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의회 (1)
누군가는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도, 또 누군가는 비로소 찾아온 평화라고도 부를 만한 게으른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극소수의, 그리고 결코 양지에 드러나지 않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 평온한 나날의 대상 중엔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이제는 카르벨리에 공왕이나 리뷔에 선제후라 불리는 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루하구나!”
“전하, 산보라도 하시렵니까!”
“산보도 지루해!”
대검 귀족들의 충성을 완벽하게 확보해내고, 이미 내부에선 차기 공왕으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다져 놓은 그녀는, 이 몇 주간의 평화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리뷔에를 떠난 이래 모든 순간 그녀는 전장에 있었다. 피와 살점은 분명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한편으로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의 사건은 자극의 역치를 높여 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녀는 유례없는 지루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공연히 칼을 차고 무술을 시험하는가 하면…….
“완벽한 검로십니다! 전하!”
“오오오! 그야말로 기사…… 아니! 기사 공주!”
“……기사 공주라는 말은 이상하지 않나?”
“기사 공작! 그래, 기사 공작이십니다! 기사공의 모습입니다!!”
그녀의 취임사 이래 그녀의 가신들은 가신이라기보단 추종자들에 가까워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불안은 에르브에 비해 못난 군주를 섬기고,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게 될 것에 대한 걱정이었으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선선히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굽힘 없이 당당한 새로운 군주의 카리스마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그만! 이게 제대로 된 검술로 보이느냐!”
“설령 쉬라이크 경이 직접 나타난다 하더라도 동수! 아니…… 세 수는 앞서십니다!”
“제국 제일검입니다!!”
밀짚 인형을 목검으로 후려치는 것엔 신물이 났다. 그렇다고 칼부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기사와 대련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무기는 검이 아니었다.
무가의 장녀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칼보다 펜. 그리고 혀를 사용하는 데에 능했다.
언변과 정치력에 모든 재능을 쏟은 그녀에게, 그 둘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의 나날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페르닌 경은 어디에 있어?”
“어…… 저…… 음. 전하?”
“왜?”
“페르닌 경을 직접 찾으시는 것은…… 조금 재고하심이 어떠시온지…….”
가신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르네를 만류했다. 르네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가신들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페르닌 경은 바쁘십니다.”
“아, 우리 저택에 바쁘신 귀족이 있으셨군! 정말 놀라워. 그대들은 왜 바쁘지 않지? 응?”
“음…… 페르닌 경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해서…….”
“언제부터 그대들이 페르닌 경의 수족이었나!”
“거…… 음…… 페르닌 경과 전하께서는 이제 곧 혼례를 올릴 예정이온데…… 그렇게 따지면 카르벨리에의 어른이 되시는 격이니…… 음. 이치에 아주 맞지 않는 건 아니고…….”
기사가 애써 변명을 이어 나갔다. 르네는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힘겹게 눌렀다. 결혼. 그래, 이제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선제후 의회가 끝나고 교황이 제위를 축복하기 위해 직접 수도를 찾는 그 날이 곧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자신의 가신들을 장악한 것? 오히려 좋다. 어차피 운명 공동체가 된 바. 두 사람 모두가 가신단의 지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면 그녀의 영향력에도 긍정적일 테니까.
그리고 그의 권위는 당연히 인정받아야 마땅했다. 선왕이 부재한 사이 가신들을 추슬러 팔텐노이아를 점거하고, 거의 어떤 피해도 없이 뷜랑을 집어삼켰으며, 심지어는 황제를 암살하는 데에 성공하지 않았나.
작게 본다면 암살자지만, 크게 본다면 의사다. 선왕의 복수를 해내고 악마의 손아귀에서 수도를 지켜냈으니.
“후. 후후후. 그래, 그렇겠지. 좋아. 하지만 안내해!”
“네?”
“어디 부부가 서로를 보지 못하는 시간이 이리도 길어서야 되겠어? 자, 페르닌 경의 집무실로 가자!”
기사들이 말릴 새도 없이 르네는 성큼성큼 걸어 중정을 벗어났다. 기사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그 시각, 이 수도에서 평화롭지 못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극소수 중 하나.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는 보고서 아래에 파묻혀 있었다.
-제기랄. 거기 사인을 왜 했어!
