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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79화 (280/388)

279. 의회 (5)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페르난데스는 애써 그 단어들을 하나씩 해체해 씹어 삼켰다. 단순히 한 사람의 말이다. 개인의 증언은 그 어떤 재판에서도 결정적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그런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헝클어트렸다.

“불가능하다.”

“왜? 네가 노력했기 때문에? 이봐, 페이자쉬. 하하. 그 시절 노력하지 않았던 자가 있던가?”

“문명 사회의 핵심 인력들……. 종말에 대항해 일어서 나와 맞섰던 이들 대부분을 살려 내었고, 더러는 그 시절보다 더욱 막강해진 권력으로 재무장했어.”

메를린 포트의 워커 사태를 종식시키고, 페이른 왕성 안을 잠식한 타락을 저지했다. 이로써 페이른의 그리폰 기사단은 아무런 저지 없이 전장을 활보하리라.

데인 왕국의 오랜 몰락을 막아 내고 비센테 2세의 아비에게 왕위를 이양했다. 비센테 2세는 고초를 겪으며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지 않고 제 자신의 힘을 온존한 채 굳건히 서리라.

인퍼머르를 중심으로 동북부 항구 도시들을 잠식하던 프란츠리트 혈족은 완전히 뿌리 뽑혔다. 북부 해안선은 이제 문명 사회의 교역로로 이어지고 있으며, 북해 무역은 지금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또. 그리고.

“북부의 에리크는 좌초되었고, 엘프 삼왕조 중 둘은 붕괴되었으며 개중 하나는 이제 문명 사회의 우군이 되었다. 대황야는 비옥한 농경지가 되었고, 네크로폴리스는 몰락했으며 수인 호족들은 전생보다 오십 년은 이르게 하나가 되었어.”

“그리고 황제와 술탄의 전쟁이 종식되어 이제 문명 사회를 살라 먹던 내분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지. 그렇지?”

“……그래. 이대로 오십 년이 더 흘러, ‘그 시절’이 도래한다 하더라도 문명 사회는 견딜 수 있어.”

그뿐이랴.

시간이 이대로 무사히 흘러가서 페이자쉬가 한창 활동하던 그 시간대가 도래한다면.

페르난데스는 자신이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전생의 악적들, 아직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악당들과 사교도들을 모조리 찾아낼 자신이.

그들을 하나씩 암살하고, 독살하고, 형틀에 걸어 올리리라. 역천이 시작되었을 때, 이 문명 사회엔 어떤 일말의 타락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운명은 없다.

그건 믿음 그 이상의 진실이었다. 이미 증명했던 바이며, 지금 와서는 증명 이상의 신념이었다. 세계가 멸망할 운명으로 만들어졌다면. 만신전의 총력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결국 멸망할 운명이었다면.

그보다 비참한 일이 더 있으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하수의 짓이지만, 비관을 과포장해 지레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하수보다 못한 머저리들의 행태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낙담하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해 보았으므로.

“정보 반사라는 것은 확정된 미래를 읽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미래의 사건을 환시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도 아니지. 너는 정보 해석에 실패했다.”

“그렇게 믿고 싶나? 물론 네 말이 맞아. 미래를 본다는 건…….”

-딱!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불똥이 타닥, 하고 튀어 오르며 새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처럼. 무작위하게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고 그 형태를 추측하는 행동에 불과해. 본산 세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정보들은 비교적 정확했지만, 기본적으로 불특정한 미래를 읽어 내는 것은 그런 식이지.”

“그러니. 해석에 실패했거나, 네 능력이 완전치 못한 것이다.”

“하지만…… 페이자쉬. 나는 봤네.”

-화르륵!

그들이 서 있던 공간이 일렁인다. 발아래 융단처럼 내려 깔린 깊고 어두운 밤하늘. 그리고 머리 위에 흩어진 별무리와 일렁이는 파도의 환상이.

격랑이 일고, 거꾸로 선 용오름이 사방을 찢어발겼다. 별빛, 수평선, 구름과 파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얽히며 검게, 더 어둡고 서늘하게 뒤엉켜 갔다.

