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84화 (285/388)

284. 매가 날다 (5)

초원의 시간은 바람보다 느리게 흐른다. 이따금 몰아닥쳐 온 게르를 뒤집어 놓는 광풍과는 달리, 때때로 시간은 손에 잡힐 듯 느긋하게,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으며 흐른다.

스스로를 테타이, 혹은 테르과이의 자손들이라 부르는 자들 사이에 오랜 농담이 있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릴 때엔 이따금 먼 옛날 죽은 선조들과 함께하기도 한다고. 미신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테타이들 또한 그 말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지만.

그런 농담에라도 매달려야 했던 한 사내가 지금 초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사내의 곁으로 한 무리의 기마가 바싹 따라붙는다. 선두의 사내는 흙먼지를 뽀얗게 일어내며 다가와 핏대 오른 목으로 거칠게 외쳤다.

“이게 대체 며칠째입니까!”

“…….”

움푹 꺼져 초췌한 눈으로 그를 힐끗 바라본 중년의 사내가 아무 말 없이 고삐를 바싹 당겼다. 말은 하얀 거품을 일어내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유순하게 그의 손길에 따라 달려 나갔다.

청년이 이를 악다물며 외쳤다.

“그만하십시오! 그 미친 늙은이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군!”

“…….”

“그만! 하십시오! 제발!”

-히이이잉!

그의 곁에 바싹 따라와 소리치던 청년이 말의 고삐를 거의 억지로 가로채다시피 빼앗았다. 오랜 질주로 탈력감에 시달리던 사내는 힘없이 고삐를 빼앗기고 말았다.

갑작스런 제동에 말이 겁을 먹고 허리를 추켜세웠다. 그 결에 중년 사내가 볼품없이 바닥을 굴렀다. 흙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사내가 맥없이 쿨럭이고 있자, 엉겁결에 달려 나갔던 청년이 황급히 뛰어와 말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주군! 제기랄! 괜찮으십니까?”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쿨럭거렸다. 청년은 머리를 깊게 숙이고는 곧장 칼을 뽑아 바닥에 박았다. 목을 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내는 대답 없이 비척거리며 일어서서 놀란 말의 뒷목을 툭툭 칠 뿐이었다.

“지금 게르 꼴이 어떤지 아십니까? 주군께서 그 늙은 미치광이 말에 홀려 떠도는 동안 우리 씨족은 쫓겨 다니고 있습니다! 이대로 우리 모두가 죽고 난 다음에도 그 빌어먹을 무당 말을 따를 셈입니까?”

“타카이는…… 타카이는 어딨지?”

“죽었습니다! 제기랄! 죽었다고요! 그게 벌써 닷새 전입니다!”

“죽었다고…….”

사내는 진정된 말의 등자 위에 올라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메마른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흙투성이가 된 그의 옷을 바라보던 청년이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그래서…… 투르게진은 나타났습니까? 일주일을 내달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럼 그 늙은이가 노망이 난 게지요!”

“내가 부족한 탓이었겠지.”

“제발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주군. 당장 게르로 돌아가 한잔 걸치고 푹 주무신 다음에…….”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 돌아가자꾸나.”

사내가 말머리를 돌리자 그를 뒤쫓아 온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그 뒤를 따랐다.

* * *

그의 씨족은 쫓기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초원의 분쟁이다. 그리고 흔한 죽음이다. 씨족의 전사들은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고, 먹거리를 구하지 못한 전사들의 얼굴에서 점차 초조함과 절망감이 짙게 비치고 있었다.

한때 그의 씨족은 일백여 게르를 세울 정도로 번성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수는 반의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싸울 수 있는 청년들은 그보다 적었다. 몰락이 눈앞에 닥쳤다. 그리고 그 효시는 한 꼬마 아이의 죽음이었다.

적어도 사내는 그렇게 믿었다.

“이거 놔라! 이 머저리들아!”

“닥쳐! 당장 목을 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청년들은 자신의 군주에게 항상 헛소리를 속삭이던 부족 무당을 끌고 와 광장에 무릎 꿇리고 있었다. 사내가 저 스스로의 입으로 ‘투르게진의 영혼을 만나지는 못했다.’라고 한 이상, 그의 조언은 모두 헛소리였다는 뜻이었으니까.

늙고 병든 무당은 거품을 물며 발악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내려 보며, 자신과 자신의 부족의 모습을 떠올렸다. 병들고, 늙었으며, 빈약한 이 씨족의 모습을.

“주군! 이자를 어찌할까요!”

