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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80화 (281/388)

280. 매가 날다 (1)

“개새끼.”

“어차피 필요에 의한 관계였을 뿐이오. 교황과의 커넥션을 위해 만들어 둔 서류상 직위일 뿐이었고…….”

“나쁜…… 나쁜 새끼…….”

르네는 가는 내내 울먹거렸다. 페르난데스는 드물게도 당황하며 애써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뭐가 되었든 그대의 제위 승계는 변치 않을 것이오. 그대에게도, 내게도, 그리고 교황에게도 지금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테니까.”

“지금 그런 말이 도움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음.”

-하하하하! 으하하하하!

귀가 찢어져라 웃음을 터트리는 페이자쉬를 애써 무시하며, 페르난데스는 말고삐를 쥔 채로 침묵했다. 애정이라. 정분이 들 만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적도, 그럴 시간도 없다 여겼었다.

팔텐노이아의 관도를 거닐며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렇게 팔텐노이아의 관문이 어렴풋이 다가올 때, 르네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죠?”

“……뭐가 말이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비참하니까, 알면서 되묻지 말아요. 왜죠? 그 여자들 때문인가요? 왜 그렇게 선을 긋고 사는 거예요?”

르네의 말이 제자리에 멈췄다. 페르난데스도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단단하게 고삐를 움켜쥐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카르벨리에 공작.”

“르네 필리파. 제 이름은 르네 필리파예요.”

“……르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르네의 붉은 머리칼이 석양을 머금고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의도가 있는 관계는 차가워야 하오.”

“……당신은 몰라도 나는……!”

“아니.”

그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은 대승적으로 최악의 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지를 남기는 것은, 그녀의 호의를 이용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전략적 판단이라 하더라도, 그녀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악의 수가 될 터였다.

“당신이 바라본 것은 내가 아니오.”

전후의 기아와 빈곤으로 고사하던 영지를 구한 이방인.

강대한 무력과 전략, 임기응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권력을 잃고 몰락하던 카르벨리에 공작가를 단 반년 안에 일으켜 세워 제국 최강의 군벌로 만들어 낸 책략가.

죽은 아비의 복수를 대행하여, 타락한 황제를 징치한 고위 사제.

제국 전역에, 아니 어쩌면 동부에서 대륙 중앙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권들에 하나 이상의 연줄을 갖춘 큰 손.

르네가 반한 사내는, 그런 조건들이 모여 만들어 낸 환상이다. 그리고 그건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보이기 위해 연출한 표면에 불과했다.

“그대는 환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오. 한때의 열병이나 한순간의 꿈결과 같은 것들이지. 바르지 않소. 그대가 호감을 표한 그 사내는 내일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고, 그다음엔 또다른 형상을 취할 수도 있소. 신기루를 좇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지만, 위정자는 그 속에서도 나침반을 갖추고 있어야 하오.”

황제는 심장이 없다. 지금은 사토 속에 파묻혔지만, 한때 황궁의 입구를 지나 어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지난 역대 황제들의 청동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화려한 보석과 장신구로 치장된 고대의 황제들. 의상도, 얼굴도, 체형도 모두 다른 그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 모든 흉상엔 심장이 부조되어 있지 않다. 뻥 뚫린 가슴만 있을 뿐.

황제의 저울엔 감성이 들어갈 수 없다. 무릇 지도자의 저울이란 그런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비센테 왕의 의로움을 싫어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기사일 뿐, 진정코 위대한 왕이 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귀족 사회의 정치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냉혈동물이다. 그 위를 군림해야 하는 황제에겐 백성의 슬픔을 들을 귀와, 백성의 눈물을 바라볼 눈이 필요할 뿐. 백성의 슬픔에 뜨겁게 맥박 칠 심장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대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까닭은 국서 자리가 가져올 다른 권한들을 탐한 것에 가깝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지지해 줄 더 강력한 무기를 원했던 것에 지나지 않소. 그대 또한, 나와의 혼인으로 굳어질 베이타서스 교회의 권위가 혼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없었어요.”

