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77화 (278/388)

277. 의회 (3)

데일 페르타스. 더 유명한 이름으로는 [검은 왕관] 페르타스.

청동 천칭단의 수좌이자 동부 왕국 전역 워커 사태의 주범이며 페이른에서 시작하여 문명 사회 전반에 지독한 자취를 남긴 대흑마법사…….

-뭐, 지금은 시체지만.

‘열다섯 악적 중에 시체가 아닌 녀석을 찾는 게 더 힘든 세상이잖아.’

세상을 멸망시킨 열다섯 악적. 선신 만신전 교회와 문명 사회의 영웅들이 이를 갈며 만들어 낸 그 자랑스러운 명단에 포함되었던 대단한 마법사였다. 메를린시티 워커 사태 당시 페르난데스의 칼 아래 유명을 달리한 사내는.

그리고 그 사내가 남긴 것이 둘 있으니, 페르난데스의 오른 손목에 걸려 있는 청동 팔찌와, 그의 연구 기록이다. 아세아스 비전 주술 문자와 그 특유의 마법 체계를 접목시킨 인체 실험에 대한 편집증적 비서였다.

그리고 그 주술 문자들이. 전생엔 그 편린조차 막대한 가치를 가졌던 유실된 지혜들이 이 탑 안엔 온통 아로새겨져 있었다.

“보물전이로군…….”

“이것들 말이에요?”

“음. 그렇소.”

초대를 받아 탑 내부로 향하는 과정 내내 르네 필리파의 투덜거림이 끝나지 않았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사생활이란 게 뭔지 알기나 할까요.”

“평범한 데이트가 뭘까요. 정체 불명의 마법사와 은밀히 접촉하는 과정?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리뷔에 상식에선 아니었거든요.”

“나 진짜…… 그 여자들한테 자랑하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심지어 말도 못 탄대요. 믿겨져요? 리뷔에 내성 안에서도 기마가 금지는 아니었어요. 지들이 황제야, 뭐야.”

마지막 말을 끝내기 전에는 심지어 ‘이제 황제는 난데…….’라는 정체 모를 푸념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그만큼 애가 닳았다는 뜻이 아니겠소?”

“애가 닳아요?”

“내가 말했잖소. 거래는 먼저 청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온 요청을 검토하는 것이라고. 이치들은 그걸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급했던 것이고…… 그건 제 몸값을 스스로 절하하는 행동이오. 우리로서는 나쁠 것 없지.”

그의 말에 르네는 로베르 황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해, 첩보 기관의 요원들 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보물전이라니. 이 그림들 말인가요?”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는 그림이지. 하지만 저기 저쪽.”

페르난데스가 손을 뻗어 탑의 기나긴 홀, 그 벽면을 훑었다. 부드러운 반원형으로 길게, 상층부로 향하도록 이어진 탑은 거뭇한 그림자와 이따금씩 타오르는 푸른 마력등 아래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 반달 모양 그림이 보이시오?”

“……네에.”

“샤이쉬요. 승천자의 보루. 신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를 갖는 주술 문자지. 하지만 우스운 역설이오. 마법사들에게는 신이 없으니까.”

마법의 소모값은 마력이다. 보편 상식에 의거한다면. 그리고 신성은 마력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간단한 논리다.

마법사에겐 신이 없다. 어떤 초월적인 마법사가 강력한 힘으로 신성을 모은다면, 오히려 마법을 상실할 테니까.

“그럼 어떤 신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인가요? 선신 만신전? 아니면 무저갱의 악마들?”

“둘 다 아니오. 마법이란 추상적인 학문이니까. 샤이쉬. 신을 향해 나아간다. 보다 직관적인 의미로 표현하자면 ‘진리를 탐구한다.’라는 뜻이 되겠소. 그럼 저쪽을 보시오.”

페르난데스는 벽화의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을 이어 나갔다.

심야의 별 무리가 흐드러진 듯한 실내의 정경은, 그 자체로도 기묘한 감각을 가져왔다. 한낮에 밤 자락을 끌어 천장을 덮은 듯한 감각.

은밀한, 그리고 몽환적인. 어딘가 아득하고 달콤한. 그런 종류의 감각을.

어느새 르네는 더 이상 페르난데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낮고 깊게 울려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관악기 같다고 느꼈다.

