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매가 날다 (4)
함께 시장 골목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키르하스는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하다가 기어코 페르난데스에게 한마디 듣고 난 다음에야 침착해졌다.
“키르하스.”
“네! 은공!”
“주위에 눈이 많다.”
“괜찮습니다! 제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
“다들 알고 있다. 여긴 아이언사이드의 요람이야.”
“어……!”
대족장의 권위를 실시간으로 깎아내리던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애써 근엄함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담뱃대를 쥐려다가,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손을 뺐다.
“피워도 된다.”
“저는…… 금연했어요!”
“건강을 위해선 좋은 선택이군.”
물론 그녀에게, 전생엔 그렇게 애연가였으면서도 천수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약초나 허브 태우는 냄새에 익숙한 그였지만, 디모니카 특유의 예민한 후각에 담배 연기는 제법 자극적이기도 했고.
키르하스는 이따금씩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그 방향을 매섭게 쏘아보며 주위 사람들을 물렸다. 그녀 특유의 분위기와 존재감 탓에,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낸 이들은 가장 거친 선원들이라 할지라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렇게 만들어진 혼잡 속의 한산을 즐기며,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가 건네는 시장 먹거리들을 손에 나눠 잡고는 함께 걸었다.
“여기 꼬치 요리가 제법입니다!”
“그렇구나.”
“입에 맞으시나요? 그럼 저기 저 음료……. 저게 뭘까요? 은공, 혹시 저게 뭔지 아세요?”
“아므르 차로구나. 키르자트 음료다.”
“맛……있나요?”
“글쎄, 가서 먹어 보자꾸나.”
그의 말에 키르하스는 재빨리 가판대로 달려 나갔다. 그사이, 페르난데스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시장을 훑었다. 시장 구석구석에서 아주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번창한 항구도시 특유의 먹거리 장터였다. 세계 각지의 식재들이 넘쳐나고, 시민들 대부분은 살이 올라 부유했으며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따금 얼굴을 붉히며 언쟁하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폭력 사태까지 이어질 정도로 격렬하지는 않았다.
항구치고는 특이한 경우다.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항구의 상인들은 내륙 상인보다 험한 경우가 많다. 뱃사람들과 교역 상인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며, 이는 거의 필연적으로 무력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시의 시민들은 대단히 온순한 축에 속했다. 이런 풍조가 암시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강력한 통제.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치안 강화. 단순히 군사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완벽한 수준의 통제력이다.
아이언사이드의 작품일 것이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이언사이드의 존재를 알고 있다. 어딘가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암행 첩보원들의 존재가 이들에게 강제된 시민 의식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상적이군.’
페르난데스는 짧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상적인 도시다. 본디 자유는 필연적으로 방종과 부패를 낳기 마련이며, 부패한 도시 아래엔 반드시 구더기들이 들끓게 된다. 이단이나 사교도들과 같은.
로베르의 철저한 자기 관리는 도시의 형태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사회 실험이었다. 강력한 통제와 감시 아래에서도 시민들이 자신의 감시자, 즉 군주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
‘잔인하고, 냉정하고.’
-현명하군.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시 관람은 어떠셨소?”
“인상 깊더군.”
“칭찬이겠지?”
“물론.”
그는 고개를 돌려 다가온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 멀리에서 키르하스가 음료 두 잔을 들고 오다가, 그들을 발견한 뒤 잠시 당황하고는 다시 상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가장 뛰어난 군주는 백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왕이 아니지. 백성들에게 행복하다는 착각을 심어 주는 왕이다.”
“내 숙부께서 해 주셨던 말과 비슷하군. 하지만 숙부께서는 거기에 한마디를 더하셨지.”
“그게 뭐였나?”
“절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소수의 불행을 은폐하라고.”
“자네 숙부께서 아이언사이드셨나?”
“숙부의 자리를 내가 이어받은 걸세.”
로베르는 후, 하고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들을 힐끔거리던 시민들이 일제히 그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이.
이곳의 시민들은 자신의 군주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 자신의 군주를 두려워한다. 통치자의 권위는 관용과 공포의 균형에서 비롯되므로, 로베르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에 가까웠다.