르네는 고개를 들어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얼룩져 반짝이고 있었다.

“전혀, 없었어요. 당신의 말대로, 당신을 좋아할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겠죠. 영지를 구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했고, 황제를 죽였으며, 제가 알지 못하는 권력과 권위를 세계에 인정받은 사내니까. 하지만 그만큼, 냉정하게 바라볼 때 제가 당신을 경계해야 할 수많은 이유들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사자의 갈기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고삐를 채울 수 없는 사자를 곁에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에게 매혹되는 것은 머릿속에 꽃밭만 펼쳐진 귀족 영애들에게나 통용될 말이었다. 르네는 어리석지 않다. 그녀는 어리석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스스로 견뎌 내며 살아왔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고? 고작 반년이에요. 당신과 직접 마주한 것은 그보다 짧죠. 그런 당신에게, 능력과 힘을 충분히 갖춘 당신에게 국서 자리가 갖는 수많은 권력들을 떠넘길 정도로 제가 멍청한 아낙처럼 보였나요?”

겉으로 보인 페르난데스의 능력만 간추려도, 그에게 충분한 시간과 권력이 주어진다면 황실 전복은 물론이고 제국을 제 손 안에 쥐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르네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페르난데스와의 혼사를 멈출 수 없었다.

“리뷔에에서 보냈던 그날 밤. 당신이 날 구하고자 무너지는 성벽을 넘어 다가왔던 날. 잠에 든 당신의 머리맡을 지키던 그 순간이, 제가 당신을 본 유일한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그거면, 당신에게 빠져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위기 속에서 나타난 기사에게 매혹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닥쳐요.”

르네의 일갈에 페르난데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동안 씨근거리며 그를 노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말을 몰아 나갔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신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젠 더 이상 찾기 어렵군요. 이혼 서류? 웃긴 이야기죠. 아직 혼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됐어요, 그런 종잇조각 따윈 필요하지 않아요.”

“……나는 떠날 것이오.”

“떠나라죠! 떠나 버리라죠!”

르네는 따라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관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제가 다시 당신을 잡기 위해 나타날 때에도 절 거부하기 위해서라면, 제국을 세우셔야 할 겁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경. 이건 황제가 그대에게 내리는 마지막 호의 어린 권고예요.”

르네는 점점 더 빠르게 말을 몰아 달렸다. 바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또렷하게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듯했다.

젊음이구나.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픽 웃었다. 사고관이 점점 낡아 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젊음이라니. 자기 자신도 아직 스물 남짓이 아닌가.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인지, 르네는 흥 하며 박차를 힘껏 내려 찼다. 애꿎은 말이 긴 투레질을 하며 달렸다.

석양이 하늘 아래로 자락을 감추는 저녁이었다.

* * *

그날 밤, 페르난데스는 쌓여 있던 보고서를 카르벨리에 공작가의 실무진에게 인계하는 시간을 보낸 이후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피로가 몸을 덮쳤다. 인간은커녕, 명백히 디모니카의 육체 한계를 넘어서는 과로의 나날들이었다. 실제로 그가 최대한 업무를 정리해 넘길 때 실무진들은 애써 짓던 웃음마저 잃어버린 채 손을 덜덜 떨었다.

“후…….”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옷가지를 벗어 방의 한켠에 걸었다. 달빛이 어스름히 창틀을 넘어 흐르는 새벽, 그는 침대를 향해 걷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둔해졌구나. 페르난데스.”

창틀 그림자 아래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금색 밀밭이 펼쳐지는 듯 부드러운 머리칼이 열린 창문 너머 바람결에 흔들렸다. 아벨이었다.

“어쩐 일이시오?”

“내가 너를 찾는 데에 이유가 필요했느냐?”

“시간이 늦었소.”

