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88화 (289/388)

288. 구만장천의 열쇠 (4)

문명 사회에 평화가 찾아왔다.

몇몇 군주들은 아쉬움을 감추고, 어떤 군주들은 안도를 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돌풍처럼 일어나 제국을 강타한 내전이 끝나고, 동부 왕국의 연합군은 선제후를 무너트려 그 저력을 과시했다.

세속 군주들의 영토는 새로운 국경선으로 찾아온 혼란에 신음하고 있었다. 물론 일시적인 잡음에 불과했다. 백성의 입장에선, 군주의 이름을 제외하면 무엇도 변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동부 왕국을 대상으로 하는 제국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선제후들 간의 불화가 거세어지고, 제국 시민들의 자긍심이 꺾여 나가는 한 해였다.

제국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이곳 팔텐노이아에. 아니, 지금 이 순간, 제국의 모든 주요 도시들에.

-데에에에엥! 데에에엥!

8번의 타종 이후 잠시 침묵. 그리고 다시 한 번의 타종. 이는 전통적으로 여덟 선제후 사이에서 한 사람의 황제가 즉위했다는 의미였다.

제국 시민들은 절반 정도의 진심을 담아 수도 방향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새로운 황제의 치세에 평화가 있기를.

* * *

“세상에 만연한 악과 그로 인한 환난 속에서 오롯이 깨어나 서니, 빛이 따르라. 만신전이여, 보우하소서.”

황제의 대관식은 전통적으로 ‘사자문’ 앞에서 역대 황제의 청동상들을 마주하며, 일곱 선제후들의 입회 아래에 황제 스스로 월계관을 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자문은 파괴되었고, 새로이 즉위한 황제는 선제후들의 동의를 무시한 채 새로운 의례에 따라 대관 절차를 준비했다.

이에 반대하는 선제후는 그 누구도 없었다.

제후들 중 목 아래 칼날 한 자루 없는 이가 없었고, 르네는 암중에 도사린 채로 다른 제후들의 목줄을 쥐고 흔들었다.

세련된 정치 공작과 몇몇 합의, 그리고 전대 황제의 참사가 만들어 낸 기묘한 풍경이었다. 만신전의 교황이 직접 황제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는 우스운 절차가 만들어진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트레뮐레 공?”

“그리모아르 공.”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을 향해 증폭 마법이 걸린 마도구로 축사를 이어 나가는 교황이 보였다. 그리모아르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세속 왕가의 정세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던 작자가 직접 세속 왕가에 축복을 내리고 있는 꼴도 우습고, 교회의 권력 아래 단 한 번도 복종한 적 없던 제국의 황제가 스스로 교황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것도 우습소.”

그리모아르는 혐오감을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사실과는 다른 일이었다. 르네는 지금 사실상 교황과 동등한 위치에서 한쪽 무릎만 살짝 굽힌 채 의전을 행하고 있었으니.

그 누구도 교황이 황제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교회도, 귀족도. 심지어는 이를 지켜보는 백성들조차도.

그들의 삶에서 사제가 귀족을 축복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실제로 신 아래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는 교황조차도, 황제의 의전 앞에서 예를 표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예의였고, 황제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그리고 그건…… 황제와 교황의 정치적 밀월을 암시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리모아르의 말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내 딸아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갑작스럽군요.”

“내가 돌려 말하길 즐기지 않는 터라. 팔텐노이아 귀족식 언행에는 익숙하지 않소.”

그리모아르는 교황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수도 귀족식 언행엔 익숙하지 않다고? 로베르는 그의 말에 픽 웃었다. 그 말 자체가 가진 정치적 함의가 지독했던 탓이다.

그리모아르 가문은 자클랭의 공왕가다. 그리고 자클랭은 해상 무역로가 매우 적은 내륙 지방인 탓에 로베르의 사략 함대가 가져온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리모아르 가문의 입장에서 트레뮐레 가문은 매력적인 혼처였다.

