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구만장천의 열쇠 (5)
“두 시간 후 열 명 이내의 비무장 인원들에 한해 접항을 허가하겠소.”
쾌속정에서 하선한 사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그러나 엘프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애써 가장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자들 또한 엘프였다는 점이다.
종족 특성 자체가 오만한 이들. 선민 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이들이며, 심지어 레이아의 엘프들은 이미 서펜트 킹,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종족신에 가까운 영원왕들의 죽음을 보았던 베테랑들이었다.
“재밌군.”
그들 사이에서 분노가 터져 나오기도 전에, 옥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레이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알현실 아래에서 뻣뻣하게 서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사절에게 전했다.
“네 이름이 뭐지?”
“나는…… 나는 데이라실 오스칼라일이오.”
“너는 두 가지 무례를 저질렀다. 나는 이국의 군주로서 네게 네 무례를 스스로 반성하고 다잡을 기회를 준 것이다. 하나는 해결했건만, 두 번째 무례는 그렇지 못했구나.”
레이아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사절을 바라보았다. 엘프들 사이에서 군주, 즉 서펜트 킹이라는 직함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사절의 낯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제르올렌 왕가의 엘프였다. 그 뜻은, 그가 모시는 군주가 천상 전쟁 시절부터 자신의 백성을 다스려 온 신적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서펜트 킹의 앞에 선다는 것은 그에게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이제 세 가지 무례가 되었군. 그웬.”
“예, 전하!”
“저치에게 무례를 해결할 기회를 주어라.”
“예! 전하!!”
덩치 큰 와일드프린스 하나가 벼락처럼 달려 나오더니 곧장 사절의 정강이를 후려쳐 쓰러트렸다. 사절은 엉겁결에 바닥에 내려 꽂히듯 쓰러지고, 코피를 쏟으며 고개를 들었다. 황망하게 벌어진 시야 속에서 레이아의 얼굴이 보였다.
“네 첫 무례는 너의 이름을 나의 어전에서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 무례는 네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왕의 친전이시다! 무릎을 꿇어라!”
아직도 쓰러져 있던 사절은 그웬의 팔에 억지로 끌어 올려져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목에 서늘한 칼날이 드리워졌다. 사절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네가 두 가지 무례를 고쳤으니 얼마나 보기 좋으냐? 자, 네가 저지른 마지막 무례를 반성할 기회를 주겠다.”
“사,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사죄…… 사죄드립니다. 대왕이시여.”
“좋다. 나는 관대한 편이니, 처음 한 실수 하나하나에 목을 취할 수는 없는 법. 네 왕에게 전하거라. 두 시간? 좋다. 두 시간 뒤에 찾아가겠다. 열 명? 아니, 열 척의 군함을 이끌겠다. 그리고 비무장이라. 그럴 수는 없지. 우리는 예포를 쏘아 올리며 접안할 것이다. 이상이 대(大)서펜트 퀸, 나 레이아 핀 가이메른의 전언이다. 너희의 왕에게 전하라.”
레이아는 악의 섞인 미소를 띠며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그웬은 아직도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 사절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는, 레이아에게 크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어전을 빠져나갔다.
사절이 떠나기 전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대신들과 와일드프린스들은, 알현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 깊게 절을 하며 말했다.
“전하. 소신 비알데일 핀 막실라스가 여쭙나이다.”
“말해.”
“전하의 의중에 전쟁이 있다면, 열 척을 적진에 던져 희생함은 바르지 않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 전하께오서 지금 저 타락한 왕가를 도발하시옵고 저들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실 대의를 쌓으시려 함이…….”
“복잡하다. 간단히 말하라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아군 군함 열 척을 희생해 저치를 처단할 명분을 쌓는 것이 아니냐. 그 뜻이냐?”
“예, 전하.”
레이아는 대신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곧 당당히 말했다.
“전쟁을 의도했다면 명분이 필요하겠느냐? 명분 없는 전쟁을 비난하기엔 이 대해 위에 저들과 우리, 그 두 세력만 존재하니. 힘이 충분하다면 그저 토벌할 따름이라. 또, 열 척의 선원들 또한 나의 백성인데, 내가 어찌 감히 그들을 쉽게 사지로 내몰겠느냐?”
“그리하옵시면……?”