“공녀와 함께하는 외출이 즐겁지는 않았나 보더구나. 이야기를 늦게 들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아벨은 천천히 페르난데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즐거운 소식을 들은 사람의 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정심을 품은 것에 가까웠다.

“아세아스 의회의 의장을 만났소. 카르벨리에 공작과 의장 간의 정치적 밀월 관계를 귀족 사회에 알리고자 했었지.”

“그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느냐?”

속일 생각도 없었지만, 속이기도 쉽지 않은 사람이다. 페르난데스는 아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가지의 단편적인 정보로도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의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유추하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한다더군.”

“……뭐?”

“우리가 해 온 일들이 헛된 것인지, 혹은 우리가 이뤄 낸 것들이 어떤 종류의 파장을 불러온 것인지. 또 어쩌면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운명일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지만, 그가 보는 미래엔 종말만 존재한다 하더군.”

“예언자였더냐?”

“일종의.”

페르난데스의 말이 이어졌다. 전생을 볼 수 있는 영생자. 오르키스가 말했던 것들.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몰락을 향해 내달리는 현실까지.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주체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오. 종말과 몰락. 악마에 의한 세계의 파멸이 코앞에 닥쳤다면. 그걸 끝내 피하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그 주체가 되어야 하오. 아무것도 없는 물질 세계에 악마가 저 스스로 도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전생에도 그랬다. 대악마는 제각기 자신의 부관으로 필멸자들을 두고 있었다. 이는 일종의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 물질 세계로 대악마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격과 지혜를 갖춘 필멸자가 필요한 법이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랬듯, 누군가는 멸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설령 문명 사회가 저 스스로 무너지는 중이라 하더라도, 멸망을 향한 초침에 방점을 찍어 줄 인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나?

“예상되는 인물이 있기는 하더냐?”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오. 전생 시절 내 휘하에 있던 사교도들 중에, 지금 시대에 활동하고 있던 자들은 대부분 죽이거나 억류했소.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을 수는 있지만, 개중에 인류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존재는 없소.”

굳이 잔챙이라 부르지는 않겠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개인의 힘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는 없다. 일정 이상의 조직력을 갖춘 단체의 힘이라면 혹 모르지만, 그런 집단이 활동을 시작했다면 페르난데스의 감시망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외통수에 막힌 기분이 들었다. 샤를 대공의 까마귀관. 유일한 힌트가 그것이겠지만…… 전생에도 없던 유물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욱이 그 아이의 곁을 떠나선 안 되는 것 아니었느냐? 페르난데스. 제국 시조의 유물을 찾는 데에 황제의 권력보다 좋은 도구가 있을 수 있느냐?”

“황제의 권력을 통해 종말을 막아낼 유물을 찾을 수 있었다면, 전생의 카르벨리에 여제는 이미 그걸 사용했겠지. 전생과 최대한 같은 조건으로 제국을 온존시켰지만, 그것이 오히려 발목을 묶은 셈이오.”

전생에 불가능했다면 이번에도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황제의 권력이 가진 한계와 최선을 이미 알고 있는 그에게, 제국 국서는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떠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느냐?”

“전생에 없던 것을 찾기 위해선, 전생에 없던 이들의 힘을 빌려야 하오.”

“……전생에 없던……?”

“엘프들.”

이것이 페르난데스가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본산 세계의 엘프들은 인간에게 비우호적인 세력이었고, 종말이 시작된 순간 자취를 감춘 미지의 족속들이었다.

본산 세계의 엘프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하지도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생에 없던 자들의 조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력을, 거의 대가 없이 제공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가자는 뜻이로구나?”

“함께하시겠소?”

“네가 혼자 또 다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 언제나처럼, 네가 이끌거라.”

내가 따르겠다. 아벨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잠시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 아이에겐 너무 큰 상처를 준 모양이더구나.”

“포기하지 않을 거라더군.”

“하하…… 아니, 포기해야 할 거다.”

아벨은 순식간에 정색하며 말했다.

용은 영역 의식이 강한 동물이었다.

제 2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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