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76화 (277/388)

276. 의회 (2)

아세아스 고위 의회라는 이름에서 일말의 진실이라도 품고 있는 것은 ‘아세아스’뿐이다. 그들은 의회도 아닐뿐더러 ‘고위’라 불릴 만하지도 않다.

적어도 페이자쉬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상 전쟁 시절의 강력한 마법으로 마탑 전체를 공중에 띄우고 세계를 유랑하며 마법을 익히는 무력 집단에 불과하다. 의회를 수립할 만한 시민들이 있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회의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의회 마법사들이 뭔가를 찾고 있대요! 듣자 하니 천문을 읽었다던가……?”

“풍문을 들었겠지.”

팔텐노이아의 서부 관문 너머 펼쳐진 너른 곡창지대를 가로지르며, 페르난데스는 말고삐를 쥔 채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며 르네가 싱글거렸다.

“낭만적이지 않나요? 진리를 위해 천하를 누비는 학자들…… 고결한 마법사들…….”

“길거리에 나앉은 와일드캐스트 대부분이 진리를 위해 천하를 누비는 학자들이오. 저들이 대단한 이유는 상징성과 무력 때문이지.”

“정말 낭만이라고는…….”

저 멀리, 아직은 아스라히. 초원의 지평선 끝에 마치 산과 들처럼, 정물이 된 탑이 보였다.

아직 먼 거리 탓에 어렴풋한 실루엣 정도만 그려질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탑’이었다. 기념비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거주구와 연구동 따위가 건설된 복잡하고 거대한 탑.

사실상 성 하나 정도의 크기가 되는지라, 저들이 ‘이동’할 때엔 대단한 장관이었다고 한다.

“팔텐노이아 시민들이 아주 흥분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아세아스 고위 의회는 보통 남부 지방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잖아요? 수도에 접근한 것이 어디 보자……. 오백 년 만이라고 했나?”

“아르낭 후작의 입김이 닿아 있을 수도 있지 않겠소?”

“트루아 선제후요? 그 늙은이가 무슨 수로 아세아스 고위 의회씩이나 포섭했겠어요?”

“글쎄, 트레뮐레는 황립 필라인네일 대학을 포섭하지 않았소.”

“그건 황제가 대학의 대출금을 탕감했기 때문이죠! 아르낭 후작에게 그 정도의 재력이 있었겠어요?”

제국 남부 방향에서 가장 유력한 친황제파 가문은 트루아의 후작가 아르낭. 일명 투르아 선제후다.

제국은 크게 아홉 개의 지방으로 나뉘어 있다. 각 여덟 선제후 가문이 이룬 ‘제후국’과 황제 직할령 팔텐노이아로.

팔텐노이아 남부 지역의 드넓은 수해는 아르낭 후작의 제후국이다.

그리고 아세아스 고위 의회가 터를 잡은 지역 또한 그 방향이었다.

-대외적으로야 정글 수색이겠지만. 뭐, 누가 알겠어?

남부 대밀림에 잠든 고대의 유적들을 조사한다는 것이 지난 500여 년 동안 아세아스 고위 의회가 곧잘 해 온 변명이었다.

일반적으로 500년을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보아야겠지만…….

“아무리 이동이 가능한 건축물이라 하지만, 오랜 세월 하나의 지방 안에서만 유랑했다면 그 지방의 유지와 연계가 아주 없을 수는 없소. 그런 자들이 갑작스레 수도를 방문했다라……. 지금 같은 시기에 낭보가 될지 비보가 될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페르난데스는 고삐를 쥔 채 정면에 점점 커져 가는 석탑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대하다. 어지간한 요새 정도의 크기다. 대체 어떤 원리로 저 성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고대 마법이란 것은 말 그대로 ‘마법의 단어’가 아니겠는가.

“비보가 될 수도 있을까요?”

“결과론적으로만 살피자면 이 일은 반드시 낭보가 될 것이오.”

“예?”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은 남들도 할 수 있소. 아르낭 후작의 위세 일정 부분은 영지 내에 있는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존재에 기인하지.”

황제가 필라인네일 대학을 후원한 이유 또한 그런 것이었다. 강력한 마법사 집단은 그 존재 자체로도 권위를 보증하니까.