“명분이 아니라 자존심이 아니냐. 경들은 자존심이 없더냐? 저 머저리들이 한 소리가 어디 같은 군왕에게 보일 만한 자세였나? 우리는 두 민족의 연합체야. 대추방 시대 이후로 두 개의 민족이 하나가 된 유일한 역사를 우리가 만들고 있으니, 우리는 한 왕가의 후예들이 아니라 비로소 우리 종족 전체의 후예라 할 만하다!”
레이아의 말에 대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도열한 대신들 사이를 저벅저벅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까이 들릴수록 대신과 장수들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당당히!”
그렇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가신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고는, 레이아는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당당해져라! 너희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종족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나의 궁내대신들이다! 고결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오만해져라! 고개를 들어! 저 타락한 군왕은 제 배를 불리기 위해 우리의 여신을 죽였으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여신을 되살렸다! 우리 민족의 시대는 황혼이 아닌, 여명이다!”
레이아의 말에 대신들의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렇다. 천상 전쟁 이후, 대륙의 패권을 잃고 대양을 떠돌아다니는 피난민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다. 강력한 군왕의 지배력 덕에 간신히 형체만 유지한 유목 민족들이었다.
그런 시대,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민족의 정기가 흩어져 가기만 하던 그 시절은 이제 끝났다.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의 민족이 하나가 되었고, 지금 이 세계의 거의 모든 엘프들은 하나의 여왕 아래에서 하나 된 의지를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몰락의 시대가 아니다. 부흥의 시대였다. 황금기를 놓친 것이 아니라, 아직 황금기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레이아는 자신의 가신들에게 이런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하며, 그러나 소탈하고 허물없는 군주. 신하들 위에 군림하지만, 그럼에도 신하의 자긍심을 깎아내리지 않는 군주. 레이아가 쌓아 올린 권위는 영원왕들의 절대 권력이 아니다. 신하들의 존중에 의해 발생하는 자발적 권위였다.
그녀는 알현실의 문고리를 잡고 뒤를 돌아보더니, 시원하게 웃었다.
“너희는 너희의 군왕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식기를 들어 만찬을 즐기는 녀석들이 아니냐. 나와 너희의 눈높이가 동일한데, 너희가 굽히면 나 또한 굽히게 되니 영 면이 서질 않는구나. 다들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라!”
“예!! 전하!!”
“그리고 열 척의 사절단을 준비해. 그 선두에서 내 친히 조타를 하겠다!”
“예……? 전하……?”
레이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알현실을 쏙 빠져나가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대신들이 황급히 알현실 입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전하! 전하!! 잠시만, 잠깐!! 통촉,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아!! 그리할 양이셨으면 대체 어찌 사절을 도발하신 겁니까!!”
“아!! 그 자식이 짜증나게 굴잖아!”
* * *
“그렇게 됐어. 준비해.”
페르난데스는 툴툴거리며 말하는 레이아와, 그녀의 뒤에서 낯을 굳히고 있는 신하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는 곧 눈을 감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나서 사절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했소?”
“어.”
“그리고 예포로 도발을 하겠다고?”
“맞아.”
“……대체 왜 그리 예포를 좋아하시는 거요?”
“의전 중에 가장 격조 높은 의전이 예포 발포잖아. 어디서 꿀리면 되겠어?”
“내가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군…….”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반대해도 좋소?”
“……너는 동행하지 않을 생각인가?”
“무슨 소리요. 나는 제르올렌에게 볼일이 있소. 그대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오.”
“하하! 재밌군! 얘 하는 말 좀 봐!”
레이아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녀의 뒤에 도열한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신하들은 레이아의 웃음에도 따라 웃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레이아는 상처 입은 표정이 되었다.
“얘들아?”
“귀빈의 말이 옳습니다. 전하, 직접 내방하심은 재고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너희 너무 격식이 없구나. 이 오만한 것들!”
“전하께서 그리하라 명하셨으니 신하 된 도리로 따를 따름이옵니다.”
레이아는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서펜트 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오. 제르올렌 왕가의 사절은 도가 지나치게 무례했고, 그대들은 저자들의 요구에 순응해야 할 만큼 약소하지 않소. 자긍심을 갖더라도 오만한 것이 아니오. 다만…….”
“예, 세르너드 공. 전하께서 친전하시는 것은 위험이 너무 크지요.”
“그렇소. 서펜트 퀸은 그대들의 국가가 가진 가장 값진 보물이며, 두 민족의 구심점이오. 결코 쉽사리 잃어서는 아니 될 일이지.”
