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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85화 (286/388)

285. 구만장천의 열쇠 (1)

귀르의 아침은 황혼만큼 어수선하다. 귀르의 백성들은 각기 다른 시차를 살아가고 있으며, 귀르의 어스름을 무대로 하는 이들처럼, 귀르의 동녘을 자신의 업으로 삼은 이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건 항구도시 특유의 혼잡이다. 먼 바다 너머에서 동녘이 터 오르기도 전에 수많은 짐들이 하역되고, 상단은 각자 자신의 물품을 납품하기에 바쁘다. 항구의 선착장에서 하역장에 이르기까지, 먼 곳에서 바라볼 때 마치 개미 떼처럼 움직이곤 한다.

그 광경 위에서, 페르난데스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동이 트는 바다는 차라리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다가 차츰 사파이어 빛의 침착함을 덧칠해 간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배 한 척이 인접하고 있었다. 디모니카의 시력은 일반인보다 월등하므로, 지금 그의 눈에 간신히 잡힌 배는 실제로 아득한 거리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크기와 규모가 원근감을 뒤흔든다. 그보다 두 배는 가까이 있을 상선들이 오히려 지금 보이는 저 선박보다 자그마하다. 배의 마스트가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고, 그 아래로 웅장한 첨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 위에 첨탑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페르난데스는 저 배의 이름까지 유추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시대에 남은 단 두 척의 군함이다.

“왔군.”

천천히, 그러나 멈춤 없이 그 규모를 더해 가는 실루엣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슬쩍 웃었다. 정확한 목표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지금의 작전에서, 적어도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제 항구의 초계함들이 접근하는 배의 정체를 알아챘다. 바다 위를 떠 다니는 귀르의 해상 병력들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경적을 울려 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켜 훌쩍 뛰어내렸다. 일을 시작할 때였다.

아침 항구에 소란스러움이 더해진다. 물론 일반적인 일이다.

* * *

당연하게도 귀르의 해상 병력들은 엘프 서펜트 퀸의 기함이 내항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받아 알고는 있었다. 로베르는 결코 일을 성급하게 처리하는 성미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선원들의 발작적인 공황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요새나 도시, 또는 섬을 보는 기분일 터였다. 심지어 그것이 항구로 쾌속 순항하고 있다면.

“길목을 터라!! 휘말리면 좌초된다!!”

“저 크기를 봐…… 대체 저런 놈을 어떻게 건조한 거지?”

선원들은 점점 더 현실감을 더해 가는 가이메른 왕가의 기함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엘프 왕의 기함은 뱃사람들에게 있어 반쯤 신화나 전설의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 해상 최강. 다른 이견이라곤 있을 수 없는, 압도적인 질량비.

“잠깐, 잠깐만. 저거 왜 감속을 안 하지?”

“어어……어어어??”

-부우우우우우!!

항만에 정박한 수많은 배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뱃고동이 사방에서 울려 댔다. 그건 감속 없이 쾌속 접근하는 저 거대한 성벽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우성에 가까웠다.

동녘 해를 완전히 가려, 귀르 항구엔 먹구름이 낀 것처럼 그림자가 졌다. 밤이 하늘 위에 다시 펼쳐지는 정도의 비현실성. 그 앞에서 영락없이 항구와 기함 사이에 압착될 위기에 처해진 상선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가속 따윈 없었다는 듯이. 기함이 정지했다. 닻을 내리지도, 돛을 당기지도 않은 채로. 마법처럼.

“어…… 어……?”

죽다 살아났다는 표정으로 침을 삼키거나,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허우적거리던 선원과 상인들의 입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흘렀다. 대체 어떻게 정선했지? 저 거체가 그 속력에서 급제동하는 것이 말이 되나? 물리 법칙의 파괴를 두 눈으로 바라보는 심경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웃음소리가 그들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바닷놈들 주제에 그렇게 간담이 작아서야 쓰겠나!”

맑고 호쾌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선원들은 저 멀리 높은 성벽 위에서 한 발을 갤러리에 걸친 채 웃음을 터트리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아. 국빈을 대접하는 솜씨가 아주 허술하구나! 자, 엘시르! 우리가 국빈을 맞이하는 방식을 보여 주어라!”

“예, 전하!!”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 이후에, 쩌렁쩌렁한 함성이 들렸다. 저 높은 갤러리 위에서 아마 도열하고 있을 엘프 군사들의 고함이었다.

그리고 곧—

-콰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함포 소리가 온 항구를 뒤집어 놓았다. 괴성을 지르며 엎드려 울부짖는 항구 시민과 선원들을 바라보며, 엘프 서펜트 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항만에 울려 퍼졌다.

“아하하하! 이것이 바로 국빈을 대접하는 우리의 환영법이니라!!”

* * *

“예포를…… 쏘기 시작했다고?”

“예, 전하. 지금 일단…… 인해에 위치한 사략 함정들에 무력 충돌을 대비하라는 전언을 모두 뿌려 두기는 했습니다만…….”