그 사이에서, 영생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래를 멸망이라, 세계의 운명을 종말이라 칭하지 않겠다. 예언과 정보 반사의 차이라 하니……. 그래. 보다 관념적으로 표현해 주지. 페이자쉬, 세상은 고갈될 것이다. 가능성과 희망이 서서히 고갈되어 가는구나. 이번 세계에도 이는 변치 않을 것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의 두 눈에서 분노가, 그리고 절박함이 흐르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의 말을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는, 적어도 본산 세계를 알고 있다. 그건 그가 확실한 정보 반사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정보 반사체들은 자살한다. 자신의 미래, 세계의 운명, 예정된 종말과 비참한 현실에 절망하며. 심지어 영생자라면? 수명의 한계가 없는 탓에, 다가오는 종말의 시간을 매일 아침마다 헤아리고, 매일 저녁마다 지나간 나날들을 한탄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결하지 않았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미쳤거나, 다른 희망이 있거나. 전생 시절의 영생자 오르키스가 가진 다른 이름은 광란의 오르키스였다. 그가 단번에 저 노인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다.

너무나 침착하다. 너무나 이성적이다. 광기에 물들어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그 영역 안으로 다가오는 모든 존재들을 적대하던 그 시절의 그와는 전혀 다른 행태다.

그러니, 희망이 있다는 뜻이렷다. 페르난데스는 그것이 필요했다. 영생하는 정보 반사체마저 광기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한 줄기의 희망이.

“천상 전쟁 시절의 유물을 찾아라. 권능제 카를루스의 까마귀관. 그것을 찾아.”

“……그게 무슨 도움이 되지?”

페르난데스는 노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권능제 카를루스. 지금의 제국을 만들어낸 샤를 대제를 의미하는 신화적 인물이다.

천상 전쟁 시절, 대륙 문명에서 인류가 가장 약한 종족에 불과하고, 드워프와 엘프가 세계를 활보하며 용과 악마, 그리고 천상의 신들이 투쟁하던 그 시대.

샤를 대제는 그 치열한 시대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가던 대륙 중앙의 왕국들을 규합하고 선제후 의회제를 만들어 제국의 기반을 다진 위대한 황제의 이름이다.

지금에 이르러 반쯤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지만, 페르난데스가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샤를 대제의 까마귀관?’

-그런 걸 쓴 놈을 못 봤는데.

이게 문제였다. 페르난데스의 정보는 거의 대부분 전적으로 전생 시절의 경험에 기인한다. 활동기 이전의 시기인 탓에 지금 시대에 정보 오차가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전생 시절에 활동하지 않았던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비운의 영웅’이라거나, 그의 주 활동 시점을 벗어난 인물과 유적에 대한 정보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샤를 대제라니. 그 후예를 자청하는 자는 전생 시절 카르벨리에 여제의 손에 죽었을 것이고, 샤를의 유물이랍시고 전장에 나왔던 것들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문명이 박살 나는 시점까지 등장하지 않은 유물은, 존재하지 않거나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했다. 그 시대 선신 만신전의 총력이 문명 사회에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그들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를 다 쓰며 악마의 군세를 막아 낼 수 있었다.

“본산 세계의 정보를 보았다면 알 텐데. 그런 유물은 없다.”

“아니, 이건 그쪽 세상의 내가 전한 정보가 아니야.”

“……그럼?”

“이 세계의 미래를 보던 과정에서, 아주 우연히 접촉한 정보야. 다시 하라 해도 못할 것 같을 정도로 짧은 순간에 찾아낸 잔향이었지.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내게 속삭였다.”

샤를 대제의 까마귀관을 찾아라.

“이건 전생의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정보다. 그 당시의 나는 다른 세계의 나와 교신하는 데에 몰두했었으니까.”

“우연히 알아낸, 출처도 정체도 모를 존재의 잔향을 믿고 추적하라? 어디에 있는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를 유물을?”