“그리하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대처가 아쉽긴 하군. 우리가 먼저 갈 필요가 무엇이 있겠소?”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에게 오라 해야지.”
“……예?”
“그대로 돌려주면 된다는 뜻이오. 제르올렌 왕에게 직접 찾아오라 말하면 되지 않겠소?”
“사절을 다시 파견하려 하십니까?”
“아니, 그건 너무 면이 서질 않으니. 조금 더 세련된 은유로 불러내 보도록 하겠소. 두 시간을 기다리라 하였으니 잘되었군. 내 직접 준비하겠소.”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레이아와 대신들은 훌훌 떠나는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레이아와 가신들이 이제 슬슬 페르난데스를 찾아가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던 그때—
-쿠구구구궁!!
갑작스런 진동이 기함 전체를 흔들었다. 요새 크기의 함선이 흔들린다는 것은 지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신들은 혼비백산하여 레이아를 둘러싸고 혹여 발생할 수도 있는 낙석 따위를 대비했다.
“이게 무슨……!”
“적…… 적습인가? 제르올렌 왕가가 선공을 취한 것인가? 여봐라! 관측대에선 어찌 경고가 없었단 말이냐!”
“아닙니다! 공격이 아닙니다! 이건…… 이건…….”
대신들은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변했던 그때, 인퍼머르에서 느꼈던 지독한 존재감이—
“아타일라틀……!!”
레이아는 어금니를 깨물며 기함의 한 첨탑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에게 하사했던 거처, 그가 공방을 틀고 들어가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저 외딴 첨탑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의 존재감이다. 가이메른 왕가의 가신들은 인퍼머르를, 말레이른 왕가의 가신들은 자신의 기함이 박살 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정말…… 요란한 녀석……!!”
레이아는 숨을 삼키며 속삭였다. 여신의 신성을 품은 탓일까. 용의 존재감이 그때 보았던 순간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 감각이라면 결코 제르올렌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엘프 서펜트 킹의 기함은 오직 대악마의 저주, 드워프의 화포, 그리고 용의 숨결에만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예포를…… 쏴라!”
“예……? 전하?”
“페르난데스가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가 한 손 보태야 하지 않겠어! 예포를 쏴! 더 확실한 경고가 될 수 있도록 해라. 제르올렌이 직접 찾아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예, 전하!!”
대신과 장수들은 삼삼오오 흩어지며 기함의 각 함포로 향했다. 요새 크기의 함선이라는 뜻은, 각 함포에 명령을 하달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이럴 거라고 언질 정도는 해 주었어도 되는 것 아니냐! 하여간 삐딱한 녀석!”
레이아는 어금니를 씹으며 투덜거렸다. 그녀가 당장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진 자긍심 덕분이었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 여신의 신성을 품은 용. 그런 존재가 자신의 자취를 온전히 펼칠 때의 감각이란…… 두려움보다 경외심이 앞섰다.
* * *
그리고, 저 수평선 너머에 걸린 한 외딴섬. 제르올렌의 기함에서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엘프라면 제아무리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멜리실두르……?”
“아니. 저건…… 놀랍구나. 아타일라틀이다.”
“아직 이 세상에 아타일라틀이 더 남아 있었단 말이오……?”
“나도 몰랐다, 제르올렌. 정말 몰랐어. 누굴까. 누가 아직 살아 있었을까? 왜 내게 지금껏 알리지 않았을까.”
“그대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오.”
“후후…… 고맙구나.”
깃털 장식을 양각한 화려한 금관을 쓴 엘프가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속삭였다. 여인은 슬프게 웃으며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가 보고 싶소?”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내가 따르겠소.”
“함정일 수도 있다. 저자들은 제 왕을 죽인 자들이야.”
“사실, 라크리시르.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서펜트 킹이란 이름이 붙은 것들은 다 죽어 마땅한 놈들뿐이었소.”
“그중엔 너도 포함된 것이냐?”
여인의 장난스러운 말에, 엘프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물론이오. 죽지 못해 살고 있지.”
“가자꾸나. 죽지 못해 사는 두 연인이 들어가기엔 썩 낭만적인 함정이 아니냐.”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여신의 존재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실히 느껴지는, 멸종된 종족의 존재감까지. 죽어 있어야 했던 자들이 만든 함정에 죽지 못한 망자들이 들어간다는 것은. 제법 시적인 운치가 있지 않나.
제르올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여인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붉은 용이 하늘을 날아올랐다.