‘아, 졸려서. 실수했다. 다시 쓰지 뭐.’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페르난데스는 방금 인장을 찍은 서류를 파기했다. 손짓 한 번에 서류가 깔끔히 불타오르며 잿가루가 허공을 비산했다.
-대천사 그 계집을 보내는 게 아니었어. 손 하나가 급한 시기에…….
‘아냐. 에버리즈는 제피스 형제와 유대감을 가져야 해.’
-그 계집이 암만 노력해 본다 한들 그 디모니카가 유혹이나 당하겠어?
‘뭐든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 우리가 처음부터 대마법사는 아니었듯이.’
-언제부터 그렇게 이해심이 투철해지셨나. 페르난데스?
페이자쉬의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다시 서류를 뒤적이던 그때. 집무실 문이 쾅 하며 열렸다. 발걸음 소리, 보폭과 기척. 디모니카의 감각과 그 자신의 경지 덕에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방문자를 유추해냈다.
“카르벨리에 공작. 노크는 귀족의 소양이라오.”
“가족 간에 예법을 따지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가족일수록 더 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예법과 예의요. 일단 그대는 감점이오.”
“득점한 것이 삼천 점쯤 되니 일이 점 감점은 오차 범위 안쪽이죠. 그렇죠?”
르네가 히죽거리며 탑처럼 쌓인 보고서들을 슬쩍 피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페르난데스는 펜을 내려놓고는 눈매를 쓰다듬었다.
“마지막 수면이 언제였죠?”
“엿새 전.”
“엿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예요?”
“아마도 디모니카라 그런 것 같소만. 사실 나도 살아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군.”
그는 찻잔을 들어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르네는 찬장에서 잔을 꺼내 들고는 페르난데스의 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곧장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맨빌 허브차요. 음…… 허브‘차’라기보다는 허브 농축액에 가까울 정도로 우렸지. 각성 효과가 아주 뛰어나니 그대도 오늘 밤 잠들긴 글렀군.”
“그거 금지 약품이었나요?”
“제국 식료품 강령에 따르면 아니오.”
“제가 황제가 되면 금지 약물로 지정할 거예요. 진짜 끔찍하네요.”
허브의 각성 효과로 잠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 끔찍한 맛 때문에 정신이 깨는 것이 아닐까. 르네는 떨떠름한 혀를 날름거리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를 홀짝이고는 다시 보고서를 쥐었다.
“그래서, 난 아직 바쁜데 무슨 일이오?”
“화 안 낼 거예요?”
“내 분노는 기능적이오.”
르네는 멍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의 말을 곱씹었다. 이건 화를 낸다는 거야, 안 낸다는 거야?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는 페르난데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잠결에 헛소리를 했군. 말해 보시오. 나는 필요하지 않을 때엔 분노하지 않소.”
“어…… 음. 놀러 갈까요?”
“거절하겠소.”
페르난데스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자르고는 다시 펜을 들었다. ‘왜’나 ‘어디로’를 예상하고 대답을 준비하려던 르네가 당황하며 말했다.
“뭐 더 물어볼 것 없나요? 갑자기 왜 그러느냐, 내가 바쁜 거 안 보이냐. 어디서 뭘 할 생각이냐……. 이거 나름대로 데이트 신청이었는데.”
“왜, 무료하니까. 바쁜 것, 보이시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은 것일 테고. 어디서 뭘, 팔텐노이아를 벗어날 수 없는 당신 입장에서 갈 수 있는 지역이라 해 봐야 수도 시내인데, 시내를 걷는 것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잔다면 모를까. 페르난데스는 딱 잘라 말했다. 르네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곧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하, 하나 틀렸어요! 팔텐노이아 시내가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거절이 아니라 반대하겠소. 그대는 수도 관문 밖으로 나서서는 안 되오.”
“아뇨! 관문을 벗어나긴 해야 하지만…… 가능한 이유가 있지요!”
“……?”
“아세아스 고위 의회가 찾아왔대요! 와! 와! 궁금하지 않아요?”
페르난데스는 펜을 내려놓고 르네를 바라보았다. 아세아스 고위 의회? 그놈들이 이 시기에 팔텐노이아에는 대체 왜?
-황제의 죽음 때문인가? 그건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라 마법적인 이슈에 가까웠으니까.
