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87화 (288/388)

287. 구만장천의 열쇠 (3)

피곤하군. 페르난데스는 뻑뻑해진 눈을 꾹 누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순간,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수인을 짚었다. 핏방울은 옷감에 스며들기도 전에 잿가루가 되어 흩어져 날렸다.

-얼마나 남았지?

‘내 계산으로는 오 년.’

-육체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삼 년. 어쩌면. 아니면 그보다 짧을 수도.’

콧대를 눌러 지혈하며, 그는 창밖에 넘실거리는 푸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귓가에서 페이자쉬가 중얼거렸다.

-수명을 늘릴 수단이 있나?

‘없어.’

페르난데스의 단호한 말에, 페이자쉬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그 둘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 아버지!!]

여전히, 귓가에 그 목소리가 선했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또 바스러지더라도. 그 어떤 경우에라도 그는 인간으로 죽을 것이다. 만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 수명을 늘리고 그 영혼에 불순물을 섞는 방법이 아니다.

찾아야 하는 수단은 단 하나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승리. 오직 그것만이 그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나저나, 이 창 말이야.

페이자쉬는 분위기를 돌리며 말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던 페르난데스도 다시 고개를 돌려 테이블로 향했다.

각종 실험 자재들이 대중없이 흩어져 있는 혼잡한 방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백색 갈기창에는 마력석을 갈아 만든 마법진이 얽혀 있고, 그 위로 측정 도구들과 관측 기구들이 갈기창의 가장 작은 회로 기판마저 뜯어보고 있었다.

일주일. 레이아 여왕이 직접 꾸려준 이 공방에서 그가 보낸 시간이다. 말레이른이 소유했던 가장 뛰어난 실험 자재들을 대여해 구성한 이 공방은, 생전에 그가 소유했던 그 어떤 공방보다 훌륭한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정도의 공방을 구성했다면, 일반적인 유물 정도야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더군다나 사용자가 페르난데스라면, 대단히 섬세하고 강력한 유물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이 고대의 유물은 그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래. 도저히 알 수가 없군.’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손을 털었다. 이 유물이 가진 힘과 작동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마력, 또는 생명력. 특히 영성을 갈아 넣으면 그 양에 비례하여 사용자에게 육체적인 기능 보조를 지원한다.

간단히 말해 마력을 때려 박을 때 초인적인 육체 성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이었다. 이런 기작을 가진 유물 따위는 페르난데스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며, 실제로 드문 종류의 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순도가 남다르다. 유물의 등급을 쉽게 표현하자면, ‘소모 효율’로 나눌 수 있다. 가령 10의 출력을 산출해 내는 데에 얼마나 많은 소모값이 필요한가. 그것이 유물의 등급을 구분하는 척도다.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마력등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시간당 소모되는 마력의 총량과 그 마력을 이용해 발생하는 빛의 양. 그 소모 효율이 유물의 등급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마력등은 유물 등급에 속하지 못할 정도로 저속하지만.’

거기서 더 발전해, 마법구에서 유물 수준으로 빛을 내뿜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람키쉬의 봉화.

그렇게 높은 등급의 유물은 아니지만, 람키쉬의 봉화 같은 경우 광량에 비해 필요한 마력량이 터무니없이 적다. 마력을 수치화시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지만, 보편적으로 10의 마력을 들여 8의 빛을 얻어낸다고 생각해 보자.

그보다 높은 등급의 경우에는 어쩌면 9. 즉 9:10의 마력 효율을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질 세계에 전설로 남은 몇몇 유물들은 그보다 더 정밀한 수치로 표현해야 좋을 만큼 효율이 높다.

그러나 이 창. 백색 갈기창의 경우엔…….

‘소모된 마력량을 그대로 힘으로 치환한다.’

기판을 타고 흐르는 마력에 단 한 푼의 누수도 없다는 뜻이다. 모든 마력이 고스란히 마력 회로를 타고 흘러 그대로 결과값으로 출력된다.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유물이다. 실존할 수 없는 수준의,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다.

아주 뛰어난 마법사의 몸에 직접 새긴 마력 회로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출력은 불가능하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력 현상에서도 누수가 없을 수는 없다. 마력의 기본적인 형질은 확산이므로, 제아무리 마력 통제력이 높다 하더라도 누수 없는 마력 회로를 축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창은 해내고 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담담하게. 그래서 일주일간 그는 이 공방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도 분명 있었지만, 이런 수준의 유물을 처음 만져 보는 탓이 더 컸다.

