로 너희가 비로소 나의 휘하에 복속되었다는 뜻이로다.”
교황은 황제의 폐위와 베이타서스 교회에 우호적인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것을 대가로, 교황의 자리를 약속했었다.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지금 이 시점에서, 페르난데스는 교황에게 적어도 그에 준하는 권한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가 요구한 권리는 단 하나였다. 새로운 수도원의 창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에서 독립된, 이단심문청 바깥의 렐리기오사를 요청했다. 교황이라는 직위는 권위에 비해 실효가 적었고, 페르난데스의 관심사는 작위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모든 신도들이 우러러보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는 직함보다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얼마든지 더러운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충견들이 더 중요한 법이다.
“공식적인 이름과 함께 성유물을 위임받았으니. 지금 이 자리는 훗날 우리의 수도원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이곳의 이름을 성 바오로 순교회라 칭할 것이며, 너희는 이 순간부터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순교자들이 될 것이다.”
이 시간 이후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순교자. 교회를 위해 목숨 바친 신도들로 취급받을 것이다. 혹은, ‘바칠’ 신도들로.
“이단심문관들은 이따금씩 스스로 ‘가장 어두운 곳을 거니는 자들’이라 칭하고는 한다. 퍽 자기 위안적인 언사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으리라. 우리에겐 음지를 거닐며 양지를 지키는 숭고한 사명 따윈 없다. 저들이 진창 위를 걷는다면, 우리는 심연 아래에 도사릴 것이니.”
어떤 보상도, 어떤 명예도, 어떤 긍지도 따르지 않으리라. 사지에 던져진다면 죽을 것이고,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저 목숨을 유예받은 것에 불과하다.
“본청의 사제들은 자신의 묘비명에 이름 대신 문장을 남긴다. 펙투스. 인켄숨. 용기와 헌신. 그러나 너희의 묘비는 지상에 남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남길 것은 자취가 아니다. 너희는 오직 결과만을 남기고 사그라들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있다면, 그 아래 타들어가는 잔불도 필요한 법이니.”
너희의 죽음 이후에 남을 것은 폐허뿐이다. 이단의 죽음과 악마의 종말. 그를 위해 넣어야 할 땔감이 너희 자신이라 하더라도.
“만일 이를 원치 않는 자들이 있다 한다면, 지금이 너희가 가질 마지막 항변의 기회다.”
“지금 나서 거부한다면 저희에게 자유가 주어집니까?”
“아니. 이름을 남길 기회가 주어지지.”
이따금씩 문장 안에 살기가 어리는 경우가 있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와 대적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침묵하는 이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페르난데스가 선언했다.
“너희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얻으리라. 너희는 렐리기오사 말레디카의 순교자들이며, 너희가 지금껏 가졌던 이름 대신 너희를 달리 부르리라.”
프라이무스, 세쿤두스, 테르티우스, 콰르투스, 퀸투스……. 일호, 이호, 삼호, 사호. 무미건조한 단어다.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다만 체스말로 구분하겠다는 뜻처럼.
-화르륵!
페르난데스가 손짓하자 횃불들이 일제히 타올랐다. 횃대 위에서 이글거리는 불길 안에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황야의 파르탁 블랙팽. 페르난데스에 의해 가장 먼저 복속된 흑마법사.
[주군께서 바라신다면 그리되리다.]
북부의 오라이온 위빙랫. 북부 최대 이단 종파 체인질링의 대사교.
“그림자의 왕이시여 저희를 인도하소서.”
마지막으로, 말레디카. 그림자 학회의 회장 메를린. 그녀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속삭였다.
* * *
[작전 보고서 : 들불]
작전 지역 : 카르벨리에 공작령 리뷔에, 레바인테르 제국.
작전 개요 : 황실의 타락 정황 조사와 처치.
작전 경과 :
1) 카르벨리에 공작 에르브와 접촉. 협조를 구함.
2) 리뷔에 인근의 이단 정황 포착 및 저지.
3) 로베르 베나티에 트레뮐레 2황자와 접촉. 협조를 구함.