‘그 이유 때문이라면 내가 사용한 마법의 잔향을 추적했다는 뜻인데, 그건 불가능해.’
-뭐가 되었든 궁금하긴 하지 않아? 가 보지.
‘바쁘다.’
-너는 더 이상 마법사도 뭣도 아니야. 어떻게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전성기 시절을 놓칠 수 있지? 나는 그런 참상을 용서할 수 없어.
페이자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아세아스 고위 의회는 이미 멸망한 지 오래였다. 대강 시기를 유추해 보자면 지금 이 시점으로부터 약 이십 년에서 삼십 년 후가 될 것이다.
따라서 페이자쉬는 단 한 번도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공중탑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파편화된 유물과 유적을 살핀 적은 있었으나, 그건 찬란했던 시절의 편린에 불과했다.
아쉬울 따름이다. 아세아스의 비전, 그 작은 파편만을 익힌 한 마법사가 훗날 청동 천칭단의 우두머리이자 동부 왕국 연합의 공포로 군림했었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더욱이.
“음…….”
“궁금하죠? 가 보고 싶죠? 네?”
“좋소. 나쁘지 않군.”
물론 호기심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보고서를 마무리하고는 책장을 덮었다. 그는 두 눈을 반짝거리는 르네를 잠시 바라보았다.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전국을 유랑하는 마법사 집단과,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차기 황제 유력 후보가 접촉한다라…… 소문이 나기에 따라서 아주 유용하겠어.’
-그리고 고위 의회의 대단하신 의원님들을 실물로 만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로군.
‘페이자쉬. 그러고 보니 그때 그런 말을 했었지.’
황제를 죽인 후에 반쯤 빈사 상태에 빠져 침상에 한동안 못 박혀 있었을 때. 페르난데스가 페이자쉬에게 물었던 것이 있었다.
지금 나의 경지는 어느 정도가 되겠는가.
* * *
‘축복과 마법을 제외하고 본다면 내가 과거 기준으로 어느 수준까지 닿았을까? 무예로만.’
-페이른의 그리핀 마스터 리옹, 데인의 비센테 2세, 칠흑의 에리크, 대카간 카라드스카르, 키르자트의 알’하쉬르, 대족장 하트테이커, 창공의 패트릭, 블라슨의 지기스문트, 성 요한 순례기사단의…….
‘내가 그 정도까지 된다고?’
페이자쉬가 말한 인물들 하나하나가 종말 직전 시절 인류의 영웅들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인류 문명 사회의 포텐셜이 정점에 도달해 마지막 불꽃을 피워 내던 시절의 대영웅이란 뜻이다.
당연하게도, 지금 이 시대의 영웅들보다는 적어도 한 수 반 이상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대충 저 정도 되는 녀석들의 아랫줄까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군.
‘축복과 유물을 모두 활용한다면?’
-그럼 이제 저놈들까지도 상대는 할 만하지.
‘마법까지 사용한다면 어떨까?’
-네 마법은 불안정해. 우리의 전성기에 닿으려면 육체 기능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지. 하지만 전투 보조에 집중해서 세심하게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사료로만, 그리고 남겨진 연구 자료로만 유추해 보았을 때 아세아스의 마지막 대의장 아스카니오 주플린부르크.
-그 정도나, 아니면 대악마의 가호를 직접 입은 대전사 정도 되는 녀석이라면 상대할 만하겠군.
‘다리안은?’
-다리안 쉬라이크? 전성기의 다리안 쉬라이크? 하하. 재밌는 농담을 하는군. 놈은 규격 외야. 대악마의 가호를 온몸에 두르고 마법을 모두 회복한 이후에 칼까지 들면 그때 다시 견주어 볼 만하겠군.
* * *
페이자쉬의 킬킬거리는 소리를 떠올리며 페르난데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뭔가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오, 페이자쉬. 이거 봐.’
-왜?
‘내가 정말 마법사에서 멀어지긴 했나 봐. 대단히 비이성적인 감정이 들어.’
-……이제 와서 갑작스럽긴 하지만, 뭔데.
‘호승심.’
아세아스 고위 의회. 그 최후의 대의장이라……. 페르난데스는 진득하게 웃으며 깍지를 꼈다.
“산책, 같이 갑시다.”
“좋아요!”
무슨 의미가 되었든 르네는 활달하게 웃고는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