“누가 엘프 황금 함대와 바다 위에서 싸우고 싶어 하겠나. 됐네.”

로베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엘프 여왕을 초대한 것도, 그리고 엘프 여왕의 접항에 대해 항구 전역에 경고를 내렸던 것도 그였으므로. 시민들의 충격과 반발을 제어해야 하는 것도 그였다.

제아무리 귀르라 하더라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로베르의 권위는 고작 이 정도에 실추되진 않을 테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온 세상이 다 알겠군.”

“미안하오.”

“그대가 사과할 일이 무엇이겠소.”

로베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이는 페르난데스를 만류했다. 설령 귀르의 정보 통제가 완벽하다 할지라도 이곳은 기본적으로 무역 도시다. 각국의 상단이 본 광경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는 법. 이제 모든 이들이 엘프 황금 함대의 귀르 접항에 대해 인지했을 것이다.

“그냥…… 쾌속정 몇 척으로 그대를 데려가면 좋겠다 싶었소만.”

“나도…… 나도 서한에 그렇게 적기는 했소.”

“엘프 여왕의 쾌속정이 기함일 줄은 몰랐구려.”

“……그렇소.”

대체 그 여자는 왜 예포 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가. 그리고 왜 자신의 기함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페르난데스에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 같았다. 애초에 기함이라는 것 자체가 엘프들의 터전이 아닌가.

“예포를 쏜 이후에 지금 뭘 하고 있다 하더냐?”

“평범한 물자 교역을 하고는 있습니다마는…….”

“마는?”

“그것…… 그것이…….”

로베르에게 귓속말을 하던 아이언사이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주홍 비단을 바닥에 깔고 예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귀빈을 맞는 법이라면서…….”

“아, 제발.”

로베르는 간절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 무언의 압박에 페르난데스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내가 가 보겠소.”

“주님의 축복이 함께할 거요.”

“그러길 바라지.”

* * *

엘프 여왕을 접견하는 일은 대단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귀르의 입장에선 시민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짓거리들을 당장 멈추고 싶었고, 엘프의 입장에선 어쨌거나 귀빈을 접객하는 일이었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주홍색 비단이 길게 깔린 길을 걸었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물론 비웃음과는 거리가 먼, 경외에 가까운 시선이었지만. 차라리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은공, 저 너무 부끄러워요.”

“나도 그렇단다. 키르하스.”

키르하스는 꼬리를 길게 뻗어 얼굴을 애써 가리며 걸었다. 그들의 수치심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엘프 사절이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떠들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말레이른 왕가와의 교전에서 제가 귀공의 바로 뒤 군함을 이끌었었지요!”

“함장이셨소?”

“예! 라하브 핀 막라린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여왕 폐하의 제15번 군함 ‘영원한 영광’호를 이끌고 있지요!”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어.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그들이 항구에서 기함으로 오르는 계단 위를 걸을 때, 갑작스럽게 포성이 울려 퍼졌다.

엘프 특유의 과장된 예포였다. 귀르의 시민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귀를 막았다. 페르난데스는 숨을 멈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능하면 조속하고 깨끗한 자결이 필요했다.

“제발 저 소란을 멈춰 주실 수 있으시오?”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듣던 대로 겸허하시군요! 하지만 여왕 폐하께서는 귀공께 가능한 한 가장 위엄 넘치는 예절을 보이라 명하셨습니다!”

“제기랄, 레이아…….”

짓궂게 웃음을 터트리는 레이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이건 악의적이기까지 했다. 페르난데스는 단단히 따져 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기함에 승선했다.

* * *

“내 듣자 하니 제국의 귀족과 혼사를 치른다 하더구나.”

그것이 페르난데스가 알현실에 도달하자마자 들은 첫 번째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그의 등 뒤에서 아벨이 조용히 쿡쿡 하고 웃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등을 살짝 찌르며 속삭였다.

“저 아이가 왜 이렇게 심술을 부렸는지 알 것도 같구나.”

“나는 결백하오.”

“아니, 너는 결코 결백하지 않다. 당장 나도 교황청을 불태우고 싶었던 것을 간신히 참았느니라.”

나야 오랜 세월을 산 관록 있는 용이니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벨이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무시하고는 여왕의 옥좌 앞으로 나섰다.

과거 말레이른의 알현실로 쓰였던 이 거대한 홀은 그 규모가 놀랍도록 줄어들어 있었다. 화려한 치장과, 엘프의 영혼을 뽑아내는 데에 사용되던 각종 도구들은 모두 철거되어 있었다. 그 자리엔 차라리 검박하게 느껴질 만큼 단순한 몇 가지 사치품들만 남아 간신히 여왕의 위엄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레이아는 픽 웃었다.

“새 단장이 마음에 드느냐? 내 격식 없는 자리를 선호해 이 쓸데없이 크기만 한 홀을 대폭 줄였느니라.”

“위정자의 미덕이로군.”