“그러니 다른 제후들, 그리고 외지 사정에 귀를 열고 있는 귀족들은 모두 아세아스와 아르낭 후작의 연결 고리에 집중할 것이오. 당사자들의 행보야 어쨌든 간에. 보이기엔 그렇게 보일 거란 뜻이지.”

“그런데 고위 의회가 갑자기 수도에 입성했다?”

“바로 그렇소.”

아세아스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정말 아르낭 후작의 뒷공작이 있었는지. 이런 것들은 외부에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사건의 결말을 듣고, 속사정을 유추할 뿐이므로.

유력한 차기 황제, 카르벨리에 공작이 오랜 시간 아무런 정치적 활동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귀족가들을 혼란스럽게 했다면. 이 또한 좋은 한 수가 될 것이다.

머릿속의 체스판이 달칵, 하고 움직이는 감각이다. 한 수. 폰이 전진한다.

“다른 귀족들은 아르낭 후작과 그대의 연수를 의심할 것이오. 또는, 아세아스와 아르낭 후작의 불화설을 믿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고위 의회가 제국의 차기 황제에게 스스로 몸을 낮춘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

소문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퍼지는 범위와 복잡성에 기인해 무게를 갖는다. 점점 더 복잡하고 음모론적인 소문일수록 더 큰 힘을 얻는 것이다.

진실과는 달리 소문은 제 몸을 부풀릴 줄 아는 짐승이다. 녀석의 고삐를 쥐고 있는 자들에게 때론 무한한 권력을 안겨 주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돌더라도. 모든 것은 그대의 권력을 공고히 할 것이오.”

“역시. 내 선택이 옳았군요.”

“응?”

“당신이요. 당신이랑 결혼하자 한 것 말이죠.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당신이 그냥 훌쩍 떠나고 다른 귀족과 손을 잡으면 대적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로베르 황자가 전쟁 중에 했던 말이 있다.

페르닌. 본명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은밀히 알려진 바로,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이자 ‘성자’. 그리고 각국의 정보 방첩 기관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이름.

[언터처블].

행보를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껏 해 온 모든 일들이 결국엔 국제적 영향력을 빚어냈으며, 그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흐름을 갖추고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그건, 첫 착수부터 마지막 행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일이란 뜻이다.

이런 짓이 가능한 존재가 있을까.

어쩌면 우연일지도, 어쩌면 과평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로 진실을 유추해야 하는’ 입장에서, 당장 드러난 것으로만 보아도 그는 상대해선 안 되는 존재였다.

일신의 무력이나 심계의 깊이가 문제가 아니다. 예측 불가라는 그의 특징 자체가 문제였다. 정보기관이 예측을 포기했다는 것은, 향후 일절 관계하고 싶지 않다는 뜻과도 동일했다.

“허튼 생각이로군.”

페르난데스는 어느덧 거대하게 다가온 요새의 문을 바라보며 웃었다.

“왜죠? 제가 쓸모가 있어서?”

“내가 쓸모가 있기 때문이지. 내 가치가 높으니, 몸값을 가장 높게 부르는 편과 거래를 해야 하지 않겠소?”

찔끔 하고, 상처 입은 눈을 한 르네를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가 그렇게 높은 가격을 불렀던가요?”

“제국 국서 자리는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관계가 거래였다는 뜻이군요…….”

“물론. 그리고 화폐는 호의요. 이보다 값진 거래가 어디에 있겠소.”

호의를 주고, 호의를 매집한다. 이보다 이상적인 거래가 어디에 있을까.

페르난데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르네가 고개를 퍼뜩 들며 눈을 글썽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고 다니는 건 아니죠?”

“응?”

“그…… 남들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저한테만 해요. 저는 오해 안 하니까!”

나는…… 나는 당신과 결혼했으니까! 르네는 그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성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삐를 당겼다.

“오해라?”

-수작질이 늘었구나, 페르난데스.

* * *

이후 페르난데스는 거의 르네의 손에 끌려다니다시피 이곳저곳을 구경해야 했다.