4) 동부 황야 망령 군벌 저지 및 복속.
5) 황제 근위 병력을 일소 및 복속.
6) 뷜랑의 선제후 세포르 공작의 발호. 제국 내전 발생 정황 포착.
7) 세포르 공작가 저지 및 뷜랑 전역 복속.
8) 팔텐노이아 점거 후 황실 조사 착수.
9) 팔텐노이아 내부 이단 정황 포착 및 처리.
10) 황실 파괴 공작 착수 황제 신병 확보 및 처리.
11) 카르벨리에 공작 르네 필리파와의 협약 체결. 임무 종결.
작전 테스크포스 팀
1) 렐리기오사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2) 토치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3) 토치맨 아벨.
악마, 이단, 마녀를 불태우리라.
작전 책임자 :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 *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 단 반년 안에 일어난 일일세.”
“반년 안에 제국의 황제를 갈아 치웠군요. 과연, 성하께서 인정한 성자다운 업적입니다.”
“성자의 업적이라 보기엔 과히 손속이 잔혹하지. 또한 내가 인정한 성자라 했나. 아니, 이 청년은 주께서 인정한 성자일세.”
교황은 허허, 하고 웃으며 보고서를 덮었다. 베오른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교황을 살폈다. 성자의 행동이 과격하다 논하는 것치고는 안색이 밝았다.
“보고서의 내용이 아주 간략히 정리되어 있군. 교차 검증이 필요한 시점이긴 하겠으나, 대외적으로 확실한 것들이 있지. 황제가 죽었고, 젊은 카르벨리에 공작이 황위를 노리고 있으며, 제국 전역이 이제 교회에 아주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것.”
“단 반년 안에 교세를 이토록 넓혔으니 교회의 홍복입니다.”
“문명 사회의 홍복일세.”
-탁.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드래곤스파인 산맥의 새벽. 안개가 낮게 깔린 산세를 내려 보며, 교황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갔다. 그리고 처리했다. 어디로 갔고, 곧 처리했다. 무엇을 확인했고, 처리했다. 이런 식이지. 과정의 생략을 제외하고 말하더라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단 한 차례의 머뭇거림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완수했군. 그대는 이 성자 형제를 믿나?”
“예.”
베오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단심문청의 입단 절차는 대단히 까다롭고 냉혹하지만, 한번 입단한 이들에 대해선 친형제 이상의 형제애로 서로를 대한다. 타락 징후가 완벽히 포착되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형제의 신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단심문관다운 맹목성이다. 주의 가장 날카로운 검다운 진실함이다. 그러나 교황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두렵네.”
“……예?”
“이 청년이 만일. 같은 능력으로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두렵네. 그의 암묵적인 요청으로 동부 왕국이 제국에 반기를 들었네. 그가 손짓하자 대황야의 야인들이 창칼을 들었지. 이제 와 본다면 제국의 다음 황제는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네.”
르네 필리파의 국서 요청을 말 그대로 연심으로 해석할 만큼 교황은 순수하지 않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가 갖는 정치적 강점은 이미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부와 서부의 각급 권력자들과의 관계, 심지어 엘프 함대와의 관계까지 고려한다면 더욱이.
르네 필리파가 페르난데스를 원한다는 것. 그건 달리 말해 차기 황제의 야욕이 문명 사회 전반으로 뻗어 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었다. 황야 동쪽으로 대륙의 절반. 황제의 권력과 페르난데스의 인맥이 얽히면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
거기에 더해. 페르난데스가 교황에게 했던 요청.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말레디카라…… 하하.”
이교도들을 이용해 이교도를 사냥하겠다. 그 방식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교회에서 관여하지 말라. 황제의 권위를 업고 하는 요청이었으며, 제국과의 수교를 고려해야 하는 교황은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치밀하게 짜여진 함정 같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이따금씩, 교황은 페르난데스의 서한과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혼란에 빠지고는 했다. 정말 20대 청년이 맞나? 진득하고 노회한 정치가나 모략꾼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이 청년이 주의 평강 아래에 형제라. 이는 이 시대의 홍복이로군.”
교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집무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