진지한 눈으로 설명을 이어 나가는 페르난데스의 깊고 어두운, 푸른 눈을 바라보며. 르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이 홀 전체가 사실 하나의 주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오. 고위 의회라. 아니, 십이인회라 부르는 편이 옳겠군. 이 벽화들은 의회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소. 입구에서부터 저쪽까지……. 듣고 있소?”

“듣고 있었어요.”

“……재미없는 이야기였겠군. 나도 이런 유적을 보는 것은 오랜만인지라, 다소 경박했소.”

“아니…… 아니에요! 경박이라니.”

전생 시절에는 아세아스의 고대 유적을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없었다. 아세아스가 멸망한 시기는 대전쟁의 초읽기가 한창인 시점이었으므로, 한가롭게 유적 관광을 할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한창 젊었던 시기. 유적 탐사자로 경력을 쌓던 페르난데스에게도 아세아스의 전성기를 온전히 담은 이 건축물은 흥미로웠다. 그의 본성은 학자였으며, 이 새로운 문물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어 몰두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문 영역에 몰두하는 열정 넘치는 청년은 그 나이 대에만 갖출 수 있을 어떤 아우라를 풍기기 마련이다. 적어도 르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염색할래요?”

“……염색?”

“까만 머리칼이 참 잘 어울리는데. 어떠세요?”

“흥미 없소.”

“화장은?”

“이점도 없고 흥미도 없소.”

제국의 귀족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교회 전에 치장을 하곤 했다. 단순히 옷매무새를 갖추는 것을 넘어, 염색과 화장은 기초 상식 정도로 통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흉터 가득한 살갗과 피로에 찌든 눈, 반백으로 새어버린 머리칼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것조차도 그의 매력이겠지만, 르네는 짧게 한탄했다.

“장차 제국 국서가 되실 몸이니, 사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할 텐데 참 걱정이 큽니다.”

“사교회는 나가지 않을 거요.”

“음…… 저희 ‘혼인 계약’에 그런 조항이 없었던가요? 어머, 깜빡했나 봐요. 추가해야겠어요.”

“있다 해도 위약 처리 할 작정이오.”

“아, 춤 좀 춰 줘요. 같이 추면 그게 또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그런데?”

“시간이 아깝소.”

페르난데스와 르네는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밤의 장막이 길게 늘어진 홀을 걸어 올라갔다.

이것도 일종의 데이트라고 봐야 할까?

르네의 마음속에서, 아세아스 고위 의회 마법사들에 대한 가치가 상향 조정 되고 있었다.

차라리 아까 전 시장 골목을 쏘다니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배는 낭만적이잖아. 르네는 픽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팔뚝에 손을 살짝 얹었다.

-끼이이익.

그때, 문의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홀의 끄트머리에서 보라색 태피스트리가 걸린 벽이 스스로 열리며 그 사이에 응접실이 나타났다.

“저것도 마법인가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탑의 입구를 넘은 순간부터, 마법이 아닌 것이 없었소.”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앞서 걸었다.

아세아스 의회는 미지의 위협이다. 어째서 팔텐노이아를 찾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전생 시절 이름을 알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먼저 알아내기 전에는.

강력한 마법사 집단이 꿍꿍이를 숨기고 제 공방 안으로 초대한 것에 불쑥 응하는 것은 어쩌면 멍청한 짓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정치적이든, 개인적이든.

“젊은 청년의 식견이 대단하군.”

응접실엔 두꺼운 로브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후드 아래로 새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한 노마법사의 자태였다. 화려한 로브에는 비술적 의미를 갖춘 장신구들과 자수가 빼곡히 그려져 촛불 아래에 반짝였다.

“흥미로운 시간이었소. 초대에 감사하지.”

“그쪽은…… 카르벨리에 공왕 전하신가? 갑작스런 초대에 양해 부탁드리오. 우리의 뜰에 직접 내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늙은이가 몸이 달아 일을 급히 처리했으니. 부디 책망 마시길.”

“그래요. 좋은 구경과 환대 고맙군요. 마스터.”

“클클, 마스터라. 알레한드로라 불러 주시오.”

-알레한드로?

‘들어본 적 있어?’

-……적어도 우리 그 멍청한 사촌 녀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 네가 없으면 나도 없어. 하지만 목소리가 낯이 익군.

세르너드 섭정공의 아들이자 페르난데스의 사촌. 알레한드로 세르너드. 그자는 이 년 전에 그의 손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아세아스 고위 의회의 마법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페이자쉬의 말을 들으며 페르난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국의 선제후 앞에서, 그것도 스스로 이름을 밝힌 선제후 앞에서 가명을 대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그리고 무례 이전에 경계의 대상이었다.