‘마력 회로의 구성은 아주 단순해.’

복잡성 없이 깔끔한 술식이다. 술식 구성의 난이도로만 따지자면 하급 유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순도가 아주 높다.

섬세함을 포기한 대신 우직할 만큼 정순하게 만들어진 회로와 그 구성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경외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수준의 유물을 만든 자가 대체 누구일까. 천상 전쟁 시절이었으므로, 필멸자의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건…….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유물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

천상 전쟁 시절에도 물론 유물에 등급이 나뉘었을 것이다. 강력하고 섬세한 유물과 그렇지 못한 하급 유물들로. 신이 직접 제작한 유물. 가령, 페르난데스가 종종 무구로 활용하는 열쇠검과 같은 유물의 경우엔 최고 등급. 아마도 이 갈기창 또한 그럴 것이다.

그가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기판을 가지고 있던, 보물전의 다른 천상 전쟁 시절 유물들도 같은 결로 볼 수 있다. 신이 직접 만들어 낸 것들 중에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던 유물들이란 뜻이다.

그런 유물들의 회로들마저 파괴되는 사건이 있었다면…….

-신의 죽음. 아마도 엘프 삼왕조의 서펜트 킹들이 엘프 만신전의 문을 넘어 그들의 신을 죽였을 때의 일이겠지.

‘하지만 페이자쉬. 신의 죽음이 곧 그 피조물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랬다면 엘프들은 엘프 신들이 죽는 순간 멸족했어야 옳다. 또는, 레이아가 소유하고 있는 가이메른 대해도가 파괴되었어야 했다.

가이메른 대해도에선 맥라렌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의 힘이 느껴졌다. 아마도 엘프들의 해신이었을 존재. 천상 전쟁 당시 죽었던 존재의 힘이다. 그의 힘이 아직 남아 유물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 가설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신의 죽음과 상관없이, 신의 유물을 파괴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왜, 어떤 유물은 성능을 유지했으며 또 어떤 유물들은 파괴되었는가. 보물전에 존재하는 천상 전쟁 시절의 아티펙트들에서는 신적인 존재가 만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수많은 가설들이 쌓여 올라오고, 그만큼의 가설들이 폐기된다.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천상 전쟁은 천여 년이 지난 고대 시대의 사건이다. 문명 사회가 건설되기도 이전, 인간은 고작 부족 사회에 불과했던 시절의 사건……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

엘프들이라면, 어쩌면 남은 정보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당시 엘프들의 거점은 내륙이었고, 서펜트 킹의 기함은 피난선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 혼란기에는 역사서와 아티펙트 제작 비법 따위를 챙겨올 생각도 못 했겠지.

“죽겠군. 정말 어디 야산에 밝혀지지 않은 던전들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종말 직전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던전들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걸 찾아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도 알아, 페이자쉬. 그냥 해 본 소리야.”

인간이고 지옥이고 천상이고, 종말의 대전쟁 앞에선 서로가 가진 모든 패를 사용하고도 필요하다면 그 어떤 것이든 이용해야 했다. 그만큼 치열한 전쟁이었고, 그 시절에조차 알려지지 않은 던전이 있다면 그건 지금 시점에서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었다. 피로감 속에 얽혀 멈춰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시간은 그에게 가장 귀중한 소모 자원이었으므로.

페르난데스는 기지개를 켜고는 목을 풀었다. 그는 널브러진 실험 기록지 아래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고는 눈앞에 펼쳤다.

“시작해 보자.”

-좋아. 워게임 시나리오 제113 안부터야.

“벌써 거기까지 왔단 말이야? 거 참 대단하군.”

그는 픽 웃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좁쌀만 한 글귀들이 뺴곡하게 들어찬 서류철을 훌훌 넘기고, 빈 페이지가 나타났다. 작은 각주를 달며, 페르난데스는 펜을 들었다.

“우리가 아직 생각하지 못한 종말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실험이 벽에 막히거나, 피로감을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는 머리를 맞대고 함께 사고 실험을 하곤 했다.