“조금 더 조용하고, 편한 곳으로 가겠소?”
“그러지. 키르하스!”
“네! 앗, 넵! 잠시만요! 네, 네. 은공!”
키르하스는 음료 상인에게서 거의 빼앗다시피 잔 두 개를 더 챙기고서야 페르난데스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숨을 짧게 고르고는 음료가 담긴 네 잔을 나눠 주었다.
“이건 은공 거……. 이건 당신 겁니다. 트레뮐레 궁중백. 그리고 이건…… 당신 거예요.”
“호의에 감사하오, 레이디.”
로베르의 곁에 서 있던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귀족적인 예법이었지만, 그 한마디로 이 청년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가 로베르와 동행했음에도 키르하스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그가 크게 중요한 인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근방에 생선 요리를 아주 잘하는 주점이 있소. 대족장께서도 만족하실 거요.”
“앗. 앗. 넵. 아니, 그래!”
더 이상 정체를 숨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는지, 키르하스는 근엄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시장 골목의 저급한 가게에도 관심이 있으신 줄 몰랐군.”
“위정자의 덕목 아니겠소?”
로베르는 싱긋 웃으며 앞장서 걸었다. 위정자의 덕목이라. 맞는 말이다. 시장 골목의 작은 주점조차도 제 수족들의 위장 영업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 시민들의 여론 조작에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니까.
* * *
주점 안은 복작거렸다. 적어도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
대낮부터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떠들던 선원들, 음울한 표정의 상인들, 출신을 파악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는 외국인들. 그들 모두가 로베르의 등장과 동시에 침묵했다.
로베르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나서 걸었다. 그들은 별다른 안내 없이 주점의 가장 깊숙한 자리로 향해 앉았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자리였다.
“생선 요리로.”
“예, 주군.”
그가 조용히 속삭이자 주방 몸종으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페르난데스의 시선에 로베르는 픽 웃었다.
“맞소. 여긴 내 자리요. 직접 모시게 되어 영광이군. 이곳이 제국 아이언사이드. 그레이서클의 본부요.”
“외부인에게 알려도 좋은 정보인가?”
“기실, 정보기관 중에 이 주점의 정체를 모르는 자들 따윈 없소.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도모할 수 없으니 방관하는 게지.”
로베르의 미소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당황한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대족장께서 바라신다면 수인 호족 연합에 첩보 인력 양성 기술 제휴를 해드릴 수도 있소만?”
“필요 없소.”
“이거 사람을 너무 곱게 키우시는군. 세르너드 경.”
“말을 꺼낼 땐 조심성을 기르는 게 좋겠군. 트레뮐레 궁중백.”
페르난데스의 싸늘한 경고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주점 로비에 앉아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아이언사이드들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로베르는 손을 내저어 주위의 눈을 돌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내 사과드리지, 세르너드 경. 피차 돌려 말하는 것이 질릴 즘인데,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 좋겠소?”
“그러시오.”
제국 귀족 특유의 은유와 심계는 충분히 나누었다.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베르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던 키르자트 상인에게 손을 뻗었다. 상인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서류 봉투를 건넸다.
“지난번 그대가 내게 ‘부탁’했던 것들에 대한 결과요.”
“……그게 벌써?”
“아이언사이드가 모르는 정보는 세상에 없는 정보뿐이고, 아이언사이드가 죽이지 못한 인물은 죽일 필요 없는 인물뿐이오.”
시원하게 웃는 로베르의 말을 흘려들으며 페르난데스는 서류 봉투를 뜯었다. 페르난데스 또한 알고 있는 간단한 암호 전문이었다. 그러나 내용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가 로베르에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머나먼 서남부, 끝없는 평야. 백국마족의 영토에서 아마르 씨족을 찾고 10살이 되지 않은 어린 사내아이 하나를 죽여라.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들 중 가장 위험한 존재. 카라드스카르를 제거하기 위한 한 수였다. 백국마족의 영토는 거의 제국 전역의 규모에 비견되리만큼 드넓었고, 그 땅 위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것은 페르난데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언사이드라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저들의 정보망은 적성국가인 키르자트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으므로. 백국마족의 주 교역 대상이 키르자트라는 것을 고려할 때 선을 대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믿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아마르 씨족의 투르게진이라는 이름은 단 한 사람뿐이었거든.”