청년들이 칼을 빼 들며 외쳤다. 날붙이로 목을 친다는 것은 전통적인 처형 방식 따윈 고려조차 하지 않은 잔혹한 일이었다. 죽어서 영혼이 땅 속에 묶일 것이었으므로. 사내는 조용히 손을 내저어 그들을 침묵시켰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곳에 투르게진의 영혼은 없었다.”

“칼날에 죽었으니 땅속에 끌려 들어갔겠지요.”

“이 노망난 놈이!!”

-카앙!

킬킬거리며 대답하는 노인의 말을 들은 청년들이 분개해 괴성을 내질렀다. 사내는 다시 한번 손을 내저어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다른 징조는 있더군.”

“어떤 징조를 보셨습니까?”

“저 멀리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해가 떠오를 때에 나는 하늘 위로 번지는 핏물을 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계시로군요, 주군. 투르게진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은 자들이 그 방향에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는 너의 죽음도 보았느냐?”

“예, 주군. 저는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죽을 것을 보았습니다.”

“투르게진이 살아 돌아올 수는 있겠더냐?”

“그건 불가능합니다, 주군. 하지만 주군께서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실 날은 보았습니다. 저 하늘의 매이며, 수천 게르의 지배자이시고, 세계의 흉터라 불리실 주군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위대한 카간이시여, 제 목을 취하소서.”

“카간?”

청년들은 그 불경한 말에 위축되어 웅성거렸다. 그건 형태를 갖췄으되 실현된 적 없는 단어였다. 모든 씨족들의 우두머리. 씨족들의 씨족장. 왕 중의 왕. 카간.

청년들이 사내의 얼굴을 바라볼 때, 사내는 우묵한 눈으로 한참 동안 킬킬거리는 노인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그는 곧 칼을 빼앗아 들어 그대로 노인의 목을 쳤다.

-콰직!

단칼에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핏물이 울컥거리며 치솟아 지면을 적셨다. 청년들은 주술사의 피에 담긴 저주를 피하기 위해 미신적인 주문을 웅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사내는 떨어져 나간 노인의 목에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를 믿겠다.”

너의 죽음으로 네 예언이 완성되었으니, 다른 예지까지 모두 믿어 주겠다. 사내는 웃음 지으며 하얗게 질려 가는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게르로 향했다.

* * *

사내의 명령에 따라 오랜만에 연회가 열렸다. 사내는 추적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 최대한 아껴 왔던 식량을 모두 풀어내 전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씨족 청년들은 오랜만에 먹고 마시며 즐겁게 떠들었다. 그러나 사내의 게르 안에선 침묵만이 맴돌았다. 사내의 부재를 대신하여 씨족을 건사하던 청년이 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군, 이제 어쩌시렵니까. 정말 놈들과 한판 붙어 보겠다는 겁니까?”

“놈들의 수가 그리 많더냐?”

“……저희 두 배는 훌쩍 넘습니다.”

“그럼 저 첨탑 도시들의 머릿수는 얼마나 되겠느냐?”

“주군…….”

첨탑 도시들. 그건 이른바 ‘문명’이라고 스스로 올려 말하는 저 샌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말에 청년은 겁을 더럭 먹었다. 고작해야 백여 명. 부족 전체를 다 따져도 오백 남짓인 그들이 무슨 수로 도시의 군대와 맞선다는 말인가.

“투르게진은 제 조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습니다. 저도 슬픕니다. 하지만 주군, 이성을 찾으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당장 튀메치우트 놈들도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세계의 흉터라. 멋진 말이 아니냐?”

“주군……!”

“그만해라.”

사내는 마유가 찰랑이는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억센 손아귀 아래에서 사내의 음울한 목소리가 울렸다.

“타카이의 죽음…… 닷새가 지났다고 하였느냐?”

“예, 주군.”

“너는 지금도 닷새 전처럼 슬프더냐?”

“……예?”

뜬금없는 말에 청년이 당황하자, 사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닷새짜리 흉터였구나. 네 형제이자, 내 부하의 죽음이. 투르게진의 죽음. 몇 년이나 애달프겠느냐? 한 달? 반년? 어쩌면 삼 년까지. 그 정도의 흉터가 될 것이다. 바야르, 고작 그 정도야.”

“주군.”

“바야르. 네 죽음 또한 그리 오래 흉 지지는 못할 것이다.”

사내는 손을 내려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시선을 돌려 게르 한구석에 걸려 있는 지도를 보았다. 낡고 해진 양피 지도엔 지금껏 도망친 경로와, 적대 씨족들의 포위. 그리고 다시 유랑을 시작할 다른 경로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형태조차 희미하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점들이 보였다. 첨탑 도시를 표현한 점들이. 당연히, 그들 씨족은 저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다. 그들의 산물은 교역할 만큼 풍족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젠 아니야.