비록 선대 황제가 이단 판정을 받았으며, 제국의 내분을 불러일으켰다고는 하지만. 당대의 트레뮐레 궁중백은 자칫 무너질 수도 있던 가세를 놀라운 정치 감각으로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젊고, 독신이었다. 이 정도의 청년을 찾는 것은 대륙 전체를 뒤져 보아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제후 사이에 혼사는 불가능하오.”

“제국법령을 따지자면 이미 우리의 황제부터 파행한 것이 아니겠소? 모든 일에는 방법이 있는 법이오.”

“하하. 그리모아르 공…….”

로베르는 이 늙은 귀족의 말에 픽 웃었다. 예절에 따르면 무례로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는 곧 고개를 슬쩍 숙여 입 모양을 가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죽고 싶소?”

“……뭐, 뭐?”

“나는 죽고 싶지 않소. 그대가 귀족식 언어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나 또한 그리하겠소. 내 진심을 듣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요. 그러니 귀를 열고 계시오. 나는 죽고 싶지 않소.”

그리모아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가, 로베르의 사나운 눈을 바라보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잊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사람 좋아 보이는 청년은 소년 시절부터 제국 최고의 첩보 기관 위에 군림했던 남자였다.

“그게…… 무슨 뜻이오?”

“내겐 누이가 있소.”

“그건 알고 있소. 명색만 남은 여식이 아니오? 지금 듣자 하니 가산을 털어 가며 빈민 구제를 하겠다고 날뛴다던데…….”

“그 여자의 성격상 그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오. 하지만 그 여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내가 직접 쌓아 올린 내 황금을 그녀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었소. 왜일 것 같소?”

로베르의 말에 그리모아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 여자가 빈민 구제라는 허울 좋은 행동을 진심으로 하려는 이유가 한 사내 때문이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오. 그리모아르 공, 그 사내가 누군지 알겠소?”

“……모르겠소.”

“알아 두시오. 파문당한 사제요. 이단심문청 소속, 그대가 알지 모르겠지만. 렐리기오사 디모니카라는 조직의 수장으로 오랜 세월 암약한 한 요원이었소.”

“그게…… 무슨 뜻이오? 파문 사제라면 그저 백성…… 그저 하층민이 아니오?”

“저걸 보시오.”

로베르의 턱짓에 그리모아르는 고개를 들었다. 교황이 자애롭게 웃으며 월계관을 르네의 이마 위에 얹고 있었다.

뎅—! 종이 울리고, 곧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꽃비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교황의 손이 르네의 어깨를 두 차례 토닥이고는 물러섰다.

누가 보더라도 진심으로 젊은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로베르가 속삭였다.

“교황과 황제가 손을 잡았소. 카르벨리에 공작가에 후사가 나온다면 그 아이는 베이타서스 교회에 귀의할 것이오. 진심이든 아니든.”

“그렇겠지……?”

“그리고 내 누이는 지금 베이타서스의 사제와 혼사를 추진하고 싶다 말하고 있소. 그 여자의 본의이든 아니든, 그게 나타내는 바는 뚜렷하오.”

트레뮐레 궁중백이라는 그 직함을 로베르에게 이양하고 권력 밖으로 쫓겨난 정치력 없는 여자. 이것이 에버리즈의 대외적인 이미지였지만. 로베르는 그 여자의 능력과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파행 속에서도 제국 내각을 유지시키던 유일한 끈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으로도, 그리고 행정 귀족으로도 결코 모자람 없는 인재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정세 속에서 찾은 배우자가 하필이면, 파문 사제였다고?

“에버리즈, 그 여자와 사제 사이에서 나온 아이는 다음 트레뮐레 백작가의 계승권을 노릴 것이오.”