아마르 투르게진. 훗날 카라드스카르라 불리는 위대한 카간. 무너진 씨족을 규합하고 백국마족의 수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해 예케 테타이 울루스(대 테타이 제국)라는 통일 국가를 건국한 일대의 영걸이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늦은 시기였다면 아마르 씨족은 본 역사대로 몰락했으리라. 그렇게 된다면 유년기의 투르게진을 잡아 죽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당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해 뒤로 미뤄 둔 작전 중 하나였으나, 기왕 제국 판도를 확보하고 아이언사이드를 활용할 수 있는 지금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기회였다.
그러나……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리라 생각해서 맡긴 일이었지만, 정말 해냈다는 정보를 얻은 지금도 그는 이 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었다.
‘차라리 다리안이 암살되었다는 이야길 들으면 그게 더 믿어지겠는데.’
다리안 쉬라이크는 카라드스카르가 한창 활동하던 당시에도 제국 최강자였으며, 여전히 황제의 눈이었다. 당연히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 시절 그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전성기를 한참 지난 황혼기의 일이었지만, 제국 최강자가 암살에 실패했던 그 끔찍한 악몽을 이토록 간단히 처리했다니.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이게 언제요?”
“암살 시점은 세 달 전이고, 보고서는 열흘 전에 도착했소. 그대가 귀르로 향했다는 정보를 얻고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렇다면 암살은 실패했다고 봐야 하오.”
“……뭐요?”
세 달 전이라면 이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가정해야 했다. 여전히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비록 전생의 카라드스카르가 세계를 멸망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칠흑의 에리크와 대카간 카라드스카르의 침공이 종말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문명 사회는 그 저력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는 것에 성공했다.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과 에리크의 해상 전쟁이 개변된 역사선 속에서 사라졌다면, 지금의 문명을 단번에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가 달리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전엔 설득할 수 없는 정보였다. 로베르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오? 아이언사이드의 변용술은 거의 완벽에 가깝소. 그 어느 집단에라도 침투하지 못할 것 같소? 그리고 대체 그 꼬마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경계하는 거요? 백국마족 놈들의 머릿수가 제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놈들은 고작해야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오.”
“다섯 살만 넘어도 말 위에 몸을 싣고, 열 살이 되면 전쟁 통에 구르고 구른 기사보다 뛰어난 기마술을 익히는 놈들이 수만 명이며, 유목민이란 것은 곧 전시에 머릿수를 고스란히 군사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뜻이오. 당연히 경계해야지.”
“수인들과는 다르오. 놈들은 단 한 번도 국가라는 것을 이룬 적이 없는 것들이오. 태생적으로 두 개 이상의 씨족들이 손을 잡은 적이 없는 야만인들이란 말이오.”
“그러니 더욱 경계해야 하오. 수인들의 저력은 예측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소. 통일 국가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으니. 그러나 백국마족은…… 테타이족들은 그 저력을 예상할 수 없소. 만에 하나 씨족들을 통일해 진군을 시작한다 가정한다면, 그들의 병력, 전술, 규모를 예상할 지표가 단 하나도 없소.”
페르난데스의 말에 로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페르난데스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이젠 다만 명령할 뿐이었다.
“암살에 대한 요청은 잊으시오. 그대에게 했던 ‘부탁’은 반드시 ‘호의’로 보답하겠소. 하지만 다른 부탁을 하나 더 하지. 백국마족의 영토에 정기적으로 정보를 수급할 수 있는 창구를 설치하시오. 놈들의 정세를 적어도 보름 단위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오.”
“……제국 내부에 투사해야 할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오만.”
“그건 내 쪽에서 할 수 있을 것 같군.”
“팔텐노이아에서 규합한 그 잡배들이 예상외로 유능하기라도 한가 보오?”
“적어도 동부에서 황야에 이르는 범위라면. 그렇소.”