“후드를 벗으시오.”

“호오?”

“공왕 전하의 친전이오. 제국 신민의 예를 갖추길 바라오.”

“제국 신민이라. 하하. 아세아스 의회는 제국령에 속하지 않소만?”

마법사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웃음 아래 걸린 악의 없는 장난기를 느끼며 마주 웃었다.

“제국 헌법은 속지주의 법률을 준수하오. 그대의 의회가 제국령에 거하는 이상 제국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지.”

“처벌의 집행은 누가 하려나?”

“내 정체를 알고 초대했다면, 내게 사법권이 있다는 것을 알 텐데.”

-차르륵.

페르난데스는 품 안에서 사슬 걸린 로사리오를 꺼내 들었다. 마법사는 끅끅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유쾌하게 소파 팔걸이를 탁탁 치고는 후드를 벗었다.

“이거 실례했군! 위세가 대단하신 두 분을 모시고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소. 자, 앉으시오. 다과를 준비하겠소.”

“내게 초대장을 보낸 건 고위 의회장이라 들었는데요?”

“지금 그걸 보낸 사람과 마주하고 있지 않소?”

수염이 길게 자란, 늙은 마법사가 히죽 웃으며 르네의 말을 받았다.

“내 잠시 떠 본 것은 사죄하겠소. 다시 소개하자면, 이 늙은이는 이 의회의 의장직이란 과분한 직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되겠소. 아스카니오 주플린부르크. 다른 이름들이 있기야 하지만, 내 가장 유명한 이름이라 한다면 저것이 아니겠소?”

노인이 싱글거리며 말하고는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손가락을 딱, 울렸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테이블 위에 휘황찬란한 다과가 늘어졌다. 르네가 머뭇거리자, 노인이 히죽거렸다.

“들어도 되오! 독을 타진 않았소. 고위 의회의 접객에 그런 치졸한 수를 쓰기야 하겠소!”

르네는 얼떨떨하게 노인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응접실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다. 진정한 사치란 진흙 속 진주처럼 은근히 빛을 발하는 법이었고, 보통의 경우 그것을 품위라 부른다. 이 응접실 전체에 흐르는 기색처럼.

보라색, 그리고 자주색 융단이 깔린 응접실은 가장 사소한 가구 하나하나에도 세월과 품위가 빚어 낸 고상함이 어려 있었다. 고동색 원목 위에 먼지 하나 없이 올려진 부드러운 비단과 반짝이는 황동 촛대, 새하얀 도자기와 그 안에 찰랑이는 선홍색 홍차까지도.

하지만 르네와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쉽단 말인가? 제아무리 공작의 위세를 등에 업었다 하더라도, 한 집단의 수장을 만나는 것엔 무릇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이토록 오랜 역사를 가진 집단이라면.

페르난데스는 찻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이질감과, 씁쓸한 기시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는 얼굴은 아니다. 들어 본 목소리도. 그리고 그가 활동하던 시대 이전의 사람이다.

물론 이 시대에 존재하는 영웅, 또는 악당, 혹은 여타 걸출한 위인들 중에도 다음 세대에 여전히 활약하는 경우가 있었다. 제국제일검 다리안 쉬라이크가 그랬고, 리뷔에의 방패 보르아가 그랬으며, 멀게는 북부 체인질링의 대사교 오라이온이 그랬듯이.

그러나 그런 존재들. 언젠가 두각을 드러낸 존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세계의 멸망이라는 사건은 일종의 거름망이다. 유약한 자들을 걸러내는. 그 시대를 거치며 남은 이들은 모두 한 세대를 주름잡는 일대의 거인들이었다.

“아세아스 고위 의회…….”

“응?”

페르난데스는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그는 한번 본 주문을 잊지 않는다. 주문이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이라. 대의장이라는 대단한 직책을 맡았던 이를 전생에 알고 있었다면, 잊었을 리가 없었다.

“십이인회.”

“……흠.”

페르난데스와 노인 사이에 불똥이 튈 듯 강렬한 시선이 맞닿았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부드러운 소파 안에 몸을 묻었다. 아는 자. 알고 있던 자. 그러나 이름과 얼굴을 숨긴. 대마법사.

“영생자 오르키스.”

“……하!”

노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잠시 머리를 숙였다.

-딱!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 그 순간, 응접실의 불이 모조리 꺼지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대단하군. 페이자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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