그리고 그때, 교황이 직접 계승권 경쟁을 지원할 것이다. 이미 그는 세속 정세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바 있으니. 여덟 선제후 중에 성직 선제후 둘을 심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 말을 들은 그리모아르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그제야 로베르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

지금, 제국 최고의 첩보 기관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강대한 선제후조차도 암살 위협을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카르벨리에가 황제로 즉위한 이상 제국 내각, 그것도 아이언사이드의 수장이라는 자리를 언제까지고 다른 선제후에게 일임하지는 않을 테니.

그리모아르는 잠시, 목숨을 유예받은 사형수를 바라보는 눈으로 로베르를 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그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쉿.”

로베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술 앞에 가져갔다. 그리모아르는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단상 위에서 그들을 내려 보고 있는 교황이 보였다.

아주 짧은 시선 교환이었다. 미소 짓는 두 사내의 눈빛이 서로를 스친 것은.

그리모아르는 정치가 만들어 낸 괴물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에 영광 있으라. 황제 폐하 만세.”

로베르는 무던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선 르네를 향해 박수를 쳐 주었다.

* * *

-트레뮐레 궁중백 그 꼬마가 미쳐 날뛰는 건 어때.

‘13번, 87번, 102번 시나리오 상황이야. 대처가 가능해.’

페르난데스는 망루 위에서 해수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축난 몸을 다시 추스르고자 하는 휴식이었지만,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카르벨리에 황제가 타락하는 경우는?

‘77번. 너무 희박한 확률이고, 그것도 대처가 가능해.’

종말을 모르는 상황에서 했던 연구와 종말을 겪어 본 이후, 두 번째 종말을 막아 내기 위해 벌이는 연구는 그 결이 달랐다.

‘이쯤이면, 솔직히 내가 직접 세상을 무너트릴 수도 있겠는데?’

전생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풍족한 인적, 물적 자원과 배경. 지금까지 다져 놓은 세력별 상황들, 그리고 이 며칠간 머리를 쥐어짜 내며 골몰한 ‘멸망 시나리오’ 총 백아흔다섯 건.

이 이상의 묘안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그의 연구 자료 안에 반드시 종말의 원인이 숨어 있다.

이제 남은 일은 백아흔다섯 건의 멸망 시나리오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며 원인 자체를 없애는 것뿐.

-대비할 수 없는 시나리오 32건, 대비할 수 있는 시나리오 121건과 의미 없을 정도로 희소한 가능성을 품은 시나리오 42건.

가능성 분포를 본다면 이렇게 따질 수 있다.

큰일 하나는 해치웠다.

대처가 불가능한 돌발적인 종말 32건의 원인을 제거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지금 당장은 무시해도 좋고, 남은 문제들은 하나하나 제거하면 될 뿐이다.

페르난데스는 제법 산뜻한 기분으로 허리를 꺾으며 생각했다. 역시 일이 예상대로 풀리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이제 남은 건 저놈들뿐이군.”

수평선 저 너머, 거대한 섬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가 슬쩍 웃었다.

-뎅뎅뎅뎅뎅!!

저 멀리에 섬이 있었다. 외곽에 날고 있는 수많은 그리폰들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작은 함선들과 함께.

섬이 육안에 들어올 때부터, 가이메른 왕가의 모든 군함들에서 일제히 경고가 터져 올라왔다.

가이메른의 함선은 멈추지 않았다. 섬이 점차 그 크기를 키워 나가는 것이 보였다. 섬은 기함의 항해 속력보다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의미는 아주 간단했다.

저것은 섬이 아니라, 함선이라는 것.

“구만장천의 제르올렌.”

각 진영의 함선들이 넓게 산개하며 경계 태세를 갖춘다. 제르올렌의 군함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기함의 규모로만 보자면 레이아의 것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말레이른의 함선이 일종의, 거대한 요새와 같다면 저건 말 그대로 섬이었다.

작은 산봉오리와 그 아래 넓게 깔린 요새, 시가지, 항구 따위가 보였다.

“네놈이 뭘 알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

노란 깃발을 장루 위에서 흔들며 다가오는 작은 쾌속정이 보였다. 천여 년 전, 결별한 엘프 왕조들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외교 활동이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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