“……뭐 좋소. 그렇다면 이건 일종의 정보 거래가 되겠군. 그건 상관없소. 자세한 협의 내용은 그대의 수하들에게 따로 보내도록 하지. 이제 그대의 ‘호의’에 대해 논할 필요가 있겠군.”
로베르가 그렇게 말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바로 옆에서 오고 가는 대화에 겁을 먹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해 드리지. 바레스 공작 장 알브레. 라 메르티옹의 공왕이며 제국의 적법한 선제후요.”
“장…… 장 알브레 드 바레스다……. 입니다……. 이오. 음. 흠. 잘 부탁드리겠소!”
페르난데스는 잔뜩 얼어붙은 청년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비센테 왕의 군사들을 물러 달라는 말이겠군.”
“……!!”
페르난데스의 말에 장 알브레가 기겁했다. 고작 자신을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목적까지 파악한 것이다.
“뻔하지 않소. 라 메르티옹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 동부 왕국의 데인이고. 이 시점에서 굳이 내게 그대를 소개했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지. 트레뮐레 궁중백은 내가 데인 왕가의 원탁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워, 워, 원탁 기사셨습니까?”
데인 왕국의 원탁 기사라는 것을 굳이 제국식으로 해석하자면 제국 궁중 최고 원로회의 고위 귀족이란 의미와도 같다. 제국 의회제와는 다소 결이 다른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는 왕국이니만큼, 원탁 기사가 갖는 권위는 보다 더 높을 수도 있겠고.
장 알브레는 자세를 바로 고치고는 간곡하게 말했다.
“라 메르티옹은 제 고향이자 천년 제국의 오랜 도시였으며 제국 내륙 교역로의 비단길에 속하는 귀중한 전략 요충지입니다. 또한…….”
“역사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군. 데인 왕가엔 파발을 보내겠소.”
“……그렇게 간단하게……?”
“비센테 왕에게도 ‘호의’를 보였던 적 있으니,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거부할 수는 없을 거요.”
페르난데스의 말에 장 알브레는 의구심 섞인 얼굴로 그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로베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 말하지 않았나. 어렵지 않을 거라고.”
“대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저자를 믿어도 되겠나?”
“자네가 ‘저자’라고 부른 저 남자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실각한 비센테 왕을 이끌고 정국을 도모해 그에게 직접 왕위를 선물한 대가로 원탁 기사의 직책을 얻어낸 인물이야. 내 말하지 않았나. ‘언터처블’이라고.”
그의 말에 장 알브레는 침을 꿀꺽 삼켰다. 페르난데스는 뚱한 표정으로 로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터처블?”
“그대의 새 별명이라오.”
“……지난번 별명만큼 별론데.”
“원래 별칭이라는 것은 업적에 따라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소?”
“아이언사이드는 이름 짓는 감각을 좀 키워 두는 편이 나을 것 같군.”
킹 메이커에 이어서 언터처블이라니. 페르난데스는 그 소름 끼치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페이자쉬가 작게 속삭였다.
-페르난데스의 역전.
‘닥쳐.’
-페르난데스의 유도창.
‘그건 안 쓰기로 했잖아.’
-페르난데스의 우기기.
‘아, 제발.’
페이자쉬가 킬킬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페르난데스는 로베르를 향해 말했다.
“별명은 어쨌든 좋소. 다음 거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지.”
“기다리고 있었소. 말해 보시오.”
“엘프를 수배해 주시오. 엘프 함대를.”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만. 어느 왕가가 필요하오?”
“가이메른 왕가. 내 이름을 말하고 접견을 요청하면 반드시 접촉해 올 것이오.”
“인퍼머르의 인맥인가 보오. 좋소.”
국가와 종족을 초월한 대화를 들으며 장 알브레는 점점 더 겁에 질려 갔다. 본디 배신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자들을 배신해야 한다면 차라리 자결하는 편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애써 시선을 돌리다가, 테이블 한 귀퉁이에서 생선을 조각 내고 있는 수인족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건 내 거예요.”
“…….”
“먹고 싶으면 하나 더 시키세요.”
“알, 알겠소.”
이 복마전 같은 대화 속에서 여상하게 식사를 계속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장 알브레는 문득 도망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