아세아스의 탑. 말이 좋아 탑이지, 이건 거의 소도시 정도의 규모였다. 높은 외성과 그 안에 즐비한 시장, 그리고 거주지 골목. 저 깊은 내성벽 안에 위치한 거대한 탑까지.

모든 구획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나뉘어 있었다. 그 뜻은, 탑을 중심으로 설계된 계획 도시라는 의미였다. 탑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이래 놓고 의회라고 떵떵거렸다는 말이냐? 하하, 가증스럽군.

도시의 행정이나 의결을 담당하는 기관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다. 도시 자체가 의회를 위해 조성된 셈이니까. 페이자쉬는 비릿하게 키득거렸다.

그 말이 맞았다. 의회라기보다는 군주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건 이 문명 사회 모든 지방의 공통적인 사회 구조였다. 비꼴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진지한 비난을 받을 만한 악행은 아니었다.

“정말 정교하네요!”

“그렇소.”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이 장신구 말이에요!”

“아. 그렇군.”

르네는 시장 가판대에 올라와 있는 장신구들을 바라보며 감탄했고, 페르난데스는 이 도시의 설계 사상을 느끼며 감탄하고 있었다. 르네는 살짝 삐친 얼굴이 되더니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 관람은 평화로웠다.

고위 의회의 마당에서 암습을 당할 가능성 따윈 없었고, 카르벨리에 공왕을 암살하려는 집단이 있었다면 제국 아이언사이드의 눈을 피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베르도 조만간 한번 만나야겠는걸.’

-아이언사이드가 사실상 수중에 들어온 격이니. 당연하지.

르네가 황제가 된다면. 이라는 가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로베르가 지배하고 있던 아이언사이드는 권력 승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르네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궁내부의 잡무 전반을 담당하게 되는 제국 국서의 역할상 그건 페르난데스의 권력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이단과 사교도 사건은 헤레티카와 말레디카를 이용하고, 정치적인 사건들은 아이언사이드를 이용한다라. 대단히 호화로운 첩보망의 완성이다. 적어도 대륙 중앙에서 동부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권역 전반이 페르난데스의 눈 아래에 놓이게 된다.

‘출세했군.’

-이 정도로 출세라니. 아직 멀었지.

‘뭐. 어쨌든 좋…… 응?’

-턱.

르네의 뒤를 따라가던 페르난데스의 감각에 이상한 기척이 잡혔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벼락같은 손놀림으로, 그는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손을 낚아챘다.

“억!”

“도둑이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카르벨리에 대공을 보좌한 자에게 감히 손을 뻗다니? 당장 손목을 쳐도 법령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일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곧 행동을 멈추었다.

그의 품에 손을 넣던 사람.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사내의 목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던 탓이다.

“고위 의회?”

“……윽.”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상징물이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사내는 힘겹게 손을 빼내더니 민망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신비감이 떨어지는데.”

“무슨 소릴……. 의회분이 도둑질이라니?”

“도둑질이라니! 나는 서한을 전달하려 했던 것뿐이오!”

“……서한?”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움켜쥔 손을 펼쳤다. 품 안을 파고들기에 당연히 소매치기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사내의 손엔 편지가 쥐여 있었다.

-소매 넣기! 저건 풍문으로만 듣던 정보기관 특유의 비기야! 나중에 아무것도 모르고 주머니를 열었을 때, 오싹한 문장과 함께 경고 서한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개소리하지 마. 농담할 때냐.’

페르난데스가 떨떠름하게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는 곧 표정을 다잡고는 근엄한 얼굴로 속삭였다.

“대의장 각하께서 경을 만나고자 하시오. 와일드캐스트 경.”

“……와일드캐스트?”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그렇게 말하면 알 거라 들었소만. 아니었다면 실례했군?”

페르난데스는 그 말에 픽 웃으며 저 멀리 걸어 나가는 르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사내가 덧붙여 말했다.

“카르벨리에 공왕 전하도 공식적으로 초대될 것이오. 하지만 각하께서는 그대를 따로 뵙고자 하시었소.”

“그럼 어울려 드려야지.”

페르난데스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수도를 직접 방문한 이유를 의장의 입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모종의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없다.

‘페이자쉬라.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을까.’

-이거 재밌게 구는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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