“그러니까 그게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거다. 다른 가능성들은 모두 멸망으로 이어져 있었으니. 선택은 너의 몫이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후회 속에 잠겨 죽든, 최소한 발버둥이라도 쳐 보든. 네가 뜻하는 대로 행하라. 어차피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회백색, 혼탁하게 뜬 눈 사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짧은 시선 교환 끝에,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알았고, 이제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에게 손을 뻗었다.

“……응?”

“전생의 두 미치광이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으니. 퍽 우습지 않나, 오르키스?”

오르키스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뻗어 나온 페르난데스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당혹스럽다는 듯 페르난데스의 눈과 손을 훑어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내가 너를 무어라 부르면 좋겠나?”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라. 평범하고 소박한 이름이로군. 인간의 이름이야.”

두 사람은 짧게 악수한 이후 맞잡은 손을 떼어냈다. 그것으로 환각이 끝났다. 세상을 덮을 듯 드리워진 장막이 흩어지며, 전과 같은 응접실이 나타났다.

응접실의 다과상, 오르키스와 페르난데스, 그리고 르네의 자세까지. 완전히 동일한 상태로 돌아왔다. 정신체의 대화란 이토록 짧은 순간에도 오랜 대화를 공유할 수 있는 법이므로. 페르난데스는 아무런 내색 없이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오르키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경계하더니, 이제야 같은 배를 탄 기분이로군. 하여간 철저한 놈이라니까. 오르키스는 짧게 소회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 갑자기 왜 그래요?”

르네는 갑작스레 어떤 교감을 나누는 것처럼 구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오르키스가 킬킬거리고,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곧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는가?”

“시간이 적으니.”

“이 순간부터 아세아스 의회는 팔텐노이아에 뿌리를 내릴 걸세. 필요하다면 이용하시게나.”

“그럴 생각이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며 로브를 걸치자, 르네가 당황하며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저희 지금 이제 막 앉았는데?”

“휴식은 충분했소. 돌아가면 그대도 이제 더 이상 쉬고만 있지는 못할 테니.”

“언제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면서요?”

“상황이 바뀌었소.”

페르난데스는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를 쫓아 일어서려던 르네는 잠시 발을 멈추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호의에 감사해요, 대의장. 언제고 카르벨리에 저택을 찾아 주세요. 호의로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하하! 그건 진귀한 광경이겠군그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하하. 다음에 만나게 될 때는 이 늙은이의 작은 호의의 배를 돌려받을 것이니 각오해 두시오.”

오르키스는 껄껄 웃으며 떠나는 르네를 일별했다. 방문자가 모두 떠나간 이후, 텅 빈 응접실의 소파에 길게 몸을 묻고 앉아서도 그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하하. 정치력은 천성이었군.”

다음에 자신을 다시 찾아 달라. 아세아스 의회가 갖는 사회적 인식을 고려할 때, 그건 일종의 커넥션을 갖추고 싶다는 은근한 권유였다. 그는 픽 웃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 페르난데스. 모든 미래에서 네가 언제나 후회했다는 것은…… 네 천성을 방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필멸자들이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라면, 그때에도 변치 않는 마음이 그자의 천성이 아니겠는가. 오르키스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희망은 절망의 가장 밑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으로 향하는 길엔 절망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늙은 망령의 회개 앞에서 생각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그의 구원이 아니겠는가. 베이타서스의 계획이 어떤 것이었든, 그의 목적과 의중이 어떤 것이었든 상관없이.

* * *

“갑자기 바뀐 상황이 뭔데요? 그러게 일손이 부족하면 혼자 다 하려 하지 말고 전략실을 짜자고 했잖아요.”

“일이 많다는 뜻이 꼭 정치 공작이 급하다는 의미는 아니오.”

“저도…… 저도 그런 뜻으로만 말한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뭔데요!”

“일단 돌아가서 서류 한 장을 더 써야겠소.”

“……서류?”

“이혼 서류요. 그동안 즐거웠소.”

그의 말에 르네는 막 오르려던 등자를 헛밟고 말의 옆구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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