“현실주의적 관점이라 봐도 좋지 않겠느냐. 말레이른 왕가의 백성들을 모두 끌어모은바, 이 기함은 두 민족을 수용하기엔 다소 비좁더구나. 당장 군주인 나의 공간을 줄인 것만으로도 대여섯 가구는 더 들어설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레이아는 쾌활하게 웃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옥좌에서 풀썩 일어나 단상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페르난데스의 바로 앞에서, 그녀는 고개를 슬쩍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결혼 소식이 있으면 청첩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냐.”

“파혼했소.”

“……응? 신부에 하자가 있더냐?”

“혼인 자체가 정치적 거래의 일환이었고, 이젠 쓸모가 다했으니. 하자로 치자면 오히려 내게 있었겠군. 레이아 여왕.”

“네게는 그 고약한 성미를 제외하면 하자가 없다.”

레이아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싱글거렸다. 그녀는 주위에 도열한 와일드프린스들과 대신들을 힐끗거리고는 페르난데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속삭였다.

“내게 초대를 청한 일이 혹 주위를 물러야 하는 일인가?”

“그렇지 않소. 이건 공식적인 요청이 될 것이오.”

“누구의? 너희 교회의 요청인가?”

“아니오. 나의 요청이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로서, 그대에게 보였던 지난날의 우정을 ‘호의’로 돌려받고자 하오.”

“우정이라! 타당하다. 그대의 우의는 우리 민족 전체의 홍복이었으니! 걱정 말아, 페르난데스. 우리는 은혜를 결코 잊지 않는다.”

그대 또한. 레이아는 페르난데스의 등 뒤에 서서 부드럽게 웃고 있는 아벨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두 여신의 영성을 품은 존재이며, 물질 세계에서 엘프들의 신에 가장 근접한 존재가 그녀가 아니던가.

“그리고 공식적인 사안이라 대신들과 함께하여도 무탈하다면. 식사를 해야겠구나.”

“식사……?”

왕이 사절을 대할 때 일반적인 예법은, 사절의 논의가 끝난 이후의 연회를 벌이는 것이었다. 물론 사안에 따라 며칠 이상 논의를 지속할 수야 있겠지만. 적어도 중요한 사안을 갖고 찾아온 사절에게 연회를 먼저 베푸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레이아는 웃으며 말했다.

“내 두 민족의 여왕이 되고, 모든 민족들에서 공평하게 내각을 구성하겠다 천명했으니. 가이메른 왕가, 그리고 말레이른 왕가. 두 왕가로 나뉘어 갈등하던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무엇을 가장 먼저 시도했는지 알고 있나?”

“뜻은 훌륭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군.”

“바로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레이아는 당당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대신들은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곧 알현실의 문이 열리며 거대한 테이블과, 요리가 잔뜩 담긴 접시를 들고 있는 시종들이 입장했다.

“경계하는 자와는 식기를 들지 않고, 같은 식기를 나눈 자는 경계하지 않는다. 하나의 민족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엘프 서펜트 퀸의 만찬회엔 민족과 종족의 가름이 없다!”

“여왕 폐하의 영광을 찬양하라!”

“그래! 대신들을 모두 모아라! 회의든, 논의든, 호의든. 그 후에 함께하지.”

페르난데스는 이것을 기함 없이 떠돌아야 했던 레이아의 민족들이 지닌 특성이라 생각했다. 인퍼머르에서 가이메른의 기함을 잃고 난 후, 그녀는 왕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함대장들과의 결속을 다져야 했을 테니.

그 버릇이 남아 두 민족의 통일 이후에도 전통으로 굳어진 것이리라. 훌륭한 정책이다. 말레이른 왕의 신하들을 포섭하며, 서로 투쟁하던 두 민족의 대표자들을 하나로 엮어 자신의 권위 아래에 복속시키는 방식이었다.

그저 쾌활하고 굳센 여성 정도로만 보이지만, 레이아는 놀랍도록 정치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건 생존 본능에 가까운 균형 감각일 것이다. 그 어느 시대보다 민족 내에서 서펜트 킹이라는 자리가 갖는 권위가 바닥을 치고 있었으니.

가이메른은 여신을 죽이려 시도하다 죽었고, 말레이른은 자신의 종족을 잡아먹으며 영생을 추구하다 죽었다. 그들의 백성들로서는 자신의 왕에게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신앙적인 존중을 보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분열되었던 엘프 백성들을 통합해야 하는 그녀는. 심지어 신살자 가이메른의 딸이자 하프엘프였다. 그런 그녀가 왕권을 다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포용’이었다.

‘놀랍도록 현명하군.’

-제법 큰 수확이 기대되는걸.

가이메른 왕의 해도와 말레이른 왕의 비밀 서가가 고스란히 보전된 레이아의 왕실은, 적어도 해상 위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갖추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설령 아무런 수확이 없다 하더라도, 북해 최강의 군벌과 정략을 공유하는 것은 반드시 종말을 막아내야 할 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방식의 종말이 도래할지 알 수는 없더라도, 지금은 최선의 무력이 필요한 순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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