“가장 깊은 흉터를 남겨 주겠다.”

복수 같은 하찮은 심정이 아니다. 아들의 허망한 죽음 끝에 얻은 것은. 모든 이들의 최후 또한 이토록 흔하고 허무하게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낡은 상처는 흔적이 된다. 그러나 흉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니.

첨탑 도시. 저 ‘고결하신’ 샌님들. 아마르 씨족이 사소한 철기, 하물며 냄비나 등자 하나라도 얻기 위해 무릎 꿇고 간절히 간청해야 했던 저들.

초원을 내달리던 열흘. 아들의 영혼을 만나고 싶었던 사내의 열흘 낮과 열흘 밤. 그 시간 동안 바람 속에서 속삭였던 목소리들이 있었다.

죽은 무당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그는 단순히 징조만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선 아들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저들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그리고 너와 네 씨족들이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교역품이 남아 있다. 이 초원에 아주 흔하게 널려 있는 그것이.]

[죽음이.]

초원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말을 타고 달리는 순간. 바람보다 빠르게 달리게 되는 그 어떤 지점에선 더욱 느리게.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사내는 계속해서 울리는 한 목소리에 집중했으며—

마침내, 깨달음과 동시에 전신으로 힘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끈적하고, 뜨겁고, 강렬한 힘이. 한때 거부했던 그 힘을 무당의 죽음과 함께 받아들인 이 순간에. 사내는 그 힘을 ‘운명’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는 오늘. 지금 이 순간 튀메치우트 놈들을 칠 것이다.”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놈들 또한 대비하지 못하겠지. 전사들을 충분히 배불리지 않았느냐.”

“녀석들은 겁을 먹을 겁니다.”

“나를 저들보다 더 크게 두려워해야 할 거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거의 열흘을 마상에서 시달린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내에게선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그의 두 눈에서 불길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는 게르를 벗어나며, 바닥에 모여 앉아 모닥불에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부하들을 보았다. 그들은 잔뜩 취한 채로 시시덕거리다가, 사내를 보고는 움찔 떨었다.

초원의 밤. 그 어둔 하늘 아래로 사내의 형상이 거대하게 부풀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존재감에 억눌린 탓에 씨족 전사들은 반쯤 겁에 질리고, 또 반쯤 경외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술을 들라. 아마르의 전사들이여.”

사내는 멈춤 없이 걸어 나가며 말했다. 청년들이 얼떨결에 술잔을 들어 올리자, 사내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전사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고는 단숨에 마셨다.

“술을 들라!”

그의 외침이 야영지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청년들이 따라 일어서며 술잔을 높게 들어 올리자, 사내는 그대로 야영지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청년들은 거의 홀린 채로 그의 뒤를 쫓았다.

처음엔 당혹감, 이후엔 긴장감. 그리고 이내 어느덧 고양감이 야영지 전체를 감돌았다. 오랜 침잠 끝에 마침내 터 오르는 태양처럼. 무언가,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청년들의 가슴이 사내의 거대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거칠게 뜀박질 쳤다.

야영지의 끝, 말들을 묶어 둔 자리 앞에 서서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투르게진, 그리고 많은 전사들의 죽음을 애도하던 그 시간들처럼! 일주일, 열흘, 반년? 고작 그 정도의 ‘흔적’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르의 전사들이여. 나는, 그리고 너희는 고작 그 정도의 비탄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야!”

사내는 등자 위를 박차고 올라 말의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너희의 이름은 이 세계 온 땅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그렇게 만들겠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우리를 두렵게 부르리라! ‘르위웨인가르(매들)’! 우리는 고작 흔적이 아니다! 아마르의 전사들이여, 말에 올라라!”

그의 말에 청년들은 황급히 자신의 기마를 찾아 뛰었다. 술과 고양감 탓에 대열이 엉키고 혼잡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우리는 흉터가 되리라! 으뤼야(진군)! 으뤼야! 우리의 이름은 영원히 살 것이다! 으뤼야, 르위웨인가르야(진군하라, 매들아)!!”

외침과 함께 사내는 밤이 낮게 깔린 초원의 그림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씨족 전사들은 곧장 그의 뒤를 따라 소리 높여 외치며 내달렸다.

그것이 카라드스카르. 대황야의 방언으로 ‘세계의 흉터’라 불리는 백국마족의 대씨족장. 아마르 카간의 탄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