종말이 일어난다는 것이 참일 경우, 세계를 멸망시킬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것인가.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을 직접 본 적 있는, 그리고 세계를 무너트리는 데 한 손 거들었던 악당이 하기엔 퍽 즐거운 취미 생활이었다.

* * *

페르난데스가 떠난 지 보름이 넘게 지난 시점에서, 팔텐노이아의 지하 수로는 완전히 정화되었다. 지하 수로를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지만 정화 작업에 투입된 인원 중에 진심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내뿐이었다.

그리고 지하 정화라는 과업을 완수한 것도 사실상 단 한 사내의 업적이었다. 제피스는 뻑뻑한 어깨를 돌려 풀고는, 이단이나 흑마법사, 또는 악마 본인이 직접 창조한 마지막 피조물의 심장을 터트렸다.

“이게 마지막 놈인 것 같군.”

“축하드려요!!”

제피스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에버리즈가 소리 질렀다. 제피스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그녀의 얼굴과 옷에 잔뜩 묻은 검댕, 그리고 오물에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제국의 황실, 그 가장 깊은 심처에서 기껏 해 봐야 서류들이나 만졌을, 대부분의 시간을 치장과 사치에 보냈을 귀족 영애가 보내기엔 너무나 힘겨운 나날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에버리즈는 아무런 내색 없이 제피스를 따라다녔다. 전투력에 있어서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들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무기도 제피스의 기준에서 단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온갖 성유물을 등에 지고, 제피스가 필요로 할 때마다 건네주었다. 지하 수로의 길이 어둡기에 누군가는 횃불을 들어야 했고, 에버리즈가 궂은 일을 도맡았던 탓에 제피스는 오직 추적과 이단 심판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녀의 조력은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심적인 부분에서도 크게 작용했다.

“고생 많았소.”

“다 도시 시민들을 위한 일인데요, 뭘!”

에버리즈는 활달하게 웃었다. 그녀가 느낄 피로도는 제피스의 것에 비견될 수 없다. 제피스는 디모니카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훈련조차 받지 않은 민간인이었으므로. 그런 그녀조차 활기차게 웃고 떠들고 농담하는데 제피스가 피로에 지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제피스에게 있어 어떤 이정표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파문된 이후 사제로서 활동할 수 없고, 더 이상 교회의 비호를 기대할 수 없는, 정처 없이 떠도는 이방인이 된 지금. 그녀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거의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이제 뭘 할 생각이오?”

“진심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 당연히 진심으로 말씀하시라는 뜻이었소.”

앞장서서 수로의 입구를 찾아 걷는 제피스의 등 뒤에서, 에버리즈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삼켰다. 임무를 끝내고 복귀하는 길에 잠시 대화를 나누자고 던진, 아무 생각 없던 화두에 불과했기에 제피스는 에버리즈의 침묵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청혼할 생각인데요…….”

“청혼이라. 그대는 귀족 여식이니 혼사로 치자면 오히려 늦었다 볼 수도 있겠지. 훌륭한 일이오.”

제피스는 짧게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이 더 이상 사제의 몸이 아니므로, 저 선하고 해맑은 귀족 여인의 혼례에 축복을 내려줄 수 없다는 것에. 성사를 대행할 수 없는 몸이었으므로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뭐, 사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축하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제피스는 덤덤히 웃고는 수로의 문고리를 쥐었다.

“저 노처녀 아닌데요!”

“음……. 일반적으로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지. 결코 너무 늦은 것은 아니오. 하지만 축하드리오.”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당연히 그대처럼 뛰어나고 품격 높은 이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그대의 배우자 될 사람 또한 헌양한 사내겠군.”

“궁금하지 않으시냐구요.”

“……좋소. 궁금하오. 누구요?”

제피스는 오늘따라 끈덕지게 달라붙는 에버리즈가 수상했다. 그건 오랜 이단심문관으로서의 감각이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자 특유의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결혼을 앞둔 새신부 특유의 수줍음이라거나, 또는 훌륭한 연인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치기 어린 마음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흐뭇한 일이다.

젊은이의 자부심을 굳이 해칠 정도로 제피스의 관록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단심문관이었지만, 동시에 사제였다. 사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도들과의 상담이었으므로, 제피스는 상담에 임하는 사제의 자세로 그녀를 대하기로 했다.

“당신이에요!”

그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그것 참 뛰어난 청년이오.’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대로 문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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